창조경제와 미래부, 제 길 찾아야

이 글은 <한겨레> 4월16일치 지면에 같은 제목으로 실린 '시론'과 같은 논지의 글입니다. 실릴 지면에 맞춰 분량을 줄이기 이전의 애초 원고를 필자인 김민수 시민참여연구센터 운영위원장·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싣습니다.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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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아무리 크고 대단한 일도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지 못해서는, 당장은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대한 우려 때문에 하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 출범 40일을 넘어선 시점에 때 아닌 ‘창조경제’ 개념 논쟁이 벌어졌다. 미래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때부터 불똥이 튀었다.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훨씬 더 일찍 벌어졌어야 마땅했던 논란이다. 대선 시기에 구호로 던져진 문구에 여전히 생명력 있는 정책 콘텐츠가 따라붙지 못한 상태고, 이를 실현할 시스템 준비도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조직법 개정 과정에서 불거진 방송통신 업무 관할에 대한 지리했던 정치적 대립도 창조경제 논란에 비하면 맛보기일지 모른다.


혼란의 씨앗은 근본에 숨어 있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을 약속했다.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힘 있는 과학기술 전담부처에 기대감을 가졌지만, 잘못 짚었다. 그 기대는 ‘헛껍데기’라는 한 단어에 맥없이 무너졌다.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듯 보였던 창조경제론은 사실 애초부터 경제 중심의 논리를 깔고 있다. ‘창의성’을 언급하긴 했으되, 여전히 개발시대 경제 부흥 중심의 정책 관점에 과학기술과 아이시티(ICT·정보통신기술)가 수단으로 종속된 구조이며, 이는 추격경제 시대 과학기술 정책의 한계를 답습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일한 한계를 노정한다는 점에서 “패러다임 전환”에 한참 못 미치며, 이명박 정부 지식경제의 연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계는 바야흐로 성장 한계의 시대를 맞고 있다. 또 한편 혁신과 융합의 시대이기도 하다. 혁신과 융합 얘기에 아이폰을 빠트릴 수 없다. 그것은 기술의 충격이 아니라, 상상력의 충격이었고 문화의 충격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돈 안 된다는 이유로 잊고 있던 인문학(liberal arts)에 다시금 눈 돌리고 있다. 그러나 아이폰의 성공을 보며 유념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 독점주의가 아닌 다양성 존중이야말로 인문학에 생명력을 부여하듯, 성장 한계의 시대에 혁신과 융합의 지향점 또한 대량생산-대량소비보다는 인간의 서로 다른 요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지원하는 데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투자를 통한 수익 극대화를 핵심으로 삼는 경제가 아닌 공존에 기반한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닿아 있는 것이다.


경제와 관련된 시대적 변화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 속에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이 갈수록 확대·심화됨에 따라,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의 의미와 가치에 눈길을 돌리고 있기도 하다. 성장이 아닌 공유의 문화에 바탕을 둔 지속가능한 경제구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과학기술도 새로운 방향을 찾을 필요가 있다. 기존 주류경제 논리에 기반한 성장우선 전략은 머지않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오히려 경제와 산업에 강하게 연결된 고리를 풀고 사회와 문화의 영역으로 폭넓게 접근해 스며들어가는 것이 지속가능한 사회 기반 구축과 장기적 국가 발전 전략 모색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다. 비유하자면 태릉선수촌 위주의 엘리트 체육진흥정책에서 나아가 생활체육 활성화 정책으로의 전환이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눈앞의 시장수요 창출보다는 장기적인 미래전략 수립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기존의 미래부 역할 논의는 이런 관점에서 한참 빗나가 있는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얘기하는 과학기술과 아이시티 기반의 신성장동력과 일자리 창출, 거기에 덧붙여 국민행복기술까지 언급하다 보면, 행정부 전체의 과제가 하나의 정부 부처 역할로 다 얽혀들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장거리 경주와 단거리 경주로 비유되는 과학기술과 아이시티를 균형감 있게 끌고나가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은데, 몇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전담부처들을 별도로 놓아두고서 과학기술 중심에서 경제와 고용, 복지까지 챙겨야 할 현실이라니! 이런 기묘한 조합의 정부부처를 이끌 장관 적임자가 이 나라에서 나타난다면 그건 오히려 기적이다.


즈음에서 기본을 다시 상기하자. 행정부는 협력과 견제, 균형의 논리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한 부처에 너무나 많은 것을 몰아넣어 예정된 실패를 초래하기보다 미래부가 가장 기본에 충실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먼저 짚어봐야 한다. 나머지 역할은 타 정부부처의 몫이고 총리실과 청와대의 몫이다. 연구개발(R&D)에서 경제·고용·복지를 찾는 것은 말 그대로 우물에서 숭늉 찾는 모습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문제점은 기초연구의 취약성에서 드러나고 있다. 해외 원천 아이디어에 대한 개량 중심의 연구개발 요구가 창의성의 발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 시간을 다투는 경쟁 상황이 아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 속에 제대로 된 창의성과 융합의 토양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경제’를 바란다면, 우리나라도 장기적 관점의 전략 수립과 체질 개선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이 정도 국력과 경제력이면 이제 한 단계 더 높게 볼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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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시민참여연구센터 운영위원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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