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초심’이 되찾아준 나의 연구생활 좌표

박혜정의 ’센티멘털 과학자의 유쾌해지기’


[1] 다시, 눈을 뜨다

00senti1.jpg » 생화학 실험실 모습(왼쪽)과 연구실의 나의 책상(오른쪽). 많은 시련을 안겨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연구실에 들어와 앉았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 사진/ 박혜정


상에 많은 사람들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존재의 이유를 품고 살아간다. 같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저마다 가슴에 얹고 있는 삶의 태도는 다르다. 그렇다고 어떤 것에 대한 당위적인 기대와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내는 존재,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일 게다.


나는 과학자다. 지난해 여름에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아직 지도교수님한테서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과학자로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지금 내 나이는 서른넷. 그리고 미혼. 뚜렷하게 정해진 미래도, 계획도 아직은 흐릿한 상태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일에 파묻혀 이 연구 생활에 대한 환멸만 키우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연구 활동에 대해 크게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리 진취적이지도 못하고 위대하지도 특출하지도 않다. 하지만 벌써 8년째, 계속 이 생활을 지속하고 있고 아마도 오래도록 계속 하고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네들의 성공 여정을 엿보고 닮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주변은 고유의 잔잔한 수식만이 그들의 차이를 들어낼 뿐, 딱히 과학자라고 해서 나름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닌, 그렇게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내고 있는 사람들로 차 있다. 나는 이번 청춘스케치 연재를 통해 위대하지 않은 ‘그냥’ 과학자들이 어떻게 그네들의 삶을 지켜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삶과 연구에 의미를 찾아가는지 그 여정을 찬찬히 풀어갈 예정이다. 반대로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실의 존속 생리로 인해 희생될 수도 있는 꿈을 품은 생물학도들의 애환도 들춰볼 것이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내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로 있는지 나만의 좌표를 찾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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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안, 나의 안


여느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실험실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처음 실험실에 발을 들여 놓은 이유로 보자면, 순수하게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취업을 위한 하나의 스펙 쌓기를 위해서, 딱히 할 일이 없는 과도기 순간에 잠시 머무르기 위함 등 제각기 얻고자 하는 것이나 누리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다양한 무리의 조합 속에서, 적어도 내가 속한 실험실 안에서는, 논문을 써서 업적을 쌓는 목적 이외에 크고 작은 담론을 쌓아,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반문을 하는 사람들을 잘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다 보니 서로간의 감정 소모전도 무시 못할 큰일이다.


연구원 간 연구토론의 장으로 팀미팅, 랩미팅 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실험 기술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경험 나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회의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명 상을 탐구하는 학문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논문 인용 지수에 따른 저널 등급을 목표로 삼아 최신의 생명공학 연구 패러다임에 맞춰 연구의 깊이와 강도를 조절하여 논문을 내는 것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최고의 지향점이니 순수한 학문 탐구보다는 기술과 요령을 누가 먼저 정복하느냐로 서로의 성취도가 좌우된다.


나 역시 처음 이 길로 들어설 때 가진 꿈이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내게 남은 것은 공부에 대한 열의를 차치하고 이 학위과정을 견뎌내리라는 나만의 약속 이행과 다름 아니었다. 지금껏 나를 누르고 있던 게으르면서도 의지가 약한 내 모습을 극복해보기 위한 하나의 도전을 학위를 위한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아마도 처음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에 대한 회의감이 열정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또한 즐거움보다도 극기의 정서로 실험실 생활을 버텨냈기 때문에 이 실험실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다만 나 스스로의 문제만으로 이렇게 회의감과 인내가 연구 생활을 버텨내는 힘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조급한 단기 성과주의가 작은 연구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연구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 내는 것이 최고의 덕으로 인정되고, 어느 순간에는 학문 탐구보다는 실험 결과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좌표가 흔들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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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첫봄의 기억


이렇게 지난한 학위과정을 막바지에 두고 지도교수님께서 갑작스레 서울대로 옮기시게 되어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2011년 여름,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 준비와 더불어 떠맡게 된 여러 연구 프로젝트들, 실험실의 잡다한 업무에 눌려 다시금 더할 나위 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서울에서 한 해, 두 해 넘기면서 나는 실험실에 출근했다 퇴근하는 좀비였다.


2012년, 서울에서 맞이한 첫 봄. 서울은 내게 너무나도 삭막한 곳이었다. 가끔 낮에 맞이하는 햇빛은 실험실의 형광등보다도 나의 가슴을 자주 먹먹하게 했다. 연구실에 갇혀 있으면 해가 떠있는 낮에 밖에서 자유롭게 다녀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막상 주말처럼 낮에 연구실 밖에 나와 일없이 집으로 향해야 하는 것 자체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 그 낮의 햇빛이 또 하나의 자극으로 나를 두들겼던 것 같다. 주말이면 지하철을 오래 탔다. 지하철 안에서는 제이슨 므라즈의 ‘러브 포 어 차일드’(Love for a child) 노래만 끊임없이 들었다. 왜 이 노래만 그토록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힘들게 보내온 학위 과정을 제이슨 므라즈의 그 때처럼 나도 그 공간과 기억들을 그대로 차분히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아침은 공포였다. 다음날을 맞이하는 것이 두려워 최대한 견딜 수 있는 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침이면 눈뜨고 새로운 날을 마주하는 것이 싫었다. 아침 7시면 새로운 날에 주눅이 들어 연구실로 향하던 나에게, 어느 날인가 늘 들르던 학교 커피숍의 사장 아주머니께서 선물로 받으신 거라며 한라봉 하나를 건네 주셨다. 커피숍을 나오면서 지친 영혼이 꿈틀대는 듯했다. 나도 언젠가 나처럼 쳐져 있는 영혼에게 아주머니처럼 한라봉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커피숍에는 퉁퉁한 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출근길에 미술관 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고양이 사진을 찍거나 제법 친한지 앉아서 한참 고양이를 쓰다듬고 가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00senti2.jpg » 커피숍 안의 고양이 시계는 아마 이 점박이 고양이인 것 같다. 모아트 커피숍의 고양이 시계와 점박이 고양이.

아직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던 기억을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도 떠올려 보지 않았다. 그렇게 봄을 보내고 지난 여름,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그 날까지도 나는 내 좌표를 찾아볼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여전히 학위의 연장선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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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첫 강의


2013년 3월 16일 오후. 제주도 바다 한 가운데. 섭지코지에 와서 한적한 카페에 들어갔다. 흐린 하늘과 맞닿아 출렁이는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다. 계속 잔 파도가 인다. 계속 출렁인다. 바다는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다를 이루고 있는 작은 물 알갱이들은 파도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겠다, 지금 나도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출렁이는 파도를 안고 있는 바다처럼 그렇게 살아서 꿈틀대고 있겠지, 하고 반문해본다. 지리하고도 혹독한 실험실 안에서 안주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멈춰 있는 내게 위로해본다. 정체해 있는 것 같아도 나도 끊임없이 나의 잔잔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2013년 봄, 우연한 계기로 분자생물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평소에 어렴풋하게 강의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터라 좋은 기회가 다가온 것 같았다. 그리고 벌써 5번째 강의를 하고난 지금, 이 강의가 나에게 10여 년 전에 생물학을 공부하며 가졌던 풋풋한 생각들과 내가 이 분야로 뛰어들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이유들을 하나씩 불러일으킬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들이 삶의 방향키잡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강의 준비에 앞서, 아니 강의실 들어갈 때까지 가장 고민 되었던 것은 첫 화두를 어떻게 던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분자생물학. 학생 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교재의 서문을 꼼꼼히 읽었다. 분자 생물학이란 어떤 분야를 다루는 학문인지, 어떤 형태로 발전해 왔는지.


분자생물학은 부분을 앎으로써 전체를 이해해가는 환원주의적 접근법을 통해서 생명현상을 탐구해가는 학문이다. 우리의 거대한 몸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분자들의 움직임을 살펴봄으로써 생명현상의 정교함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분자들 가운데 분자 생물학에서는 생명현상의 주연배우라 할 수 있는 디엔에이(DNA)와 단백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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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던, 내가 잊고 있던 생명


종이 가장자리가 노랗게 변하기 시작한 <생명의 파노라마> 책을 몇 년 만에 꺼내 보았다. 생물학자와 화가가 함께 작업한 만큼 생명현상에 대한 비유가 탁월했다. “분자는 1조분의 1초마다 휙휙 지나가며 서로 부딪힌다. 생명은 이처럼 빈번하고 격렬한 충돌에 의존한다.” 가만히 있는 지금도 우리 몸은 끊임없는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이다.


지지부진한 일 진행 속도, 밀려드는 과중한 업무, 사람들 사이에서 오는 공포로 일과 사람의 시선에 쫓겨 점점 가루처럼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요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감정이었다.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었지 나는 경이로울 정도로 완벽한 존재라는 사실과 내  온몸의 온갖 분자들이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며, 나는 살아 있었고, 살아 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이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다. 자극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의 정신보다도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분자들이 더 경이로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첫 강의 날이 다가올수록 강의 자료를 만들면서 과연 이 정도의 내용으로 강의시간을 채울 수 있을지, 학생들 앞에서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면서 말문이 막혀버리면 어떡하나,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첫 강의를 하는 날, 단정한 정장에 높은 힐을 신고, 두꺼운 교재와 출석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출석을 부르면서 긴장을 좀 풀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 몇 마디는 말이 꼬여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의외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내 모습이 되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 시간 수업을 진행하고 쉬는 시간을 지나 다시 수업을 이어갈 때쯤에는 긴장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몇 년 만에 그럴싸한 뿌듯함을 느낀 것인지. 첫 강의 치고는 순조롭게 잘 넘긴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벌써 5번째 강의까지 마쳤다. 처음의 긴장감과 달리 이제는 학생들 앞에서 약간의 쇼맨십도 발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에 뭔가 내 안의 숨어 있는 재능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강의를 준비하며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명현상을 이해시켜 나가며 우리 몸을 느껴볼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에 강의는 준비 단계부터 요즘 나를 흥분시킨다.


그리고 ’초심’을 다시 기억해낸 나의 현재 이야기

업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진행했던 연구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초심을 접어둔 채 오로지 극기의 정신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던 순간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어떤 일이든지 온 마음을 쏟지 않으면 작은 일도 순조롭게 해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그 암흑 같은 오랜 기간도 지나갈 뿐이며 다시금 처음의 그 마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내 자신을 스스로 격려한다. 2013년 봄, 다시 찾게 된 나의 좌표에서 좀 더 유쾌한 모습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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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생화학교실, 박사후연구원(줄기세포학)
외로이 홀로 떠있는 구름, 가난하고 어진 선비(孤雲), 고상한 운치(高韻)를 지닌 센티멘털 과학자.
이메일 : hye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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