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팀워크 있는 ‘가족 같은 D랩'의 사람들

김서경의 “D랩의 팀워크, 시스템, 그리고 fMRI 이야기”


[1] 랩 생활 여덟 달, 내가 보고 느낀 것

00UIUC3.jpg » 우리 랩이 있는 연구소 건물을 맑은 날에 바깥에서 본 모습. 파란 유리가 인상적이다.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김서경 (아래 사진도 마찬가지)


과 꿀 대신에 눈보라와 옥수수가 흐른다는 미국 미드웨스트의 한 복판, 시카고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사십 분을 달리면 나타나는 두 도시, 어바나-샴페인. 다시, 그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캠퍼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이제 여덟 달 정도 돼 간다.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샴페인 캠퍼스(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 이하 UIUC)의 심리학과엔 사회심리학, 인지심리학, 임상과 커뮤니티 심리학 등 다양한 세부 분야들이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전공하는 분야는 인지신경과학이다. 수업은 심리학과 건물에서 수강하지만 연구실은 심리학과 건물이 아닌 북쪽 끝의 벡맨연구소(Beckman Institute) 건물 2층에 있다. 벡맨연구소는 다양한 학제간 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비단 인지신경과학 뿐 아니라 기타 이학과 공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다양한 랩이 그곳에 있다.



랩의 사람들,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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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는 루마니아 출신의 플로린 돌코스 박사로, 산적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덩치가 크고 목소리도 우렁차다. 주요 연구 분야는 감정-인지 간 상호작용(interaction between emotion-cognition)이다. 아마 이 연재 글에서는 그분을 ‘캡틴’이라고 부르게 될 것 같다. 캡틴과 더불어 루마니아 출신의 산다 돌코스 박사가 있다. 캡틴의 아내로, 사회심리학 분과의 방문학자로서 함께 랩을 이끌어 간다. 주요 연구 분야는 감정 조절과 관점 전환(emotion regulation and perspective taking)이다. 이 분은 ‘미스트리스(mistress)’라 부르기로 한다.


검 고 긴 머리칼이 아름다운 미스트리스는 ‘포스’가 남다른 캡틴과 달리 언성을 높이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캡틴이 으르렁거리며 주장을 펼치면 한 발짝 물러나 차분히 지켜보다가 적절한 시점에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간다. 사뭇 달라 보이는 두 사람, 캡틴과 미스트리스가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활짝 웃을 때다. 솔직하고 정 많은 성격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슷하다.


신경과학 박사과정 3년차이자 랩의 선배인 알렉스 요르단도 루마니아에서 왔다. 트랜실바니아 태생의 캡틴과는 달리 부쿠레슈티에서 온 차가운 도시 남자다. 본 지 8개월이 되었는데 아직 나이도 잘 모른다. 집중하고 있을 때 말 걸면 화낸다. 아마 연구와 결혼한 것 같다. 보통 랩의 선배가 1년차 박사과정의 어미오리 노릇을 하기 마련인데, 이 사람 덕분에 점심도 저녁도 전부 연구실에 앉아 먹는 게 당연하게 돼 버렸다. 설마 이 글을 번역기 돌려서 읽을 일은 없을 테니 한 마디 한다. “너, 그러면 여자친구 못 만든다.”


함께 들어온 랩 동기인 매트 무어는 금발벽안의 미국인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미국인이 이토록 ‘젠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메일 한 줄에도 슬랭 한 마디 없이 정확하고 겸손한 영어를 사용한다(덕분에 괜찮은 표현을 많이 배운다). 평상시에 거의 말이 없고 발표 자리에서도 나서지 않는다. 여럿이 모이면 늘 뒷자리 구석에 앉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 할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간다. 아침에 연구실 문을 열면 늘 그가 있다.


랩에 는 또 지난 학기부터 이번 학기까지 함께하는 학부 연구생들이 있다. 분자생물학과의 라시드와 화학과의 지나, 심리학과의 한나와 현웅. 알렉스의 프로젝트를 줄곧 도와 일하며, 졸업 이후에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하는 비키. 그리고 나, 김서경. 한국에서 갓 건너와 물정 모르는, 좌충우돌 그 자체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랩을 구성하는 일원이자 매일의 주인공들이다.

00UIUC1.jpg » 며칠 전, 일리노이에 유명한 눈보라가 몰아쳐 휴교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연구소에 나와 눈집을 짓는 동네 연구자들. 이것이 미드웨스트의 기백이다. 이날 학교 곳곳에 눈집과 이글루, 피카츄와 토토로가 만들어졌다.



랩은 함께하는 과학문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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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박사과정 학생이 갓 미국에 떨어지면 홀로 자생하느라 1년이 다 간다고들 한다. 하나 돌코스 박사의 랩(이하 ‘디(D) 랩’)은 오히려 그 반대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 없으나, 서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가족 중심적이며 관계지향적이라고 한다. 그 덕분일지, 랩 분위기도 (좋은 의미로) 대단히 가족적이다. 테뉴어 트랙을 타는 조교수의 랩이 그러하듯이 밤낮없이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는 탓에 나를 비롯해 대부분 연구자들이 한솥밥 먹는 식구들처럼 지낸다. 지도교수 내외가 진행되는 거의 모든 연구를 알고 있고, 그 연구 각각에 깊이 관여한다. 어쩌면 이제 막 흐름을 타고 꽃을 피우는 작은 랩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해서 헐렁할 것이라는 생각하면 오산이다. 랩을 관통하는 큰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을 설명하는 매뉴얼이 있다. 한 예로 랩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매뉴얼이 저장된 드라이브에 접속하여 내용을 일람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배우고, 또 물어보며, 알게 된 내용은 다시 매뉴얼에 추가로 적는다.


00UIUC2.jpg » 눈보라 휴교령으로 학교는 쉬어도 사이언스는 쉬지 않는다. 연구소 카페도 닫고 정문도 폐쇄했지만 출근은 한다. 지구가 멸망해도 벡맨연구소는 건재할 것 같다는.... 늘 네댓 개의 프로젝트가 한꺼번에 진행되고 있어서, 일을 진행하는 또는 돕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그런 곤란함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주로 그 실행에는 알렉스의 머리와 손발이 동원된다. 위에서 농담 삼아 공갈을 치긴 했지만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다. 바퀴의 축대이자 랩의 큰오빠다). 이 랩이 UIUC에 정착한 지 2년여 정도 된 것을 감안할 때, 그 동안의 고심과 노력이 현재의 시스템을 일구었을 것이다.


이처럼 D랩의 일원으로 동고동락하며 조금 손발이 익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문득 좋은 연구와 좋은 연구를 가능케 하는 랩 문화에 대하여 시간을 들여 정리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특히 작게는 랩 문화를 일구는 팀워크부터, 좀 더 크게는 랩 문화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럿이 일하는 문화야말로 현대 과학의 문화다. 랩은 그 문화의 고갱이 역할을 담당하는 장소다. 주제에선 비교적 ‘소프트’하다고 일컬어지는 인지신경과학 분야도 역시 랩 문화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 워낙 학제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실질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이학 및 공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많은 인력과 기술을 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랩’의 조건, 시스템과 팀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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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좋은 연구를 가능케 하는 랩 문화, 나아가 그러한 랩 문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일단, 다양한 배경과 능력을 지닌 연구자들이 다수 참여하는 공동연구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첫 번째 선결 조건은 좋은 시스템이다. 연구 아이디어가 한 편의 논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다단하다. 피험자 모집부터 실험실 세팅, 데이터 수집,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포함하는 실험장비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와 관련된시스템이 효율적으로 굴러가지 않으면 연구의 진행도 더뎌질 수밖에 없다.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는 랩의 문화를 일컬어 ‘좋은’ 랩 문화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좋은 시스템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좋은 팀워크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연구의 각 단계마다 그에 걸맞는 일손이 필요하며, 여러 연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비중도 높아진다. 피험자 모집 공고를 내어 스케줄을 잡는 것처럼 단순한 일조차도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실험이 겹치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 한다. 이 때문에 랩원들 간에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성과를 내기란 지난한 일이다. 따라서 첫 번째만큼이나 중요한 두 번째 선결 조건은 좋은 팀워크이다. 외적인 요소인 시스템과 내적인 요소인 팀워크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훌륭한 연구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랩 문화란 결국, 시스템이라는 토양 위에서 팀워크를 뿌리삼아 피어나는 꽃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 얘기한 두 조건, 그러니까 시스템과 팀워크야말로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갓 시작하며 느꼈던 가장 큰 차이였다. 연구실에 오래 남아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이상으로, 한 개인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어 가장 효율적으로 연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시스템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에서 팀워크를 장려하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단지 개별 랩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브라운백 미팅(Brown Bag meeting, 특히 점심시간에 하는 발표나 세미나를 말한다. 각자 싸온 점심을 먹으며 편하게 질문하거나 토론하는 자리이다)이나 세미나처럼 여러 랩의 일원들이 함께하는 활동이 장려되며, 학생이 주도하는 공동연구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시각인지 및 인간요소(human factor) 분과의 ‘방문주간’ 행사에 인지신경과학이나 인지심리학과 학생들이 초대받아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함께 즐기고 배우며 연구자로 성장하는 학생들에게는 공동연구가 자연스러운 것이 될 터이다.


D랩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풀며

이제 D랩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에서 깊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 그 장점과 단점, 팀워크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하나하나 써보고자 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는 하나 서로 느끼는 고충이나 갈등이 없을 수야 없다. 그러한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도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D랩을 둘러싼 C랩과 G랩도 차차 등장하게 될 듯한 예감이 들지만 그건 아직 먼 훗날의 또다른 이야기다. 비록 일천한 필력이긴 하나 늘 그래 왔듯이 즐기며 쓸 생각이고, 읽는 분들도 맘 편하게 즐겨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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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경 미국 일리노이대학(어바나-샴페인) 인지신경과학 박사과정
10년차 INTP. 종교는 대우주의 의지와 문학. 좋아하는 것은 호르차타. 질 좋은 편지지. 요가 매트 위에 누워서 듣는 말러. 거의 모든 계절의 꽃. 보이지 않는 것들. 망설이는 순간. 싫어하는 것은 사람 키치. 잿빛으로 변하는 윈도우즈 바탕 화면.
이메일 : suhkyungbu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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