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공부·연구에 ‘준비없는 도전’은 쉽지 않더라
한정규의 “자연과학 공부의 안과 밖” (9)
[안] 연구에 중요한 것은 '순서'

지난 연재 글(과학 호기심을 살리는 방법, ‘차근차근 한 걸음씩’)에서 과학을 접하지 않다가 나중에 과학을 배우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주된 동기가 호기심과 궁금증이었다고 얘기했다. 그러고선 글 말미에 단지 과학에 대한 궁금증만으로 오랜 동안 과학을 조밀하게 공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언급했다.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과학 공부를 하려면 체계적인 틀을 갖추고서 순서에 맞게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 그 글에서 말하려 했던 바이고 또한 이번 글에서 전하고 싶은 얘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다면, 우리는 초중고 12년 동안 정해진 ‘교육 과정’을 밟으며 배움의 길을 걷게 된다. 내 경우에는 ‘6차 교육과정 세대’에 속한다(필자의 나이를 가늠하지 마시길). 이런 교육 과정에는 여러 과목의 시수가 계산되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것들과 소양을 기르는 데 필요한 과목이 구분되어 있고 학생들은 이에 맞춰 배운다. 짐작컨대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이 주요 과목이 될 것이고, 예체능 계열의 과목이 낮은 단위수를 갖는 과목군이 될 것이다.
과목들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학년별로 혹은 연령별로 배워야할 개념들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수학 과목에선 더하기 빼기 같은 셈법부터 미적분과 확률통계 풀이까지 그리고 과학 과목에선 분자 구조 개념부터 복잡한 유기화학 구조식과 난해한 진화론까지 단순함에서 복잡함의 방향으로 학습의 진도가 나아간다. 대학 고등교육 과정에 들어서면, 수강 과목이 정해지지는 않지만 수강 학년에 따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본인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적어도 초중등 교육보다는 자율성과 전문성이 높아진다.
문제 핵심은 나의 사고 패턴 바꾸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이유인지 20년 가까이 학습 훈련을 받았는데도, 사회인이 되어 다시 공부에 전념하려는 사람들 대부분은 ‘빨리 필요한 것만 습득하자’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깊이 파고들 것도 아니기에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집중하는 전략이 좋을 수 있다. 다만 이런 전략이 통하는 것이 있고, 통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감히 주장컨대 과학 공부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이 통하기 어려운 공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 학부 과정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세포, 유전자, 단백질 어쩌고저쩌고 하는 생물학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이런 배움의 과정과는 별개로 평소에는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인간의 정신과 철학적 함의 등등이 나의 관심사였다. 다른 것들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당시에 내가 배운 생물학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찾은 것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테마였다. 특히 병원에서 축적해놓은 수많은 임상 데이터에서 놀라운 현상들을 밝힐 단서를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도전한 분야가 뇌영상 분야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전실패’였다.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될 일이야 없겠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일정한 수준이 내게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뇌영상 분야에서 필요한 것은 수학적이고 물리학적 내용이었다. 만일 내가 수학, 물리학 내용에 대해 단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새로운 연구 주제에 충실히 임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수학, 물리학 수준은 대학 1학년 기초 수준에 머물러있기에... 현실은 냉혹했다.
» 이러한 수식들을 보면서 내 머리는 식을 겨를이 없었다. (Hamalainen, 1993)
학습에서 중요한 ‘체계성’
1년 남짓한 시간에 그동안 공부하지 않던 생소한 내용을 익히고 그것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나의 사례를 살펴보면, 과학 공부와 연구에서 ‘체계성’이라는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물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21세기를 융합, 통섭의 시대라고 하고,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다른 전문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요구하는 시대에 그러면 어떻게 대처하라는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다시 말해, 한 분야도 전문성을 탁월하게 지니기 어려운 마당에, 앞으로의 방향은 복합적인 전문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답은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다.
비록 대학원에 있었지만 나의 경우에 뇌영상 분야의 기술적인 부분을 익힐 수 있는 수업 체계는 부족했다. 혼자 논문과 책을 보고 낑낑대며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유투브에 올라온 강의 동영상을 보고 혼자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니 시간도 많이 들고 이해도 잘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직접 배웠을 수 있겠지만 국내에는 매우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즉, 전문 영역을 새롭게 배우고자 한다면, 체계적인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체계적인 학습이란 바로 12년 동안 초중고에서 잘 정리된 개념을 배웠던 과정과 비슷한 것을 의미한다.
[유투브에서 찾은 선형대수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공부했지만 효율적이진 않았다]
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대학원 제도에서는 한 학기의 과제가 학부에서 하던 분량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공계 실험실에서는 필수적으로 실험 활동이 중요하게 행해지기 때문에 이런 수업 과제를 넉넉하게 준비할 시간 여유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따라서 만족스럽게 과제를 완성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학기말이 되면 놀라운 수준으로 학생의 성취도가 올라온다고 한다.
연구 활동, 체계적인 순서의 중요성
학습에서 체계성이 중요하지만, 탄탄한 공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 지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연구 활동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야말로 체계성, 다른 말로 하면, 앞과 뒤가 질기게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긴 구조는 상관성 혹은 연관성이 매우 높은 인과적 구조이다. 논문은 이전 연구 결과의 토대에서 나온다. 그리고 논문 그 자체도 여러 실험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빈틈없이 수행된다.
연구는 하나의 주제 또는 과제가 생기면서 시작된다. 그 과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상관없이, 모든 연구자는 해당 과제에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끌어 모으면서 연구를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믿을 만한 정보는 리뷰(Reviews)라는 형식의 논문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대개 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학자들한테 유명 학술지의 리뷰 논문 집필 요청이 몰리게 마련이고, 그렇게 해서 작성된 리뷰 논문에는 대체로 100~200편 넘는 논문들이 인용된다. 수많은 논문을 인용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그리고 다음 연구에 앞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을 조목조목 살피고 따지며 체계적으로 서술해 놓는다. 막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거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길잡이’ 논문인 셈이다.
또한, 학술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 논문(Research article)이다. 실험 연구를 통해 밝혀낸 주요한 발견 몇 가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함으로서 과학적 사실을 쌓아가는 과정의 문헌이다. 1년에 수천 편의 논문이 출판되고 출판되기를 기다린다. 나도 당연히 이 논문 출판을 당면한 목표로 연구를 진행했다. 나는 우선, 실험실에서 과거에 진행했던 주제였지만 미완의 과제로 남았던 부분을 마무리하는 쪽으로 연구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실마리로 잡았던 부분은 실험실에서 이전에 발표된 논문의 토론(discussion) 부분에 한 문장으로 서술되어있던 예비실험의 결과였다. 단 한 문장. 이 문장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 이 한 문장(노란줄)에서 내 연구가 시작되었다. (Cestra, 2005)
검색, 검색…스스로 연구주제의 좌표 찾기
하지만 연구 과정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연구 주제에 관한 선행 논문은 고작 3개만이 검색되었다. 결국 나는 더 큰 틀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내 연구 주제와 관련된 핵심어를 중심으로 리뷰 논문을 찾아보았다. 최근이면 가장 좋은 것이고, 5년 전에 발표되었다 하더라도 잘 정리된 내용을 공부하기에는 적당했다. 과학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연예계와 비슷하다. 한 번 뜨는 스타가 있으면 그 스타에 온갖 조명이 집중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 학자는 많은 학술지로부터 리뷰 논문을 써줄 것을 요청받는다. 그래서 논문을 찾다 보면, 비슷한 해에 비슷한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과학 분야가 유행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다행히 리뷰 논문을 통해서 하나의 실마리를 더 얻었다. 내가 직접 실험을 통해 밝히지 않아도 이미 많은 실험적 증명을 통해서 확증된 메커니즘에 기대어 내가 가진 실마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을 찾아보지 않았다면 시간과 돈 낭비하며 누군가 이미 했을 실험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실마리도 늦게 찾았을지 모른다.
충분한 자료 조사와 실험계획을 세운 뒤에 할 일은 실험이다. 그런데 실험하는 것 자체에도 ‘순서’(프로토콜)는 매우 중요하다. 실험을 해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면, 요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프로토콜, 즉 레시피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생물학 실험의 특성은 살아 있는 개체를 다룬다는 점이다. 한 번 순서가 뒤섞이면 실험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험할 때마다 결과가 뒤죽박죽일 것이다. 물론 이런 순서를 뒤섞는 잘못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과학적 물음에 걸맞은 방법과 과정을
앞에서 나는 과학에서 선택과 집중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순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연구 방향을 결정할 때 단계별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고, 기존 결과를 해석하고 이용함으로써 또 다른 결과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도 있다. 내가 특정 주제를 골라 그 일에 매진한다고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연구자들이 앞서 해놓은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에 진행할 일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또한, 내가 실험해서 도출한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해당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할 수 있다. 내가 애당초 호기심을 품었던 대상인 인간 정신 현상의 문제도 역시 뜬구름 잡고 소설 쓰는 수준으로는 결코 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뭔가 구체적인 고민, 정신에 관한 합리적 연구의 후속 작업의 방법과 결과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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