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뇌영상과 정신의학"

현직 정신과 의사인 필자가 최근 뇌영상과 정신의학 연구의 성과를 아우르며 뇌영상에 바탕을 둔 정신질환 해설에 나선다. 정신질환에 대해 여전히 큰 편견과 오해를 풀어주고자 한다.

'잘해야 해!' 질식할듯한 긴장이 만든 마음의 괴물

[39] 입스 -① 분석에 의한 마비(paralysis by analysis)



야구계에서는 입스의 치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입스의 이응조차 입에 올리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혹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스티브 블래스의 경력을 끝장 낸 괴물의 정체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분석 행위가 운동 수행능력을 마비시키는 질식 현상이었다.


1.jpg »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인 존 레스터. 출처/Pardavila, Arturo, “Cubs lefty Jon Lester throws a bullpen session at Wrigley Field”, Flickr



국 프로 야구에 존 레스터(Jon Lester)라는 선수가 있다. 2006년에 메이저 리그에 등장한 뒤 선발 투수로서 꾸준히 활약 중으로, 월드 시리즈에서도 세 차례나 소속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의 주무기는 속구, 커터, 커브, 체인지업으로 올해 정규 리그 성적은 13승 8패, 평균 자책점 4.33으로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큰 경기에 강한 면모답게 내셔널리그 4강전(디비전 시리즈)에서도 2차전 선발과 4차전 구원 등판으로 듬직한 모습을 보였다.


레스터는 2006년 여름 등에 발생한 통증 때문에 15일 동안 부상자 명단(DL)에 오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교통 사고 후유증 정도로 여겼지만, 의사인 삼촌에게 깜짝 놀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림프종이란 암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다행히 암은 치료할 수 있는 상태였다. 몇 차례의 항암 치료를 거친 4개월 뒤 그는 완치 판정을 받았고, 이듬해 여름 선발 투수 자리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는 생애 첫 무안타, 무실점(노히트 노런) 경기도 만들어냈다.


그런데 암도 극복한 레스터가 몇 년째 해결 못해 쩔쩔매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1루수에게 공을 던지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나? 좁은 스트라이크 영역에 공을 던지는 것과 1루에 공을 던지는 것은 언뜻 비교해도 후자가 더 쉽다. 1루 송구에는 스트라이크와 볼이 없으며, 방향이 조금 빗나가도 1루수가 팔과 다리를 뻗어 어지간한 공은 다 잡아주기 때문이다.


정규 리그에서 1루에 던진 견제구의 횟수를 살펴보면 레스터의 변화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2010년도에 98개, 2011년도에 70개의 견제구를 던졌지만, 2012년부터는 10개 미만으로 줄었고 2014년에는 단 한 개의 견제구도 던지지 않았다.[1] 상대팀은 그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1루 주자는 2루 쪽으로 보폭을 넓게 잡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도루를 시도했다. 레스터는 ‘도루 자판기’로 만천하에 소문이 나버렸다.


[ https://youtu.be/b8x7Rj-XVo4 /상대 선수가 아예 대놓고 2루로 뛰는 자세를 취하면서 레스터를

  괴롭히는 장면 ]



스티브 블래스 병,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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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스터를 괴롭히는 범인의 정체는 ‘입스(yips)’이다. 입스는 무의식적인 경련, 떨림, 멍해짐 등의 증상이 운동 선수의 미세운동기술(fine motor skill)을 방해하는 현상을 의미한다.[2] 흔히 골프의 퍼팅과 관련해서 언급되지만, 다른 종목에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다트에서는 다트염(dartitis), 스누커(당구 경기의 일종)에서는 큐대염(cuetitis), 사격에서는 움찔하기(flinching), 양궁에서는 과녁 공황(target panic)으로 불린다.[3] 야구에서 입스 현상은 ‘스티브 블래스 병(病)’으로 흔히 소개되는데, 여타 종목과 달리 사람 이름이 붙은 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티브 블래스(Steve Blass)는 1971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투수이다. 당시 1, 2차전을 상대 팀에게 넘겨준 상황에서 3차전에 출전한 그는 9회 동안 1점만을 내주며 승리를 거둬 열세이던 흐름을 바꿨다. 닷새 뒤 마지막 7차전에 다시 등판한 그는 이번에도 1점만을 내주는 완투승을 거두며 소속팀에게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안겼다. 정교한 제구력이 주무기였던 그는 이듬해 19승을 올리며 선수 생활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에 당당히 선정되었다.


[ https://youtu.be/mZKQhnwJ98I /1971년 미국 메이저 리그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스티브 블래스가

  마지막 아웃을 잡는 장면 ]


다음 해 정규 시즌이 시작할 무렵 블래스는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4] 코치진은 일시적인 슬럼프이고, 투구 방식을 조금만 교정하면 금세 해결될 문제로 여겼다. 비록 그가 경기 중에는 어설프게 공을 던졌지만, 연습 때는 마음 먹은 대로 스트라이크를 꽂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블래스는 결국 1973년 시즌을 평균 자책점 9.85라는 내셔널리그 최악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그가 리그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은 타자의 몸에 맞는 공(사구)이었다. 88.2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2개였으니 빼어난 제구력을 자랑하던 이전의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듬해 마이너 리그로 강등된 뒤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한 스포츠 전문 잡지에서는 그의 불안한 투구 동작을 이렇게 묘사했다.


“블래스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자 갑자기 투수판(피칭 플레이트)을 짚은 오른 발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면 다리가 꼭 불어터진 스파게티 면발처럼 보인다. 가까이에서 보니 다리가 도망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버티면서 오른 발을 투수판에 고정시킨 채 공을 던진다.”[5]


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불안과의 싸움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언론이 추락하는 투수에게 관심을 기울일수록, 관중들이 연봉 값어치는 하고 있냐며 비난할수록 블래스의 심적 고통은 심해졌다. 어느 날 연습 경기에서 타자 몇 명을 삼진 아웃 시키는 경기력을 보여준 뒤 그는 좋은 모습으로 야구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블래스의 야구 인생은 입스가 나타난 지 불과 2년 만에 그렇게 막을 내렸다.


메이저 리그에서 입스로 고생한 선수는 스티브 블래스 외에도 많다. 나타나는 모습도 다양해서 2루수 척 노블락은 1루에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고, 포수 맥키 새서는 투수가 던진 공을 다시 투수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국내 야구계도 예외는 아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던 투수 이왕기는 이재율로 개명까지 하며 노력했지만 반등에 실패했고,[6] 맥키 새서와 비슷한 문제를 겪던 홍성흔은 포수를 포기하고 은퇴 전까지 지명 타자로만 나섰다.[7]


[ https://youtu.be/COqXNQiIHgU /영화 <메이저리그 2>에서 투수에게 공을 돌려주지 못하던

  포수 루브 베이커. 이 배역은 맥키 새서가 겪었던 입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출처/각주 [8]]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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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된 블래스는 갖은 노력을 다 해봤다. 투구 방식과 자세를 바꿔보고, 야외에서 연습하거나 무릎을 꿇고 공을 던져보기도 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여러 상담가를 찾아 다녔고, 명상, 최면술 등 할 수 있는 여러 치료를 다 받아봤다. 심지어는 사냥감을 놓칠 때마다 팬티가 너무 꽉 조인다는 연관성을 찾아냈다는 사냥꾼의 편지를 받고 넉넉한 속옷을 사려고 바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했다. 자신의 투구에 노력하고 신경을 쓸수록 공 던지기는 더 잘 되지 않았다.


소에 별 생각 없이 잘 하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잘 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명시적 감시(explicit monitoring) 혹은 분석에 의한 마비(paralysis by analysis)라 부른다. 제식 훈련 중 “걸음 바꿔 가”란 구령에 ‘잘 바꿔야지’하고 신경 쓰다 보면 같은 손과 발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지 않던가. 이 이론은 운동 선수가 압박 받는 상황에서 수행 능력이 감소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미국의 롭 그레이(Rob Grey) 교수가 대학교 야구 선수를 운동장이 아닌 가상 타격연습장으로 불러 시행한 연구를 살펴보자.[9] 연구진은 모니터에서 가상의 야구공이 다가올 때 방망이를 휘두르는 참가자의 몸에 동작 추적 장치를 붙여 방망이와 참가자 팔다리의 움직임을 측정하도록 준비했다. 참가자는 압박을 받는 상황에 놓였는데, 먼저 방망이를 휘두르는 동안 소리를 들려주고 고음인지 저음인지 파악하게 했다. 이어서 소리가 나올 때 방망이가 위쪽으로 움직이는지 아니면 아래쪽으로 움직이는지 살피도록 했다.


참가자가 소리의 높낮이를 평가하는 동안에는 방망이의 궤적과 타격 성적은 평소와 비슷했다. 수 년 동안 무수히 방망이를 휘두르는 연습을 한 이들에게 외부적인 압박은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참가자가 자신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자 타격 수행 능력이 현저하게 감소했다. 즉 외부가 아닌 내부에 신경 쓸 때 압박감에 목이 졸리는 듯한 소위 ‘질식(choking)’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야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사이언 베일럭(Sian Beilock) 교수는 축구 선수에게 일렬로 놓인 원뿔꼴 표지 사이를 갈지자 형태로 드리블하게 하면서 유사한 연구를 시행했다.[10] 드리블하면서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공을 발의 바깥쪽 혹은 안쪽 중 어디로 쳤는지 말하도록 하자 특정 단어를 들려준 뒤 따라서 말하도록 했을 때에 비해 표지 전체를 통과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다. 평소 무의식적으로 하던 드리블에 의식적으로 집중하자 드리블을 더 못하게 된 것이다.


운동 선수가 기술을 처음 배울 때에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이 많이 관여한다.[11] 기술에 필요한 동작을 천천히 짚어 가면서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특별히 의식하지 못한 채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술과 관련된 지식이 의식에 남지 않고, 운동조절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무의식 영역(소뇌)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기술 수행이 ‘집중’에서 ‘자동’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런데 압박을 받아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에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면 운동 선수는 기술을 배우던 초보자로 다시 돌아간다.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나타나야 할 기술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무수한 반복을 통해 어렵게 얻은 기술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여러 작은 단계가 덩이지면서 완성된 숙련된 기술이 다시 각각의 작은 조각으로 나뉘고, 개별적인 단계에 일일이 신경 쓰는 초보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소 의식 밖에서 이뤄지는 기술에 세세하게 관심을 가지면 질식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스티브 블래스의 대처 방법이 딱 이랬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문제를 분석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할수록 블래스는 심리적으로 압박 받고 불안했다.


“공을 잘 던질 때에는 어수선한 게 없어요. 투구 기술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죠. 모든 것이 느긋하고 즐겁고 부드러워요. 하지만 온갖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복잡한 게 많아졌어요. 마음에 여유가 없고 긴장하게 되죠.”[4]


야구계에서는 입스의 치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입스의 이응조차 입에 올리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혹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스티브 블래스의 경력을 끝장 낸 괴물의 정체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분석 행위가 운동 수행능력을 마비시키는 질식 현상이었다.[12]



적과의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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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공중 그네>라는 소설이 있다. 환자 중 프로야구단의 베테랑 3루수 스즈키의 고민은 1루에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엉뚱한 이라부는 일방적으로 비타민 주사를 놓고, 공놀이를 하자고 떼를 쓰면서도 문제를 해결한다. 원인은 바로 새로 입단한 신인 선수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스즈키는 자신의 두려움을 인식하면서 입스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야구계에서는 어떨까? 1루 송구에 어려움을 겪다가 3년 여 만에 극복한 2루수 스티브 삭스와 같은 사례도 있지만, 대개 실패담이 더 많다. 근래에도 강정호의 팀 동료로 알려진 페드로 알바레즈가 3루에서 잡은 공을 1루에 제대로 송구하지 못해 고전하다가 1루수로 보직을 바꿨다. 올해 초 <경이로운 것(The Phenomenon)>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펴낸 릭 앤키엘도 폭투로 고생하다가 결국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다.


[ https://youtu.be/KDZX525CSvw /2000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4강전(디비전 시리즈)에서

 릭 앤키엘은 한 회에 폭투를 다섯 번이나 던졌다. ]


스라는 괴물과의 싸움이 대게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귀결되는데, 앞서 소개한 존 레스터는 어느 쪽에 속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입스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더 발전하기까지 했다.[13] 물론 그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처음 그가 취한 방법은 많은 선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을 던지는 속도와 자세를 가다듬고, 번트로 굴러온 공을 잡아 1루수에게 던지거나 견제구를 던지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시행했다.


흔히 ‘연습이 완벽함을 만든다(Practice makes perfect)’고 하지만, 입스는 예외이다. 연습은 어디까지나 연습일 뿐이다. 아무리 실전처럼 꾸미더라도 연습 중 1루쪽 송구를 제대로 못해 잃을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실전은 다르다. 사소한 송구 실수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심리적 압박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연습 때 자연스럽게 던졌던 공도 뻣뻣하고 어색하게 던지게 된다.


2015년 소속팀 감독 조 매던(Joe Maddon)은 경기 중 굳이 1루에 공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레스터에게 말했다. 연습의 효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선수들이 그의 약점을 채워나갔다. 전담 포수 데이비드 로스와 1루수 앤서니 리조는 1루 주자의 동태를 주고 받기 위한 그들만의 정교한 수신호를 만들었다. 도루하려는 낌새가 있으면 로스는 레스터가 던지는 공을 옆으로 빼서(피치아웃) 2루로 공을 잽싸게 던졌고, 1루 주자가 2루 쪽으로 보폭을 넓게 잡고 있을 때에는 직접 1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또 수비가 뛰어난 리조는 레스터의 악송구를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노력했다.


[ https://youtu.be/5d8jRcx9IPA /리조가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레스터의 악송구를 잡아 타자를

 아웃시키는 장면 ]


음의 부담을 던 레스터는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고, 이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2014년까지 메이저리그 9년 간의 평균 자책점이 3.58, 9이닝 당 출루시킨 타자의 수가 11.5였지만 2015년 이후 각각 2.95, 9.94로 성적을 반영하는 지표가 호전되었다. 상대 팀의 발 빠른 주자들이 타자와의 승부를 방해하려 노력했지만, 그는 당당히 이겨내며 2016년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전설적인 투수 사이 영을 기려 해마다 최고의 활약을 보인 투수에게 주는 상) 투표 2위에 올랐다.


하지만 팀에서 부담을 지우지 않고, 동료들이 도움을 줘도 레스터가 공을 1루로 던져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상대 타자가 번트를 대거나 빗맞은 공이 그의 앞으로 굴러올 때이다. 불가피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잡은 공을 한 번 땅에 튀겨서 1루수에게 던지는 연습을 했다. 혹 악송구가 나와도 추가 진루와 같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공을 들고 1루 쪽으로 달려가다가 안전하게 허리 아래서부터 위로 올리듯이(언더핸드) 공을 던졌다. 가끔 공이 글러브에 껴 공과 글러브를 함께 던지기도 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타자를 아웃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https://youtu.be/EyFRO7xMD8I  /레스터가 공을 글러브와 함께 던져서 타자를 아웃시키는 장면 ]


스터가 입스를 극복한 비결은 그의 유머(humo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1루에 공을 던지지 못하는 야구 선수라고 해보자.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하겠나. 흔히 이런 상황에서는 현실을 부인하거나 남 탓을 하기 쉽지만 레스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웃음으로 자신의 약점과 불편한 상황을 승화시켰다. 한 예로 메이저리그 노사 협약이 새로 이뤄진 뒤 그가 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살펴보자.


2.jpg » "투수가 1루에 송구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내 노력이 통과되지 못했지만, 새로운 단체교섭에 합의한 선수 노조와 구단주가 자랑스럽다!" 출처/ 존 레스터의 트위터


정신 의학에서 심리 불안이나 갈등이 있을 때 감정적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 부른다. 유머는 성숙한 방어기제에 속한다. 레스터가 입스를 극복하는 데에 몰두했다면 자학 개그를 선보일 심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에 마음 속 괴물을 품에 안되 신경 쓰지 않는 ‘적과의 동침’ 형태로 노력했기에 스티브 블래스의 30년 전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6월 2015년 이후 처음으로 견제구로 1루 주자를 아웃시켰다. 얼마나 통쾌했을까!


[ https://youtu.be/jyo39FFQM08 /2017년 6월 존 레스터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1루 주자

 토미 팸을 견제사 시키는 장면 ]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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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 16일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있다. 이맘 때면 오래 전의 아픈 기억이 떠 오른다. 내가 치렀던 시험은 난이도가 매우 높아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는 1996, 1997년(재수) 수능이었다. 평소 접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가 계속되자 나는 이내 불안해졌고, 수능 성적이 좋지 못하면 본고사를 얼마나 잘 봐야 만회할 수 있을지 염려하기 시작했다. 딴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평소 모의 고사를 통해 갈고 닦아 자동화된 뇌 속의 문제 풀이 회로는 더욱 느려졌다. 심적으로 부담을 느낀 상황에서 불안에 잠식당한 나는 평소만큼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물론 성적이 좋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내 실력 부족 때문이었지만).


스티브 블래스, 척 노블락, 맥키 새서, 페드로 알바레즈, 릭 앤키엘, 이왕기, 홍성흔. 내가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압박 받는 상황에서 평소의 수행 능력이 떨어진 정도나 삶에 미친 영향은 나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들이 겪었던 입스가 주는 교훈이 하나 있다. 긴장하고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이겨낼까 '복잡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평소 연습했던 대로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호랑이 굴에서 차려야 할 정신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또 다른 형태의 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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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스는 지금까지 살펴본 형태, 즉 압박 받는 상황에서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종류가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한 새로운 여정은 한 피아노 연주자에서 시작한다.… [2부에서 계속]



[주]


[1] 김형준. [인사이드MLB] '견제 못하는 좌완' 존 레스터

  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224&aid=0000003527 (2015).

[2] Clarke, P., D. Sheffield, and S. Akehurst, The yips in sport: A systematic review. International Review of Sport and Exercise Psychology, 2015. 8(1): p. 156-184.

[3] Katwala, A., The Athletic Brain: How Neuroscience is Revolutionising Sport and Can Help You Perform Better. 2016: Simon & Schuster UK.

[4] Clark, T., Nerve: Poise Under Pressure, Serenity Under Stress, and the Brave New Science of Fear and Cool(번역판-너브). 2011: Little, Brown.

[5] Jordan, P. PITCHER IN SEARCH OF A PITCH

  http://www.si.com/vault/1974/04/15/615290/pitcher-in-search-of-a-pitch. 1974.

[6] 이영미. 그 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3> 이왕기→이재율, 입스로 은퇴하기 까지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0947 (2016).

[7] 박현진. 두산 홍성흔 "시즌 뒤엔 사회인야구에서 뛰어볼까?"

  http://www.sportsseoul.com/news/read/308627#csidx05d6331284417888d215a4184e690ec (2015).

[8] Durrett, R., Saltalamacchia's been thrown for a loss

  http://www.espn.com/dallas/mlb/columns/story?columnist=durrett_richard&id=5199866 (2010).

[9] Gray, R., Attending to the execution of a complex sensorimotor skill: expertise differences, choking, and slumps. J Exp Psychol Appl, 2004. 10(1): p. 42-54.

[10] Beilock, S.L., et al., When paying attention becomes counterproductive: impact of divided versus skill-focused attention on novice and experienced performance of sensorimotor skills. J Exp Psychol Appl, 2002. 8(1): p. 6-16.

[11] Jueptner, M., et al., Anatomy of motor learning. I. Frontal cortex and attention to action. J Neurophysiol, 1997. 77(3): p. 1313-24.

[12] Smith, A.M., et al., The 'yips' in golf: a continuum between a focal dystonia and choking. Sports Med, 2003. 33(1): p. 13-31.

[13] Apstein, S. Jon Lester didn't just beat the yips, he improved once the secret was out

  http://www.si.com/mlb/2017/05/17/jon-lester-yips-chicago-cubs (2017).

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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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 과장
우울하던 의과대학 시절에 운명처럼 찾아온 정신과학과 여전히 연애 중인 정신과 의사. 환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정신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자 늘 고민한다.
이메일 : ir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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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양극성장애, 가벼운 또는 심각한…1991년, 이범학이라는 신인 가수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데뷔곡 <이별 아닌 이별>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는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에 올랐고,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훤칠한 ...

  • ‘강속구·변화구 칠까 말까’ 0.15-0.25초 타자의 뇌 반응‘강속구·변화구 칠까 말까’ 0.15-0.25초 타자의 뇌 반응

    뇌영상과 정신의학최강 | 2017. 03. 27

    [35] 타격의 비밀 2017 프로야구 시즌이 이번 주 토요일인 3월 31에 시작한다. 비록 세계대회인 ‘월드베이스 볼 클래식(WBC)’에서 죽을 쑤긴 했지만 올해에도 변함없이 많은 사람이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즐기리라 예상된다. 누가 뭐라 해도 현재...

  • “거짓말은 왜 할수록 늘까” –뇌과학 실험의 설명“거짓말은 왜 할수록 늘까” –뇌과학 실험의 설명

    뇌영상과 정신의학최강 | 2017. 02. 24

    [34] 거짓말 한 달 전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대개 취임 연설의 내용이 주목을 받지만 이번에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란 생소한 단어가 많이 회자됐다.[1] 사연은 취임식을 찾은 시민들의 숫자 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