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경제발전 도구일 뿐?’ 헌법 조문 개정 목소리

브릭(BRIC) 설문에 2280명 응답…“조문 개정 필요” 의견 많아

ESC 단체,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에 관련 조문 개정 의견 전달


00law.jpg » 헌법재판소 법정에 걸린 상징문안. 한겨레 자료사진


한민국 헌법에는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기조를 보여주는 관련 조문이 담겨 있다. ‘경제’를 다루는 제9장의 제127조에 있는 과학기술 관련 조문은 다음과 같다.


①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②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

③ 대통령은 제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문기구를 둘 수 있다.


내년에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최근 과학기술인들이 헌법에 담긴 과학기술 관련 조항들에 대한 관심과 의견을 밝히고 나섰다. 대체로 이들의 목소리는 ‘제127조 제1항의 개정’을 요구하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최근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즉 브릭(BRIC)이 과학기술인을 대상으로 헌법 개정과 관련해 의견을 물은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2280명의 응답 참여자 가운데 70% 넘는 응답자들이 과학기술을 경제 발전의 도구로 인식하게 하는 제127조 1항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 자세히 보기]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report&id=2855


그동안 제127조 조문이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에 국가가 경제개발을 주도하며 과학기술을 국가 주도의 도구로 인식했던 낡은 틀을 담고 있으며, 또한 현실적으로도 과학과 공학의 다양한 연구들을 국민경제 발전이라는 단일한 목적으로 묶을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관련 조항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부의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이번 설문 조사 결과는 이런 문제의식이 과학기술인 사이에 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설문조사에서 이 헌법 조문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다수인 79%가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동의한다’ 73%, ‘일정부분 동의한다’ 6%).

[참조 글]

국가 경제성장 논리에 묶인, 헌법 속의 과학기술 (김영삼 동의대 교수, 사이언스온, 2012. 10. 26)

 http://scienceon.hani.co.kr/65348


많은 응답자들은 연구 과제의 신청서나 평가 보고서, 결과 보고서 등에 ‘해당 연구의 경제적 효과, 사회적 효과’를 설명해야 하는 보고서 형식의 관행이 이런 헌법 조항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으로 답한 점도 눈길을 끈다. 응답자의 72%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과학기술 관련 조항이 제9장인 ‘경제’ 장에 담는 것이 적절한지를 묻는 물음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31%가 ‘기술만 경제 조항에 둔다’는 의견을 냈으며, 30%는 ‘과학과 기술 모두 ‘경제’ 조항에서 뺀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처럼 과학기술을 경제 장에 둔다’는 의견은 26%였다.


‘과학’과 ‘기술’은 학문 체계나 연구-응용 단계에서 다른 성격을 보여주곤 하는데 우리사회에서는 흔히 ‘과학’과 ‘기술’을 묶어 한 단어처럼 ‘과학기술’을 관행적으로 쓴다. 이미 일상어처럼 굳은 이런 표현을 관행으로 이해한다 해도, 헌법 조문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괜찮을까? 응답자의 다수(69%)가 두 개념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개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 용어와 개념을 헌법 조문에서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분리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은 23%였다.


응답자들은 대체로 ‘과학기술 헌법 조항이 과학기술계 정책과 활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77%), ’실제 자신의 과학기술과 관련한 활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69%)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정작 헌법에 담긴 과학기술 관련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다수(75%)가 모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브릭 쪽은 “이번 설문조사 참여자(2280명)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 과학기술 관련 헌법 개정에 대한 현장 연구자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높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주요 내용을 보면,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바라보는 헌법 조항의 문제를 지적하며 관련 내용을 좀더 포괄적으로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기술 헌법 조항에 대한 개정 목소리가 높은 만큼 과학기술단체는 물론 헌법연구단체, 경제연구단체들과 함께 이런 의견에 대해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127조 1항 개정 요구’ 의견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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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학기술인단체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는 최근 단체 안에 ‘헌법 개정 티에프(TF)’를 만들고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헌법 개정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인 데 이어, 최근엔 제127조 1항의 개정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마련해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의 경제·재정분과에 제출했다. 의견서에 담긴 개정 요구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과학기술은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의 진보, 환경 보전, 삶의 질 향상, 건강 증진, 군사력 향상 등 매우 다양한 활용성을 가지는데,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만 접근하여 다루는 것은 과학기술의 무궁무진 한 활용가능성을 저해함.

- 국가의 역량을 오로지 경제발전에 집중하는 것은 6-70년대의 저개발국가 시절에 빠른 산업화를 이룩 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으나, 산업 발달이 궤도에 오른 현재에 들어와서는 비효율적인 정책임. 과학기술 역시 경제개발을 벗어나 보다 다양한 활용을 장려할 필요가 있음.

- 세계적 수준의 연구역량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높은 기초과학 수준이 필요하나, 현행 헌법으로는 국가 가 기초과학에 투자할 당위성이 떨어짐. 따라서 향후 연구역량을 위해 기초과학 연구를 조력할 당위성을 헌법적으로 열어 둘 필요가 있음.

- ‘혁신’이라는 용어는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라는 국어사전 의 용례를 보더라도, 국가의 인위적 개입으로 과학의 자연스러운 발전 흐름을 저해하는 의미로 읽힐 수 있음. 따라서 ‘북돋우고 조력하며 돕는’ 의미를 가진 용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함.


단체는 헌법 제127조 제1항을 삭제하고 “국가는 과학기술의 장려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문을 '제1장 총강'에 신설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안을 함께 내놓았다. 현재 헌법 개정 논의는 국회 개헌특위(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다. 국회 개헌특위는 국회의원 36인으로 구성해 2016년 12월 29일 출범했으며, 개헌특위에 전문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53인의 전문가와 시민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올해 2월2일 출범했다. 자문위원회는 2개 소위원회에 기본권, 경제·재정, 지방분권, 정부형태, 정당·선거, 사법부 등 6개 분과를 두고 있다. 과학기술과 관련한 헌법 조문의 개정 문제는 경제·재정 분과에서 여러 안건들 중 하나로 다뤄지고 있다.


■ 참조: 설문 응답의 주관식 답변 사례


다음은 브릭의 설문조사에 답하며 응답자들이 자유롭게 쓴 의견들(2275건 + 148건) 중 일부를 간추린 것이다. 어색한 문장 부분을 일부 손질했다.

[1] http://www.ibric.org/community/biohelp/reply/law15.html

[2] http://www.ibric.org/community/biohelp/reply/law17.html


과학기술은 경제 발전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은 기초 학문을 근간으로 발달한다. 기초학문은 기술 응용화 및 상용화의 시발점이고 우리가 쌓아야 할 큰 데이터베이스다. 이것이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국한해 인식이 된다는 것은 시대에 뒤쳐지는 생각이다. 한국도 과학기술이 많이 발달하고 있지만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 다른 나라들처럼 큰 획을 긋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욱 더 발달하려면 단순히 경제 발전의 도구가 아닌 과학 그 자체의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이 인식되어야 한다.


과학이라는 것이 일정 부분 당장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기초과학 분야의 경우 경제 발전보다는 미래 가치의 창출을 위한 투자라 할 수 있으므로 현재의 시각에서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경제 발전을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는 아니라는 인식이 기초과학 발전과 향후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며, 기술 개발은 경제 발전을 위한 직접적인 행위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와 개념 설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학기술이 비단 경제 발전에만 영향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편익과 효과는 클 것이기에 경제 발전의 한축으로서의 기존의 역할은 계속 수행하면서 국민의 삶의 질의 확보하는 역할도 지금 시점에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학은 인문, 사회,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통합적인 학문 개념으로 이해하고, 기술은 이러한 인문, 사회, 자연현상의 탐구를 통해 실생활에 적용하는 2차적 경제활동으로 연결되는 개념으로 이해함이 적절하다.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는, 과학이 반드시 기술이라는 것으로 연계되어야만 가치가 있음을 내포하는 용어로 과학의 가치를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도구적 의미에 국한하는 것으로, 한정적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물론, 과학이 충분히 ‘잠재적 경제 가치’를 지니는 분야인 것은 맞지만, 과학이라는 과정을 통해 기술화가 가능하고 사업화가 되었을 때 ‘실현적 경제 가치’를 지니게 되므로 과학과 기술은 분리해서 용어를 정의하고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뿐 아니라, 과학이라는 학문의 그 존재적 가치와 순수한 탐구정신을 통한 다양한 연구의 장려의 목적에도 부합하다. 또한, 국가가 ‘과학’을 지원하고 교육하고 장려하는 것도 중요하고,‘기술’이라는 분야를 투자하여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학의 도구적 목적도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과학의 유용성이므로 과학과 기술의 개념을 구분하고, 과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과 과학을 토대로 기술화, 사업화하는 기술자를 구분하고, 그들의 권리, 책임,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가와 민간의 역할을 구분하여 발전하는 방법이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생산된 부를 나눠가질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결론적으로 본인은 위의 논거를 바탕으로 아래와 같이 헌법의 조문이 개정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22조 ②저작자·발명가·과학자·기술자(과학자와 기술자의 분리 사용)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제9장 ‘경제’ 제127조①항에서 ‘국가는 기술(과학 삭제)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현재 심각한 문제점은 과학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서 위정자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 경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자명하나,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을 과학으로 볼 때, 진정한 과학의 발전이 이뤄질 수 있고, 경제 발전은 그에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국가연구과제의 평가도 그렇다. 기초과학 연구는 멀리 내다보고 ‘투자’를 해야 되는 부분이다. 기초과학 연구사업을 평가할 때는 ‘얼마나 단단히 기초를 다지고 있느냐’를 평가해야지, 근시안적으로 당장의 ‘성과’ (IF[인용지수] 몇 점의 논문 따위)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것들이 잘못 되었다. 국가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 중에서 필드에서 몸으로 부딪혀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다. 지금과 같은 식으로는 헌법을 개정하고, 수백 억 원을 쏟아부어 수십 년이 지나고 언제나 제자리 걸음일 것이다. 언발에 오줌 누기다.


헌법에서 ‘과학기술’이 ‘국민경제‘와 분리되어야 한다. 주무부처가 문교부, 과학기술처,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미래창조과학부로 계속 바뀌었고 관련 중장기대책은 ’과학기술개발계획‘, ’과학기술혁신계획‘, ’과학기술기본계획‘ 등으로 달라졌지만 모두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하나같이 과학 혹은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고 있다. 외국의 기술을 모방하던 시대에는 정부가 경제성장 관점에서 과학기술 활동을 촉진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창의적인 과학기술 활동을 촉진하려면 더이상 경제 논리를 피해야 한다. 자율, 창의,미래, 인재양성 등 과학기술의 가치를 담아내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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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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