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 의학과 서사 (1)
시 각 | 의학과 서사 ① |
2013년 방영되어 관심을 모았던 드라마 ‘굿닥터’가 최근 미국에서 리메이크 되어 인기리에 방영 중이라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1]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 중 하나인 서번트 신드롬을 앓는 주인공이 의사가 되어 남들이 놓친 지점을 발견해 내며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점차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자폐스펙트럼장애는, 자폐와 관련된 전반적 발달 장애를 2013년 하나의 항목으로 통합하면서 만든 이름으로, 사회적 상호작용과 제한적, 반복적 행동을 보이지만 심각도와 기능 수준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드라마 전개의 출중함은 이미 원작이 보증하고 있는데다 이 드라마를 리메이크 한 사람이 데이비드 쇼어라는 것을 전해 들은 터라, 리메이크가 성공할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그려낼 새로운 이야기가 어떤 모습이 될지에 관한 궁금함도 커졌다. “한국 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를, 법원에서 연애를, 방송국에서 연애하지만 미국 드라마는 병원에서 진료를, 법원에서 변론 다툼을, 방송국에서 촬영을 한다”라는 우스갯소리 때문이 아니라, 쇼어의 전작 ‘하우스(House M.D.)’에 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의 서사 흐름을 빌려온 ‘하우스’
의학 드라마인 ‘하우스’를 한 마디로 줄이자면, 괴짜 천재 의사인 하우스 선생의 기상천외한 진단 모험이다. 미국에서는 ‘이.아르(E.R).’, ‘그레이스 아나토미(Grey’s Anatomy)’ 등 유명한 의학 드라마가 방영됐지만, 2012년 종영한 ‘하우스’야말로 의학 드라마 열풍을 불러온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 근거로 ‘하우스’가 종영 시점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세계 66개국에서 시청자 수 8억명)는 점을 들 수 있겠다.[2] 작품의 주인공 하우스 선생 역을 맡은 휴 로리와 그를 보좌하는 포어맨 선생 역을 맡은 오마 앱스는 덕분에 유명세를 누렸다.
어떤 점 때문에 ‘하우스’가 인기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두 가지 요소가 중요했던 것 같다. 하나는 주인공의 독특하다 못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성격, 다른 하나는 추리 소설의 구조를 갖춘 작품의 서사 형태이다. 극 중 하우스 박사는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며, 이를 핑계로 마약성 진통제를 습관적으로 삼키는 약물 중독자이다. 염세적인 데다가 과거의 상처 때문인지 대인 기피증을 보이는 그는 직장 동료도, 환자도, 심지어 애정 전선(그야말로 ‘전선’인데, 싸우다 정든다는 말의 의미를 아주 잘 보여준다)을 형성하는 병원장 커디도, 지음(知音)이자 유일한 친구인 종양내과 의사 윌슨도 절대 믿지 않는다.
»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를 입에 달고 다니는 괴짜 의사 하우스. 출처: Kevin Chin of Deviant Art.
또 전통적 서사 흐름을 따르던 기존의 의학 드라마와 달리 ‘하우스’는 추리물의 구조를 빌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의 발생, 뒤이은 증거 수집, 추론과 검증을 통한 진단, 그리고 회복의 순서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의학 드라마를 생각하면 흔히 떠오르는 수술실의 긴박감, “메스!”를 외치는 외과의, 앞에서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는 가족 대신, ‘하우스’는 질병이라는 ‘범인’이 ‘범죄’를 저지른 방식과 원인을 찾아 나가는 ‘진단’을 극의 중심에 배치하면서 추리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지적 긴장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았다. 덕분에 ‘하우스’는 병리학(pathology, 질병의 원인을 연구하는 학문)을 범죄학(criminology, 범죄, 범죄자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시각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의학 드라마의 방식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예컨대, ‘하우스’는 비슷한 시기 인기를 끌었던 ‘그레이스 아나토미’보다 ‘시에스아이(CSI)’에 가깝다. 시리즈의 시작이자, 이후 드라마의 서사 구조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첫 화 ‘테스트 케이스(Pilot)’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29세의 여성 환자가 입원한다. 그는 한 달 전에 발작한 뒤로, 말을 하지 못하고 아기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경우 일차적으로 의심해볼 대상은 뇌암이다. 하지만, 뇌암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단백질 표지자(암과 같은 특정 질환의 경우 이상 세포가 생성하는 단백질이 혈중에서 검출되며, 따라서 이 단백질의 존재 여부로 질환의 발병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세 가지 중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의심해볼 만한 환경 요인도 없었다. 뇌의 조영 자기공명영상(contrast MRI, 조영제를 주입하고 자기공명영상을 촬영하는 것)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아 누구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상태다.
피해자인 환자는 질병의 ‘습격’을 당해 병원을 찾아온다. 기존의 의학 드라마, 그리고 대부분의 의학적 서사는 치료의 난관을 이야기의 전개에, 수술 또는 치료 과정을 절정에 배치한다. 질병에 대한 승리가 최종 결말이 될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료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환자의 회복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 가능케 한 의사 또는 의료진의 천재적인 실력과 헌신은 경이의 대상이 된다. 다른 의학 서사에서 앞서 설명한 사례는 주제가 되기 힘든데, 싸워야 할 질병이 모호하다는 점 때문이다. 대상이 명확해야 싸울 수 있으며, 서사의 핵심은 해결 과정에서의 역경과 극복에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하우스는 현대 의료의 자화상”
반면 ‘하우스’에는 ‘시에스아이’처럼 이미 벌어진 ‘질병’ 사건이 제시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질병인가에 있다. 누구도 환자의 질병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이것이 서사의 긴장을 형성한다. 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추리물의 순서를 따르게 된다. ‘시에스아이’가 현장을 조사하여 범죄 기법의 단서를 찾고, 단서의 분석을 토대로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리하여 누가 범인인지를 밝혀내는 것처럼 말이다.
병원의 천재 진단의인 하우스 선생과 그의 팀 또한 진단에 계속 실패하며 잘못된 치료법을 택한다. 하우스 선생은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외골수인 성격을 이기지 못해, “모두는 거짓말을 한다”면서 환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고 방에서 영상과 실험실 검사 결과만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추론해 나간다. 하지만, 혈관염이라는 가진(hypothetical diagnosis, 진단명을 확정할 수 없을 때, 최선의 근거에 기초하여 내린 가설적 진단) 하에 이뤄진 스테로이드 약물 투여는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환자의 병세는 더 악화하여, 도움 없이는 거동도 어려워지게 된다.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환자는 절망하여 치료 중단을 선언한다.
질병의 단서로 실험실 검사 수치, 각종 영상 자료, 환자와 의료진의 대화가 등장하지만, 누구도 원인을 발견해내지 못한다. 하우스 선생과 그의 팀은 여러 가설을 세워 검증해보지만, 원인을 모른 채, 눈감고 내디딘 걸음은 헛발질이기 일수다. 오히려 상황은 악화하여 간다. 추리 소설에서 발견한 여러 단서를 통해 범인을 추리해내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 것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 극은 절정, 즉 원인의 확인 또는 ‘범죄의 식별’로 나아간다.
치료가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는 압박 앞에서, 모든 정황을 보고 하우스 선생은 결국 병의 원인을 추론해 낸다. 현 증상은 촌충(tapeworm) 감염으로 인한 혈관 염증이라고 추측한 하우스 선생은, 근거로 스테로이드 약물 투여가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보였지만 이내 증상을 악화시킨 것을 든다. 자신의 진단을 확신한 하우스이지만, 그에겐 이제 절망한 환자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일, 어찌 보면 그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남는다.
환자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인 이유는,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의 성격과 신조 때문이다. 프린스턴-플레인스보로 병원 진단의학과 과장인 그는 사람과의 교제를 싫어하고, 냉소적이며, 나르시시스트인 데다가 까다롭기까지 하다.[3] 덕분에 하우스 선생은 환자를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하우스 선생은 환자를 만나고 싶어하질 않아, 환자와의 상호작용은 온갖 의학 자료들, 그리고 진단팀의 다른 선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다가 제대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다른 의료진을 무시하고 폭언을 일삼기까지 하는 그가 환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물론 소위 ‘까칠남’인 그에겐 매력적인 구석도 있다. 친구 왓슨 역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션 레오나드의 표현을 빌려보면, “사람들은 왜 내 역이 하우스와 친구냐고 묻곤 해요. 나는 대답하죠. 이 드라마를 어떤 이유로 보세요? 그는 반사회적이죠. 천재예요. 그는 불만에 가득 차 있죠.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는 재즈 피아노를 치고, 버번(미국이 원산지이며 옥수수를 주성분으로 하는 위스키)을 마셔요. 그는 매우 지혜롭죠. 좋아하지 않을 구석이 없잖아요?”
여기까지 보셨으면 떠오르는 사람 또는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우스’의 추리 구조와 주인공의 반사회적 성격, 약물 중독 등은 ‘셜록 홈스’를 닮지 않았는가? 사실, 작가 쇼어는 그레고리 하우스를 창조하면서 셜록 홈스, 그리고 홈스의 모형이자 작가 코난 도일의 스승이었던 외과 의사 조지프 벨 박사를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4] 하우스 선생의 지음이자 비판자 역할로 등장하는 윌슨 선생이 홈스 모험의 기록자이자 서술자, 군의관 왓슨인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의학적 추리의 서사, 또는 추리의 모양을 한 의학을 지지하는 표현이 극 전체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우스 선생의 신조이자 그가 진단 과정에서 계속 되뇌는 말,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라는 표현 말이다.
[동영상 https://youtu.be/0U989j62g20| 드라마 <하우스> 177편을 7분에 요약한 한 팬의 동영상.
천재적 진단의지이만 괴짜, 사회 부적응자, 약물 중독자인 하우스 선생은 “현대 의학”의 얼굴을 잘 보여준다.]
마치 셜록 홈스의 과학적 추리 과정처럼 하우스 선생은 자신의 관찰과 인과 과정에 관한 집요한 사고를 통해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려고 한다. 환자와의 상호작용은 사고를 흐려 자신의 판단을 그르칠 수 있는 요소이기에, 또 환자와 나누는 대화는 사회적 교환이 아닌 정보 수집의 대상이기에 하우스는 환자의 ‘거짓’에 천착한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라는 말은 환자가 진실만을 말한다면 의사는 언제나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명제를 진단 과학이라는 가면 뒤에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셜록 홈스를 생각해보자. 등장인물 모두가 진실만을 말한다면, 홈스는 언제나 진실에 도달할 것이다. 아니, 숨겨진 진실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하우스 선생의 입장은 현대 의료의 자화상이다. 하우스 선생 자체가 현대 의료의 체현(體現, 사상이나 관념 등 정신적인 것을 구체적 형태,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환자를 만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환자와의 만남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매일의 진료 현장 뒤에는 이 정서가 깔려 있다. 더 정확히 보자면, 환자의 말은 언제나 ‘거짓’이기에 그 말보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환자의 ‘몸’이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현대 의료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너무 넘겨짚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실 분을 위해, 근대 의학이 탄생하던 순간을 잠시 되짚어보고자 한다.
근대 의학의 탄생과 환자의 침묵
19세기 파리는 그야말로 혁명의 공간이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불씨는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를 가져왔다. 의학 또한 그중 하나였으니, 기존 문헌의 권위에 의존하던 구체제(Ancien régime, 기존에 고착된 제도나 사상 등을 말하며,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사회 제도, 학문을 가리킴)와 그 의학적 위계 대신 계몽주의적 지식과 과학적 실험에 근거한 새로운 의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독일의 뮐러, 헬름홀츠, 피르호와 프랑스의 클로드 베르나르가 생리학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5] 파스퇴르와 코흐의 연구는 배종설(germ theory, 생명체가 배나 종으로부터만 발생한다는 이론으로, 자연발생설을 반박했다)을 입증하며 세균학을 창시하였다.[6] 루이는 임상 자료를 통해 사혈(瀉血, 4체액설에 근거한 서양 고중세 의학은 체액의 균형을 중시했으며, 체액 중 하나인 혈액이 과잉일 때 피를 뽑아내어 그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이 효과가 없음을 증명해 임상 역학(clinical epidemiology, 임상 자료를 수집하여 통계적 분석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나 변동, 치료의 효과 등을 연구하는 학문)의 선구자가 되었다.[7]
그중에서도 라에네크의 청진기 발명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당시 청진은 주요한 진찰 방법의 하나였지만, 의사가 환자의 가슴팍에 직접 귀를 가져다 대야 하는 탓에 귀족 여성을 진찰하는 것은 당시 남성이었던 의사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35세였던 라에네크는 젊은 여성의 심장 질환 진찰을 부탁 받지만, 환자의 나이, 성별, 신체 때문에 직접 청진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8] 그때 라에네크는 마당에서 두 아이가 긴 나무 막대와 핀을 가지고 장난치던 장면을 떠올렸다. 한 소년이 막대를 귀에 대고 있으면, 다른 소년이 핀으로 막대 반대쪽을 긁어 전달되는 소리를 듣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말아 자신의 귀에 대고, 반대쪽을 환자의 가슴에 위치시켰다. 환부에 직접 귀를 가져다 대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 청진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나무, 청동으로 만든 라에네크의 청진기 원본 중 하나. 출처: Wikimedia Commons
근대 이전의 의학은 절대적으로 환자의 말에 의존해야 했다. 의사의 오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긴 했다. 환자의 혈색이나 외관을 살피는 시진, 라에네크의 일화에서도 언급한 청진, 환부의 성상(性狀, 사물의 성질과 상태)을 만져보아 판단하는 촉진이 사용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환자의 분비물을 맛보고 환부의 상태를 냄새로 판단하여 미각과 후각도 활용했으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내뱉는 말이었다. 언제부터 아팠는지, 아프기 이전의 상태는 어땠는지, 왜 아픈 상태가 되었는지, 아픈 부분은 어디이며 그 양상은 어떤지를 파악하기 위해 의학은 환자에게 계속 말할 것을 요청했다. 의사의 실력은 잘 맞는 질문을 던져 환자가 질병 증상과 원인을 정확히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의사의 권위가 그 자신의 말에 자리 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근대 의학의 청진기, 엑스(X)선 촬영, 혈액 검사, 화학 검사 등 수많은 검사법이 환자와 의사 사이의 대화를 대체해 나가게 된 것은 의사가 환자의 말에서 질병에 관한 절대적인 정보를 얻고 파악하는 대신, 환자의 입에 손가락을 대어 조용히 시키고 환자의 몸이 내는 ‘소리’에 더듬이를 세우고 갈고 닦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료실이 ‘조용’해지는 순간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의학적 시선(le regard médical, the medical gaze)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9] 그것은 의학이 환자의 인격과 환자의 신체를 분리하는 과정이었다. ‘거짓말을 일삼는’ 환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물론 대화에서 필요한 정보를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에서 진실을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항상 진실을 말하는 몸에 물어보는 것이 더 빠르고 확실하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X선 사진, 컴퓨터 단층 촬영, 자기 공명 영상 등 환자의 몸을 직접 보는 시각 자료, 맥박, 심전도 등 몸이 내는 소리를 직접 듣는 청각 자료, 혈액, 분비물 검사, 유전자 검사 등 실험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치, ‘만질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런 임상 자료를 통해 환자 신체를 재구성하고 살로 가려진 몸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현대 의학의 뼈대가 되었다.
» 근대 의학 이전, 의사는 환자의 맥박을 재고 소변의 색깔을 검사하는 등 감각을 동원한 신체 검사를 수행하기도 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와의 대화였다. 당시 의사와의 만남은 환자가 진료소에 가는 것이 아닌 의사의 왕진으로 이뤄졌으며, 의사는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Doctor’s Visit, Elisabeth Geertruida Wassenbergh (1750-1760). 출처: Ruks Museum.\
현대 의학이 걸어온 150년의 길은 환자의 발화 대신 환자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던 하우스 선생의 생각이 그저 드라마 등장인물의 독특한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현대 의학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인간의 입과는 달리, 영상과 자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사의 역할은 환자를 의심하며 규정된 체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환자의 말을 의학적 지식에 붙들어 매는 일이다. 현대 의학은 환자의 몸에 자리 잡은 질병을 파악하기 위해, 그 몸을 기술의 도움을 통해 의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본업이라고 규정한다.
20세기 후반은 이런 현대의학의 입장이 눈부신 의학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을 보면서도, 이 규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현대 의학의 한계는 그 기술적 제한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현대 의료 윤리를 출발시킨 터스키기 매독 실험(Tuskegee syphilis experiment, 1932~1972년에 걸쳐 미국 공중 위생국이 터스키기 지역 흑인을 대상으로 매독의 자연적 경과를 연구하기 위해 치료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고 계속 건강 상태를 추적하기만 해왔다는 사실이 1972년 언론에서 폭로된 사건)은 사회적 조건이 질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10] 다른 지역, 다른 인종이었다면 항생제를 먹고 초기에 치료받을 수 있었던 그들은, 국가에 의해 자원으로 취급 받아 생물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11]
» 질환은 단순히 환자의 몸에만 국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환자의 행동, 사회적 상황, 유전적 요인, 의료적 조건, 환경의 복잡한 영향으로 결정된다.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출처: Wikimedia Commons. 여러 학자는 점차 질병이 환자의 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나가기 시작했다.[12] 질환(생물학적 병을 표현하는 '질병'과 구분하여 생물, 사회, 정신적 측면을 지닌 병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질환'이라고 표현한다)은 환자의 몸을 넘어 환자의 사회적 공간, 정신적 삶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질환의 다층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단의 학자들은 질환이 걸쳐 있는 사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과 사회의학(social medicine)이 대표적이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요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고려대학교 보건과학과 김승섭 교수의 신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차별, 불볕더위, 낙태, 가난, 노동, 성 소수자 문제 등 흔히 사회, 정치적 이슈로 분류되곤 하는 주제들에 사회역학적으로 접근하여, 건강을 규정하는 요소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몸 밖의 문제들’을 살펴 나간다.[13]
피르호, 토마스 매퀀, 하워드 바이츠킨, 폴 파머, 김용(세계은행 총재 맞다)으로 이어지는 사회의학의 계보는 개인의 질병과 보건의 사회적 결정인자 사이의 틈새를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14] 하버드 의과대학 국제보건 및 사회의학부 교수이자 ‘현대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파머는 논문에서 질병과 사회의 틈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인의 질병과 사회적 인자 사이에] 틈새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현대 의학의 성배(聖杯)가 질병의 분자적 원인을 찾는 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한된 탐구의 실용적 결과가 엄청나긴 했지만, 분자 수준에서의 현상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한 것은 과학적 탐구의 “탈 사회화(desocialization)”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은 생물 사회적(biosocial) 현상인 것에 자꾸 생물학적 질문만 들이대는 현상을 말이다.”[15]
하지만 무엇보다도, 출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환자의 몸, 그 생물학적 공간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 환자의 말에 귀를 닫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환자가 말로 표현하는 사회, 문화, 정신적 연관성을 의학에서 지워 나간 것이 현대 의학이 걸어온 걸음이라면, 이제는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다행인 것은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한 방법론이 계속 연구와 적용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20세기 말에 구체화하기 시작한 서사학(narratology)을 경유하여 환자의 이야기를 임상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고 있다.
콜롬비아 의과대학의 리타 샤론이 이끄는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은 해마다 워크숍을 거듭하면서 협력 병원과 연구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그들은 “집중, 표현, 연합(attention, representation, affiliation)”의 세 축을 통해 그동안 버려졌던 환자의 “말”, 그의 언어, 몸짓, 표정 등을 21세기 의학에서 다시 살리려고 한다.[16] 최근 국내에 번역되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와 그의 사회서사학은 이야기를 통해 삶이 사회 속에 처하게 되는 방식을 살핀다.[17] 철학자 알렉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사 누스바움 등이 주장하고 아담 재커리 뉴턴, 마사 몬텔로, 하워드 브로디, 아서 프랭크 등 여러 연구자가 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서사 윤리(narrative ethics)는 특히 생명윤리, 임상의학, 공중 보건의 여러 딜레마가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를 살피기 위해 이야기를 활용한다.[18]
[동영상 https://youtu.be/24kHX2HtU3o | 내과 의사로 문학을 전공한 리타 샤론은 질병 이야기에
경의 표하기(honoring the stories of illness)라는 제목의 TED 강연에서, 환자의 이야기에서 삶, 질환,
죽음의 가치를 알 수 있기에 자신이 의사가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환자와 의료인,
사회와 의학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우스 선생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들
다시 하우스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가 환자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는 퇴원하는 환자를 막기 위해 내키지 않는 걸음을 병실로 향한다. 존엄한 삶은 있으나 존엄한 죽음 같은 것은 없고, 죽음은 그저 모두 고통스러운 죽음일 뿐이라며 강변하는 그. 환자가 하우스 선생의 말에 감동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환자는 잠깐 주저하고 마지막으로 검사를 받아보기로 한다. 결국, 하우스 선생의 추리가 옳았다. 환자의 몸속에서 살고 있던 촌충이 질병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촌충이 다리 근육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것뿐.
환자의 퇴원을 늦춘 것은 하우스 선생의 언변이 아니라, 그 또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하는 환자였다는 사실이다. 환자는 하우스 선생의 모습에서 이해의 가능성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것은, 하우스 선생이 환자의 다리 근육에서 촌충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자신의 질병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허혈(虛血, 국소 조직의 빈혈 상태)로 다리 근육이 손상되었던 자신의 병력을 떠올리던 하우스 선생은, 환자의 병인(病因)이 다리 근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촌충은 혈액 공급이 충분하며 단백질이 많은 큰 조직, 근육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우스 선생이 환자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우스 자신의 이야기와 환자의 이야기가 겹치는 지점에 질환 치료의 실마리가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료인의 이야기, 환자의 이야기, 사회와 문화의 의료 이야기가 겹치는 지점을 세밀하게 읽어 나갈 때 발견할 수 있는 이 겹침의 지점들이 서사 의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숨겨진 보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 이야기를 잘 읽고 들을 수 있게 될 때, 진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더 넓은 시야에서 환자와 의료의 다면성에 접근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학에 관한 서사적 접근이 그저 환자의 이야기를 더 오래, 많이 듣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 의료에서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3분 진료’는 극복해야 할 대상일 것이며, 의료인과 환자가 서로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제도가 시급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료 시간의 길이와는 별개로, 서사 의학과 서사 윤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환자의 이야기, 의료인의 이야기를 더 주의 깊게 파악,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 이야기를 구체화할 수 있는 이해의 틀이다.[19] 짧은 대화에서, 환자의 몸짓과 표정에서 질환이 드리운 그림자와 환자의 회복력이라는 햇살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의료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서사 의학은 환자와 의료인의 이야기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 나와 상대를 위치시키고 받아들이며 이해하는가? 신체와 건강, 의학과 질병은 문화와 사회가 만든 이야기에서 어떻게 제시되며 동작하고 있는가? 이야기는 사회의 갈등과 화해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의료 이야기’ 속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글에서 드라마 ‘하우스’에서 문화가 제시한 의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몸과 질환이 규정되는 의학적 관점을 살핀 것 또한 서사 의학을 통한 의학적 성찰의 한 방법이다. 앞으로 여러 이야기를 의료의 관점에서 조망해 나가면서 질환과 사회, 삶과 의학이 중층적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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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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