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플 땐 힙합을 춰”…이건 우리 안의 소리
[38] 힙합
이달 초 엠넷의 <쇼미더머니 6>가 끝났다. 개인적인 바람과는 다르게 래퍼 올티는 중간에 탈락했다. 여러 래퍼 중에서 그를 응원하게 된 계기는 ‘사이퍼(cipher; 한 비트에 맞춰 여러 래퍼가 돌아가면서 랩을 하는 것)’ 미션 때였다. 닥터 드레의 <스틸 드레(still D.R.E)> 비트가 흘러나오자 올티는 바로 마이크를 잡고 랩을 시작했다. 프리스타일 랩(즉흥적인 랩)이었는데도 라임(rhyme; 같거나 비슷한 발음을 반복하는 것)과 펀치라인(punchline; 중의적 표현을 사용한 언어 유희)이 매우 뛰어났다.
[ 올티가 사이퍼 미션에서 랩하는 장면, 유튜브 https://www.youtube.com/v8MeEs9vE6g ]
벌스쓰긴 귀찮아서 그냥 프리스타일로
뭐 이 정도만 해도 MC들 다 비탈로
보내버리는 래퍼 기대 충족하게 나는 spit해
래퍼들은 나 때문에 핏대 올라가
I’m a young generation like 지코, 딘
내 랩은 너무 잘 빨려 마치 니코틴
여기 수많은 래퍼들 내 보기엔 귀요미
랩 연습 대신 딴 거해 니코니코니
Ayo 주노플로 빨리 도망가는 게 좋아
난 너를 잡는 추노 플로우
면도는 면도하다가 베이고 빅원?
스몰 사이즈라고 내가 랩하면 비기스몰즈
나 벌스 안 써도 뭐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쇼미더머니 정형돈이라고 말할 수 있어
왜냐면 난 getting’ bigger
다른 사람들 전부 다 비켜
가사에서 백미는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이용한 부분이다. 올티는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의 거센 느낌으로 주노플로를 공격하고, 빅원이란 이름을 이용해 상대를 작은 존재로 낮추면서 자신을 힙합의 거장 비기 스몰즈(Biggie Smalls;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별명)로 격상시켰다(상대적으로 면도에 대한 가사는 한 방이 부족해 보이지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랩이 가능한 것일까? 나처럼 창조적이지도 않고, 임기응변에 둔한 사람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래퍼들의 뇌는 뭔가 특별한 것일까? 기존 시즌을 시청한 적 없는 내가 쇼미더머니를 보게 된 계기는 젊은 환자와 소통하기 위해서였지만, 힙합은 내게 고민한 적 없는 새로운 의문을 자아냈다(참고로, ‘시청한 적 없는’과 ‘고민한 적 없는’은 나름 라임입니다).
프리스타일 랩의 과학적 비밀
올해 4월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라 몬테로(Gabriela Montero)의 연주회가 서울에서 있었다. 흥미롭게도 연주회의 2부 곡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대신 관객이 특정 곡의 일부를 부르면 몬테로가 그 선율에 맞춰 즉흥 연주를 했다. 관객은 ‘새야 새야’나 ‘아리랑’ 같은 노래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아름답게 변주하는 그의 손놀림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창조적인 선율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내며 관객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즉흥 연주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래퍼가 읊는 프리스타일 랩을 즉석에서 듣는 것처럼.
[ 가브리엘라 몬테로가 관객 2명이 부른 ‘해리 포터’ 선율을 듣고 즉흥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유투브 https://youtu.be/uD_DAUpb1Xg]
2008년 미국의 국립 난청-의사소통장애연구소(NIDCD)의 찰스 림(Charles Limb)과 앨런 브라운(Allen Braun)은 즉흥 연주 때에 일어나는뇌의 변화를 살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1] 이들은 전문 재즈 음악가 6명에게 자기공명영상(MRI) 기계 안으로 들어가서 작은 키보드를 이용해 사전에 외운 곡과 즉흥곡을 연주하도록 요청했다. 음악가가 두 손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 부위를 고정시킨 불편한 자세로 연주하는 동안 연구진은 이들의 뇌를 촬영했다.
» 실험에 참여한 연주자가 실제 키보드를 연주하는 모습. 출처/유튜브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omNG5N_E_0 갈무리
연구진은 즉흥 연주 때 뇌의 배외측 전전두피질(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DLPFC)의 활동이 감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영역은 과제의 집행이나 자기 점검을 담당하는 곳으로 음악가가 외운 곡을 연주할 때에 많이 활성화했던 곳이었다. 반면 즉흥 연주 때에 내측 전전두피질(medial prefrontal cortex; MPFC)의 활동성은 증가했다. 이 영역은 자기 표현과 관련된 곳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음악가가 암기해서 연주할 때에는 반대로 덜 활성화했다.
» 재즈 음악가가 즉흥 연주를 할 때의 뇌 변화. 자기 점검과 관련된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의 활동은 감소하고, 자기 표현과 연관된 내측 전전두피질(MPFC)의 활성이 증가한다. 출처/각주[1], 변형
즉흥 연주를 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펴 본 연구 결과가 발표된 뒤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그 중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래퍼도 있었다. 이들은 연구진 중 한 명인 앨런 브라운에게 프리스타일 랩으로 유사한 방식으로 연구해볼 것을 제안했다. 4년 뒤인 2012년, 래퍼 12명이 ‘리튼(written; 미리 외운 가사를 들리는 비트에 맞춰 랩을 하는 것)’과 ‘퓨어(pure;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즉석에서 랩을 하는 것) 형태로 랩을 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비교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2]
뇌의 변화는 재즈 음악가가 즉흥 연주를 할 때와 비슷했다. 래퍼가 즉석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동안 뇌에서는 배외측 전전두피질의 활성화가 감소했고, 내측 전전두피질의 활동이 증가했다. 반면 기존에 외웠던 랩이 흘러나올 때는 정반대의 양상(배외측 전전두피질의 활동 증가/ 내측 전전두피질의 활동 감소)가 나타났다.
» 래퍼가 프리스타일로 랩을 할 때의 뇌 변화. 좌측: 따뜻한 색은 활동이 증가하는 곳, 차가운 색은 반대로 활동이 감소하는 곳을 나타낸다. 우측: 배외측 전전두피질(DLPFC)의 활동은 감소하고, 내측 전전두피질(MPFC)의 활동은 증가한다. 출처/각주[2], 변형
연구진은 랩의 음악성도 평가했다. 제대로 된 서사(敍事; narrative)를 갖추고 있는지, 내용이 다양한지, ‘you know’와 같은 허사(虛辭)를 피하는지, 유머가 섞여 있는지, 라임의 형태가 다양한지, 빠른 속도로 랩을 하는지, 복잡한 리듬을 오랫동안 지속하는지 등을 확인했다. 그 결과, 랩이 좋은 평가를 받을수록 내측 전전두피질이 더 많이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내측 전전두피질은 자기 표현과 관련된 곳이다.
일련의 연구 결과는 멋지고 창조적인 프리스타일 랩을 위해서는 잔뜩 조여 있는 통제의 끈이 느슨해져야 함을 시사한다. 흘러나오는 비트에 맞춰 빠른 속도로 가사를 읊조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따지고 고심할 여유가 없다. 즉 여러 과제를 적절하게 조정하고 배치하는 실행 조절(execute control) 기능이나 불필요한 자극에 대한 반응을 억제하면서 과제의 특성에 따라 주의력을 변경하는 주의력 점검(supervisory attention) 기능에서 자유로워질 때에 참신한 영감이 떠오를 수 있다. 창조적 몰입을 위해서는 내부의 검열 스위치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요즘은 예능인의 느낌을 더 많이 주는 데프콘이라는 힙합 가수가 있다. 한국방송공사(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에서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달리 그가 부른 노래는 매우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며, 욕설과 디스(영어 disrespect의 준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힙합의 문화 중 하나)로 가득 차 있다.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가수인데 목사님께 드릴 앨범이 없다고 토로했겠는가(이에 데프콘은 아이들의 피처링이 인상적인 <힙합유치원>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효자 노릇을 했다).[3]
[ 데트콘의 ‘힙합유치원’ 뮤직비디오. 유투브 https://youtu.be/BJJcqhMRZK8 ]
최근까지만 해도 힙합에 대한 나의 태도는 데프콘 어머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래퍼들은 그렇게 으스대며 잘난 척을 할까?, “fu*k과 같은 단어를 남발하며 서로 싸우는 이유는 뭘까?”, “여성과 약자를 폄하하는 가사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힙합하면 대개 부정적인 의문이 많이 떠 올랐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와 달리 힙합은 전지구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쇼미더머니에 출연하려는 사람들이 매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으며, 힙합은 가요계의 한 축을 확실하게 담당하고 있다. 혹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정신과에 대해 잘 몰라 오해와 편견을 갖는 것처럼 나 역시 힙합에 대해 비슷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예로 ‘랩 배틀(rap battle)’을 살펴보자. 랩 배틀은 이름 그대로 랩으로 싸움을 벌이는 것인데, 보통 두 명의 래퍼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서 일정한 규칙 아래 랩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행위이다. 래퍼 에미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8마일>에서 에미넴(영화 속 이름은 비-래빗)이 랩 배틀의 왕으로 군림하던 ‘파파독’과 랩으로 맞짱뜨는 장면은 랩 배틀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 ‘8마일’ 후반부에서 에미넴과 파파독이 랩 배틀 하는 장면. 유투브 https://youtu.be/WR9iMb9eDtk ]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욕설과 비아냥을 쏟아붇는 랩 배틀을 듣고 있노라면 일단 마음이 불편해진다. 음악비평가 김봉현 역시 랩 배틀을 가리켜 힙합이 뒤집어쓴 누명, 오해, 편견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4] 그러나 랩 배틀은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로 접근해야 한다. ‘규칙’아래 ‘경쟁’하고 누군가는 ‘승리’하는 일종의 스포츠로 랩 배틀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00년 중반 에스비에스(SBS)의 예능 프로그램 <엑스(X)맨>에는 ‘당연하지’란 꼭지가 있었다. 각 팀에서 한 명씩 나와 마주보면서 질문을 던질 때 내용에 관계없이 “당연하지”라고 대답해야 하고, 대답하지 못하면 패배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출연진이 승리를 위해 징크스, 무명 시절, 비인기, 외모와 같은 상대방의 약점을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과정이 웃음의 발생 지점이었다. 당시 나는 참신한 표현과 언어 유희 탓에 이 꼭지를 매우 좋아했다. 가만? 형식만 조금 다를 뿐이지 ‘당연하지’는 랩 배틀과 비슷한 것 아닌가? ‘당연하지’를 좋아했다면 랩 배틀을 즐기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 ‘당연하지’의 한 장면. 이지현이 전진의 이름을 이용한 공격 “너 여자만 보면 전진하지?”라는
말로 전진을 물리친다. 유투브 https://youtu.be/FVULGNgqexE ]
힙합이라는 음악은 태생적으로 미국의 흑인 문화와 떼어놓을 수 없다. 게토(ghetto)에서 궁핍하게 살았기에 물질적 성공을 으스대는 자수성가 문법이 환영을 받고, 사회구조적으로 남성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자 구실을 못했기에 역설적으로 마초적인 남성성이 공감을 얻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힙합과 조금 친해지니 이제서야 ‘드렁큰 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에 대답할 자신이 샘솟는다. 스웩(Swag)!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1990년대 후반 <언플러그드 보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었고, 순정 만화였지만 당시 유행하던 힙합 문화를 작품 속에 잘 녹여내어 남학생(나를 포함한)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남자)’ 같은 현겸과 이마에 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는 평범한 지율의 우정과 사랑이 담겨 있는 이 만화에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가 있다.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만화에서 현겸은 슬프다는 걸 감추기 위해 힙합을 춘다고 했지만, 최근에는 우울한 마음을 치료하는 수단으로 힙합이 주목 받고 있다. 힙합이 어떻게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정신과와 힙합을 연결하는 가교로 ‘힙합 사이크(HIP HOP PSYCH)’라는 단체를 만든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두 신경과학자에 따르면, 그 근거는 ‘긍정적인 시각적 심상(positive visual imagery)’에 있다.[5] 이들은 그 예로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곡 <쥬시(juicy)>를 소개한다.
Super Nintendo, Sega Genesis
수퍼 닌텐도, 세가 제너시스
When I was dead broke, man I couldn‘t picture this
돈이 엄청 없을 때 이런 건 상상할 수 없었지
50 inch screen, money green leather sofa
50인치 스크린, 돈 색깔 녹색 가죽 소파
Got two rides, a limousine with a chauffeur
운전사가 있는 리무진 두 대
Phone bill about two G’s flat
전화 요금은 약 이천 달러
No need to worry, my accountant handles that
걱정할 필요 없어 내 회계사가 알아서 할 거야
And my whole crew is loungin‘
내 모든 친구들은 여유롭게 지내
Celebratin’ every day, no more public housin‘
매일 축하해 임대 주택에 더 이상 안 살아도 되지
10대 시절에 폭력과 마약 판매 혐의로 수 차례 체포된 적이 있는 노토리어스 비아이지는 힙합 음악가로서 자신이 이뤄낸 성공의 결과를 눈 앞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그려낸다. 힙합 특유의 풍부하고 시각적인 서사가 돋보인다. 힙합 사이크는 이런 형태의 음악을 통해 우울증 환자가 자기 자신,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치료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측한다.
힙합 팬들이 ‘리스펙(영어 respect의 약자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힙합의 문화)’’ 할 소식이지만 엄밀히 말해 아직 이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힙합 사이크의 두 과학자는 감옥, 학교,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면서 힙합의 치유 능력을 검증하고 있다.[6] 예를 들면 감옥에서 둘은 회복탄력성에 관한 가사로 재소자에게 긍정적인 심상을 유도해 이들의 부정적인 인지 체계를 변화시키려 노력한다. 평소에 접하지 못한 참신한 접근 덕택에 재소자도 역시 편한 마음으로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다.
아울러 힙합은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힙합이 태동한 곳인 뉴욕 브롱크스(Bronx) 지역의 여러 학교에서는 일명 ‘힙합 치료(hip-hop therapy)’가 활성화되어 있다.[7]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흑인이 사망한 뉴스를 보거나 알고 지내던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들은 학생은 상담실을 방문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가사를 쓰고 비트에 맞춰 랩을 하며 녹음을 한다. 힙합을 통해 학생은 슬픈 마음을 추스르고, 심리적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뉴욕이 있는 동부에 노토리어스 비아이지가 있다면 캘리포니아가 있는 서부에는 ‘투팍(2Pac)’이 있지 않았던가.[8] 힙합 치료는 뉴욕이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서부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사회사업가는 학교에서 많은 빈도로 정학이나 퇴학을 당하는 흑인, 히스패닉 학생의 정신 건강을 돕는 방법으로 역시 힙합을 사용하고 있다. 의자에 앉는 전통적인 형태의 상담을 거부하는 학생도 힙합 치료에는 곧잘 반응한다. 단지 슬픔이나 상실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도 힙합으로 표현하면서 청소년은 정신적 안녕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힙합 치료와 관련해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다. 치료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해 힙합 치료는 일반적인 정신 치료의 첫 단추를 꿰는 정도의 단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힙합을 통해 청소년(나아가 일반인까지)이 감정을 표현하고 치료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의미가 있다. 향후 정신과 임상에서 이런 랩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해본다. “힙합X정신과,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 일리네어 레코드의 ‘연결고리’ 뮤직비디오. 유투브 https://youtu.be/Q7AbIQHYidQ ]
공기와 같은 힙합 즐기기
최근 힙합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다. 지난해 제이티비시(JTBC)에서 방송된 <힙합의 민족>에서는 평균 나이 65세인 할머니들이 랩을 하며 힙합에 도전했고, 반대로 올해 초 엠넷의 <고등래퍼>에서는 10대 고등학생들이 힙합 실력을 뽐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힙합의 매력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앞으로 힙합의 인기는 어떻게 될까? 생물의 진화를 연구해 기원을 밝혀내는 진화생물학처럼 대중 음악의 진화 과정을 컴퓨터로 분석한 연구가 있다.[9] 1960-2010년 기간에 빌보드 핫(HOT) 100 차트에 올랐던 1만 7000여 곡을 살펴본 결과 1991년부터 현재까지 랩과 힙합이 대세로 대중 음악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과거에 두 차례의 큰 도약(1964년의 영국 밴드와 록 사운드; 1983년의 신디사이저, 샘플러, 드럼 기기)이 있었지만 영향력을 따져보면 힙합이 가장 크고 혁명적이다.
» 1960년부터 50년 동안 13가지 음악 형태의 진화 양상. 1991년 이후에는 랩과 힙합(제일 좌측 빨간색)이 대세를 이루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출처/각주[9]
우리나라의 첫 랩곡으로 꼽히는 홍서범의 <김삿갓>이 발표된 때가 1989년이다.[10]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힙합은 이제 공기처럼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힙합의 히읗도 모르던 나 또한 덕분에 프리스타일 랩의 과학적 비밀을 깨달았고, 밑바탕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이해했으며, 정신건강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관심 갖게 되었다. 박치여서 랩을 멋들어지게 읊지 못하고, 배가 나와서 힙합 바지를 입지 못하지만 오늘부로 나도 생활에서 힙합을 실천하는 힙합인이라고 감히 외쳐본다.◑
[주]
[1] Limb, C.J. and A.R. Braun, Neural substrates of spontaneous musical performance: an FMRI study of jazz improvisation. PLoS One, 2008. 3(2): p. e1679.
[2] Liu, S., et al., Neural correlates of lyrical improvisation: an FMRI study of freestyle rap. Sci Rep, 2012. 2: p. 834.
[3] 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301110000000000005213&ServiceDate=20130111
[4] 김봉현,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2014: 글항아리.
[5] Sule, A. and B. Inkster, A hip-hop state of mind. Lancet Psychiatry, 2014. 1(7): p. 494-5.
[6] http://edm.com/articles/2017/9/3/hip-hop-cure-depression
[7] https://www.nytimes.com/2016/01/20/nyregion/bronx-school-embraces-a-new-tool-in-counseling-hip-hop.html?mcubz=0
[8]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188457.html 한때 친구였던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와 투팍은 힙합의 원조를 두고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중 갱단을 동원한 총격전까지 벌어졌고, 결국 96년 투팍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6개월 뒤 노토리어스 비아이지도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9] Mauch, M., et al., The evolution of popular music: USA 1960?2010. Royal Society Open Science, 2015. 2(5).
[10] 김봉현, 한국힙합 에볼루션2017: 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