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물이 지닌 유전자가위, 생명현상 보는 또다른 ‘창’

※ 이 글은 한겨레 5월24일치 ‘사이언스온’ 지면에 실렸습니다. 온라인 사이언스온에도 옮겨 싣습니다. 이 기사는 몇몇 해외매체들에 실린 자료들과 국내 연구자들의 도움말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virusattackingBac2.jpg »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자연에서 박테리아와 고세균 미생물의 생존과 진화를 이끄는 중요한 생명현상임이 밝혀지고 있다. 현미경 영상은 박테리아 세포막에 달라붙어 침투 공격을 하는 바이러스들(녹색)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생물이 지닌 유전자가위

생명현상 보는 또다른 ‘창’


실험실에만 있는 공학기술이 아닌

자연계 널리 퍼져 있는 시스템

 

박테리아 DNA 구간에 끼여 있는

정체 모를 염기서열 발견

 

사람 몸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에

항체 만들어 ‘적응면역’ 방어하듯

 

침입자 바이러스 ‘블랙리스트’ 저장해

미생물이 대응하는 면역체계로

 

바이러스도 방패 뚫는 유전자 가위로

미생물과 공격-방어 시소 게임


자기 증식과 생존 위한 구실도 해

생물계 진화 이끄는 요인


치성 질환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바꿀 수 있고 새로운 농축수산 동식물을 개발하거나 값진 물질을 분비하는 박테리아종을 만들며 감염질환을 옮기는 곤충을 퇴치하는 데에도 이른바 ‘유전자 가위’라는 유전체공학 기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즘 생명과학의 뜨거운 관심사를 꼽으라면 단연 ‘유전자 가위’가 앞자리에 놓일 것이다. 생명공학기업 툴젠의 김석중 사업개발이사는 “특정 디엔에이(DNA) 염기서열을 찾아가 자를 수 있는 도구로서 유전자 가위는 이제 상당히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 있어 앞으로 응용기술과 규제과학이 함께 발전하면 여러 상품도 사회에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흔히 유전자 가위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크리스퍼/카스(CRISPR/Cas) 시스템’은 유전체공학에서 2013년 이후 성장했지만, 사실 그 기술은 자연계 박테리아와 고세균 미생물의 생명현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자연계의 크리스퍼 시스템은 유전자 가위의 생명공학과는 또 다르게 미시생물계의 역동성과 복잡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무대 위에 오른 유전자 가위 기술에 가려져 있는 자연계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보여주는 생명현상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600개 가까운 목록 저장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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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분자생물학자인 노정혜 서울대 교수는 “유전자 가위라는 말은 생명공학의 관점에서 붙인 이름이며 당연히 자연 미생물에서 그 생명현상이 실제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는 미생물학의 또다른 문제”라며 “크리스퍼 시스템은 미생물 세계를 들여다보는 중요한 주제로 여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 박테리아(세균)의 크리스퍼 시스템이 과학자들의 눈에 든 것은 그 디엔에이 염기서열에 있는 독특한 배열과 구조 때문이었다. 희한하게도 반복되는 염기서열들이 몰려 있는 디엔에이 구간에 정체 모를 염기서열 정보들이 반복 서열들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수수께끼 같은 구조를 왜 미생물들이 지니고 있는지를 풀려는 연구가 1990년대 이래 계속됐다.


그 염기서열 정보의 일부가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것이 미생물 나름의 면역 시스템과 관련이 있음이 점차 밝혀졌다. 2007년 무렵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시스템이 미생물에 침입했던 바이러스나 외부 유전물질의 조각 정보이며 미생물이 그 기록을 자신의 디엔에이에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같은 침입자들이 있을 때 이에 맞서는 일종의 ‘자기방어용 유전정보 블랙리스트’로 활용한다는 이론을 갖추게 됐다.(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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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발견은 미생물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사람 몸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난 뒤에는 항체를 만들어 이른바 ‘적응면역’ 방어를 하듯이, 아주 단순한 단세포 미생물에서도 일종의 적응면역이 이뤄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송기원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는 “그 발견으로 그동안 고등생명체에나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적응면역 반응이 박테리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을 큰 의미로 꼽았다.


미생물 연구가 거듭되면서 크리스퍼 시스템은 드문 현상이 아니라 자연계에 널리 퍼져 있음이 드러났다. 지금은 세균(박테리아)의 3분의 1가량, 고세균의 90%가 자기 유전체에 외부 유전물질 정보를 기록해두는 크리스퍼 시스템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중엔 한두 개의 외부 유전물질 블랙리스트만 기록해두지만 어떤 미생물은 무려 600개 가까운 목록을 저장한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미생물이 사는 환경에 따라 크리스퍼 시스템도 달라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노정혜 교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물음은 크리스퍼 시스템에 기록된 유전정보들이 모두 바이러스들의 것과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라며 “훨씬 많은 부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남은 물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생물의 크리스퍼 시스템은 우리가 모르는 바이러스 시스템이 존재할 가능성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용적인 응용 연구개발에도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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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이 크리스퍼 시스템이라는 적응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미생물에 침투해 증식하는 바이러스들은 또다른 공격 또는 회피 전략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 분야의 후속 연구들에서 밝혀졌다. 크리스퍼 시스템을 둘러싸고 미시생물계의 공격과 방어는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엠바이오>(Mbio)라는 국제학술지에 보고된 미국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이런 역동성을 잘 보여주었다. 우유 배양액에다 연쇄상구균과 바이러스(파지)를 함께 넣어 수백일 동안 두었더니 초기엔 바이러스 공격에 밀려 세균 수가 줄어들었지만 뒤이어 크리스퍼 면역 방어 체계를 갖춘 세균이 살아남아 증식하면서 바이러스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시 바이러스의 돌연변이가 출현하면서 바이러스 공격은 거세졌다.


2015년 <네이처>엔 박테리아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서 ‘가위’ 구실을 하는 절단효소(카스)에 달라붙음으로써 그 기능을 차단하는 도구가 특정 바이러스에서 발견됐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됐다. 박테리아의 디엔에이를 잘라 침투 공격을 쉽게 만드는 바이러스의 유전자 가위 시스템도 존재한다는 다른 연구 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


송기원 교수는 “여러 연구들은 미생물과 바이러스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공격과 방어의 시소게임을 보여준다”며 “이런 공격과 방어가 생물계의 진화를 이끄는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근래에 연구자들의 관심을 끄는 큰 물음은 아무래도 ‘미생물의 크리스퍼 시스템이 적응면역 기능만을 할까’라는 것이다. 이미 일부에선 미생물 크리스퍼 시스템이 바이러스나 외부 유전물질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응하는 기능뿐 아니라 미생물 자신의 유전자를 조절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음을 제시하는 연구 결과도 내놓고 있다.


크리스퍼 시스템이 실험실의 간편한 유전자 가위와는 다르게 자연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때로는 미생물이 크리스퍼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증식과 생존에 도움이 되는 유전형질을 바이러스한테서 얻기도 한다는 다양한 기능과 작용이 밝혀지고 있다.


노정혜 교수는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지구 생태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생물계가 지구 생물계에 끼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리스퍼 시스템은 일정한 구실을 할 것”이라며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발견들은 실용적인 응용 연구개발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생명공학은 주목, 기초과학은 찬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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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초과학 연구도 비슷하지만, 미생물의 크리스퍼 연구는 무대 위에서 주목받는 유전자 가위의 응용 연구에 비해 외진 환경에 놓여 있다. 크리스퍼 시스템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모히카는 <네이처> 뉴스에서 자신이 미생물 생명현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매달리고 있지만 연구비 지원의 여건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여건이 훨씬 나쁘다.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한 과학자는 “국내에 미생물 크리스퍼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없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유전자 가위의 생명공학은 크게 주목받는데, 비슷한 주제의 미생물 연구자는 왜 찾을 수 없을까? 우리나라 기초과학 정책의 오랜 풍토가 그 배경으로 지적된다. 송기원 교수는 “우리나라에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묻지만, 사실 과학의 가치를 경제성장 동력에서 찾는 분위기에선 다양한 기초과학이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노정혜 교수는 “적어도 기초과학 분야에선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다양성’이 키워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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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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