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신체 영혼과 육체적 영혼 -공각기동대를 보고

 문화 리뷰 


글쓴이: 김명성

오시이 마모루와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를 통해 보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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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육체’와 ‘회복해야 할 육체’.

육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시선은 무엇보다 먼저 탈신체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디지털 네트워크나 신체변형 기술이 생소했던 1980년대와 90년대와는

사뭇 달라졌음을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과학적 진보와 자아의 정체성 문제를

서사의 형태로 재현한 사이버펑크 장르가

발전하고 변화해온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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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ghostintheshell.jpg » 공각기동대, 1995년 애니메이션 원작과 2017년 실사 리메이크작. 출처/ Wikimedia Commons

 


시이 마모루 감독의 1995년 애니메이션을 실사 영화로 제작한 루퍼트 샌더스 감독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2017)를 향한 관객과 평단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못한 모양이다. 평론가들과 원작을 기억하는 팬들한테는 애니메이션 원작의 철학적 주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한테는 빈약하고 진부한 이야기 구조를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른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이 예상되었을 터인데도 애니메이션의 상징적 캐릭터인 쿠사나기 소령의 역할에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 할 정도로 흥행을 위해 공을 들였지만 결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회의적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이 그러하듯이 세부적인 설정들이 작품의 전체적인 큰 틀 속으로 촘촘하게 짜여 들어가기 때문에, 작은 변화조차도 수많은 디테일이 이루는 구조의 역학 자체를 바꾸는 법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캐스팅이 만들어내는 사소한 설정상의 문제점들은 이야기 중심의 부재를 만들어낸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미라 킬리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새로운 백인의 육체에 깃든 쿠사나기의 영혼이 기억을 회복해 일본인 가족을 찾는다는 설정을 통해 감독은 주인공의 인종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원작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영혼 전송(mind uploading)’ 기술이 야기하는 육체와 정신의 관계성 문제가 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가 아닌 탓에, 이런 가족 찾기 설정은 2017년 작이 집중하고 있는 ‘신체를 통제하는 국가패권주의적 과학기술’이라는 주제의 초점을 흐트러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이 산만함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핵심 개념들, 예를 들어 고스트(ghost)와 의체(artificial body), 인공지능, 전뇌(cyberbrain) 등의 개념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빌려와 사용한다. 이 역시 영화의 주요 관심사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정체성과는 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설정이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상당부분 훼손한다.


하지만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애니메이션 원작과 실사 리메이크 작품이 기계의 영혼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는 일견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스칼렛 요한슨의 역할을 단순한 화이트워싱의 차원이 아니라 원작이 태어난 1990년대와 리메이크가 만들어진 2010년대의 서로 다른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보면 ‘탈신체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시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과학기술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애니메이션 원작이 개봉된 때로부터 20년 동안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왔는지를 두 작품의 비교를 통해 검토한다.


[ 유투브 https://youtu.be/zctqQda_1Lc ]



20세기 후반 이래 이어진

사이버펑크 문화의 흐름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쿠사나기는 인공지능으로부터 탄생한 순수한 비육체적 의식체인 고스트와 융합하여 자신을 디지털화한다. 이에 반해 스칼렛 요한슨의 쿠사나기는 고스트를 거부하고 육체에 기반한 전통적인 인간성을 회복하여 한카 로보틱스(Hanka Robotics)라는 기업의 거대자본에 대항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애니메이션 원작이 과학기술로 인한 육체와 정신의 분리,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불안감을 여러 철학적 질문 속에서 리얼리즘적으로 담아냈다면, 실사 영화는 패권주의적 과학기술에 저항하는 낭만적 영웅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스에프 영화에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사뭇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영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 예술의 리얼리티는 일반적인 의미의 리얼리티와는 차이가 있다. 에스에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애니메이션 원작에서 쿠사나기는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기억을 통해 규정되는 인간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한다. 유기체이건 인공 의체이건, 쿠사나기에게 육체는 구속과 제약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실사 영화 속의 쿠사나기는 고스트와 융합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육체적 개인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애니메이션 원작에서 육체란 곧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릴 외피에 불과하지만, 실사 영화에서는 다시 회복해야 할 정신적 이산(diaspora)의 대상이다. 마음과 영혼, 기억 등의 비육체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하여 개념화하는 원작과는 달리, 리메이크 작은 육체와 비육체, 혹은 영혼과 비영혼의 다소 좁은 이분법 속에서 인간성을 탐구한다.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슬프게도 범작이 되어) 다시 돌아온 이 사이버펑크 걸작은 우리로 하여금 탈신체의 시대에 육체적 인간성으로 회귀할 것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인간으로의 회귀는 지난 20년 간 우리가 겪어온 과학기술 발전의 궤적을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돌이켜볼 기회를 준다.


‘사라질 육체’와 ‘회복해야 할 육체’. 육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시선은 무엇보다 먼저 탈신체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디지털 네트워크나 신체변형 기술이 생소했던 1980년대와 90년대와는 사뭇 달라졌음을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과학적 진보와 자아의 정체성 문제를 서사의 형태로 재현한 사이버펑크 장르가 발전하고 변화해온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사란 한 집단의 기저 감정이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일종의 집단 무의식의 숨겨진 창고이다. 따라서 서사 형태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시대의 정서가 변해온 과정을 읽어낼 수 있는 가장 방법 중 하나이다.)


에스에프의 하위 장르인 사이버펑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거대기업 중심 시장주의 체제로 편입해 있는 세상을 묘사한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로봇, 사이보그 기술이 보편화 되어있고, 사회 체계는 디지털 정보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한다. 가상현실 기술은 실제 현실과 매우 비슷한 형태의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고, 육체의 일부나 전체를 기계적으로 개조하거나 영혼을 다른 육체로 전송하는 등,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분리 가능하다. 하지만 첨단 과학기술이 창출하는 부는 거대기업과 관료조직이 독점하기 때문에 사회계층은 심각하게 양극화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사이버펑크의 세계가 주로 디스토피아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이버펑크 장르가 묘사하는 세상은 1950년대를 즈음한 두가지의 주요한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다. 첫 번째는 냉전시대의 종식에 따른 후기자본주의 형성이다.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후기자본주의는 인종적, 성적 소수자들과 노동계급의 사회 지배계급에 대한 전통적인 투쟁 방식이 시장 환원주의(market reductionism)로 인해 상당부분 와해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념적인 적이 사라진 자본주의는 중립적인 경제체제로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인종, 성, 계급을 따라 형성된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시장원리의 결과로 환원된다.


두 번째는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주의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사이버펑크의 화법이 처음 등장한 1980년대는 비물질적 존재로 인식되던 인간의 마음이 컴퓨터와 유사한 일종의 정보처리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인지과학 이론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인지주의의 전통 속에 정보 기술과 컴퓨터 과학을 주요한 분석 도구로 편입시킨다. 데카르트적인 ‘마음/신체 이분법’에 기반한 관념주의 전통이나, 관념주의의 추상적인 논리실증적 접근에 반대하여 객관적 지표들을 주로 관찰하고자 한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은 고전적 인지주의와는 달리, 인지과학은 유기체의 작동 기제를 비유기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물질과 운동을 중심으로 한 뉴턴 과학관을 넘어서서 정보처리와 계산, 기호적 표상(semiotic representation) 같은 개념적 틀을 이용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 1950년대의 새로운 과학적 지평을 받아들여,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와 유사한 원리를 구현하는 순환적 정보처리 체계로 이해한다.


하지만 인지과학이 컴퓨터의 정보처리 체계를 단순히 해석적 틀로 가져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신 컴퓨터나 인공신체 같은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활동을 보조하는 인공물을 일종의 확장된 인간의 일부로 파악한다.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가 인공두뇌학(cybernetics)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컴퓨터의 지능을 실험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최근의 컴퓨터 철학자들은 계산주의(computation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과학적 경향을 설명하기도 한다. 인지 심리학이나 진화 심리학, 혹은 분석 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의 두뇌가 세상을 인지하는 메커니즘은 디지털 컴퓨터의 알고리즘 구조와 유사하며, 인간의 두뇌가 언어적/수학적 기호의 체계를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컴퓨터가 코드화된 정보의 처리함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유기적 구조를 디지털 기호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분자 생물학자인 릴리 케이(Lily Kay)는 이러한 과학적 인식론을 “자연의 문자화” (textualization of nature)라 칭한다. 이 관점에서 생물학적 분자는 “정보의 저장고”(information storage)이며 유기체는 저장된 정보의 “전송 시스템”(transfer system)이다. 릴리 케이는 1980년대에 시작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이러한 인식적 전환의 가장 거대한 물결이었다고 설명한다.


[ 유투브 https://youtu.be/eWMBQhdcCTo ]



기계-인간 정체성에 몰입한 원작,

과학기술 ‘사용방식’에 집중한 리메이크


1980년대와 90년대에 인기를 얻은 사이버펑크 장르는 인지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패러다임의 변화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거대자본에 대한 공포심과 결합하여 생겨난,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반응이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에서 시작된 이 장르는, 문학에서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Neuromancer, 1984)와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시>(Snow Crash, 1992), 그리고 영화에서는 <트론>(Tron, 1982), <로보캅>(RoboCop, 1987), <론머맨>(The Lawnmower Man, 1992), <너바나>(Nirvana, 1997)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며 전체주의와 시장 논리가 과학기술의 사용을 통제하는 시대에 맞이하는 인류의 정체성 문제를 그려냈다.


원작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이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 있었다. 작품 속의 ‘영혼 전송’ 기술은 인간이 육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혹은 인간이 반드시 필멸의 존재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시대적 질문에 답을 시도한다. 고스트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의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스트의 의식은 육체로부터 분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고스트에게 있어서 육체는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일종의 ‘악세사리’ 같은 존재이다. (포스트휴머니즘 학자인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는 신체란 의식이 우연히 깃든 악세사리 같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육체가 없는데도 고스트는 여전히 자신이 법적 권리를 가진 인격체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육체를 옮겨 다니며 존재를 유지하는 컴퓨터의 자기보존 프로그램은 핵심적 유전자 정보 단위인 디엔에이(DNA)를 통해 전수되는 인류의 자기보존 방식과 다르지 않다. 태아의 DNA에 저장된 정보들은 성체로 성장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또한, 생명체는 주변의 정보를 흡수하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속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확장하는 고스트는 활자와 소리, 영상을 저장하는 기술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함으로써 진화해온 인류와 다를 바가 없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주장하였듯이, 인류는 생물학적인 방식 이외에 문화적 정보저장 단위인 밈(meme)을 통해 지식의 전수함으로써 비생물학적 진화를 거듭해왔다. 고스트와 융합하여 자신을 네트워크 속으로 코드화 한 쿠사나기는 탈신체 과학기술의 발전이 던져준 고민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었던 셈이다.


이에 반해 2010년대는 디지털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 속으로 훨씬 깊게 들어와있다. 사물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증강현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게임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인공지능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대폭 끌어올렸다. 특히 이 사건이 한국사회에 준 영향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이어서, 이후 과학-인류학 관련 교양 서적의 출판이 급증했고 레이 커즈웨일(Ray Kurzwei)이나 닉보스트롬(Nick Bostrom), 슈테판 로렌츠 조르그너(Stefan Lorenz Sorgner), 한스 모라벡(Hans Moravec) 같은 컴퓨터 철학자들의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소개되고 번역되었다.


외부적 신체의 결손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체내에 인공장기를 삽입하는 의학기술도 역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인공지능이나 기계신체가 기술적 연구의 대상에서 일반인의 삶 속으로 확장됨에 따라 탈신체 과학기술은 80년대나 90년대만큼 인류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가 되지 못한다. 대신, 이제 관심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분배되며 소비되는 ‘방식’에 집중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우리의 탈인간적 미래>(Our Posthuman Future, 국내 번역명: 부자의 유전자와 가난한 자의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생명공학의 발달이 정치적 논리의 의해 통제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불균형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술 사회의 유토피아적 전망에 경고를 던졌다.


리사 나카무라(Lisa Nakamur)나 앤드류 로스(Andrew Ross), 콘스턴스 펜리(Constance Penley) 같은 학자들은 인종과 성, 계급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보이는 사이버 공간이 사실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으며, 지배 문화에 의해 생산된 과학기술이 하위 문화나 소외계층의 반정부 투쟁에 사용된다는 점 등 과학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문화적 역학 구조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인터넷 불법 공유 기술을 이용해 서구 국가들의 저작권 시스템을 피한다. 이러한 문화적 해적행위는 오랫동안 확립되고 유지되어온 서구와 제3세계 간의 독점 관계를 해체하는 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표방하는 지역사회의 주체적 문화 네트워크의 확립이라는 목적이 달성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문화적 해적행위가 “지식과 기술의 적법한 사용”이라는 말 속에 숨은 서구 저작권 체계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어느 정도 와해시킨 것은 사실이다.


00ghostintheshell2.jpg » 공각기동대(2017)의 영화포스터.



계급-인종-성 차이를 따라

새로운 사회지형 만드는 21세기 과학기술


정보와 지식의 광범위한 보급이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전망도, 혹은 또 다른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유기체로서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통제된 신체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 다시 말해 이른바 성과 인종으로 구분되는 전통적인 의미의 신체가 다른 방식으로 국가권력 혹은 거대자본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며, 또한 하부문화(subculture)에 의해 전유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21세기의 주요 논제 중 하나라는 점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창작된 사이버펑크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과학기술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은 이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사이버펑크는 인종과 성, 혹은 계급을 나누는 사회적 기제에 관심이 없다. 인간은 단일성을 가진 보편적 존재로 그려진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시기의 사이버펑크를 백인 중산층 남성의 서사문화라고 비판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에 반해 최근 십 여 년간 주목을 받아온 사이버펑크 작품들은 사회적인 의미들을 과학기술에 부여한다.


특히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Avatar, 2009)와 알렉스 리베라의 <슬립 딜러>(Sleep Dealer, 2008), 닐 블롬캠프의 <엘리시움>(Elysium, 2013) 같은 작품들이 사실적 혹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탈신체 과학기술의 불균등한 분배와 이로 인한 사회적 계층의 재생산 문제를 다루었다. <아바타>는 20세기의 주류 미국 서사 문화가 원주민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소비할 때 사용하던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의 주제를 우주 식민지 개척 전쟁 풍경 속으로 옮겨놓았다. 원주민 이미지에 대한 착취는 영화 속에서 여전하지만, 이 영화가 미국 원주민의 인종 문제를 영혼전송 기술과 연관 지어 재현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작품임은 분명하다.


<슬립 딜러>는 미국-멕시코 국경지역의 이주민들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를 다룬다. 영화 속 다국적 기업 사이버텍(Cybertek)은 멕시코 국경지역 노동자들을 전 세계의 주요도시 건설 현장으로 원격 연결 시킨다. 이 원격 노동 기술은 멕시코 노동자 계급의 ‘비신체적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또한 노동자 계급에 의해 미국 정부와 기업의 군국주의적 대외 정책에 저항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엘리시움>은 황폐해진 지구에 남은 노동자 계급과 우주 정거장 엘리시움에 거주하는 극소수 상위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을 묘사한다. 엘리시움이 향유하는 부는 대부분 지구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생산되는데,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부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다. 엘리시움 계급은 자신들의 부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군사적 방법들을 사용하는데, 이중에서 인간의 신경에 연결하는 동력 외골격(powered exoskeleton) 수트와 네트워크 해킹 기술을 지구 노동자 계급이 이용하여 지구와 엘리시움의 사회적 경계를 허문다. 닐 블롬캠프는 다른 작품인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과 <채피>(Chappie, 2015) 같은 작품에서도 정부와 기업의 군국주의, 그리고 지배문화의 기술을 이용한 하위 문화의 저항을 통해 과학기술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꾸준히 그린 바 있다.


2017년 작 <공각기동대> 역시 이런 시대적 관심을 상당부분 보여준다. 1995년 애니메이션 원작과 달리 2017년 영화 속의 고스트는 순수한 인공지능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닌, 한카 로보틱스가 정부와 계약을 맺어 진행하던 실험의 결과물이다. 한카 로보틱스는 무정부주의 일본인 가출 청소년들을 의체화 하여 반테러리즘 부대를 만드는 실험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험대상 중 하나였던 쿠제 히데오가 우연히 디지털 네트워크 속으로 전뇌화 된 것이다. 쿠사나기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라 킬리언이 된 것이다.


한카 로보틱스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종의 대도시 언더클래스(underclass) 집단이다. 언더클래스는 만성적인 실업과 빈곤의 상태에 빠져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고 주로 불법적 조직을 형성하는 대도시 빈민 계층을 뜻하는 개념이다. 20세기 중반 미국 대도시 슬럼화로 인해 생겨난 흑인 빈민층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생겨난 이 개념은 도시지역 계급 형성이 인종적 분리와 깊은 연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영화 속의 고스트는 인공지능 속에서 자생한 의식이 아닌 정부와 기업이 인종적 소수 계층의 신체를 전유하는 과정에서 탈신체화 된, 다시 말해 기술적 진보의 불평등한 배분의 결과로 생겨난 또 다른 형태의 인간의 영혼이다. 성과 인종, 계급에 따른 과학기술의 사회적 지형에 대한 21세기 사이버펑크의 관심을 상당부분 공유하는 셈이다. 또한 영화 속의 쿠사나기는 정부와 기업의 패권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지배계급의 과학기술이 축적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다는 점 역시 “하부계급에 의한 패권적 과학기술의 전유”라는 최근 사이버펑크의 경향을 따른다.


결국 2017년 작 <공각기동대>가 재현하는 과학기술의 역학관계는 노버트 위너와 앨런 튜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컴퓨터와 인간의 관계가 인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를 지나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21세기의 사회적 지형을 계급적, 인종적, 성적 차이를 따라 만들어내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한 철학적 흐름들, 즉 데카르트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로 이어지는 관념주의, 행동주의 철학 전통과 이 전통을 컴퓨터 철학으로 가져온 원작 감독 오시이 마모루의 고민이 2017년 리메이크 영화에서는 왜 상대적으로 부재한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도 일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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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명성/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영문학 박사과정


흑인 에스에프 작가들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으며 미국의 고전-현대 문학 작품들을 사이버네틱스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작업도 한다.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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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다면체 기하학과 나노과학기술 윤복원 미국 조지아공대 연구원(물리학 박사)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현실 세계가 흙. 물, 공기, 불 이렇게 네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원소론을 주창했다. 플라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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