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의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질병의 원인을 인구집단 수준에서 찾는 학문을 역학(epidemiology)이라고 합니다. 이 분야 전문가인 김승섭 교수가 사회•공동체와 관련해 질병 원인을 추적하는 '사회역학'의 역사를 짚으며 흥미로운 연구 사례를 들려줍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병들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11] ‘원인들의 원인’을 추적하는 사회역학의 역사


Spider_web_wikimedia.jpg » 질병의 원인들은 그물망을 이룬다. 무엇이 그런 질병 원인의 그물망을 만든 '거미'인가? 출처/ Wikimedia Commons


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몸과 질병에 대한 지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갔던 감염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 140년 전입니다. 1877년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탄져균(Bacillus anthracis)을 확인한 게 그 시작이었으니까요. 당연히 감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합병증이 발생할 때까지 자각 증상이 없어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고혈압은 70년 전만 하더라도 그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41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혈압이 188/105 mmHg(밀리미터 에이치지는 혈압의 단위)로 나타났을 때, 오늘날의 기준으로 응급 상황일 수도 있는 혈압을 두고서 당시 대통령 주치의는 나이를 고려할 때 정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년 뒤 루즈벨트 대통령은 고혈압으로 인해 뇌혈관이 터져 사망하게 되는데, 그때 혈압은 300/190 mmHg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 주치의조차도 고혈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1]



20세기 의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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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거를 생각할 때, 20세기 의학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항생제가 개발되어 감염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고, 예방 접종을 통해 질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8년 발견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수많은 목숨을 살린 기적의 약이 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천연두 발생을 막기 위해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시작한 예방 접종은 세계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천연두 박멸을 선언했습니다.


혈압이나 암과 같은 질환에 대한 이해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깊어졌고 획기적인 치료법들이 나타났습니다. 혈압이나 혈당을 조절하는 약이 개발되었고, 컴퓨터 단층촬영 영상(CT)이나 자기 공명 영상(MRI), 그리고 내시경 같은 다양한 검사 도구가 생겨나 인간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진단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가슴과 뇌를 열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 가능해졌지요.


그 과정에서 인간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상 지난 100년 만큼 수명이 급증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3세였습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고, 영양 섭취에 부족함이 없었을 그들의 평균수명이 50세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래 그림은 2002년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논문으로, 1840년부터 2000년까지 매년 세계에서 가장 평균수명이 높았던 나라를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빨간 동그라미는 여성의 평균수명을, 파란 동그라미는 남성의 평균수명을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1840년 전세계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높았던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평균수명은 모두 50세가 되지 않습니다.[2]


11_1.jpg »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보였던 나라의 평균수명 변화, 1840-2000년, 빨간 동그라미는 여성, 파란 네모는 남성의 평균수명.[2]


그러나 인간의 평균수명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한국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1960년에 53.7세였던 평균수명이 불과 50여년 뒤인 2014년에는 81.8세로 무려 28.1년이 늘어났습니다.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2017년 지금 우리 인류는 한번도 조상들이 살아본 적 없는 고령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100년 동안 전염병과 만성질환의 진단과 치료에서 모두 거대한 성과를 거둔 현대의학을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핵균이 결핵을, 흡연이 폐암을, 비만이 뇌졸중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현대 의학의 주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현대 의학이 더욱 발전하면, 그래서 질병을 더 정확히 진단하고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다면, 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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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 Medicine)> 저널에 역사적인 논문이 출판됩니다. 논문의 제목은 ‘원인의 그물망과 역학: 거미를 본 사람이 있는가?(Epidemiology and the Web of Causation: Has Anyone Seen the Spider?)’였습니다.[3] 이 독특한 제목의 논문을 출판한 이는 현재 미국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교수로 있는 낸시 크리거(Nancy Krieger)였습니다.


논문에서 낸시 크리거 교수는 우리가 오늘날 질병의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역학 교과서에 등장한 ‘원인의 그물망(web of causation)’은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만성질환인 2형 당뇨병을 생각해보지요. 당뇨병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노화와 가족력은 물론이고, 고혈압과 과체중도 원인이지요. 여러 원인들이 서로 엉켜 함께 당뇨병 발생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역학 연구들은 ‘원인의 그물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습니다.


11_2.jpg » 1994년 출판된 낸시 크리거 교수의 논문


낸시 크리거 교수는 그 지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 ‘원인의 그물망’이 마치 처음부터 주어진 것인 양 생각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은 주어진 고정물이 아니라 역사를 지니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인데도, 질병 원인들은 항상 개인 수준의 고정된 것으로만 가정하는지 묻는 것이지요. 유전적 요소인 가족력조차도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 하며 질병 발생에 영향을 주는데, 질병의 원인을 개별적으로 개인 수준에서만 고려할 때 우리가 놓치는 점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지요. 어떤 이가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결핵에 걸리고, 또 다른 이가 흡연을 해서 폐암이 걸린다고 이야기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망처럼 얽힌 여러 원인들로 인해서 우리가 아프다면, 그 그물망을 만든 거미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 그물망을 엮어낸 역사와 권력과 정치에 대해 물어야 하고, 좀 더 간결하게 ‘질병의 사회적, 정치적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문에서 낸시 크리거 교수는 개인의 생활 습관이나 분자생물학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질병의 원인을 탐구하게 된 역사적인 이유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1953년 왓슨과 크릭이 발견한 디엔에이(DNA) 이중나선 구조를 비롯해 많은 생물학적 연구의 발전입니다. 인간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구조가 밝혀지고 질병의 유전적인 원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인간 몸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이해가 획기적인 수준으로 발전했고, 이런 변화는 현대 의학의 중요한 뼈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냉전(Cold War)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소련 사회주의와 벌인 냉전으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의 건강 연구가 위축되었던 것입니다. 그 시기의 매카시즘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공산주의자 사냥’이 진행되면서, 인간 몸을 병들게 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에 대한 논의를 꺼려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까요.


낸시 크리거의 논문 등을 계기로 1990년대 후반 역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촉발됩니다. ‘역학 전쟁(the epidemiology wars)’으로도 불렸던 그 논쟁 과정에서 질병 원인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 학교, 직장, 지역사회와 같은 공동체의 특성에서 찾는 연구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나이와 가족력과 생활 습관에 대해 묻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어떤 곳인가에 대해도 질문한 것이지요. 개인과 공동체의 특성은 모두 질병 발생에서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건강 연구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연구가 개인적 요소들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었고 그런 연구들은 질병 위험의 개인화 경향을 점점 강화되었던 것이지요.


인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역사와 정치와 구조에 주목하는, 일찍이 심장내과 의사였던 제프리 로즈(Geoffrey Rose)가 이야기했던 ‘질병 원인들의 원인(the causes of the causes)’을 탐구하는 연구가 적극 진행되기 시작합니다.[4] 이런 원인들의 원인을 바꾸는 일은 아픈 환자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지점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기에 적절한 개입이 진행될 경우에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고민을 공유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2000년 이 분야의 첫 교과서를 출판합니다. 책의 제목은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이었습니다. 질병을 발생시키는 ‘원인들의 원인’인 사회적 요인을 탐구한다는 뜻에서 사회역학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원인들의 원인: (1) 작업장 안전과 노동자의 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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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 교과서에는 아래와 같은 표가 있습니다. 저소득층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과 그 환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담배의 효과에 대해 정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저소득층에게 흡연은 싼 가격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러한 스트레스 감소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지만요. 이 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1_3.jpg » 저소득층 흡연의 사회적 맥락 From <Social Epidemiology> (Lisa F. Berkman, Ichiro Kawachi)

 

‘상시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제조업 노동자나 안전장치 없이 매일 추락사의 위협 속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에게 10년 뒤 암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니 지금 담배를 끊으라는 충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일 생명이 위협받는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담배를 피우면 십년 뒤에 폐암이 발생할 수 있으니 지금 금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기 힘들지요. 이런 고민이 가난한 사람들의 흡연을 인정하거나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저소득 계층이 자신이 처한 열악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흡연을 할 경우, 그 조건을 감안하지 않고 진행되는 금연정책은 효과를 보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책은 소득에 따른 흡연율 차이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금연에 실패한 저소득층은 오히려 ‘패배자’라는 낙인을 뒤집어 쓰게 되기도 하구요.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글로리안 소렌슨(Glorian Sorensen) 교수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금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프로그램의 효과를 역학적 방법을 이용해 보여주는 연구를 진행해왔습니다.[5]


연구팀은 2002년 출판된 논문에서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의 제조업 사업장들을 대상으로 금연 프로그램과 관련된 무작위 대조 실험연구(Randomized Controlled Trial)을 진행하여 그러한 관점이 지닌 힘을 검토하고자 했습니다.[6] 연구팀은 제조업 사업체 15곳의 노동자 9019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안전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더 금연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러니 금연 프로그램만 진행한 사업장과 산업안전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 사업장에서 금연율은 어떻게 다를까?’


좋은 질문입니다. 노동자는 흡연과 화학물질 노출과 같은 작업장 내 유해인자가 모두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작업장에서 위험한 물질에 계속 노출되며 일하는 이들은 굳이 금연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 있으니까요. 더 나아가 계속 위험에 노출되는 근무환경으로 인해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결여될 수 있어, 금연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연구팀의 가설은 흡연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습니다. 금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6개월 뒤 흡연 상태를 측정했을 때, 산업안전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특히 시간제 근무 노동자에서 금연율이 금연 프로그램만 시행한 사업장의 노동자들보다 2배 가까이 금연율이 높게 나타납니다. 안전한 곳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일수록 금연 프로그램의 효과를 더 컸던 것입니다.


이 연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금연에 실패할 경우, 그 원인은 개인의 금연 의지 부족인가요 아니면 금연 의지를 좌절시키는 위험한 작업환경일까요. 물론 둘 다 중요한 원인이고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자는 개인의 역할이고 후자는 작업장과 회사와 국가의 책임이지요. 한국사회는 전자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봅니다.



원인들의 원인: (2) 남아공 시골마을의 에이즈 사망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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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남성 동성애자들에서 첫 사례가 발견되어 한때 동성애 질환(Gay-Related Immune Deficiency)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에이즈(HIV/AIDS)입니다. HIV/AIDS는 초창기에 높은 치사율로 인해 공포의 질병이었지만, 1995년 다양한 약제를 함께 사용하는 칵테일 요법이 도입되면서 그 치료가 획기적으로 개선됩니다. 2013년 출판된 논문에 따르면 미국이나 캐나다에 거주하는 20살 젊은이가 HIV에 감염되었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평균 51.4년을 더 산다고 발표했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HIV/AIDS는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이 된 것이지요.[7]


그러나 고소득 국가에서는 관리가능한 만성질환으로 취급받는 HIV/AIDS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치명적인 주요한 사망 원인입니다. 치료약은 존재하지만, 비용과 접근성의 장벽을 넘지 못한 감염인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이지요. 2012년 한해 동안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관련 질환으로(AIDS-related illnesses) 사망한 이들의 숫자는 100만 명이 넘습니다.


아프리카공화국의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rural KwaZulu-Natal)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절반 크기의 땅에 10만여 명이 사는 이 지역은 남아공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동시에 HIV 감염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성인의 29%가 HIV 양성 반응을 보이는 감염인이었습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고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에서 HIV 감염은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 사망 원인의 절반은 HIV 감염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요.


2000년을 기준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의 성인기대수명(Adult life expectancy)은 61.4년이었습니다. 성인기대수명은 영유아기에 사망하지 않고 15세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평균 몇 살까지 사는지를 예측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콰줄루나탈 지역의 성인기대수명은 국가 평균보다 9년이 낮은 52.3년이었습니다.


국 보스턴대학의 제이콥 보어(Jacob Borr) 교수는 남아공의 콰줄루나탈대학의 연구팀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합니다. 이 연구는 2013년 <사이언스>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시골 지역에 나타난 성인기대수명의 증가: HIV 치료 확대 평가(Increases in Adult Life Expectancy in Rural South Africa: Valuing the Scale-Up of HIV Treatment)’라는 제목으로 발표됩니다.[8]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의 HIV에 감염된 빈곤한 지역 주민들은 비싼 치료약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대부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보건부는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국제 원조 비용을 이용해서 HIV 양성 감염인 중에서 치료가 필요한 모든 이에게 공공 의료보험을 통해 칵테일 요법 치료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지역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냅니다. 2011년을 7월 1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역의 15세 이상 성인 중 12.6%가 HIV 치료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팀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2004년 국가가 공공자금으로 시작한 HIV 치료약 제공은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 주민의 평균수명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을까?” 연구팀은 2000년부터 2011년까지 10만 1286명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해서, 그 지역의 15세를 기준으로 한 성인 기대수명을 매년 계산해냅니다. 그 결과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2000년에 53년에서 2003년에 49년로 감소했던 성인 기대수명은 2004년에 HIV 치료 확대와 더불어 증가하기 시작해 2011년에는 61세로 증가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HIV 치료약을 공공자금으로 제공하기 시작한 지 7년 만에 콰줄루나탈 시골 주민의 15세 기준 기대수명이 12년이나 증가했던 것입니다.


11_4.jpg »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의 성인기대수명 변화 (2000-2011)[8]


이 결과가 보여주는 함의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그동안 HIV/AIDS 때문에 죽었던 걸까요, 아니면 HIV 치료약을 공공자금으로 제공하지 못했던 공동체로 인해 죽었던 걸까요. 이 논문은 후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개개인이 감염되었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치료약을 제공받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라는 점을 계량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인들의 원인: (3) 옛소련 지역 국가들의 경제위기와 결핵 사망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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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40년 가까이 진행된 냉전이,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계획경제로 국가를 꾸리던 사회주의 국가의 중심이었던 소련이 해체됩니다. 과거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은 속속 독립을 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동유럽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극심한 경제위기를 경험합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자본주의 사회에, 그것도 많은 경우에 강제로 외부에서 이식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지요.


과정에서 동유럽 국가들의 평균수명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의 평균수명이 꾸준히 증가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을 주장했던 경제학자들은 동유럽 지역 남성들의 과도한 음주, 살인과 같은 폭력의 증가를 그 이유로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보건학자가 있었습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데이비드 스터클러(David Stuckler) 교수는 과거 소련에 묶여 있던 여러 나라들의 건강지표를 하나하나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경제위기, 군부나 인종간 갈등, 정치 변화, 전쟁 등을 고려해서 통계적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검토한 연구 가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제위기 시기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해야 했던 나라와 돈을 다른 곳에서 빌렸던 나라의 결핵 사망률 변화는 어떻게 다른가?’


11_5.jpg »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집행 여부에 따른 결핵 사망률 변화 (1992-2002) [9]석 결과는 놀랍습니다. 위에서 말한 여러 조건들을 감안하더라도,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라에서는 결핵 발생율과 사망율이 각각 14%, 16%가량 유의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올 경우에 결핵 사망율이 평균적으로 31%가량 줄어드는 것입니다.[9] 그러나 같은 시기에 동유럽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IMF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렸던 슬로베니아에서는 같은 기간에 오히려 결핵 사망율이 유의하게 감소했습니다. 논문에 실린 아래 그림은 경제 위기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집행되었느냐에 따라 나라별 결핵 사망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결과는 경제위기를 겪을 때 국가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보다 구체적으로 효율이라는 이름 하에 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행을 요구하는 IMF의 권고사항을 따랐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결핵 사망율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데이비드 스터클러 교수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공공의료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 투자하는 비용이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물론 IMF가 돈을 빌려간 나라에 그러한 영역에 투자하는 비용을 줄이라고 직접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의 관료들은 모두 공공의료 시스템, 교육 시스템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지 않고서는 IMF가 요구하는 경제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지요.


이후 출판한 다른 논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이유로, 의료 인력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노동시장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사회안전망이 축소되고, 빈곤층이 늘어나고, 질병 감시체계에 대한 사회적 투자가 줄어드는 것 등이 언급됩니다. 그러면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구조조정을 핑계삼아 자신의 재산을 불렸던 옛소련의 정치 관료들을 언급하면서요.[10]



글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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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리가 인간을 개개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런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100년간 거대한 혁신을 이뤄낸 현대 의학으로도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을,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금연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지역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여성도, 옛소련 지역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던 나라에서 결핵에 걸린 어린이도 개개인만을 바라본다면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들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작업장을 방치했던 일터가 금연율을 낮췄고, HIV 치료약 공급을 전적으로 민간보험에 맡겨둔 지역사회가 에이즈 사망을 높였고, 경제위기 속에서 공공보건의료 영역 투자를 줄이기로 결정한 국가의 결정이 결핵 사망률을 증가시켰습니다.


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인 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주]


[1] Bruenn, H.G., Clinical notes on the illness and death of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Ann Intern Med, 1970. 72(4): p. 579-91.

[2] Oeppen, J. and J.W. Vaupel, Demography. Broken limits to life expectancy. Science, 2002. 296(5570): p. 1029-31.

[3] Krieger, N., Epidemiology and the web of causation: has anyone seen the spider? Soc Sci Med, 1994. 39(7): p. 887-903.

[4] Marmot, M.,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inequalities. Lancet, 2005. 365(9464): p. 1099-104.

[5] Sorensen, G., et al., Implications of the results of community intervention trials. Annu Rev Public Health, 1998. 19: p. 379-416.

[6] Sorensen, G., et al., A comprehensive worksite cancer prevention intervention: behavior change results from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United States). J Public Health Policy, 2003. 24(1): p. 5-25.

[7] Samji, H., et al., Closing the Gap: Increases in Life Expectancy among Treated HIV-Positive Individual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PLoS ONE, 2013. 8(12): p. e81355.

[8] Bor, J., et al., Increases in adult life expectancy in rural South Africa: valuing the scale-up of HIV treatment. Science, 2013. 339(6122): p. 961-5.

[9] Stuckler, D., L.P. King, and S. Basu, International Monetary Fund programs and tuberculosis outcomes in post-communist countries. PLoS Med, 2008. 5(7): p. e143.

[10] Stuckler, D., et al., An evaluation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s claims about public health. Int J Health Serv, 2010. 40(2): p. 327-32.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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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경험과 고용불안 등의 사회적 요인이 비정규 노동자, 이민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 지에 대해 연구한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메일 : ssk3@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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