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눈물 짓는 의사’: 좀 더 인간적인 의학을 그리며

김준혁의 이야기: ‘경계에 선 연구자의 유학생활’

뒤늦게 의료인문학이라는 낯선 분야에 뛰어든 김준혁 님이 유학생활 동안에 겪는 ‘틈바구니에서 연구하기’, ‘경계선 위에서 생각하기’의 삶을 이야기한다.


[2] 의사의 덕목, 공감과 감정억제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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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 들어와서 들은 안타까운 표현 하나가 있다. ‘펜 페이스(Penn Face)’라는 표현인데, 이 대학 사람들은 어떤 압박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완벽한 삶과 완벽한 생활을 추구해야 함을 뜻한다. 이런 ‘아이비 리그[1]의 자존심’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엄혹한 성과 위주의 삶을 요구하는데, 이런 압박이 심각해질 때엔 이로 인해 비극적인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 3년 동안 열 명의 학생이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한다.[2]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겪었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운이 좋아서 좋은 학교, 좋은 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그것이 말그대로 뼈를 깎는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 생활도 그랬다.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책을 읽고 공부하는 요즈음과 비교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그때에는 어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만큼만 공부하고 다른 분야에 관심을 쏟았다. 그런 와중에 심심찮게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들이 있었다. 선배, 동료, 후배의 자살 시도. 보통 그런 시도가 실패해 천만다행이었지만, 결국에 비극으로 이어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슬픔에 젖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내 경우에 치과대학의 학업량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함께 짐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어서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고백한 것처럼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학업에 임한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컨대, 저마다 크나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토해낸 감정적인 위로의 요구가 응답받지 못하고 또한 존중 받지 못했던 것이 그런 비극의 배경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한다.[3] 늘 억눌러야 했던, 부정해야 했던 감정들.


의료인의 감정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1
한 남자가 병원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그는 곧 고된 신경외과 수련을 마칠 것이다. 미국 신경외과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연구상을 받기도 한 그에게는 이미 교수 자리의 제안도 여럿 들어와 있다. 하지만 정점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암 선고였다. 그는 투병 생활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쓰여진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작년 하반기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4]


그중에는, 함께 의사가 된 아내 루시와 학창 시절에 공부하던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함께 심전도 파형[5]을 공부하던 어느 날, 아내는 “치명적인 부정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갑작스럽게 뭉클해진 루시는 울기 시작했다.”[6] 위중한 심장질환을 나타내는 그 파형은, 이미 예전에 사망했을 어떤 환자에게서 찍은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파형이라고 해도 사람이 임의로 그린 것과, 환자에게서 얻은 파형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니까. 그 파형을 보면서 의사는 아마도 앞에 놓인 두려운 시간들을 생각했을 것이고, 의사의 설명을 들은 환자는 곧 닥쳐올 죽음을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닥친 불행을 생각하면서 루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내를 보며, 칼라니티는 그래프 너머에 있는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 유투브 https://youtu.be/aetY_zS7Q6M ]


<숨결이 바람 될 때>의 홍보 영상에는 칼라니티의 마지막 순간들이 담겨 있다. 곧 죽어갈 자신의 몸과 막 태어난 딸의 모습이 교차하는 장면은 뭉클하게 다가온다.


#2

2년 전, 한 사진이 웹사이트 ‘레딧(Reddit)’[7]에 올라왔다. 신원이 뚜렷하지 않지만,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그가 의사임을 짐작게 한다. 그는 왠지 벽을 잡고 웅크리고 있다. 사진을 찍은 것은 응급구조사로, “병원에 실려 온 19세 환자를 살리지 못한 응급실 의사가 벽을 잡고 통곡하고 있다”는 설명을 달았다.[8] 글에 적힌 대로라면 그는 환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슬픔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 유투브 https://youtu.be/7AI4POBmDkA ]


슬퍼하는 응급실 의사를 담은 사진은 당시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하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그것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의 가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의사라는 전문직이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치면 안 된다는, 대학과 수련 과정에서 몸속 깊이 체득하는 격언이다. 한쪽에서는 지난해 의학교육학과에서 일하며 의사의 공감 능력에 대해 토론하던 때의 목소리들이 귓전에 윙윙거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감정 조절에 대한 전문가적 의무와 감정적 소진에 대한 경계가 반짝 경고음을 울린다. 어느 쪽이 맞는가?


“초연하라”

anatomy.jpg » 근대 의학이 시작하던 시기, 해부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베살리우스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해부도를 그렸다. 단순히 미적 장치를 넘어서, 그것은 어떤 알레고리로 읽힌다. 이 그림 또한 성적 방종에 대한 경고로도, 성큼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위협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출처/ Andreas Vesalius, De humani corporis fabrica (1543), p. 190. 치과대학 학생 시절은 거부감을 극복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골학[9]을 공부하면서 처음 가까이 보게 되는 인골은 그래도 초중고에서도 볼 기회가 있으니 좀 낫다. 수업 시간에 총천연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절개된 조직과 피는 점심 식사를 거르게 만들었으며, 본과 1학년 때 시작한 해부학 실습 시간의 카데바[10]와 실습실 가득한 포르말린[11] 향은 나도 주변 사람들도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먼저 참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임상 실습으로 환자를 먼발치에서 직접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치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수술방에서 나와 같은 신체가 다뤄지는 가혹한 방식들을 보는 동안에 감정은 계속 뒤로 물리쳐야 할 대상이었다. 또, 인턴에게 주어지는 격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차원은 철저히 다스려야 할 것,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했다. 아침에 뵙고 컴퓨터단층촬영(CT)에 관해 설명 동의를 받은 환자분이 저녁에 갑작스럽게 응급 상태에 빠져, 결국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공포와 서늘함은 잊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렇게 의료인은 감정적으로 거리 두기, 초연함을 자신의 것으로 습득해야 할 것을 강요 받는다. 그것은 화급을 다투는 순간에 감정에 좌우되어 신속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또한 여러 질환의 무게에 눌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절연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기계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차가운 의사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환자로서 나는, 나의 상황과 상태에 공감해줄 수 있는 의사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공감, 만능 열쇠

‘감정이 없는 차가운 의사’라는 이미지는 현대 의학에 제기된 가장 큰 비판 중 하나였다. 시퍼런 메스가 인간을 재단하는, 생물의과학의 생기 없음에 대한 반발. 그것이 1980, 90년대의 의료사회학[12]을 추동시켰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작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을 관통하고 있는, 배제[13]와 시선[14]에 대한 문제의식의 바탕이었다. 또,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가 주장한 반의학(反醫學)[15]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비판자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강조하는 환자의 이익에 따른 판단[16]이 아닌, 의사의 상업적 편의와 의과학의 환원적 결정이 우선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답하기 위해 의학교육은 ‘공감’을 꺼내들었다. 환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의사는 차가운 의료의 문제에 대해 따뜻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학생과 의료인에게 공감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로 확장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이다. 공감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한 여러 답이 제시됐다.[17] 의학교육의 현장에서 공감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공감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설문지를 써서 학생들을 평가하고, 학교와 임상 현장에서 이를 신장시킬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18] 물론, 이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공감을 ‘배워야’ 한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다. 또한, 기존의 방식은 공감의 인지적 차원,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을 미루어 따져보는 것에 대해서만 다루었을 뿐 정작 중요한 공감의 정서적 차원인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존재한다.[19] 하지만 의학교육학, 의료인문학 전반에서 공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공감하는 의사, 따뜻한 의사. 하지만 궁금하다. 공감할 수 있으면 될까?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이 질문을 던지면, ‘공감만 잘 하는 의사’와 ‘능력 있는 의사’를 구분하여 대립각을 세워 토론하곤 한다. 하지만 이건 사실 적절한 대립쌍은 아니다. 공감을 잘 하면서도 능력도 있는 의사,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공감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감정, 정서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인간의 한 단면인가 하는 것이다. 감정은 한없이 메말라 있는 어떤 사람이 엄청난 공감 능력을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공감이 한자의 뜻처럼 같이(共) 느끼는(感) 것이라면 글쎄, 이것은 소위 말하는 형용 모순이 아닐까? 감정을 억누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느낌을 함께 느낄 수 있을까?


감과 배를 동시에 내놓기

아마 이게 친구들이, 그리고 선배들이 공감에 대해 들었을 때 느낀 기분이 아닐까 싶다. 공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던 나에게 산부인과 교수로 일하는 한 선배가 제기한 문제도 동일했다. 주변의 필요를 잘 아는 예민한 그는 환자의 감정적 부분을 늘 직면하게 되지만, 대학병원에서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감정 이입하다 보면 진료를 계속해 나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의사의 감정 표현이 환자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으니까. 감정은 메스와 항생제를 들고 질병, 병균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영웅으로서의 의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적 냉철함’이라는 표현은, 감정 없는 차가운 의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다지 학업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예전의 내가 위화감을 느꼈던 것도 같은 지점이었으리라. 감정은 죽여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환자의 감정적인 필요를 이해하고 그에 대해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런 이중의 요구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어바인대학교에서 의료인문학, 예술, 가정의학 프로그램을 이끄는 요한나 샤피로는 “의과대학생, 레지던트가 감정에 정직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전혀 기울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사 자신의 “혼란, 위험, 어려움”에서 대해서도 “감정적 초연함과 거리 두기”의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이어진다.[20] 그렇게 자신의 감정적 반응에 익숙해지기는커녕, 학생들은 감정을 부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또, 의사이자 작가인 대니얼 오프리는 저서 <의사들이 느끼는 것: 감정이 의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21]에서 의료인이 직무에 종사하는 내내 공포, 부끄러움,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과, 감정적 압도가 종종 소진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감정을 철저히 무시할 것을 요구 당한 의료인이 공감이라는 부분에서만은 뛰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인 듯하다. 의과대학 교육이 계속되면 학생들의 공감 능력은 점차 쇠퇴한다는 사실은 이것을 뒷받침한다.[22] 물론 학생들에게 공감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선생은 없으며, 따라서 의학교육이 공감을 축소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일면만 보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끊임없는 엄숙함, “초연하라”는 명령이 등뒤에서 계속 울리는 한,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느낌을 겪는지도 모른 채, 의료인의 성장 과정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의료인들이 환자의 기분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우는 의사

인공지능 왓슨이 암 진단을 돕는 세상, 기술의 발달은 의료인을 뒤흔들고 있다.[23] 아마 진단과 치료의 역량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때 생길 수 있는 직업 안정성의 위기에 대한 불안 때문인 것 같다. ‘공감’이 다시 주목 받는 이유도 그 탓인지도 모른다. 기계는 공감할 수 없으니, 환자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의사가 환자에게 더 나을 것이다. 자, 그러니 학생들에게 공감을 가르치자.[24]


위 주장을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맞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감정적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도 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도 모르는 채, 그에 대해 늘 부정적인 생각만 배워온 학생에게 어떻게 공감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인공지능이 과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전문직의 지적 업무 처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되는 이때가, 의사가 어떻게 감정에 솔직해질 것인가, 환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의과대학의 자살, 소진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좀더 인간적인 의학을 만드는 한 걸음이 될 것은 당연하다.


앞서 떠올렸던 두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 심전도를 보면서 눈물짓는 의과대학생, 살리지 못한 생명을 생각하며 오열하는 응급외과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철혈의 의사가 아니라, 자신의, 타인의 아픔에 대해 울 수 있는 의사가 아닐까.


[주]


[1] 미국 북동부에 있는 8개 사립 대학의 스포츠팀으로 이루어진 운동 경기 연맹이다.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닌 8개 대학에 대한 통칭이자, 명문의 상징이기도 하다.

[2] Laura B. University of Pennsylvania student is 10th on ‘over-stressed campus’ to commit suicide in three years after jumping in front of train. New York Daily News, Published April 14, 2016. http://nydailynews.com. Accessed April 26, 2017.

[3] 자살율, 자살 사고, 약물, 알코올 남용이 의학계에 높게 나타난다는 여러 보고가 있다(Dyrbye LN, Thomas MR, Massie FS, et al; Burnout and Suicidal Ideation among U.S. Medical Students. Ann Intern Med. 2008;149:334-41, Fatal Results of Doctors’ Burnout Revealed. British Medical Association. http://bma.org.uk/news-views-analysis/news/2012/october/fatal-results-of-doctors-burnout-revealednewsitem. Last Updated June 30, 2016. Accessed April 26, 2017. Cited by: Bleakley A. Medical Humanities and Medical Education. Oxon: Routledge; 2015). 국내에서도 의대생 41%가 우울증, 자살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보고가 있으며(조고은. 의대생 41% 우울증, 자살 경험. 뉴시스, 2006년 10월 23일. http://www.newsis.com.), 2007년 의과대학생 정신건강 실태조사는 최근 1년 동안 우울증을 겪었다고 대답한 학생의 비율이 6.4%라고 보고한 바 있다(한국의과대학, 의학전문대학원장협회. 전국 의과대학생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 http://kamc.kr/data/bbs/b74054_전국_의과대학생_정신건강_실태조사_최종(2007).pdf. 2007년 5월).

[4] ‘뉴욕타임즈 12주 연속 1위, 아마존 종합 1위, 전 세계 38개국 판권 수출’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국내에서도 2016년 하반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중앙일보, 교보문고 선정 ‘2016 올해의 좋은 책 10’에 포함되는 등 널리 읽혔다.

[5] ECG(Electrocardiogram)은 심장의 전기적 신호(심전도)를 파형으로 기록하여, 심장 운동의 이상을 발견해내는 검사 장비를 말한다.

[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이종인 역. 서울: 흐름출판; 2016.

[7] Reddit(www.reddit.com)은 소셜 뉴스 웹사이트로, 글, 정보, 뉴스 등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데 초점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8] 박종익. 응급실(ER) 의사 뒷모습, 美네티즌 감동시키다. 나우뉴스, 2015년 3월 21일. http://nownews.seoul.co.kr. Accessed April 26, 2017.

[9] 골학(Osteology)은 골학자(osteologist)의 뼈에 대한 연구를 말하며, 해부학, 인류학, 고고학의 분과학문이기도 하다(https://ko.wikipedia.org/wiki/골학). 의과대학에서는 본과 1학년 진입 전, 뼈의 명칭, 위치, 특징적인 구조물들을 외우는 것을 가리킨다.

[10] 카데바(cadaver)는 해부 실습을 위해 기증된 시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습 전후로 기증자분들의 뜻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며, 이 행사는 의과대학생들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11] 카데바는 장기 보관을 위해 포르말린으로 고정한다. 해부 실습 과정에서 실습용 테이블에 카데바와 그 고정액이 놓이면서 실습실은 포르말린 향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냄새가 옷과 몸에 다 배기 때문에, 의과대학에는 해부 실습이 진행되는 1학기 동안 본과 1학년 생은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이 장난스레 동아리방과 매점 앞에 붙기도 한다.

[12] 건강과 질환의 사회적 원인과 결과를 다루는 학문으로, 미국 기능주의 학파 사회학자 탤콧 파슨스의 ‘병자 역할(sick role)’이 그 이론적 방향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을 넘어, 신체와 정치의 문제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푸코의 영향이 크다. 네틀턴,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1장 ‘서론: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 변화하는 영역’에 그 개괄이, 5장 ‘몸의 사회학’에 몸이 의료사회학의 중심 담론이 되면서 신체성과 생명권력에 관한 담론이 확산되는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13]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기존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자로 여겨지던 광인들이 어떻게 구호소로 ‘감금’되어갔는지를 그의 특징인 막대한 인용을 바탕으로 정치하게 분석해 나간 저작이다. 그는 스승인 캉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나가 포함과 배제의 문제로 광인을 분석하며, 이에 따라 광인은 정상인의 사회를 성립시키기 위해 의학 권력이 배제한 존재라는 주장을 펼친다.

[14] 푸코의 다음 저작인 <임상의학의 탄생>은 17세기에 확립된 임상의학 또는 침상 의학(bedside medicine)이 인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분석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분석을 밀고 나가 의학적 시선이 어떻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체를 뚫고 들어가 투명한 신체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15] 일리치는 오진, 잘못된 치료로 병이 악화되는 의원성(iagrogenic) 질병 등을 예로 들면서 병의원과 의사들이 오히려 병을 만들고 사람들의 건강을 더 해친다고 주장했다(https://ko.wikipedia.org/wiki/반의학). 그는 의학이 자신을 특권화하여, 원래 가정에 맡겨져 있던 치료 기능을 독점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이후 의료화(medicalization)라고 부르게 된 사회의 의료적 종속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16]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간에 있는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내가 환자의 이익이라 간주하는 섭생의 법칙을 지킬 것이며”라는 문장은 의료윤리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인 선행의 원칙(Principle of Benevolence)의 기반이기도 하다. 자세한 설명은 반덕진 저, <히포크라테스 선서>, 사이언스북스; 2006에서 살필 수 있다.

[17] Schwartz AW, Abramson JS, Wojnowich I, et al; Evaluating the Impact of the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Mt Sinai J Med. 2009;76(4):372-80, Rosenthal S et al; Humanism at Heart: Preserving Empathy in Third-Year Medical Students. Acad Med. 2011;86(3):350-58.

[18] Hojat M, Gonnella JS, Nasca TJ, et al; Physician Empathy: Definition, Components, Measurement, and Relationship to Gender and Specialty. Am J Psychiatry. 2002;159(9):1563-9.

[19] 블레이클리는 공감에 대한 여러 논의를 살피면서, 앞선 논의들이 공감을 인지적 이해의 측면에서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Bleakley A. Medical Humanities and Medical Education. Oxon: Routledge; 2015). 심리학에서는 공감을 다면적이며, 정서적, 인지적, 행동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Feighny KM, Arnold L, Monaco M, et al; In Pursuit of Empathy and its Relation to Physician Communication Skills: Multidimensional Empathy Training For Medical Students. Ann Behav Sci Med Educ. 1998;5:13-21).

[20] Shapiro J. The Feeling Physician: Education the Emotions in Medical Training. European Journal for Person Centered Healthcare, 2013;1(2):310-16.

[21] Ofri D. What Doctors Feel: How Emotions Affect the Practice of Medicine. Boston: Beacon Press; 2013. Cited by: Charon R, DasGupta S, Hermann N, et al; The Principle and Practice of Narrative Medicine.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22] 여러 경험적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며, ‘공감의 쇠퇴(empathy decline)’라고 부른다(Neumann M, Scheffer C, Tauschel D, et al; Physician Empathy: Definition, Outcome-Relevance and its Measurement in Patient Care and Medical Education, GMS Z Med Ausbild. 2012;29(1):Doc11).

[23] 한국에서도 이미 길병원, 부산대병원이 왓슨을 통해 암 치료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건양대병원 등 3개 병원이 추가로 도입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강윤 교수와 필자의 논문(이강윤, 김준혁. 인공지능 왓슨 기술과 보건의료의 적용. 의학교육논단. 2016;18(2):51-57.)과 여러 기사(비판적 입장으로는 김상기,  ‘인공지능 왓슨’ 도입 대학병원, 한달에 1곳 꼴로 늘어… 이게 정상인가? 라포르시안, 2017년 3월 27일. http://www.rapportian.com, 긍정적 입장으로는 송수연,  왓슨 도입이 시작… 미래의료 패러다임 변할 것. 청년의사, 2017년 3월 30일. http://www.docdocdoc.co.kr)에서 살필 수 있다.

[24] 이영미. 의학교육과 인공지능. 대한의학회 뉴스레터. http://kams.or.kr/webzine/16vol74/index.php?main_num=1. Published July 2016, Accessed April 26, 2017.


김준혁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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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소아치과 전문의가 된 것이 오히려 고민의 시작이 되어 의료인문학을 공부했다. 의학교육의 다음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의료윤리를 통해 길을 찾기 위해 유학길을 떠났다.
이메일 :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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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스케치양우석 | 2016. 06. 30

    양우석의 이야기: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생으로 살아가기’한국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을 대학원생 양우석 님이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합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걷고 있는, 걷게 될 사람들에게 조그만 공감과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

  • 매력적이지만 순탄치 않은 이 길을 걷는 이유매력적이지만 순탄치 않은 이 길을 걷는 이유

    청춘 스케치양우석 | 2016. 05. 10

    양우석의 이야기: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생으로 살아가기’한국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을 대학원생 양우석 님이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합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걷고 있는, 걷게 될 사람들에게 조그만 공감과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

  • ‘훌륭한 타자라고 어떻게 늘 홈런을 치겠어요?’‘훌륭한 타자라고 어떻게 늘 홈런을 치겠어요?’

    청춘 스케치양우석 | 2016. 04. 14

    양우석의 이야기: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생으로 살아가기’한국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을 대학원생 양우석 님이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합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걷고 있는, 걷게 될 사람들에게 조그만 공감과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

  • “잘 하고 있으니까 힘든 거야”“잘 하고 있으니까 힘든 거야”

    청춘 스케치박수현 | 2016. 04. 12

    박수현의 이야기: 우리 자랑스런 어깨 ‘토닥토닥’해외에서 유학중인 박사과정 박수현 님이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겪는 희노애락을 나누며, 또한 해외 유학생한테 필요할 법한 유익한 정보와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1] 연재를 시작하며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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