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책 틀짜기에 현장의 땀과 한숨 담아야

※ 이 글은 한겨레 3월29일치 ‘사이언스온’ 지면에 실렸습니다. 온라인 사이언스온에도 옮겨 싣습니다. 지면 편집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정책 틀짜기에

현장의 땀과 한숨 담아야00policy3.jpg » 연구현장 사람들의 평범한 목소리는 과학기술정책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을까? 그림은 젊은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자 <어떤 대화>에 실린 삽화들, 사진은 ‘과학 하는 삶’ 영상공모전(2014)에 나온 사진들. 그림 노수리, 사진 카이스트 전치형 교수 연구실 제공







대선 앞두고 정·관계 관계자 초청 

과학기술단체 ‘청사진’ 토론회 한창

 

대학원생 운영하는 팟캐스트엔

젊은 연구자들 희로애락 봇물

 

“거창한 구호…이번엔 4차 산업혁명?

매번 비슷, 이런 식 이젠 그만”

 
“돈 되는 연구만 다그치는 연구 환경”

후학들에게 농반진반으로 말려

 

‘타운미팅’ 형식의 수평적 토론에선

1인1표 투표로 ‘질문 10가지’ 선정

 

“경제 성장 도구로만 봐서는 곤란

과학기술자 개인의 삶도 중요”

 

“과학기술 공약 총론만, 각론은 뒷전

상향식 정책 수립·집행 필요”





“연구자들은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연구비는 어떻게 받고 랩(실험실) 생활은 또 어떻고…. 멋진 과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현실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연구자, 연구생의 삶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거죠.”


2014년부터 꼬박 3년 동안 과학정책과 연구현장 이야기를 들려주는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과정남, http://www.podbbang.com/ch/7549 )의 운영자인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대학원생 박대인(29)씨와 정한별(28)씨는 실제 과학 연구 현장의 삶과 우리 사회가 품는 과학자 이미지 사이엔 큰 간극이 있다는 걸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팟캐스트엔 지금까지 42명의 평범한 연구자·연구생이 출현해 저마다 다른 삶의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들려주었다. 연구현장의 진솔한 목소리들이다.


올해 대통령 선거가 일찍 치러지면서 새 정부가 추진할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의 청사진을 짜보자는 여러 토론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의 기초를 이루는 연구현장 사람들의 목소리는 무성한 정책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만화 <미생>처럼 고단한 그들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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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남’ 두 대학원생은 “많은 이들이 청취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이야기, 목소리를 기록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껏 팟캐스트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의 현실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회도 마땅치가 않아요. 자기 전공과 연구 생활을 가족에게, 지도교수에게 하기도 어렵고 친구에게도 하기 어려워요.” “한국의 20·30대가 다들 어렵겠지만 마찬가지로 이공계 연구자들의 논문, 졸업, 결혼, 직장 걱정도 큽니다. 하지만 그런 삶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선 정말 잘 들리지 않아요.” 과정남은 자기 목소리를 전할 곳이 있는 교수나 책임연구자급은 일부러 인터뷰에 초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고 한다.


팟캐스트 파일에 담겨 들려오는 목소리의 기록엔 젊은 연구자들의 희로애락이 담겼다. 어떤 수학자는 수학의 매력에 빠져 지금껏 달려왔지만 이제 ‘돈 되는 연구’를 다그치는 연구 환경에서 “(나는) 루비콘강을 건넜”지만 후학들에겐 수학자의 길에 쉽게 들어올 생각을 말라며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말한다. 산을 누비며 박새의 번식행동을 연구하는 생태학 연구자나 우주 규모의 중력이론을 탐구하는 이론물리 연구자는 자기 연구 주제를 신나게 얘기하다가도 기초연구가 한국 연구 환경에서 어떻게 생존해나갈지를 생각하며 주저함을 보인다. 어떤 항공우주공학자, 어떤 원자력안전 엔지니어, 어떤 신경과학자, 어떤 제약회사 연구원, 어떤 로봇공학자, 어떤 공룡 연구자, 어떤 줄기세포 연구자, 어떤 프로그래머, 어떤 비정규직 연구원 등등, 이름 없는 “어떤” 과학기술인은 “<미생> 만화가 보여주었던” 고단한 그들만의 삶을 전해준다. 최근 그 일부를 정리해 <어떤 대화: 청년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라는 책자도 펴냈다.(http://www.esckorea.org/article/data_view/275 )


과학기술정책의 새로운 판을 짜자는 요즘의 정책 토론은 ‘과정남’ 목소리의 시선에선 별다른 기대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작은 목소리들이 정책 토론에 스며들기는 여전히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대선 정책 토론이라 하면, 매번 비슷하잖아요. 녹색경제, 창조경제처럼, 이번엔 4차 산업혁명인가요? 거창한 구호를 띄워놓고 거기에 연구개발을 집중해야 우리 경제의 살길이 보일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과학기술 연구엔 경제성장과 먼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 이런 식의 과학기술정책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과학기술정책의 의제설정(어젠다 세팅)을 누가 하는지 알고 싶어요. 여전히 정부 주도잖아요. 1960~70년대엔 정부 주도가 괜찮았을 거예요. 이젠 달라져야 하잖습니까.” “사실상 주변부에 놓인 많은 연구자들에게 처우 개선 같은 시혜적인 정책으론 충분하지 않아요. 현장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대변되어야 하고 의사결정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고등학생부터 교수·기관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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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policy2.jpg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잘 들리지 않던 현장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참여형 토론 행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연구원, 교수, 기관장까지 각계각층의 목소리들이 모여 ‘대통령 후보에게 무엇을 묻고 요구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색다른 토론 행사를 열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대표 윤태웅 고려대 교수) 단체가 주관하고, 2012년 같은 형식의 토론 행사를 열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준비팀을 꾸려 마련한 행사였다.


60여명이 참석해 모두 ‘1인 1표’의 자격으로 5시간에 걸쳐 ’타운미팅’ 형식의 수평적 토론을 벌였다. 가장 활발한 토론의 주제는 여성 과학기술인을 포함하는 과학기술계 소수자 문제, 청년과 신진 과학기술인의 연구 환경과 삶의 질 문제였다. 윤태웅 교수는 이와 관련해 “과학기술을 경제 성장·발전의 도구로만 봐서는 곤란하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며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과학기술자 개개인의 일상과 삶의 행복도 과학기술 발전의 필요조건임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토론 이후에 온라인 투표를 거쳐 ‘대통령 후보에게 물어볼 질문 10가지’가 선정됐고(표 참조), 최근엔 토론에서 나온 목소리들을 기록한 자료집과 함께 공개됐다(http://www.esckorea.org/article/data_view/322 ).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이런 분위기는 과학기술정책에서 행정체제 개편 같은 큰 변화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한 연구환경을 위해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노력이 이제 절실해졌음을 보여준다.


토론 행사의 공동 준비팀장인 이강수 생물학연구정보센터(브릭) 실장은 “과학기술 공약을 내세울 때마다 ‘새로운 거버넌스’를 앞세운다는 것은 그동안 과학기술정책에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이 얼마나 얕고 허술한지 보여주는 것”이라며 “총론만 얘기되고 세세한 현안을 다뤄야 할 각론은 언제나 뒷전이 되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공동 준비팀장인 ‘재규어’(별명, 기업 임원)는 “과학기술의 거버넌스나 컨트롤타워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서 시작해 하향으로 관리·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상향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정부조직 개편 단골

“정치적 요인이 과학기술 불안정성 키워”



“요즘 과학기술정책 토론 행사가 자주 열리죠. 어떤 날엔 하루 3곳에서 토론회가 열려요. 대부분은 성장동력, 부처 개편, 종합조정체제(컨트롤타워)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갑자기 찾아온 대통령 선거 탓에 준비가 부족했는지 신선한 개선 방안은 부족한 느낌이에요.”


국회입법조사처의 권성훈 조사관(공학박사)은 “선거일까지 일정이 짧은데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간도 따로 없는 터라 새 정부 구성 때까지 정책 토론이 충분히 이뤄지기 힘들 듯하다”며 “성장동력과 거버넌스 외에 다른 현안 주제를 다루는 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부처 개편 중심의 토론은 이전 대선 때에도 되풀이됐던 풍경이었다. 행정체계를 비롯해 정책의 기본 틀이 되는 이른바 ‘거버넌스’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개혁 대상이 됐다. “새로운 정부가 집권하게 되면 정부조직 개편이 일상화되고 있다. 특히 정부조직 중에서도 최근 변동의 횟수와 폭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영역이 바로 ‘과학기술정책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천세봉 등, 한국정책학회 논문집, 2013) 이런 지적은 부처 간 경쟁, 권력 대립 구도 같은 정치적 요인이 안정적 기반을 쌓아가야 할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불안정성을 키운다는 우려를 보여준다.


부처 개편 같은 거버넌스의 큰 문제는 새 정부에서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연구현장의 현안들이 이에 가려져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세정 국민의당 의원은 “지금 과학기술정책 토론에서 가장 크게 주목을 받는 것은 아마도 부처 개편 문제인 것 같다”면서도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역할, 비정규직 문제, 하향식과 상향식 연구과제 간의 비율 문제,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 같은 문제에 대해 더욱 활발한 토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문미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거버넌스는 세밀한 연구현장의 방향까지 결정하는 시금석이며 연구현장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거버넌스의 방향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런 논의는 중요하다”면서도 “적절한 거버넌스 안에서 연구자 중심의 기초연구 지원 확대, 청년과 여성 등 연구인력 일자리와 처우, 정부출연 연구기관 개혁 같은 여러 현안들을 함께 다루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예산이 걸린 ‘경제성장 동력 과학기술 선정’ 정책에 집중하는 분위기에도 경계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연구자 중심의 기초연구 확대를 주장해온 호원경 서울대 의대 교수(생리학)는 최근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과학 정책까지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며 “정부 주도의 국책연구에 치우친 연구비 지원 구조를 과감히 개혁하고 다양한 분야의 기초연구 투자를 확대하는 실질적인 개선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성훈 조사관은 “새 정부에 인수위 기간이 없다는 점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며 “정부 출범 이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폭넓게 여러 현장 의견을 모아 지속가능한 정책 개선을 이뤄가는 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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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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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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