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연재를 끝낸 배현진, 오하나, 한아름 님에 이어 김상규, 김서경, 신동화, 박혜정 정민기, 최승원, 홍주은, 한정규 님이 연재를 이어갑니다.

투고논문이 반쯤 거절되어 돌아오던 날

오하나 2012.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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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나의 “식물 실험실의 생명 왈츠”


(5) 투고논문 반송, 다시 시작된 보충실험

paper33.jpg » 투고한 논문은 검토위원 2명의 긴 코멘트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에다마에(풋콩)가 되어 버리고 싶었던 순간. 일본에서는 맥주 안주로 데친 풋콩, 에다마에의 인기가 높다. 선술집에서 일본술과 맥주 안주인 풋콩을 시켜 놓고 멀뚱히 앉아 있다 보면, 그냥 맥주 안주인 에다마메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작고 야무진 풋콩은 쳐다 보고 있노라면, 왠지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인다. 내 연구 식물이 콩과의 모델 식물이라서 그런지, 멘델의 유전 법칙이 완두콩에서 완성이 되어서 그런지, 연구를 시작한 후로 세상의 모든 콩이 다르게 느껴진다. 연구 재료와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 있다 보면, 연구 재료가 내가 되고, 내가 연구재료가 되는 경험을 꽤 하게 된다. 사진/ 오하나


구 대상 식물인 벌노랑이 야생 집단을 채집하러 나선 북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교토는 한여름이 되어 있었다. 교토는 위도상으로 부산과 비슷한 곳에 있으며, 지형상으로 분지이기 때문에 한여름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다. 한여름 온도는 섭씨 27~35도 정도로 서울의 여름 기온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인지 습도가 높아 여름에는 후텁지근하고 겨울에는 한기가 살 속까지 파고든다. 햇볕도 무척 따갑다. 그래서 요즘 교토 사람들은 챙이 넓은 모자는 필수로 쓰고 다니고, 선글라스에, 팔토시에, 양산까지 동원해 온 몸을 자외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다.


내가 사는 집에도 에어컨이 달려 있지만, 난 올 여름에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일본은 지난해에 발생했던 동북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을 중지한 상태로, 국가적으로 사용 가능한 전력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대학교 교직원들은 중앙도서관도 28도, 연구실도 27도로 온도 설정을 고정해 놓았고, 공공 장소의 시설물 중 불필요한 것들은 아예 전원을 뽑아 놓았다. 복도의 전등은 두 개 걸러 하나씩 꺼 놓았고, 화장실의 핸드 드라이어도 사용 중지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금세 적응했다. 적응하고 보니, 생각보다 사람은 적은 것들로도 충분히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나는 비교적 선선한 새벽녘에 집을 나서서 연구실로 가고, 어둠이 깔린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기로 마음 먹었다. 학교로 오는 길에, 매미들은 어디엔가 숨어 새벽녘부터 울고 있었다. 마치 캐스터네츠를 양쪽 날개로 미친듯이 쳐대며 한여름에 대한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paper11.jpg » 전력 절약 캠페인의 일환으로 교토대학교 중앙도서관은 한여름에도 실내 온도를 섭씨 28도로 설정해 놓았다.



1년반 노력해 쓴 연구논문, 문제점 지적으로 가득한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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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들어서자, 벌노랑이 재배기가 설치된 옆방으로 통하는 문 틈으로 시원한 공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노랑이 재배의 최적 온도는 25도이다. 그래서 재배실만은 25도를 유지하게 에어콘 설정을 해 놓았다. 모두들 더위가 참기 힘들 땐 그쪽으로 잠시 옮겨가 있거나 한다. 가끔 연구를 하다 보면, 사람보다 연구 대상 식물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과장해서 말하면, 벌노랑이를 들고 비행기를 탄다면, 아마도 벌노랑이는 비즈니스석에, 나는 짐칸에 실려 갈 것 같다.


슬슬 2개월 전에 투고했던 논문을 재투고하기 위해, 보충 실험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교수도 현재 논문의 국제 저널 투고와 게재 승락을 졸업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졸업이 내년 3월이므로 졸업까지는 앞으로 6~8개월 남짓 남은 셈이다. 나는 익명의 논문 검토위원 2명한테서 받은 코멘트에 대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그것들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연구 대상으로 선정한 벌노랑이 야생 집단이 네 군데 있더군요. 각 집단의 개체들에서 분석 개체를 하나만 선정하여 광수용체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논하였습니다. 하나의 샘플을 분석한 결과로부터 한 야생 집단의 유전적 배경을 추론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집단당 분석 개체수를 늘리세요.… 분석하신 유전자가 야생 집단 내에서 자연선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말에 신빙성이 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중립 유전자를 분석한 다음에 서로 비교해야 합니다.…개화 시기와 지역별 유전자 타입의 관계에 연관성이 있는지는 실험으로 증명했나요? 같은 광환경 아래에서 야생 집단 개체의 개화일을 점검하세요.…”



코멘트를 읽으며 나는 가장 먼저 내 자신의 연구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성실했다면 성실하게 실험을 하고, 데이터를 뽑고, 교수와 토론을 해가며 연구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끔 노력했던 나날들이 별 볼 일 없었던 것처럼 한 줄로 요약되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전기를 써줬다고 상상해 보자면,


2011년 1월부터 2012년 6월까지: 실험 및 기초 대사 활동 그리고 논문 투고

2012년 7월: '빨간펜 선생님'의 논문 문제점 지적과 함께 논문 반송


이렇게 간략히 기록될 것만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교수가 코멘트를 읽는 내 표정을 보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나씨, 논문의 검토위원이란 원래 그런 역할을 담당하도록 존재하는 거예요.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마저 들죠? 심술궂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런 과정에서 실험 결과 및 토론 내용이 사실에 가까워질 수 있고 신뢰성이 높아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건 자기의 연구에 대한 자부심을 끝까지 잃지 않는 거랍니다.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라도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남게 되죠. 비록 유명한 국제 논문에 투고할 만큼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하나씨의 논문은 분명 다른 어떤 연구자의 연구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나는 교수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는 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교토대 캠퍼스를 산책해 보기로 했다.



연구라는 프로의 세계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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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라는 프로의 세계란 뭘까? 누군가가 말했다. '한 분야에서 프로가 되려면 1만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얼추 하루에 8시간씩을 한 가지 일에 투자했을 때 5년이 흐르면 1만 시간이 채워진다고 한다. 석사 2년과 박사 3년을 합하면 5년, 그리고 그 뒤에 박사학위(학자의 자격증)을 딴 연구자는 프로로서 비로소 연구라는 세계에서 돈벌이를 하며 직업적 전문가로 살아가게 된다.


생각해보니, 프로 선수인 내 지도 교수와 견습생인 나의 차이점은 독립된 연구를 디자인해서 논문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을 얼마나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 같았다.


논문을 대하는 마음가짐 또한 달랐다. 지도 교수는 진실에 가까운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프로가 공정하게 심사하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검토위원이 익명일 수밖에 없고, 논문이 출판되기까지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논문의 검토 위원이 얼마나 공정하게 심사를 할 수 있을지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연구자의 연구 모습도 내 자신이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진실에 가까운 과학적 사실이 알고 싶어서 연구를 해나가는 게 아니라, 논문 편 수를 늘리기 위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천재 과학자가 아닌 이상, 현대의 프로 연구자의 삶이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논문을 내기 위해 연구 테마를 고르기도 하고, 하찮아 보이는 실험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면서 몇 가지의 작은 진실을 알 듯 말 듯한 상태에 이르고 죽는 삶 말이다.


이런 생각은 연구자 모두가 한 번쯤은 해 보았을까? 나만 이상한 걸까? 연구자의 길은 나와 맞지 않는 걸까?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은 걸까? 지도교수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도 분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겠죠.” 그렇구나. 나는 그 말을 교수의 말을 "나는 과학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연구자들의 과학적 성과와 연구 활동이 분명 세상의 진실에 다가서는 일이라 믿는다."나와 지도 교수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현대의 과학 연구에 대한 관점의 차이, 혹은 열정의 차이겠구나….


실험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머릿속이 알 수 없는 희뿌연 감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연구자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얻·는·다’는 것일까.

paper44.jpg » 보충 실험의 하나로 개화기 점검 실험을 시작했다. 벌노랑이 종자의 종피를 벗겨 한천 위에서 발아 실험을 하는 중이다. 에다마메가 되어 버리고 싶었던 순간 2.


실험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한여름의 대낮처럼 위험할 만큼 따분한 실험이 반복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리고 저명한 국제 저널에 투고하고 싶은 투기심이라도 들면, 도박성 있는 실험을 진행하며 느끼는 반쯤은 두근대는, 반쯤은 불안한 마음을 견뎌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품 빠진 결과를 억울해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승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내 논문이 국제 저널에 실리게 되어 한 권의 출판물로 넘겨받을 때에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보충해야 할 실험의 양도 만만치가 않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실험해 왔던 샘플량보다 추가된 샘플량이 더 많다. 허얼… (풋콩으로 다시 변신). 당장 추가한 샘플의 DNA를 꺼내오고 실험에 필요한 얼음을 퍼왔다. 첫번째 보충 실험을 걸어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두번째 보충 실험을 시작했다. 벌노랑이 야생 집단의 종자를 따로 모아 놓은 스티로폼 박스를 뒤적이니, 흑갈색의 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자의 종피를 사포로 문질러 가며, 중얼 중얼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 정말 난, 졸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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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나 일본 교토대학교 인간환경학연구과 석사과정
커피, 식물, 음악, 남자를 좋아한다. 부자가 될 자신은 없지만, 여윳돈이 생긴다면, 남미와 티벳은 꼭 가볼 것이다.
이메일 : hanaoh.plant@gmail.com      
블로그 : flowersneversa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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