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떼고 참여와 소통의 토론 -과학기술 타운미팅을 열며

  기 고  


00townmeting10.jpg » 지난 2012년 열린 '현장의 목소리로 채우는 과학기술정책 제안 타운미팅'에서 참가자들이 토론 결과를 중간 발표하는 모습. 타운미팅에는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참여해 현장의 연구환경과 이공계 기피 문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 2012 타운미팅 준비모임


…, 저 분은? 나의 첫 직장이 될 뻔했던 회사 채용 면접 때 면접관이셨던 분이 아닌가? 무슨무슨 과학자인가 하는 엄청난 타이틀에다 회사까지 창업하셨던 원로 과학자. 그분이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계셨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건너편이 아니라 8-9명이 둘러 앉은 원형 테이블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우리 과학기술인들끼리 과학기술정책 공약을 만들어보자던 타운미팅 행사. 과학기술정책에도 관심이 많았고 타운미팅은 또 무엇인지 궁금했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참가 신청을 했다. 행사 참여 신청 때에 이름 대신에 토론 때 쓸 ‘별명’을 입력하라고 해서 온라인 게임을 할 때 아이디로 가끔 쓰던 ‘재규어’라는 별명을 입력했다.


행사장에 가보니 여러 개의 원탁에 별칭으로 된 명찰을 단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나도 사전에 정해진 조의 테이블을 찾아가 앉았다. 그곳에 그분이 앉아 계셨다. 그 분의 별칭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편의상 ‘괴수’라고 하겠다.


사실 대학원생들끼리는 연구실의 책임자인 교수를 종종 ‘괴수’라고 부른다. 그만큼 두려운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나랑 같은 테이블에 앉은 ‘괴수’는 평범한 교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분이 아니신가. 다른 참석자들은 ‘괴수’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있을까?


드디어 타운미팅은 시작되었고 돌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별명을 사용해 토론을 진행하는 덕분에 사회적 지위라는 계급장은 떼어졌고 우리는 어느새 똑같은 한사람으로서 서로 대우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참가자의 발언에 대해서도 ‘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고 심지어 존댓말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방금 전에 ‘괴수’께서 나랑 조금 다른 생각을 말씀하신 것 맞아?



‘별명으로 통하는 평등한 목소리’ 색다른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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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나기를 내성적이었던 나. 한국에서 초·중·고교와 대학, 그리고 군대와 회사 조직을 경험하면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나. 어른의 면전에서 다른 생각을 말씀드리기를 기피하던 나. 그러나 타운미팅 행사장에서 별칭으로만 불리던 나는 이런 내 모습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괴수님,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괴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감히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나.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나 맞나? 소리 높여 반박하시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시는 ‘괴수’!


“재규어님 말씀처럼 생각하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오옷, 이건 마치…, 존댓말로 진행하지만 ‘야자 타임’ 같은 쾌감이 잠시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쾌감에 중독이라도 된 걸까? 4차례의 타운미팅을 마치고 결과물을 과학기술 정책 제안 자료집으로 만들어 2012년 대선을 준비하는 대통령 후보 캠프들에 전달한 뒤에도 나는 타운미팅과 인연을 끊을 수 없었다. 타운미팅을 준비했던 사람들과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교류를 지속하였고, 회사에서도 타운미팅을 시도해 보았다.



타운미팅 1단계 ‘감춰진 목소리 끄집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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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발전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타운미팅의 첫 단계에서 자주 쓰는 방법을 활용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위해 ‘포스트잇’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자 에이(A)4 용지 1장에다 포스트잇 16장을 붙여놓고, 회사에서 해결해야 할, 또는 추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포스트잇 한 장에 적는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앞의 A4 용지에 하나를 적고 나서 그것을 바로 옆사람에게 넘긴다. 넘긴 사람은 다른 옆사람한테서 포스트잇 붙은 그의 A4 용지를 건네받는다. 건네받은 A4 용지의 비어 있는 포스트잇 15장 중 하나에다 또다른 나의 생각을 하나 적는다.


이런 식으로 A4 용지의 포스트잇이 모두 꽉 차면 이것들을 떼어다가 커다란 백지인 전지 또는 화이트보드 같은 곳에 옮겨 붙인다. 그러고선 비슷한 내용들을 분류해서 이리저리 한데 모은다. 그러다 보면 참석자들이 생각하는 다양한 안건들이 자연스럽게 몇 개의 중요 안건으로 정리된다.


이 방법을 쓰면 말로 논의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형성된다. 먼저 말하는 사람(주로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한 말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닫거나 할 필요가 없다. 포스트잇에 조용히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써내려가면 되고, 그러면서도 A4 용지를 돌릴 때마다 포스트잇에 적혀 있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하나씩 접하면서 거기에 덧붙여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고 또는 반대하는 의견도 쓸 수 있다. 이런 포스트잇 작업이 타운미팅의 출발점이었다.


약식 타운미팅을 끝내고 나니, 대부분 참가자들은 회사의 주요 안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밝힐 수 있는 기회를 공식적으로 갖게 되어 매우 좋아했다. 보통은 술자리에서나 뒷담화처럼 얘기할 수 있던 화제들이 아닌가? 하지만 평소에 결정권과 발언권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윗사람은 엉겁결에 참석하게 된 타운미팅 방식의 토론을 다시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 듯했다.



‘새로운 질문’을 꺼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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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미팅은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서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단순히 취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설문조사나 신문고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도 평소에 깊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면 기회가 주어져도 말을 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큰 일부 사람에게 쉬이 휩쓸리기도 한다.


런데 타운미팅 방식의 토론은 일단 참석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장점을 지니는 것 같다. 생각하지 않았던(못했던), 또는 문제 삼지 않았던(못했던) 것에 대해 고민하고 궁리하게 만든다. 돌아가면서 발언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정리도 해야 한다. 그것도 나와 생각이나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의 시각이 바뀌고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이런 고민과 궁리 끝에 모인 결론은 기존에 알려진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을 만들어내고 이런 결론을 실천할 사람들은 기존과는 달라진 사람들일 것이다.



25일 ‘2017 타운미팅’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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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5일에는 사단법인 과학기술인단체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가 주관해 과학기술 지원정책을 주제로 한 타운미팅을 연다. 이 자리에는 한국 과학기술계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모여 현행 과학기술 지원정책에 대해 ‘뭣이 중헌지’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행사는 타운미팅의 정신에 입각해 별도의 발표자 없이 모든 참석자들이 ‘위아래’ 없는 수평적인 토론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온 한국 과학기술 지원정책의 중요 이슈들은 같은 단체가 3월에 계획하고 있는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던져질 질문의 기반이 될 것이다.


100%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던 2012년의 타운미팅과는 달리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아 준비해온 2017년 타운미팅. 그래, 우리는 이렇게 한발 더 나아간 거구나.


오는 2월 25일 열리는 타운미팅에 관심 있는 분들은 다음 링크에서 참가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ibric.org/townm/townm_reg1.php

타운미팅 행사의 개최 정보는 다음 링크에 있습니다.

 http://scienceon.hani.co.kr/49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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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재규어’ (필명)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의 타운미팅 준비팀에서 일하는 과학기술인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알림] 함께할 '2017 사이언스온 필자'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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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한겨레 8월7치 <한겨레>의 “미래&과학” 지면에 실렸습니다. 취재 중에 이뤄진 이메일 일문일답들 중 일부를 덧붙여서 웹진용 기사로 사이언스온에도 옮겨 싣습니다. 지면 편집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