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실험실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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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낸 2016년 


‘더 좋은 사회에서 자라날 더 좋은 연구실문화’


00gender2.jpg » 세계경제포럼이 펴낸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 2013'를 전하는 동영상 화면. 출처/ https://youtu.be/_hpQ3X2wlWU


“으아, 실험하기 싫다.”

요즘처럼 날씨가 쌀쌀할 때면 이불 밖으로 한 발짝 벗어나기가 그렇게나 힘들다. 크리스마스 하루 전 날은 고단함이 더해져서 더욱 출근하기가 귀찮았다. 그러게 평소에 미리미리 똑바로 했어야 했는데, 이게 참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 여튼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30분쯤 한숨을 쉬다 보니 조금씩 나가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내가 키우는 벌레들(내가 속한 연구실은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해 유전학을 연구한다.)에게 밥은 똑바로 먹이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 슬금슬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집에서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날은 퍽 쌀쌀했지만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00sciencesociety2.jpg » 아일린 폴락(Eileen Pollack)과 그의 원저서, 국내 출간 번역서. 연구실에 도착해 벌레한테 밥 주고 실험을 조금 해둔 뒤 집에서 들고 온 책 『평행 우주 속의 소녀』를 펼쳤다. 이 책의 원제는 “그 방에 있던 단 한 명의 여성(The Only Woman in the Room)”으로, 저자가 물리학을 공부하던 여성으로서 받은 편견과 정말 미묘한 성차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예일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던 여성이었으며 교실이든 연구실이든 여자라곤 자신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공부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물리학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지 못해 결국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밀어주던 방향 -“여자애는 물리학보다는 글쓰기지!”- 으로 길을 바꿔 작가로서 멋진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다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왜 과학계에서 여성이 소수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적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은 참 훌륭했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남은 분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딸에게 어려운 수학 수업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던 한 페미니스트가 이 책을 읽고 태도를 바꿔 딸을 지지해주었고, 덕분에 성적 향상까지 이뤄냈다는 사례를 마지막으로 책을 덮고 나니 후련하기까지 했다. “진짜 좋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날 밤, 연구실에 홀로 남아 읽기에도 충분히 적당한 책이었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하기에는 정말이지 가장 적절한 책이었다.


지난 1년, 나는 연구실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과학자 사회의 정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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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열린 신경생물학 학회 후반부에 “지속가능한 뇌과학 생태계 만들기(Creating a Sustainable Neuroscience Ecosystem)”라는 제목의 발표가 진행됐다. 강연자는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뇌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행정 책임자를 맡고 있는 찰스 요코야마(Charles Yokoyama) 박사.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림을 가져와 큰 눈에 호리호리한 몸집을 지니고 실험복을 걸친 가상의 여성 박사과정 과학자의 삶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지금 존재하는 과학 생태계 내에서 뇌과학 연구를 한다는 게 어떤 점에서 힘든지 그리고 이를 보완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발표가 00sciencebiologist.jpg » 출처 / openclipart.org 흥미로웠던 점은 “신성한” 학술대회의 장에서 정치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육 받는 동안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할 때면 보통 “그 시간에 가서 공부나 해라”라는 소리를 들었고, 가끔은 “와, 공대생(심지어 자연대생인데!)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다니, 아주 대견하구나!”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공식 석상에서 연구가 아닌 과학자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는 사실이 퍽 흥미로웠다. 정치나 사회에 관심 갖지 말라고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서야 내가 처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 즈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남역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생리대 가격 인상 문제가 불거지면서 비싼 생리대 값 때문에 휴지, 심지어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체한다는 가슴 아픈 사례가 알려지기도 했다. 또 페이스북 코리아의 편파적인 페이지 검열에 대응해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 소송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판매한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성우의 목소리가 게임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이처럼 수많은 페미니즘 이슈가 부각되면서, 그리고 요코야마 박사의 문제제기 등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공계 내 여성 문제에 대해 고려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이공계 속 페미니즘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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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과학계의 문제는 상당 부분 전체 사회가 지고 있는 문제를 반영한다. 여성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과학기술개발인력 중 여성 비율은 14년 기준 19%에 불과하고 정규직 비율을 놓고 봐도 남성은 79%가 정규직으로 일하는 반면 여성은 55%만이 정규직으로 일할 뿐이다.


이공계 대학만 따지면 그 차이가 훨씬 두드러져 남성은 43%, 여성은 19%만이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전임교수 중 여성 비율도 12%에 불과하다.[1] 참고로 이 중 상당한 비율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2000년에는 이학 학사와 공학 학사로 졸업한 여성의 숫자는 약 1만 명씩, 비율로 따지면 각각 약 50%와 20%에 달하는데,[2] 역산하면 30% 가까이 되는 여성이 이공계에서 학사를 마친 셈이다. 이 숫자에 담기지 않은 이들은 다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정적인 직장과 같은 다양한 경제적인 여건 이외에 미묘한 사회적 편견도 활동을 계속하는 여성의 비율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때는 기술이랑 가정이 나뉘어 있었는데, 여자애들은 다 가정 배우고 남자애들은 전부 기술 배웠지.” 나만 해도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통합된 기술·가정 수업을 들었지만, 한때는 사회에서 성별에 따라 요구하던 업무를 그대로 반영해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새 많은 부분이 개선됐다 하더라도 여전히 수학이나 과학은 남자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일로 묘사되고 매체에 등장하는 이들도 대부분 남성 과학자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남학생은 자신이 과학자가 된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어떤 여학생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만약 그가 과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도 재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여성에게 보다 “권장되는” 성격의 직업이라면 그 길로 방향을 트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성 비율이 굉장히 낮은 공과대학교에서는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내가 나온 학부 성비는 남학생 5명당 여학생 1명 정도였고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해 가까운 곳에 교류할 수 있을 학교가 마땅치 않았다. 이 때문에 교내에서 연애를 하는 또는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성비가 맞지 않다 보니 상당한 폐해가 발생했다.


여느 날처럼 기숙사 1층에서 어슬렁거리며 놀고 있을 때 멀리 같은 학과 여자 후배가 축 처진 어깨로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근심이 가득한 것 같아 “요새 무슨 힘든 일 있나?”라고 말을 걸었는데 그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남자애들이랑 친해지고 나니 애들이 연애 상담을 해오고, 그 이야기를 잘 들어줬더니 갑자기 자기한테 고백을 해 결국엔 친구를 잃는 일을 연달아 겪다 보니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다른 일까지 겹쳐 견디기 어려울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학교에서 여성으로 생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내가 겪지 못할 종류의 스트레스까지 받아가며 그 힘든 학부 생활을 견뎌내고 있었다.



함께 공부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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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scientistinsociety.jpg »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많은 시민들이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애도하며 추모글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꽃을 놓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효 기자 (2016.5.19)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상당한 고통을 호소했다. 연구실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주변 대학원생들과 이야기할 때면 어느 순간 그 화제가 툭툭 터져나오곤 했다. “친구들이랑 있는 단체 채팅창에서 그 살인사건을 보며 여성이 왜 유독 분노나 공포를 느끼는지 얘기를 했단 말이야. 근데 남자애들은 대부분 아예 이해를 못하더라.” “우리 부모님은 어젯밤에 그 기사 보더니 나 보고 위험하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좀 말라 그랬어. 그 말 들으니까 화가 나서 잠도 안 오고, 그래서 결국 밤새고 왔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면서 내 동료 과학자들, 특히 여성 과학자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이는 분명히 그들의 삶, 그리고 연구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이건 별로 좋지 않네.’ 다른 사람은 어렵더라도 같은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라도 해소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하라는 연구는 안 해도 맛있는 건 꼭 같이 챙겨먹으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친구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였고, 얼마 뒤 한 친구는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페미니즘 소설을 읽을 거라는 이야기도 꺼냈다. 나는 그 책 읽기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어차피 읽을 거라면 차라리 연구실에 공지를 해서 같이 읽을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건 어때? 그렇게 하면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이들이 연구실에 여럿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을 거고, 동시에 연구실 분위기도 환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책 읽다가 여력되면 과학계 내 페미니즘 이슈 다룬 논문을 번역하는 작업도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일본에서 돌아오고 나서 얼마 뒤 우리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갈리아의 딸들』과 『나쁜 페미니스트』를 함께 읽었다. 일부는 한국여성민우회라는 여성단체에도 후원을 시작했으며 함께 신입회원 모임도 나갔고 때로는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정말 부럽네요. 저는 오프라인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어서 이번에 민우회 가입했거든요.” 단체 모임에서 만난 분은 연구실에서 함께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더니 부러움을 한껏 표현하기도 했다.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는 말에 한 편으로는 참 안타까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친구들과 함께 이런 모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굉장히 뿌듯해졌다.



더 좋은 연구실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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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를 하다 보면 대번에 이해하기 힘든 거대하고 중요한 질문일수록 아주 작은 부분부터 차근차근 그 답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게는 과학계 안에 있는 여러 문제, 특히 과학 속 페미니즘 이슈도 그런 질문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수많은 요인들이 얽혀 있어 하나하나 바꿔나가기란 참 어렵고, 게다가 뭘 바꿨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분석하기도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고 이를 그대로 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것인가 하면 그러기엔 이건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은 모르겠지만, 게다가 이렇게 해나간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지만, 당장은 작은 부분부터 해결해보기로 했다. 연구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자신이 겪어온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경험할 수 없었던 삶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나. 그리고 이렇게 눈앞에 있는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더 좋은 연구실 문화를 가꿔나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주]

[1] KISTEP 통계브리프 2016년 제03호, “2014년 우리나라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

[2] 이은경, “과학기술과 여성의 정책 쟁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김준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생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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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생(석사과정)
“먹고 살 걱정 하는 세상을 넘어, 놀고 즐길 수 있는 세상으로.” 포스텍에서 학부를 졸업하고서 2015년부터 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 생명의 비밀을 알아가는 과학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열정과 기쁨을 다른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지향합니다.
이메일 : ecologicalj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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