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상태를 되짚어가는 물질복잡계 ‘기억의 효과’
이승헌 교수 연구진, 비결정질 물질 자성(스핀) 변화 측정
“복잡 에너지 분포의 차이가 ‘기억 효과’의 차이와 연관돼”
» 스핀 물질의 복잡 에너지 분포를 시각화한 그림. 복잡 에너지 분포의 차이가 기억 효과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차원 그림에서 가로축/세로축은 스핀들의 상태를 의미하며 높이축은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림 (a)는 스핀 고체, (b)는 스핀 유리, (c)는 스핀 잼의 에너지 분포의 특성을 보여준다. (스핀 고체/스핀 유리/스핀 잼, 아래 용어설명 참조) 그림출처/ 이승헌 교수
신경세포들의 복잡계에서 일어나는 기억 현상을 “어떤 과거 상태나 정보의 복원”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런 특성의 기억 현상은 무생물 복잡계에서도 볼 수 있을까? 생물학적인 기억과 무생물의 기억은 어떤 공통 속성으로 함께 논의될 수 있을까?
무생물 복잡계에 나타나는 기억 현상과 그 물질의 에너지 분포 간의 상관관계를 보고하는 물리학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학 교수(물리학)가 교신저자로 참여한 미국·일본(토호쿠대학) 소속 연구진은 4일 물질 속 전자들의 ‘스핀(고유한 각운동량)’들이 불규칙하게 정렬된 ‘비결정질 스핀 물질’(스핀 유리라 부른다, ☞아래 용어설명)에 나타나는 기억 현상의 차이에 관한 논문을 과학저널 <미국과학아카데미 회보(PNAS)에 발표했다.
▒ 스핀과 복잡계 연구, 참조기사
전자들 ‘춤 놀이’에 숨은 ‘게임의 규칙’ 찾아라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260671.html
이승헌 교수는 “몇 가지 다른 비결정질 스핀 물질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자성체의 복잡 에너지 분포(complex energy landscape)의 차이가 어떻게 그 물질들에 다른 기억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지를 연구했다”고 말했다.
이 난해한 연구의 의미에 조금 접근하려면 먼저 ‘비결정질 스핀 물질’이 무엇인지 개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참조그림] 전자들은 언제나 두 가지 스핀 상태에 놓여 있는데, 개별 전자의 스핀이 전자 집단들에서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어떤 상태로 정렬하느냐에 따라 자성이 생기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전자 스핀들의 집단거동은 물리학의 복잡계 연구주제 중 하나이다. 위 그림들은 전자 스핀들의 상호영향과 거동을 보여주는 여러 물리학 모형들을 보여준다. 참조기사/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260671.html
물질 속에 있는 전자의 스핀은 대체로 낮은 온도에서 상호작용해 서로 정렬한다. 이때 스핀들이 아주 먼 거리까지 규칙적으로 정렬할 수도 있고(결정질 스핀), 아니면 가까운 거리에서만 규칙적이고 먼 거리에선 불규칙적으로 정렬할 수도(비결정질 스핀) 있다. 원자들이 불규칙하게 정렬한 대표적인 비결정질 물질인 ‘유리’의 이름을 따서, 전자 스핀이 불규칙하게 정렬한 것을 ‘스핀 유리’라 부른다.(자세한 설명은 아래 용어설명 참조)
연구진은 비결정질 스핀 물질이 냉각 과정에서 서로 다른 냉각 경로를 겪도록 했다. 그러고나서 이런 냉각 경로의 차이가 비결정질에 이른 서로 다른 물질들에 어떤 기억 현상의 효과 차이를 만드는지에 주목했다. 이들은 스핀 물질의 자성변화를 실험으로 측정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런 기억 효과와 복잡 에너지 분포의 상관관계를 규명해 제시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서로 다른 냉각 경로 중 하나에선 물질이 최저 온도로 가지 전에 중간쯤 온도에서 한참 동안 그냥 ‘기다림’의 과정을 두어 스핀 물질이 복잡 에너지 분포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로 찾아가는 과정(연구진은 이를 ’나이듦(aging, 숙성)’이라 부른다)을 거치게 한다. 그런 뒤에 최저온도로 냉각했다. 다른 경로에선 스핀 물질이 곧바로 최저온도로 냉각하게 했다.
과연 중간에 기다림과 ‘나이듦’의 과정을 거친 경험이 그 비결정질 스핀 물질에 기억될까?
연구진은 기다림 동안에 물질이 어떤 에너지 상태로 나이듦을 경험했는지를 기억(복원)해내는 현상이 관찰됐다고 보고했다. 이 교수는 “이는 기다림이 없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면서 또한 “기다림의 시간이 길수록 나이듦의 정도가 커지고, 따라서 기억 효과도 더욱 커진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비결정질의 스핀이 고밀도로 존재하는 상태(스핀 잼)과 그렇지 않은 비결정질 스핀 상태에서 이런 기억 현상과 효과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함께 밝혀냈으며, 이런 기억 현상들이 결국에는 복잡 에너지 분포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리 전이(glass transition)는 액체를 급냉각할 때 그 물질 고유의 온도영역에서 고무 같은 비결정질 상태로 빠르게 굳어버리는 현상이다. (위키백과 ‘유리 전이’)
이승헌 교수(미국 버지니아대학, 물리학)
기억은 흔히 신경생물학적 현상을 가리키는데 이 논문에서는 에너지 상태/역동을 설명하며 기억의 개념을 씁니다. 기억은 과거의 어떤 정보/상태가 보존되어 있다가 나중에 복원될 수 있음을 뜻하는 듯한데, 이 분야에서 물리학자들이 쓰는 기억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요? ‘복잡계’와도 관련하여 다뤄지는 듯합니다만.
“여기에서도, 기억이란 과거의 어떤 정보/상태가 나중에 복원됨을 뜻합니다. 스핀 물질들을 냉각을 하면(온도를 낮추면), 물질에 따라 특정한 온도 밑에서 결정질로(스핀 고체인 경우) 혹은 비결정질로(스핀 유리나 스핀 잼의 경우) 정렬을 합니다. 스핀 유리나 스핀 잼의 경우에는,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상태들이 많아, 전이온도 밑에서, 에너지가 비슷한 상태들로 헤맵니다.
자성 민감성 측정실험을 할 때, 온도를 가장 낮은 온도로 냉각하지 않고, 먼저 어느 중간쯤 온도에서 먼저 가만히 기다립니다. 중간 온도에서 가만히 기다릴 때, 스핀들은 수많은 에너지가 비슷한 상태 중에 에너지가 조금 더 낮은 상태를 찾아갑니다. 이걸 ‘나이듦(aging)’이라고 합니다.
기다림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상태로 가지요. 그리곤, 가장 낮은 온도로 냉각합니다. 가장 낮은 온도(기다렸던 온도보다도 훨씬 낮은 온도)에서는 더 낮은 에너지 상태로 갑니다. 그리곤, 온도를 천천히 올리면서 자성 민감성를 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가만히 기다렸던 그 온도근처에 가면, 기다렸을때 ‘나이듦’의 상태를 기억한 듯이, 기다림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간온도에서 기다린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이듦’ 정도가 더 커지고, 따라서 기억 효과가 더욱 커집니다.”
- 왜 이런 현상이 관심 대상, 연구 대상이 되었는지요? 어떠한 물음을 풀고자 하는 것인지요?
“비결정질 물질에 나타나는 복잡한 역동적 거동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들 중의 하나입니다. 스핀 물질을 통해서 그 질문에 대해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연구결과는, 비결정질 스핀 물질들의 역동적 거동은 어떠한 에너지 분포를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를 자성 민감성 측정실험을 통한 기억 효과로서 알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 이 분야에서 있었던 연구의 흐름을 간략히 설명해주신다면?
“스핀 유리 물질들은 1970년대부터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저밀도 자성 혼합물뿐만 아니라, 고밀도 자성 물질들에서도 비슷한 비결정질 냉각 현상를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그 모두를 ‘스핀 유리’란 똑같은 이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동적 거동 행태를 자세히 보면, 다른 행태를 보임이 알려졌는데요, 그 차이의 원인을 그동안 정확히 밝히질 못했습니다. 최근에 저희 연구그룹이 밝힌 것은, 낮은 온도에서의 두 물질(스핀 유리와 스핀 잼)의 다른 역동적 거동 행태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인 때문에 갖게 되는 다른 특성을 지닌 에너지 분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란 걸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 이 연구는 시뮬레이션으로 수행된 것인지요?
“연구는 실제 실험(자성 민감성 측정)과 컴퓨터시뮬레이션, 이 둘을 서로 비교한 결과입니다.
- 이 논문에서 보여준, 물질(상태)가 기억 효과를 낸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에너지 분포(energy landscape)를 간직하고서 이를 복원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인지요?
“주어진 복잡한 에너지분포에서, 기다림 중에 어떤 상태들로 늙어갔는지(aging)를 기억해내고 복원해내는 게 기억 효과입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결국에 기억에 관한 우리의 인식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어떠한 새로운 생각을 얻을 수 있을런지요?
“인간의 기억 또한, 수많은 뇌신경조직들의 복잡한 에너지분포 상태에서의 역동적 거동이라고 볼 수가 있을텐데요, 그러면 뇌기억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저희의 연구결과에서 어떤 새로운 영감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건 희망사항입니다.)”
- 그렇더라도 무생물의 기억은 당연히 생물의 기억 특성과는 근본적인 특성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겠지요?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두 시간에 따라 변해갑니다. 어떻게 변해가느냐는 주변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물론 생물, 특히 인간에겐, 여러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택하느냐는 자유 의지의 선택 또한 중요하지만, 가능성의 폭은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생물의 개체를 보면 그 변해가는 전 과정을 ‘일생’이라 일컫습니다. 지구, 태양계, 등의 무생물 또한, 시간의 단위가 매우 크다뿐이지, ‘일생’이 있습니다. 지구가 상호작용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는지의 몇 예로는, 최근에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와 지진을 들 수 있겠지요.
이 모든 변화는 각 물질들이 상호작용에 의해 갖게 되는 가능한 상태들의 에너지 분포를 통해서 예측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론 매우 다르게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같은 원리 때문에 생길 수 있지 않나를 질문하는 것은, 과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기억현상들이 표면적으론 다르게 보이지만, ‘에너지 분포’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보편적인 이해를 돕지 않을까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폴리머(중합체)부터 뇌 활동, 사회연결망, 그리고 유리 전이(☞ 아래 용어설명)에 이르기까지, 많은 복잡계들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역동적 거동 그 밑바탕에는 ‘복잡한 에너지 분포(complex energy landscape)’라는 개념이 있다. 저밀도의 자성 혼합물에서 볼 수 있는 스핀 유리(☞ 용어설명) 상태는, 울퉁불퉁한 깔대기 패턴(rugged funnels)을 나타내는 위계적 에너지 분포(hierarchical energy landscape)로 인해서 생기는 복잡계 동역학을 연구하는 데에 편리한 실험의 틀이 되어 왔다. 자성 민감성(magnetic susceptibility) 측정실험과 몬테 카를로 기법의 시뮬레이션을 이용하여, 우리 연구진은 고밀도로 산재하는 자성체(스핀)들의 스핀 잼 상태(spin jam state, ☞ 용어설명)에서는 스핀 유리 상태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약한 기억 효과를 나타냄을 보여준다. 또한 그 약한 기억 효과는, 깔대기 패턴의 위계적 에너지분포가 아니라, 비슷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가능한 상태들이 거의 평평하고 넓게, 하지만 울퉁불퉁한 바닥 상태와 같은 비위계적인 에너지 분포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연구 결과는 간단한 기억 효과에 대한 실험이, 여러 비결정질 스핀 상태들의 서로 다른 느린 역동성을 연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래서 다양한 유리 물질들의 차별적인 에너지 분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방법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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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국제엠바고를 준수하여 10월4일 오전에 발행되었습니다.-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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