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자들이 말하는, “기억이란 ___이다”

※ 이 글은 한겨레 8월10일치 ‘사이언스온’ 지면에 실렸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약간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00brain.jpg » ‘기억의 집’은 뇌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신경과학 연구가 활발하다.출처/ 픽사베이(pixabay.com)



신경과학자에게 기억이란
빙산, 생채기, 정체성…



“기억이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30년째 ‘기억’을 연구해온 신경과학자인 정민환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과)는 기억 연구자한테 기억이란 무엇인지 묻자, ‘나’의 인성과 세계관을 만드는 기억의 의미를 이렇게 전해주었다.


기억은 역사, 철학, 문학의 오랜 주제이지만 한 세기 넘는 생물학적 연구 덕분에 기억은 이제 신경과학의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게 됐다. 정 교수는 30년 전에도 기억 연구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는 기억 연구의 황금기로 기억되는데, (신경세포들을 잇는) 시냅스에서 기억과 관련해 생기는 여러 물리적, 생화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이 알려지면서 심리학이 이끌던 기억 연구에 생물학이 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기억 연구자들이 ‘유레카’를 경험한 시절이었죠.”


근래 몇 년 새 또다른 변화가 오고 있다.. 한진희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과)는 “지난 10년 동안 기억 연구가 비약적 발전을 이뤄 기억 세포의 존재를 입증하고 기억 저장 세포가 결정되는 원리가 발견되고, 기억 세포를 직접 조절해 기억이 변형될 수 있음이 밝혀져 왔다”며 “앞으로 자극과 반응의 단순 기억을 넘어 시공간의 의미를 담는 복잡한 기억에 대해 답을 주는 연구들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연결이며 한 사람의 성격, 정체성을 이루는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기억은 신경세포들의 연결이며 신호의 생성, 저장, 복원(회상)이다. 기억은 수많은 신경세포의 활성과 억제가 빚는 협주이다. 기억은 소통과 공감의 원천이고 집단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자원이다.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은 과연 기억을 어떻게 설명할까?


기억 연구자들한테 물어보았다.

① 기억이란 ______이다.

   왜냐하면 __________.

② 기억 연구자로서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 또는 물음을 꼽는다면, 그것은 ______ 이다.




0KangBG.jpg ‘나’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① 왜냐면, 기억이 없다면 나에게 어제란 없을 것이며 아울러 내일을 계획할 수 없기에 미래도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없는 나는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실제로 해마를 포함한 내측두엽 손상 환자는 서술기억을 만들지 못해 항상 현재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② 흥미로운 주제를 꼽는다면,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나 장면이 아니라 시간속에 진행되는 스토리나 멜로디 같은 정보가 어떻게 저장되고 회상되는지 알아내는 것이 흥미로운 다음 주제가 될 것이다.




0KimHyung2.jpg 바다에 흘러가는 빙산이다.


[김형 성균관대 글로벌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① 왜냐면, 빙산의 일각이란 말처럼 기억의 일부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의식할 수 없다. 오랜 동안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빙산은 개인이 지닌 독특한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이다. 각 빙산이 독특한 모양으로 서로 다르게 흘러가듯이 개인의 독특한 기억형상은 삶의 바다에서 각자 행동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때로는 충돌을 만들지만 때로는 건설적인 진화의 힘이다.


② 흥미로운 주제를 꼽는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인 기억과 의식적인 기억의 형성과 상호작용이다.



0ParkHJ.jpg


인간이 주변 환경을 겪으면서

뇌에 생기는 생채기와 같다.


[박형주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한국뇌연구원 겸무교수]


① 왜냐면, 기억이 형성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은, 울창한 숲을 맨몸으로 걸어갈 때 생기는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가 감염이나 치유에 의해 번지거나 아물어 흉터로 남는 현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기억은 환경을 겪고 이를 그대로 저장하거나, 경험한 외부 환경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고를 하거나 기존 기억을 변형한다. 몸 상처와 다른 점은, 뇌에 생긴 경험의 상처(기억)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상처(기억)와 기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② 흥미로운 물음을 꼽는다면, 그것은 뇌에 존재하는 비신경세포와 신경-혈관단위체가 기억 형성과 유지에 어떻게 관여하는가이다.




0LeeInha.jpg 생존이다.


[이인아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교수]


① 왜냐면, 추억을 간직하는 것도 기억의 일부이지만 기억은 낭만적인 이유만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이뤄지는 모든 운동과 행동은 기억에 의존해 이뤄진다. 단순하게는 방문을 열고 닫는 법과 냉장고에서 그릇을 꺼내는 방법부터 복잡하게는 직장을 찾아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등 우리는 뇌세포의 기억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선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② 흥미로운 주제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억의 자연스러움’이다.




0JungMH.jpg 나의 정체성이다.


[정민환 카이스트 교수, 기초과학연구원 시냅스뇌질환연구단 부단장]


① 왜냐면, 평생 쌓아온 기억에 의해 우리의 인성과 세계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된 본능적인 행동만이 가능할 것이다.


② 흥미로운 주제를 꼽는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는 망각되고 일부는 재구성되어 아주 오래 지속되는 장기기억으로 변환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0ChoiJS.jpg 순서 정하기이다.


[최준식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① 왜냐면, 일상에서 좀 더 중요한 사건이나 단서는  우리 마음에서, 뇌의 기억회로에서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건이나 단서들은 뒷자리로 밀리다가 나중에는 그 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개체가 태어난 뒤에 경험하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 변화하면서 기억의 서열은 끊임없이 그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다.


② 중요한 물음을 꼽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경험한 외부 사건이 어떻게 신경세포 활동으로 부호화하며 표상되는가일 것이다.




0HanJHnew.jpg 시간의 강을 흐르는 ‘테세우스의 배’이다.


[한진희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① 왜냐면, ‘테세우스의 배’는 실체에 대한 철학적 패러독스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배를 구성하는 부품이 낡아 하나씩 교체하다가 다 바뀌면 그건 과연 같은 배일까, 다른 배일까? 기억도 비슷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을 지탱하는 생물학적 물질은 하나씩 교체되지만 우리는 우리는 이를 다른 기억으로 인지하지는 않는다. 그 기억 자체는 동일하겠지만 그것을 장식하는 색깔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닐까.


② 흥미로운 물음을 꼽는다면, 그것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은 과연 같은 기억일까, 하나의 기억에 대한 엔그램은 몇 개가 존재할까, 기억도 이식이 가능할까 등이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 연구에서 새로운 발견이 잇따르지만, 여전히 기억의 실체, 그 메커니즘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기억은 어디에 어떻게 저장될까? 다양하고 복잡한 기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기억이 저장되는 ‘기억의 흔적’을 뜻하는 엔그램(engram)은 100여 년 전 가설적인 개념으로 등장해, 이제 분자와 세포 수준에서 그 실체를 약간씩 드러내고 있다.

기획·정리/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기억의 과학, 기본 개념들

1000억개 뉴런, 100조개 시냅스
이들은 기억에서 무슨일을 할까?


00neuron.jpg
기억에 관한 연구결과가 곧잘 뉴스로 보도됩니다. 기억을 다룬 과학 뉴스를 좀더 흥미롭게 보려면, 신경과학의 몇 가지 용어에 익숙해지는 게 좋습니다. 기억은 뇌 신경세포와 시냅스에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뇌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경세포(뉴런)가 있죠. 그 수를 실제로 센다는 건 어렵기에 어림짐작으로 추산합니다. 널리 인용되는 뇌 신경세포의 수는 대략 1000억 개이지만 최근엔 860억 개라는 좀 더 정밀해 보이는 수치도 제시되네요. 다른 체세포와 달리 신경세포엔 매우 많은 가지(가지돌기와 축삭)들이 뻗어나와 서로 연결되는데, 신경세포 하나에 무려 수천, 수만 가지가 나 있다고 합니다. 신경세포들의 가지와 가지를 이어주어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가 바로 시냅스입니다. 그러니 사람 뇌엔 무려 수십 조 내지 100조 개의 시냅스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신경세포, 그리고 이들을 잇는 어마어마한 수의 연결 패턴은 우리가 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경세포들은 기본적으로 전기적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세포들끼리 신호 전달은 주로 시냅스에서 물질을 교환해 이뤄집니다. 글루타민산염, 도파민, 세로토닌 물질이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알려져 있죠. 간단히 말하면, 신호를 보내려는 신경세포에서 분비된 신경전달물질은 신호를 받아들이는 신경세포의 활성을 흥분하게 하거나 억제합니다.

흥분’과 ‘억제’는 매우 중요한 열쇳말입니다. 스위치를 켜고(+, 흥분성) 끄는(-, 억제성) 것에 비유해 상상하셔도 됩니다. 어떤 신경세포는 주로 흥분성 물질을 내는 흥분성 신경세포이며, 어떤 것은 반대로 억제성 신경세포입니다. 억제성 신경세포가 억제성 신경세포를 억제하기도 합니다. 탈억제 신경세포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흥분성 물질이 파도타기를 하듯이 여러 흥분성 신경세포를 거쳐 먼 거리에 있는 신경세포를 흥분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흥분과 억제는 수십조 개의 시냅스를 통해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를 깨우거나 잠재우는 뇌의 협주에서, 기본적인 작동 기제가 됩니다.

기억의 메커니즘은 이런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것은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분자들에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하며, 또한 세포들 간 연결 패턴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기억이 어떤 생물학적 현상인지를 말해주는 단 하나의 답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기억을 일으키는 여러 현상의 여러 측면이 지금 막 밝혀지고 있으니까요. 기억이 저장된 분자, 세포, 연결망 수준의 흔적, 즉 ‘기억 흔적’ 또는 ‘기억 장소’를 일컬어 과학자들은 엔그램(engram)이라 부릅니다. 박형주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겸무교수는 “예전엔 모호한 개념이었지만 점차 기억과 관련한 신경세포들과 그 연결 패턴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엔그램도 점차 생물학적인 실체로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철우 기자]

00neuronnet.jpg » 기억 형성에 중요한 해마 영역의 3차원 신경망. 3차원 전자현미경(SEM)'으로 관측. 한국뇌연구원 제공

이런 연구, 저런 발견

가짜 기억 만들고 치매 쥐 기억 회복하고…


최근의 몇몇 연구결과들이 기억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던져주고 있다. 이런 연구들은 신경세포(뉴런)의 활성을 선별해 조절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기법(‘광유전’학’)이 등장하면서, 이전까지 실험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기억의 특성을 신경세포 수준에서 보여주고 있다.

두 기억의 연결, 기억세포의 경쟁
http://scienceon.hani.co.kr/420356
멋진 옷을 차려 있고 거울 앞에 선 기억, 이어 집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딜 뻔한 기억은 왜 쉽게 연결되어 회상될까? 지난달 캐나다 토론토아동병원과 토론토대학 등의 연구진은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난 두 사건의 기억은 동일한 신경세포 집합에 겹쳐 저장된다는 쥐실험 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왜일까? 연구진은 앞서 기억이 생성될 때 흥분한 신경세포의 활성이 한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뒤이은 기억의 생성에도 손쉽게 선택되어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신경세포의 흥분성이 기억을 이루는 신경세포 집합에 참여하는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참여한 박성모 토론토대학 연구원(박사)은 “단일 기억을 주로 다루었던 이전 연구들과 달리 이 연구에선 두 가지의 연합기억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그 새로운 메커니즘을 밝혀주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기억 세포들의 활성을 조절하니 가까운 시간대의 두 기억이 분리하거나 먼 시간대의 두 기억을 연결하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연결을 잃을 뿐

http://scienceon.hani.co.kr/378874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게 곧바로 기억의 소실을 뜻하진 않음을 보여주는 연구도 제시됐다. 지난 4월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등 연구진은 알츠하이머 질환을 지닌 쥐를 이용해 이런 연구의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어떤 경험을 하고도 곧바로 잊어버리는 치매증세의 쥐 뇌에서 기억 세포들의 연결지점을 일부러 활성화하는 자극을 주자 실험 쥐가 기억을 회상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회복된 기억은 일정 시간 지속됐다. 이는 기억이 기억 세포들에 저장되지만 그 기억의 장소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할 때 떠올리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로서 주목받았다.


기억은 견고할까, 기억 바꾸기
http://scienceon.hani.co.kr/114991
같은 일본·미국 연구진은 2013년엔 실험용 쥐의 기억 세포들의 활성을 조절함으로써 쥐들이 겪지 않은 경험을 마치 실제 겪은 듯이 회상하게 하는 ‘가짜 기억’을 만들어냈다. <사이언스>에 실린 이 연구는 기억의 생성과 저장이 특정한 신경세포 집합에서 이뤄지며, 이 기억 세포들의 활성을 조절하면 기억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9년 <사이언스>에 ‘공포 기억 지우기’라는 논문을 낸 한진희 카이스트 교수는 “이런 실험결과는 기억이 실제 경험이 아니라 기억 세포의 활성 조절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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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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