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이 진화를 증명하다

우리는 어떻게 ‘과학의 품위’를 지키며 창조과학과 싸울 것인가?


00creationofAdam.jpg »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그린 ‘천지 창조’ 벽화의 일부 작품인 ‘아담의 창조’(1511년). 진화-창조 논쟁은 이번 교진추의 시조새 논란과는 별개로, 오랜 동안 한국에서 과학이 소비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문제에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단순한 창조론이 아니다. 그것 뒤에는 편협함과 암흑이라는 오래된 적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끝없는 전투를 마다해서는 안 된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유란 끝없이 감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작 아시모프, ‘창조론과 학교’ 중에서1)


창조론이 사회적 차원으로 무단횡단 할 때

00dot.jpg

진화-창조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었다. ‘결국 정의는 승리하리라’는 인류의 상식적 믿음은 적어도 진화-창조 논쟁에서는 진화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원숭이 재판’으로 유명한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의 스콥스 재판도 결국 과학 교사였던 스콥스의 승리로 끝났고, 미국 캔자스 주에서 진화론 교육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도 결국 진화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교진추(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의해 제기된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시조새 삭제 청원도 여론의 뭇매를 견디지 못한 교과부가 청원을 기각함으로써 다시금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듯 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정의가 승리함에 있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화론을 둘러싼 논란이 이번처럼 크게 폭발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피시(PC) 통신이 유행하던 1980년대부터 인터넷이 정보의 흐름을 바꾸던 1990년까지 돌이켜보면, 진화-창조 논쟁은 한국 사회에서 과학이 소비되는 가장 주요한 통로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과학과 연계된 학문들을 공부하는 누군가는 반드시 이 논쟁사를 접하게 되며, 이러한 논쟁들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둘러싼 여러 화두들과 중첩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과학을 수호하겠다는 어떤 이들은 리쳐드 도킨스라는 영웅을 만나게 되며, 과학적 회의주의라는 ‘스켑틱스(skeptics)’ 진영을 발견하고 희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또 종교인이면서도 진화를 믿는 어떤 이들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주제에 천착해 끝도 없는 대화에 탐닉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건간에, 진화-창조 논쟁은 이번 교진추의 시조새 논란과는 별개로, 한국에서 과학이 소비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임엔 분명하다.


저 유명한 제너럴리스트인 아이작 아시모프도 창조론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에 휩쌓인 적이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무대응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논리적 귀결인데, 이미 과학으로 인정받는 진화론이 창조론에 대응할 경우, 자칫하면 이 논쟁이 과학계 내부의 논쟁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모프도 훗날 인식했듯이, 무대응의 원칙은 창조론자들이 무엇을 공격하느냐에 따라 자칫하면 위험한 원칙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논쟁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무대응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지만, 창조론자들은 과학적 논쟁은 도구로만 사용할 뿐, 주로 과학을 구성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공격하는 데 치중하기 때문이다. 아시모프는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상황의 진짜 심각성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창조론적 견해들은 과학적 사상들의 시장에서 계속해서 확고하게 거부되어져 왔다. 창조론적 견해들이 내용이 그렇게 부실한 이상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따라서 창조론자들은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입법자들과 행정부를 위협하고 무엇이 과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는지를 정의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명령하는 법률을 만들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선례인가! 만일 대법원이 위협에 굴복해 그러한 것이 합헌법적이라고 선언하게 된다면, 이 국가에서 다원론과 자유로운 사상이 종말을 맞게 되는 기나긴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국교가 된 교회와 법에 의한 정론이 있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2)


개인의 신앙으로서 종교적 신념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사회 속으로 유입될 때에는 반드시 해당 사회의 상식과 마주해야 한다. 창조과학도 마찬가지다. 창조론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과학자의 존재는 사회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그 과학자가 자신의 수업시간을 이용해 과학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창조론을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순간이다. ‘과학 교육에서 창조론을 강의하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어, 한국 과학계의 요람이라는 카이스트 내엔 (카이스트는 이들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창조과학회의 가장 큰 지부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끼리 창조과학을 공부하는 수준을 넘어, 대중 강연과 심지어 대학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창조론을 설파하고 있으며, 이러한 오래된 행태에 대해 한국 과학계와 정부가 모두 침묵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번 시조새 논란은 지금까지 무대응의 원칙으로 일관해 온 한국 과학계와 정부가 새롭게 인식을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창조과학회는 몰상식한 광신자들의 조직이 아니며, 실제로 이들이 노리는 목표는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망교회 장로 대통령이 탄생하고, 이들의 노골적인 전략이 대중 앞에 드러난 것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창조과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그저 웃어 넘길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황우석 사태도 한국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유야무야 처리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황우석 사태와 비슷한 수준의 논문 조작과 연구비 횡령을 목도하고 있다. 당시 황우석 사태를 불러온 과학계의 구조적인 원인들이 지목되었고, 이를 치유해야만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지적들이 있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러한 방식을 체택하지 않았다. 황우석은 물러났고, 사건은 그렇게 덮였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은 황우석이라는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결론내려졌고, 과학계와 언론 그리고 정부는 황우석 사태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이번 시조새 논란도 아마 그런 운명이 될지 모르지만, 희망을 가져보도록 하자. 혹시 정부가 140여 명에 달하는 교진추 회원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진화학자가 5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창조론에 맞설 진화학자 육성 특별법’이라도 제정할지 모를 일 아닌가.



유쾌한 복수: ‘창조과학을 이용해 진화를 설명하기’

00dot.jpg

창조론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대응의 원칙도, 적극 대응의 원칙도 통하지 않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 도킨스가 창조론자들의 비논리성을 독설로 파괴하며 수십 년을 버텨왔지만, 그래서 한국에선 도킨스의 책이 나오기 무섭게 번역되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지만, 교진추와 창조과학회는 그러한 유행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런 사건을 저지른다. 아마도 싸움은 장기전이 될 운명이거나, 혹은 우리의 대응방식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박살내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창조과학을 과학으로 대접하게 된다는 모순을 낳는다. 그렇다고 창조론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간 이번처럼 어이없는 파국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과학을 구성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수준에서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창조과학에 대한 대응 방식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과학적 논리에서도 창조론에 대해 무대응의 원칙으로 일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로 진화론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멋지게 창조과학을 논파하는 길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가 있다.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진화생물학계의 유력 저널인 <진화생물학 저널(Journal of Evolutionary Biology)>에 ‘창조과학을 이용해 진화를 설명하기(Using creation science to demonstrate evolution)’라는 비슷한 제목의 논문 세 편이 실렸다.3) 필 센터(Phil Senter)가 시작했고, 토드 우드(Todd C. Wood)가 보강한(토드 우드는 창조과학자인데도 센터의 연구를 보강해주었다) 이 논문들은 창조과학자들이 ‘대진화(macro evolution)’를 부정하기 위해 개발한 독자적인 도구를 사용해 거꾸로 그들이 부정하는 대진화를 증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론 전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윌리암 페일리의 시계공 논증에서 시작된 창조과학의 역사도 매우 유구한 것이며, 최근의 지적설계론에 이르기까지 창조과학자들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유전자 수준에서 일어나며 실제로 목격이 가능한 ‘소진화’를 인정한 것은 창조과학자들이 전혀 몰상식한 존재만은 아님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험이 불가능하고 수십만 년 단위에서 일어나는 대진화만큼은 한사코 부인하고 있다. 그래서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창조과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이 대진화를 부정하는 창조과학적 근거로는 종과 종간의 ‘형태학적 연속성(morphological continuity)’이 완벽하지 않으며, 매우 불연속적이라는 게 있다. 이는 대진화를 주장하는 진화론에서도 논란이 되는 것이며, 실제로 화석기록의 불완전성은 최근의 분자계통분류학 등의 근거로 메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화석상의 기록들이 불연속성을 보인다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조차 허황된 연구결과에 기대고 있다면 어떨까. 센터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창조과학자들은 화석기록의 형태학적 불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창조생물학적 생물분류체계 (Baraminology)’라는 분야를 창조했다. 한국창조과학회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생물학적 분류체계’란 “Baraminology는 과학에 있어서 새로운 분야인데, 이는 baramin, 즉 창조될 당시의 baramin에 관해서 연구하는 과학”이다.4) 이러한 독특한 분류체계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 간 창조과학자들은 ‘ANOPA (analysis of patterns)’라던가 ‘CMDS (classic dimensional scaling)’ 혹은 ‘DC (distance correlation)’와 같은 분석방법을 개발해왔다. 센터는 ANOPA와 CMDS 기법을 사용해서 화석기록들을 분석하면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형태적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을 얻게 된다는 결론을, 우드는 DC를 사용해서 같은 결론을 얻었다.
 
ANOPA나 CMDS가 아주 비과학적인 분석틀은 아니다. 실제로 진화생물학자가 이 방법을 이용해서 논문을 게재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창조생물학적 분류체계’를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의 표준적인 방법론인 이 두 가지 분석기법으로 나온 결과는 창조과학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두 가지 방법론을 포기하거나 변형하는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센터는 우선 이 분석기법을 이용해서 공룡과 시조새 화석의 형태학적 연관성을 조사했다. 시조새가 왜 선택되었는지는 자명하다. 진화학자들에게도 창조과학자들에게도 시조새가 중간종인지 아닌지는 대진화의 결정적 증거로 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 대 종교’의 링 아니라 ‘진지한 과학’의 링 위에서

00dot.jpg

논문의 결론은 창조과학자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것으로, ANOPA와 CMDS 두 방법에서 모두 다 시조새와 공룡이 형태학적으로 연속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1920년대의 불완전한 화석기록들이 새롭게 발견되는 화석들로 보충되어 갈수록, 창조과학자들의 분석법은 시조새를 점점 더 공룡과 가까운 종으로 밀어넣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창조과학자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생긴다. 왜냐하면 센터의 분석 결과, 최근 20년 동안에 새롭게 발견된 화석들이 없다면 시조새와 공룡의 형태학적 연속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과학자들의 분석방법을 사용할 때 그렇다는 뜻이다. 결국 창조과학자들이 대진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조새는 공룡과 새의 중간형태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했던 바로 그 분석방법에 의해, 시조새가 공룡과 조류 모두와 형태학적 연속성을 지닌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창조과학자들도 과학자로서의 덕목들을 갖춘 이들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면, 이런 자명한 결과 앞에서 과학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센터는 그의 논문에서 창조과학자들을 비난하지 않고, 대신에 이들에게 살 길을 터주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분석법에 의해 형태학적 연속성이 밝혀졌으니, 대안 이론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센터가 대안으로 제시한, 즉 창조과학자들이 유일하게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은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를 인정하는 것 뿐이다. 즉, 전혀 다른 계통에 속한 두 종이 비슷한 환경에서 진화할 때 나타나는 수렴 현상으로 시조새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수렴진화의 가장 좋은 예로는 오징어의 눈과 사람의 눈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창조과학자들은 결정적인 난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대안 이론을 찾는 과정에서 또 다시 진화를 인정해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센터의 두 번째 논문은 창조과학자들에게 또 다른 대안 이론의 길을 보여주는데, 바로 ‘인공선택 (artificial selection)’이다. 창조과학자들의 패러다임 속에서 공룡 화석들의 형태학적 다양성을 설명하는 최적의 이론은 결국 인공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도대체 왜 인류가 공룡처럼 거대하고 위험한 동물을 사육해서 품종 개량을 시도했느냐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신이 인간과 공룡을 동시에 창조했고, 노아의 홍수로 인해 공룡이 멸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센터는 그의 첫 논문을 통해 자신이 <진화생물학 저널>처럼 진지한 학술지에 왜 창조과학의 방법론을 이용한 논문을 게재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생물학 학술지에 창조과학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다는 게 가치 없는 일이라고 여길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릴 필요를 느낀다. 북미와 유럽 인구의 상당수가 창조과학자들의 관점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고, 공교육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히 강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에 눈 감기보다는 이를 직시해야 한다. 창조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왔으며, 이들에 맞서 진화론을 방어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주류 과학의 성과들을 이용해 창조과학을 매번 공격해왔다. 하지만 만약 창조과학 그 자체가 진화론을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방어는 전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 속에서 창조과학은 역설적인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즉, 창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방법론에 의해 도출된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자신들의 이전의 연구결과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이 연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공룡에서 시조새로 이어지는 진화 과정을 하나의 예로 삼아, 이러한 방식의 대응도 가능하다는 점이다.”5)


센터와 우드의 논문을 단순한 우스갯거리로 넘겨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회에서 기초학문이 어떤 문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기초학문이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사회가 이를 무시했을 때, 그 사회는 얼마나 어이없는 문화적 충격을 겪어야만 하는지, 이 논문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매우 예의바르고 진지하게 수행된 이들의 연구는 종교와 과학을 대립 구도로 몰고가, 마치 진화론과 창조론이 링 위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포장하고, 이를 통해 이러한 사건들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무시해 버리는, 진화학에 몸을 담고 있는 여러 학자들과, 창조과학자들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센터는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실제로 이 분석법을 개발한 창조과학자들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의 진지함이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에게 더욱 서늘한 칼날이 되는 이유다. 그것이 창조과학자들을 단순히 조롱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이유다. 센터가 2011년 논문의 말미에 적어 놓은 ‘감사의 글’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창조생물학적 분류체계’에 관한 토드 우드와 데이빗 캐버노프(David Cavanaugh)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둘은 나와 이념적으로 반대 편에 서 있었지만 매우 협조적이었고 학자로서 동료애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이 논문의 결과가 그들의 이념에 반대로 나오는 것을 보고 거의 이 두 신사 분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느꼈을 정도다.”6)






  • 구글
  • 카카오
  • 싸이월드 공감
  • 인쇄
  • 메일
김우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원, 행동유전학
“생명에 취한 사람, 초파리들의 날개짓 속에 편안함을 느끼는 몽상가.” 초파리를 이용해 행동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메일 : heterosis.kim@gmail.com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부산행’의 좀비와 감염병 인식: 의학과 서사 (2)‘부산행’의 좀비와 감염병 인식: 의학과 서사 (2)

    시각김준혁 | 2017. 11. 09

      시 각   | 의학과 서사 ② |☞ 의학과 서사 ① 한 소녀가 다급하게 열차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불행히, 누구도 소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다. 신을 찾는 걸까, 용서와 구원을 구하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소녀는 상처 ...

  •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 의학과 서사 (1)“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 의학과 서사 (1)

    시각김준혁 | 2017. 10. 17

      시 각   | 의학과 서사 ① |2013년 방영되어 관심을 모았던 드라마 ‘굿닥터’가 최근 미국에서 리메이크 되어 인기리에 방영 중이라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1]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m Spectrum ...

  • 우리는 '질환'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행자들: 질병의 은유 (4)우리는 '질환'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행자들: 질병의 은유 (4)

    시각김준혁 | 2017. 09. 19

      시 각   | 질병과 은유 ④ |☞ 먼저 읽기: 햄버거병, 전쟁, 춤: 질병과 은유 ①백신, 죽음, 의료화: 질병과 은유 ②영웅과 희생양: 질병의 은유 ③서른네 해, 평범하다면 평범할 삶을 살아가던 로체 서덜랜드의 인생은 그날 ...

  • 영웅과 희생양: 질병의 은유 (3)영웅과 희생양: 질병의 은유 (3)

    시각김준혁 | 2017. 08. 24

      시 각   | 질병과 은유 ③ |☞ 먼저 읽기: 햄버거병, 전쟁, 춤: 질병과 은유 ①백신, 죽음, 의료화: 질병과 은유 ②지난해, 의과대학에 막 입학한 신입생을 맡아 지도하면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갓 ...

  • 혁신본부장 사퇴 파문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혁신본부장 사퇴 파문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각사이언스온 | 2017. 08. 18

      시 각    글쓴이: 호원경 서울대 의대 교수(생리학) “새로 만들어지는 혁신본부가 장기적 안목과 긴 호흡으로 이런 복잡한 일을 하나씩하나씩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와 과학기술계 사이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