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인공지능과 우리"

인간의 과학과 기술인 뇌과학과 인공지능은 다시 ‘나, 너,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뇌과학 박사과정 송민령 님이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의 모습을 전하면서 나, 너,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의 이야기를 독자와 나눈다.

인공지능과 우리뇌에서, 구별하기와 표상하기

[3] 표상과 자아 ①: 표상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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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신경망의 성능이 과거의 인공지능에 비해 월등한 것은

특징과 잡음을 가리지 않고 요소들을 인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요소들이 조합된 시스템을

표상해내는 유연함과 포용성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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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표를 보고 고양이와 관련된 항목에 빨간 체크, 개와 관련된 항목에 노란 체크를 표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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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고양이를 길러본 적이 없는 나의 경우는 아래와 같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사람, 개에게 물린 적이 있는 사람 등등, 사람에 따라 체크의 패턴은 달라질 것이다. 체크의 패턴은 개와 고양이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즉, 개와 고양이에 대한 나의 표상(representation)이 어떤지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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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은 살아가는 동안 축적한 정보의 패턴이며,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과 감정, 경험적 에피소드, 지식 등 다양한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1] 비슷한 환경적, 문화적 맥락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사한 표상을 공유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처럼 대단히 일반적인 경우조차, 표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표상은 무엇에 쓰이는가?



인공 지능과 표상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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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킨 일을 인공지능이 똑똑하게 수행하려면 입력된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2] 예컨대, 개에게는 개 사료를,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사료를 주는 것처럼 간단한 작업을 수행하려면 입력된 사진 속에 개 또는 고양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이 작업은 오랜 세월 인공지능 분야의 난제였다.


개인지 고양이인지를 구분할 수 있으려면, 개들에게서는 공통되지만 고양이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feature)을 추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다수의 입력 데이터에서 특징을 추출하여, 개 또는 고양이와 같은 범주에 대한 표상을 학습하는 과정을 표상 학습(representation learning) 또는 특징 학습(feature learning) 이라고 부른다.[2]


00rep3.jpg »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일은 쉬워 보여도 쉽지 않다. 동물들의 모양과 자세, 배경색 구분…, 각 픽셀의 내용은 사진마다 크게 다르다. 출처/ pixabay.com 등에서 수집


거에는 사람이 개와 고양이의 구별에 유용할 법한 특징들을 일일이 설정해주는 방식으로 컴퓨터 인공지능에게 표상 학습을 시켰다. 컴퓨터는 사람이 설정한 특징들을 어떻게 조합해야 개와 고양이를 구별할 수 있는지만 학습했다. 여러 종류의 특징과 학습 알고리즘이 고안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컴퓨터가 사람만큼의 정확도로 개와 고양이를 구별해내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00rep4.jpg » 과거 인공지능의 학습방법. 출처/ http://web.engr.illinois.edu/~slazebni/spring14/lec24_cnn.pdf


반면, 오늘날의 심층 인공 신경망(deep neural network)은 개와 고양이의 사진을 무수히 입력 받는 동안 단위들 간의 연결 세기를 스스로 조절하며 표상 학습을 한다. 지난번 연재 글에서 다룬 감독학습 (supervised learning)처럼 신경망의 출력 결과가 맞는지 틀린지 피드백을 줄 수도 있지만 피드백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비감독 학습(unsupervised learning) 만으로도 놀라운 수준의 학습이 일어난다.



인공 신경망의 표상 학습: 헵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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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rep5.jpg » 인공신경망. 인공 신경망의 표상 학습에서는 단위들 간의 인과관계가 연결 세기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인공 신경망의 기본 구조은 지난번 연재 글 참고).


른쪽 그림의 신경망에서 단위 A와 B를 생각해 보자. 단위 A가 출력을 내지도 않았는데 단위 B가 출력을 내거나, 단위 A가 출력을 냈는데도 단위 B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두 단위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위 A가 출력을 낸 뒤에 단위 B가 출력을 낸다면 A의 출력이 B의 출력을 유발했다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단위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을 때만 이 둘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연결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헵 규칙(Hebbian rule)이라고 한다.[3]


이제 아래 그림 A처럼 출력층의 단위들이 입력층의 모든 단위들과 약하지만 무작위적인 세기로 연결된 인공 신경망을 생각해 보자.[3] 그리고 아래 그림 B처럼 줄 두 개로 구성된 입력들을 무작위적인 순서로 넣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00rep6.jpg » 좌: 입력층 단위의 붉은 색이 강할수록 화살표로 표시된 출력 단위와의 연결 세기가 강하다. 다른 출력 단위들도 이처럼 입력층의 모든 단위들과 약하지만 무작위적인 세기로 연결되어 있다. 우: 줄 두개로 구성된 입력들.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입력층의 단위들과 무작위적으로 연결된 출력층 단위들은 여러 입력들을 받는 동안 이렇게든 저렇게든 출력을 내게 된다. 출력층 단위 중에는 아래 그림 A와 같은 입력이 들어왔을 때 출력을 일으킨 단위(빨간 화살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헵 규칙에 의해서 이 출력 단위는 입력된 줄 두개를 구성하는 입력 단위들과 더 강한 연결 세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신경망에 아래 그림 B와 같은 두번째 입력이 가해졌는데 우연찮게 같은 출력 단위가 또 다시 활성화 되었다고 하자. 이 출력 단위와 입력층 단위들 간의 세기는 헵 규칙에 따라 수정될 것이고, 그 결과 이 출력 단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입력에서 공통되는 특징인 두 번째 세로줄과 특별히 강한 연결 세기를 가지게 된다.[4]


00rep15.jpg » 헵 규칙(Hebb rule)에 따라 신경망이 특징(feature)을 표상하는 과정. 출력 단위와 입력 단위들 간의 세기가 강할수록 노랗게 표시된다. 화살표로 표시된 출력 단위는 두 번의 입력에서 공통되는 부분인 두 번째 세로줄을 표상하게 되었다.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런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이 출력 단위는 두 번째 세로줄하고만 강한 연결을 갖고 나머지 입력 단위들과는 약하게 연결된다. 이때, 이 출력 단위가 두 번째 세로줄이라는 특징(feature)을 표상(represent)한다고 하고, 이 두 번째 세로줄을 특징(feature)이라고 한다. 아래 동영상처럼 학습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출력 단위들이 입력을 구성하는 가로줄 또는 세로줄을 표상하게 된다.


[ https://youtu.be/5X8WT3Tav4s 동영상에서 신경망의 위에 있는 표는 각 출력 단위의 연결 세기들이 학습이 진행됨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


특징은 입력 단위들의 특정한 조합 방식을 뜻한다. 앞서 보여준 입력들만 사용하는 한, 신경망을 아무리 오래 학습시켜도 대각선 모양의 특징을 표상하는 출력 단위는 생기지 않는데, 이는 입력 데이터에 대각선 모양의 조합 방식이 없기 없기 때문이다. 입력된 데이터에서 자주 나타나는 조합 방식이 특징이기 때문에, 특징은 다르지만 어딘지 비슷한 대상들에서 공통 속성을 찾아 범주화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또한 특징은 여러 개별 입력들에서 공통된 부분이므로, 특징이 표상된 출력층은 입력층보다 한 단계 더 추상화된다.



인공 신경망의 표상 학습: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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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rep8.jpg » 인공신경망에 경쟁이 필요한 이유.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그런데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서로 다른 출력 단위들이 동일한 특징을 중복해서 표상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위 동영상에서 학습이 끝났을 때(오른쪽 그림)를 보면, 같은 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출력 단위들은 같은 특징들을 표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중복의 정도가 지나치면, 다수의 출력 단위가 빈도가 높은 소수의 특징을 표상하는데 집중되는 반면, 빈도가 낮은 특징을 표상하는 출력 단위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3]


신경망에서는 출력 단위들 간의 경쟁을 통해서 이런 현상을 방지한다. 강한 출력을 내는 단위만 남기고 나머지 출력 단위들은 강제로 꺼버리는 것이다 (아래 그림). 그런 뒤에 헵 규칙을 적용하면 강한 출력을 낸 출력 단위들은 헵 규칙에 따라서 연결이 강화되는 반면, 약한 출력을 낸 출력 단위들은 헵 규칙에 따라서 연결이 약해진다.


00rep9.jpg » 인공신경망에 경쟁이 필요한 이유.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00rep10.jpg » 경쟁을 적용한 인공 신경망의 학습결과. 시뮬레이션 출처/ https://grey.colorado.edu/CompCogNeuro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동일한 입력 특징을 여러 출력 단위들이 중복 표상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신경망이 표상할 수 있는 입력 특징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진다.


오른쪽 그림은 위 동영상보다 강한 경쟁을 적용했을 경우의 학습 결과인데, 동일한 입력 특징이 중복 표상되는 경우는 줄어들고, 여분으로 남는 출력 단위들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여분의 출력 단위들은 나중에 색다른 입력을 접했을 때, 이 입력의 특징들을 표상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이처럼 단위들 간의 경쟁은 여러 개의 단위가 몇 개의 특징에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특징의 표상에 분배될 수 있게 한다.



스스로 표상 학습 하는 인공 신경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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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경망이 깊게(deep) 쌓인 거대한 신경망이라면 신경망의 층을 하나 지날 때마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요소들의 조합(특징)이 표상되며 점점 더 추상화 된다(아래 그림). 그러다가 마침내, ‘개라는 범주에 속하는 동물들의 외양’처럼 상당히 추상화된 특징을 표상하고, 이로부터 개와 고양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5]


00rep11.jpg » 과거의 인공지능과는 달리 인공 신경망은 입력로부터 일반화된 특징들을 스스로 찾아낸다. 신경망 부분 출처/ http://neuralnetworksanddeeplearning.com/


람의 뇌처럼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훨씬 더 큰 신경망이라면,  위 그림의 주황색 상자에 해당하는 부분에, 이 글의 처음에 보았던 표와 비슷한 특징들이 표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꼬리 흔들기, 멍멍, 귀엽다 등의 조합이 반복해서 입력되다 보면 좀더 추상화된 개념인 ‘개’의 표상이 된다. 비로소 개가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답에 대한 피드백 없이 입력만 제공하더라도 인공 신경망은 헵 규칙과 경쟁을 통해 스스로 조직하며 표상 학습을 할 수 있다.[6] 사진 속의 물체를 인식하는 인공 신경망의 능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유투브와 같은 빅데이터를 학습하면서 청소, 고양이 등의 개념(표상)을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 나아가 아래 그림처럼 사진의 내용을 언어로도 기술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7] 인공지능이 외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래 동영상 참고)

00rep12.jpg » [ 사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인공지능. 한글 설명은 필자가 인공지능이 영어로 서술한 것을 번역한 것. 출처/ https://youtu.be/t4kyRyKyOpo

[ https://youtu.be/t4kyRyKyOpo ]


인공지능이 이렇게까지 발전했다니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런데 신경망으로 이뤄진 사람의 뇌에서도 표상 학습이 일어난다. 인공지능과 의식, 직업에 대한 염려 등은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은 ‘인공 신경망을 통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선물부터 챙기자.



내적 표상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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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모델인 표상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 대부분의 감각정보들은 뇌에 들어올 때 시상(thalamus)이라고 하는 부위를 거치는데, 놀랍게도 눈에서 시상으로 들어가는 정보의 양은, 시각피질에서 시상으로 전해지는 정보의 1/6에 지나지 않는다. 청각, 촉각 등 다른 감각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데 내적 표상에 대한 정보가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것일까?


다음 음악 파일을 주의깊게 들어보자.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 음성파일 https://youtu.be/rQQk466rXYo ]


도저히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다면, 이번에는 다음 동영상을 보자.


[ 동영상 https://youtu.be/5vbOTYdGeFs ]


어떤가? 가사가 훨씬 잘 들리지 않는가? 음악 파일과 동영상은 둘 다 크레용팝의 <빠빠빠>를 거꾸로 재생한 것이므로 가사가 없다. 그럼에도 동영상을 볼 때 가사가 들린다고 느껴지는 것은 자막을 읽으면서 활성화된 내적 표상이 소리의 부족하거나 모호한 부분을 메꿔 인식을 편향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술취한 친구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것도, 모두 내적 표상의 덕분이다.


간은 언어를 통해서 내적 표상을 더욱 정밀하게 다듬고, 비슷하지만 다른 표상들을 세분화하고, 마음 속 시뮬레이션을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대학에서 전문 용어를 배우고, 학습한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어려운 전공 내용을 공부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언어가 표상의 습득, 제련, 사용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책 <목소리를 보았네>에서 언어를 배우지 못해 정신적으로 결핍된 삶을 살아가는 청각장애인들을 통해서, 언어가 소통이라는 사회적 기능뿐 아니라 사고의 재료라는 지적인 기능도 수행한다고 지적한다.[8]


선천성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뒤늦게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수많은 개별 입력을 일반화하는 인공 신경망의 표상 학습처럼, 단어도 개별 현상들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거쳐 학습되는 것으로 보인다.[8] 이 아이들이 “의자” 같은 단어가 특정한 의자 한 개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의자의 속성(의자성)을 지니는 여러 사물을 통칭하는 것임을 처음으로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는 수많은 의자와, 의자가 아닌 여러 사물들에 대한 경험을 일반화, 추상화하여 “의자성”이라는 표상을 형성하고, 의자성을 가지는 사물들을 “의자”라는 기호로 상징한다는 규칙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는 감각기관으로 접하는 순간순간의 현상 세계에 머물러 있던 청각장애 아동들이 단어들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며 지적인 능력이 눈부시게 깨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내면에 표상하고, 이 표상을 활용해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면서 아이들은 세상과 깊이 관계맺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처럼,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도덕, 화폐, 법률, 국가 등 온갖 표상을 상상해 내고 서로 공유해 왔다. 그리고 공유된 표상을 현실 속의 제도, 풍속, 문화로 구현함으로써 문명을 이룩했다.[9]



경계선이 없는 자연과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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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토록 유용한 표상도 사용하기에 따라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표상은 경험을 일반화하여 구축한 내면의 모델이지만 우리는 이 순서를 뒤집어, 내적 표상을 기준으로 외부 현상을 판단하곤 한다. 과거에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게 하는 특징을 사람이 직접 설정해주고, 컴퓨터가 이 특징들을 활용하도록 한 것 자체가 표상을 기준으로 현상을 판단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개와 고양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했던 과거의 인공지능처럼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아래 사진 속의 인물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아무리 뜯어봐도 여성인 이 단거리 주자는 2014년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여성 종목의 참여가 금지되었다.[10] 이 사건은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할 것이냐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00rep13.jpg » 여성 종목의 참가를 금지 당했던 인도의 육상선수 두티 찬드(Dutee Chand). 출처/ https://www.youtube.com/


은 사람들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포는 스펙트럼에 가깝다.[11] 자녀를 몇이나 낳은, 아무리 뜯어봐도 정상적인 남성(또는 여성)이 미분화된 여성(또는 남성) 생식기를 가진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지 않다. 성염색체가 XX이면 여성, XY이면 남성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덜 전형적인 생식기 발달을 보이는 경우는100명 중의 1명꼴로 추산된다.


임신 중에 자녀의 세포가 모체로 들어와서, 혹은 모체의 세포가 자녀의 몸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심지어 흔하게 일어난다.[11] 자녀의 세포는 어머니 몸 속의 다양한 장기에 통합되어 수십 년 간 체류하곤 한다. 자녀가 아들인 경우, 아들의 몸 안에 여성인 어머니의 XX 성염색체가, 여성인 어머니의 몸 안에 아들의 XY 성염색체가 섞여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그러할 뿐인 자연(自然)에는 남녀의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표상을 구축하고는 그것을 객관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경계선이 없는 자연을 무리하게 구분하다 보면 앞에서 본 단거리 주자의 경우같은 문제가 생기곤 한다. 주최측은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하나의 요인을 기준으로 테스토스테론 이외의 온갖 요인들이 다양하게 조합된 시스템인 여성 또는 남성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은 테스토스테론은 남녀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feature)인 반면, 나머지 요소들은 별 상관이 없으므로 상쇄(average-out)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컨대,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비교해보면, 각 집단 내의 편차를 고려하더라도 남성 집단의 테스토스테론 평균이 여성 집단보다 높다(아래 그림). 반면,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은, 각 집단 내의 편차를 고려했을 때 별반 다르지 않다. 이 경우, 상쇄된 편차인 시력은 남녀 구분에서 중요치 않은 신호, 잡음으로 간주된다. 특징과 잡음을 나누는 이런 접근은 평균과 표준편차로 집단을 설명하는 정규 분포 및 정규 분포를 활용하는 통계 기법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


00rep14.jpg » 정규분포를 사용한 집단의 구분. 정규 분포의 사용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므로 데이터의 모양은 실제의 테스토스테론 수치 및 시력과는 무관하다.


문제는 특징과 잡음(혹은 신호와 소음)의 구분이 자연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관측자가 임의로 결정했다는 데 있다. 이처럼 특징을 규정하는 방식은 과거의 인공지능이 그러했듯이 얼마간의 효과는 있겠지만 불충분하다. 잡음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개인 내에서 입체적으로 작용함을 무시한 채 평면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이 요소들이 집단 내에서 상쇄(average-out)될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도 문제다. 이래서야 집단 간의 비교는 할 수 있어도 개인 간의 비교는 어렵다.[13]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뇌신경망 등의 시스템이 겉보기에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구성 요소들을 조율하는 방법은 입체적이고도 다양하다.[14][15] 하나의 요소가 너무 강하거나 약해지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던 요소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분포되고 다르게 작동하면서 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다. 인공 신경망의 성능이 과거의 인공지능에 비해 월등한 것도 특징과 잡음을 가리지 않고 요소들을 인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요소들이 조합된 시스템을 표상해내는 유연함과 포용성 덕분이다.



표상의 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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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경계선이 없고 표상의 모호한 경계는 문제를 일으킨다면, 표상은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헛된 걸까? 문제는 표상 자체가 아니라 표상들이 주변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습관에 있다. 다음 이야기를 보자.


강에 살던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시꾼들이 “이야~ 물 참 좋다!”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 물고기는 물이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좋다니 꼭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길을 떠난 물고기는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물이 뭔지를 깨닫고 고향에 돌아왔다. 친구들은 기대에 차서 물이 뭐냐고, 물이란 게 그렇게 좋더냐고 물었다. 당신이 이 물고기라면 평생을 물 안에서만 살았던 친구들에게 물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맥락과 관계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기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천동설이고, 태양을 기준으로 보면 지동설이다. 주류 집단의 남녀 표상에 따라 트랜스젠더(transgender; 몸과 마음의 성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의 남녀 표상을 “정상화” 하는 전환 “치료”를 강제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폭력이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한 트랜스젠더가 전환 치료를 거부하다 자살했고, 이 사건이 트랜스젠더들의 인권에 관심을 모으면서, 오바마의 동성결혼 합법화에도 힘을 실어주었다.[16]


또한 상대적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추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 <미의 역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느리다를 생각하지 않고는 빠르다를 생각할 수 없고, 여성성을 재정의 하는 순간 남성성도 재정의 된다.[17] 표상의 경계를 긋는 순간 안팎이 생겨나고, 하나의 표상을 정의하는 순간, 인접한 표상들의 속성도 덩달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맥락에 의존한다. 갈릴레오가 뜻을 지킨 것은 소신이라고 하고, 필름회사 코닥이 뜻을 지킨 것은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한다.[18] 뜻을 지키는 데 목숨도 걸었던 갈릴레오를 두고 코닥을 지나치다고 하는 것은 적절함이 정도의 중간이 아니라, 용법의 중용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유불급은 한치도 넘어서도 모자라서도 안되는 완전무결한 표상으로서의 중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상황 판단과 상황에 맞는 용법을 지향한다.


락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에, 모든 표상은 수단인 동시에 약점이 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여성을 얕보고 남성들의 리그에서 배척하던 시절, 여성을 얕보았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내 대장부들’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아녀자들’의 일에 낄 수 없었다. 마나님들은 곳간 열쇠를 꼭 쥐고 있다가 죽을 때면 며느리에게 넘겼다.


표상의 이런 속성을 알면 하나의 표상을 바꾸기 위해서 여러 다른 표상들과 맥락을 활용하는 전략을 훈련할 수 있다. 동서고금 최고의 병법서라는 <손자병법>은 전쟁을 논한다면서 정치, 법률, 경제, 도덕 등 온갖 것을 다채롭게 구사한다. 오늘날의 정치와 마케팅도 사람들이 어떤 표상을 어떤 맥락(프레임)에서 어떤 표상과 연관지어 인식하게 하느냐 하는 표상들의 전쟁이다.[19]


그래서 다양한 표상과 그 용례를을 확보하고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은 내가 가진 패를 늘리는 것과 비슷하다.


나와 다른 타인의 표상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점에서 보면 내가 가진 표상의 레퍼토리를 확장해주는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콜럼버스의 계란처럼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못해서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찬물 마시는 것도 보고 따라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좀더 자라면 이해와 공감을 보태 타인의 표상을 좀더 정교하게 벤치 마킹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처럼 타인의 표상을 뒤집어 습득할 수도 있게 된다.


낱의 표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따로따로 동작한다고 여길 때보다, 또 모든 표상이 환상이라고 여길 때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신나지 않는가? 표상이 객관이라던 관점(정)에서, 모든 표상이 헛되다는 관점(반)에서, 표상은 관계와 맥락에 위치시켜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관점(합)까지.


인공지능이 좀 낯설더라도 선물은 마음에 들었길.◑   [②편 글]


[주]


[1] The Brain with David Eagleman: What Is Reality? BBC Documentary (2016). https://www.youtube.com/watch?v=3MSw2irv0-A

[2] Y Bengioy, A Courville, & P Vincenty (2014) Representation Learning: A Review and New Perspectives. arXiv.

[3] RC O‘Reilly & Y Munakata. Computational explorations in cognitive neuroscience. MIT Press (2000).

[4] 최근에 받은 입력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는지는 학습율(learning rate)에 따라 달라진다. 학습율이 크면 클수록 최근에 받은 입력의 영향이 커지는데 그만큼 이전에 학습한 내용이 빠르게 지워지므로 좋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처럼 우연히 하나의 특징을 공유하는 입력이 연이어 주어진다면 몰라도, 다양한 입력들이 무작위적으로 들어올 때 학습율이 높으면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잊는 과정이 반복되어 학습의 진척이 없다.

 지난 번과 이번 연재에 설명된 인공 신경망은 대단히 단순화된 것으로 알파고나, 물체 인식에 쓰이는 신경망과는 다르다. 이들 신경망의 각 층은 서로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기둥들로 구성되곤 하므로 한 층이 기실 한 층이 아니다. 이런 구조의 신경망을 convolutional neural network라고 하는데 시각 피질의 구조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심층 인공 신경망의 막대한 계산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과적합(over-fitting) 문제에도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convolutional neural network 참고자료/ http://cs231n.github.io/convolutional-networks/

[5] N Jones (2014) The learning machines. Nature 505:148. http://www.nature.com/news/computer-science-the-learning-machines-1.14481

[6] 신경망이 사람의 피드백도 받지 않고(비감독 학습) 스스로 연결 세기를 조절해간다는 측면에서 자기 조직망(self-organizing map)이라고도 부른다.

[7] http://cs.stanford.edu/people/karpathy/deepimagesent/

[8] 올리버 색스, 목소리를 보았네, 알마 (2012). 올리버 색스는 언어습득에서 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어떤 형태의 언어든, 부모의 목소리를 비롯한 온갖 정보를 종합해 일반화, 추상화, 상징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해내야 아기들이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청각장애 아이들은 목소리 정보가 빠지다 보니 이 과정에 진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자녀가 청각장애를 가진 줄을 부모가 몰랐거나 (자폐증이나 지능 문제로 진단된 아이들 중 청각장애가 더러 있다고 한다), 아이가 청각장애를 가진 사실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정상인’들의 입말만 억지로 가르치려다 보면, 아이들이 이 과정에 진입하는 시기를 놓치기 쉽다.

 반면, 부모가 청각장애인 덕분에 ‘청각’의 결여를 보완해줄 ‘시각’적 인 정보, 수화를 어려서부터 습득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이 아이들은 일반화, 추상화, 상징화 과정을 이미 해봤기 때문에 수화 형태의 언어조차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 훨씬 더 빨리 글자와 입말을 배운다. 이 책을 통해 수화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입말을 하는 사람들과 사고 방식도 다르다는 걸 알고 수화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수화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9]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10] Dutee Chand, female sprinter with high testosterone level, wins right to compete. (NY Times 2015.7.27)

[11] Claire Ainsworth (2015) Sex redifined. Nature 518: 288-291.

[12] 데이비드 살스버그, 통계학의 피카소는 누구일까, 자유아카데미 (2011).

[13] 샤론 버치 맥그레인, 불멸의 이론 - 베이즈 정리는 어떻게 250년 동안 불확실한 세상을 지배하였는가, 휴면 사이언스 (2013).

[14] E Marder (2011) Variability, compensation, and modulation in neurons and circuits.  PNAS 108: 15542-15548.

[15] E Marder (2012) Neuromodulation of neuronal circuits: back to the future. Neuron 76: 1-11.

[16] Obama Calls for End to ‘Conversion’ Therapies for Gay and Transgender Youth. (NY Times 2015.4.8)

[17]https://www.ted.com/talks/jackson_katz_violence_against_women_it_s_a_men_s_issue?language=ko

[18] 125년 코닥 필름 끝내 사라진다 (경향신문 2013.8.21). 카메라/필름 회사 코닥은 한 때 필름과 필름 카메라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러나 전자 카메라의 부상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적응하는 대신 필름 카메라만을 고수하다2013년, 125년의 화려한 역사를 뒤로한 채 사라졌다. 코닥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 회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19] 조지 레이코프 & 로크리지 연구소. 프레임 전쟁. 창비 (2007).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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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빗소리를 좋아하고, 푸름이 터져나오는 여름을 좋아합니다. 도파민과 학습 및 감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뇌과학이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 되기를, 우리가 이런 존재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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