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식물 연구하며 생긴 물음 "생존이란 건 무얼까"
오하나의 “식물 실험실의 생명 왈츠” (1)
연재를 시작하며
» 사진 / 오하나
난방 시설이 빈약한 일본식 전통 가옥들이 도로변에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유서 깊은 절들이 눌러 앉아 있는 이곳은 일본의 지방 도시 교토다. 일본의 중고등학교의 수학 여행지는 대개 교토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이 도시는 일본에서도 관광 명소로 인기가 높다. 나는 이곳에서 아침마다 상쾌한 발걸음으로 ‘모닝 세트’를 파는 카페를 지나, 벚꽃이 흐드러진 교토시립미술관과 동물원을 지나, 헤안진구 신사를 지나, …연구실에 도착한다.
나는 이제 막 석사 2년차 되는 교토대학교 대학원생. 현재 인간환경학연구과에서 식물의 환경 적응과 진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연구 대상으로 삼은 식물종까지 소개하자면, 미야코구사로(국명 ‘벌노랑이’, 학명 ‘Lotus japonicus (Regel) K. Larsen’)라는 풀인데, ‘미야코’라는 말은 수도를, ‘구사’라는 말은 풀이나 잡초를 뜻하니,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서 이 잡초가 많이 발견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유학 온 평범한 석사 2년차 학생인 내가 과학웹진 <사이언스 온>에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은 나의 작은 실험실 생활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진화생물학에 관한 전문지식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석사과정 연구생이 나름의 연구 과정에서 배우고 깨닫고 고민하는 여정을 담은 과학과 생활의 에세이로 꾸미고 싶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생존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식물의 생존에서 개화(꽃핌)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를 연구생 수준에서 고민해보고 싶다. 그런 뒤에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분자생물학 중심의 실험 과정에서 겪으며 나를 깨우치는 일들에 관해, 그러니까 실험과 공동연구에 관해, 일본 유학생활에 관해, 스승과 동료의 관계에 관해 써나갈 생각이다. 이 연재의 여정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고, 다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생존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목표로 에세이를 써나가고 싶다. ‘생존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정답이 없다면, 물음을 찾는 여정에는 독자 분들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틀린 지식을 지적해주면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살펴보겠고, 토론과 의견 교환도 환영이다. ‘교토의 겨울은 그리 안 춥던데요, 엄살 떠시기는…’ 식의 댓글도 (제일) 좋다.
실험…재실험…실패와 낙담, 그리고 다시
우리 연구실은 세토구치 히로아키라는 부교수 한 명이 이끌어 나가는 작은 랩(연구실)이다. 교수와 학부생을 다 합쳐 11명이 소속돼 있으며, 50평도 채 되지 않는 방에서 연구 생활을 하고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식물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아, 계통지리학과 진화, 멸종위기 식물의 보전 등에 관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도 다양한 연구 주제를 어떻게 한 사람의 교수가 다룰 수 있는 걸까? 입학할 당시에 내게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동료의 연구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다양한 연구의 ‘공집합’ 영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영역은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지도교수의 발상 회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식물은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해 나가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 고산 식물이 빙하기에 어떻게 분포를 확장해 나갔으며 종 분화를 했을까? (계통지리학)
- 일본의 류큐 제도(오키나와 현에 속한 섬들. ‘일본의 하와이’라고 불릴 만큼 환경·문화의 배경이 본토와는 크게 다르다)에는 고유종이 유달리 많은데 이건 갈라파고스 섬에서 다윈이 생각해낸 진화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식물의 종분화 과정)
- 시가 현에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에는 해변 식물들이 다수 분포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고립된 교배로 인해 외부 환경의 변화에 극도로 취약해진 상태이진 않을까? (멸종위기 식물의 평가와 보전)
부교수는 취미 반, 연구 반으로 키우는 화초들의 잎사귀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면서 의문형으로 끝나는 혼잣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가끔은 혼잣말이 그저 혼잣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학생들은 “네? 지금 저한테 말씀하셨나요?”라고 화들짝 놀라 되묻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혼잣말들이 기발하고도 어엿한 연구 주제로 바뀌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런 연구 주제는 방금 광산에서 캐낸 원석 그대로의 다이아몬드와도 같다. 교수와 학생은 원석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가장 있을 법한 연구 가설을 세운다. 즉, 다이아몬드를 세공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잡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학생들은 각자 2년(석사과정), 또는 3년(박사과정) 동안 연구 방법을 디자인(설계)한 뒤 세공 단계에 들어간다. (진실에 가까운 세공 과정은 이러하다. 디자인, 실행, 그러나 가설과 다른 결과, 약간의 실망, 디자인 수정, 다시 실행, 그럴 듯한 결과! 그러나 결국에 다른 결과, 다시 낙담…, ‘후후후 괜찮아’ 스스로 위로하기, 다시 디자인 수정...ㅍ0)‘#(ㅉ&%)“ㅒ쇰$…) 그리고 졸업 시기가 다가오면 몇 편의 논문을 ‘연구 시장’에 상품으로 내어 놓는다. 잘 세공된 연구 결과는 저명한 과학저널에 보내고, 기대에 못 미친 연구 결과는 나름대로 눈을 낮춰 2급 이하의 과학저널에 보낸다.
나의 실험실 생활, 나를 성장시키리라
한국에서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전화를 하면 꼭 내게 묻는 말이 있다. ”연구실 생활은 어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조금은 망설이다가, ”힘들지만 즐거운 편인 것 같아” 하고 답하곤 한다. 어느 정도 힘든지, 그리고 왜 즐거운 편인지는 말해주지 않은 채. 이 에세이를 통해 연구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해 간다면 “어느 정도”와 “왜”에 대해 답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떠올려 본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연구생이라고 특별히 누구보다 더 힘들거나 더 즐겁지는 않은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나는 아직 대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으니 야생에 던져져 고생하는 다른 사회 초년생 친구들에게 투덜대는 것도 좀 미안하다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번씩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찾아오리라. 그리고 때에 맞춰 난 석사학위를 받게 되리라(제발~). 이 연재를 통해 내 스스로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사실 나의 숨겨진 진짜 목표다.
» 세토구치 연구실 사람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마츠다와 히가시는 올 3월에 석사 졸업을 했다. 뒷쪽에는 교토대의 상징인 보리수나무와 시계탑이 있다. 두 딸을 안고 있는 분이 세토구치 히로아키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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