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와 ‘자유’
기 고
글쓴이: 김태신 생명과학 박사, 현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
낡은 문이나 창문만을 그리는 한 화가의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낡은 문고리를 표현한 것이 있었는데, 문고리 주변의 패인 홈이 어떻게 생겼는지 페인트칠이 벗겨진 모습은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 작가의 시선이 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두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그림들을 통해 신기하게도 온기를 느꼈다. 그 그림들이 그의 자발적 행동에 의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화가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답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그 안에는 그의 자유의지가 들어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생각은, 과학자는 아직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밝고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은 과학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는 사회적이나 학문적으로 소외된 곳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스스로 그러함(자연)'과 '스스로의 이유(자유)'. 출처 / 사이언스온, 서울 시내 공원에서 촬영
이세돌 프로기사 9단과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의 대국이 있은 뒤에 많은 이들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편, 정부는 국가 산업의 경쟁력을 고민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형 알파고 개발’이라는 말로 함축되는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 계획이 발표되었다. 인공지능뿐 아니라 최신 정보기술(IT)을 망라하는 것이라 한다. 데이터 과학과 맞물려서 정보기술이 갖는 강력함과 중요성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정부의 계획은 많은 이들의 우려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 사업이 과연 다수 국민을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 톱-다운(top-down) 방식의 연구 관리가 지니는 한계성, 그리고 장기적 비전의 결여 등에 관한 문제이다.
최신 과학과 트렌드, 그리고 학문 하는 자세…
최신 과학 연구의 흐름에 합류하는 것은 마치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며 하는 긴줄넘기에 끼어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돌고 있는 줄의 리듬을 파악하고선 적절한 시기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줄을 열심히 넘다 보면 어느 새 발이 걸리며 줄넘기는 끝나고 만다. 과학계에는 패션계만큼이나 트렌드가 확연하다.
내가 속한 의생명과학도 사정이 비슷한 것 같다. 현대 의생명과학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암’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그 안에 많은 세부 분야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학계-의료계-제약업계를 포함하는 다분야에 걸쳐 큰 주목을 받지만, 어떤 것은 학문적인 영역에서만 그에 대한 관심이 관찰된다. 학문적 영역 내에서도 어떤 주제에는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지만 어떤 것에는 극소수만이 관심을 가진다. 이제 막 연구에 발을 들인 대학원생이 이런 현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 과연 나는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갓 박사학위를 취득한 ‘꽃박사’도 이제 본격적으로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이처럼 연구 주제를 결정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접근해야 할까? 우리가 학문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점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아직까지 많지 않았는데, 사실은 내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였으며 또 누군가는 이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계의 문제점? ‘자유’와 ‘질문’의 실종
한국형 알파고 개발을 위한 정부의 지원 계획을 다시 생각해보면, 과학자들이 하는 연구는 사실상 어떤 ‘맥락’ 안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례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이슈의 등장, 외국과의 경쟁, 미래산업 육성 등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일 뿐 절대적이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아직 ‘자유’롭지 않다. 철학자 한병철은 학문이 처한 이러한 현실을 간파하고 있다. 2014년 독일 <차이트(Zeit)>에서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인용한다.
“학자들은 오늘날 앎의 사회적 맥락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증적인 연구를 합니다. 모든 지식이 지배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지배관계, 새로운 장치가 새로운 앎,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냅니다. 앎은 항상 지배 구조 속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이 권력의 지배하에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또 앎의 맥락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실증적인 연구를 할 수도 있겠지요. 맥락에 대한 성찰은 이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철학 역시 실증적인 학문이 되었습니다. 철학은 사회와 관계 맺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합니다. 그러니 학문은 사회에 대해서는 장님이 된 것이죠.”
학문은 자유의 공간에 놓여 있을 것 같지만 위 인용문에서 ‘권력의 지배하’라고 표현했듯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는 질문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매주, 매달, 매년 쏟아지는 각 분야의 논문들은 너도나도 답을 주고 있지만, 그 질문을 누가 던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누군가가 던진 질문의 재탕이 많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의 두 번째 문제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질문이 그 분야의 집단지성에 의해 던져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저널에 논문이 실리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그 논문이 과연 학계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던져주는가 하는 점이다. 즉, 중요한 이슈 혹은 중요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좋은 질문이란 것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족함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도 물론 가능하다. 한 가지 질문이 던져지면 100명의 연구자가 각자의 답을 내면서 그 분야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너무 많은 사람이 하나의 질문에 몰린 나머지, 무의미한 연구들까지 진행되는 것 같다.
때로는 답이 질문보다 먼저 나오기도 한다. 매년 새로운 휴대전화가 출시되는 것은 질문보다 답이 앞서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의학계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다. 암에 대한 수술법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최근까지 변화의 큰 추세는 ‘복강경 수술’이었다. 이것은 배에 몇 개의 작은 구멍만을 뚫고 그 안으로 긴 수술도구를 넣어서 수술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긴 도구에 로봇팔을 연결하고 의사는 조이스틱을 이용해 이것을 조종하는 ‘로봇수술’이 나타났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복강경 수술을 받건 비싼 로봇수술을 받건 결과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환자들로부터 던져지는 질문보다 의사들의 답이 앞서는 것으로 보이곤 한다.
자유에 대해 언급한 한병철의 또 다른 글로 들어가 보자. 그의 최근 책 <에로스의 종말>에서 ‘성과주체’인 현대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중략…] 자기 착취의 주체는 타자 착취의 주체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자유의 역사로 파악한다면, 지금 ‘역사의 종언’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인과 노예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노예주인 혹은 주인노예일 뿐,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현재 우리의 학문 행태는 사회의 지배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과 끊임없는 성과를 위한 자기 착취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찾고 질문할 수 있을까?
과학자의 마음은 예술가의 심성과 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그 함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이다. 작년에 낡은 문이나 창문만을 그리는 한 화가의 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낡은 문고리를 표현한 것이 있었는데, 문고리 주변의 패인 홈이 어떻게 생겼는지 페인트칠이 벗겨진 모습은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 작가의 시선이 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두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그림들을 통해 신기하게도 온기를 느꼈다. 그 그림들이 그의 자발적 행동에 의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화가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답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그 안에는 그의 자유의지가 들어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생각은, 과학자는 아직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밝고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은 과학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는 사회적이나 학문적으로 소외된 곳에 시선을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곳은 아직 학문의 등불이 비치지 않았지만 중요한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곳이다. 시선을 두는 것은 자연스럽게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학은 경제논리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회적 맥락에 합류하며 ‘스스로의 이유(=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빛이 비치지 않던 곳에 등불을 가져오고자 했던가? 반대로 밝은 불빛을 따라가는 주광성 곤충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던가?”
물론 이러한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주요 분야에 편중된 연구비와 장기적 연구에 불리한 평가 시스템은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일 것이다. 이외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들로 인해서 나의 제안은 이상적인 소리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과학계의 문화가 바뀌어야 함에는 분명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이것은 최신 연구의 트렌드를 빠르게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식의 연구에서 벗어나 독창성 있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연구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패스트 팔로워의 전략을 버린다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지금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분야가 아니라 미개척 분야에 시선을 가져가는 것이다. 즉, 경쟁이 치열한 작금의 연구 현실 속에서도 연구의 본령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대학과 대학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학문적으로 소외된 분야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이 부족하다. 학생들은 최신 트렌드에 대해서는 자주 접하게 되지만 소외된 영역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적다. 이미 활성화된 것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 글의 처음에 던졌던 ‘우리가 학문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우리 학계의 저력을 키우는 것과 연결된다. 학계의 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복합적인 움직임이 맞물려야 한다. 과학자는 자유를 찾음으로써 각자의 독창성을 확보해야 하고, 연구 지원 기관은 다양한 연구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교육 현장에서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과학자들이 학문과 우리 사회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김태신 생명과학 박사, 현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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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태신은…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의 ‘히포(Hippo) 신호전달네트워크 연구실’에서 암억제유전자 기능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인간 질병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자 의대에 진학했으며 졸업 뒤에 자신과 사회에 좀더 의미 있는 연구를 하고자 한다.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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