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더 넓게 읽고 듣고 더 많이 나누자" 느낀 2박3일
::: 이공학도, 우리들이 사는 세상 (21)
--- 아태이론물리센터의 '과학커뮤니케이션 여름학교' 참가기
서울에서 태어나서 23년째, 난생 처음 고속철도(KTX)에 몸을 실었다. 처음 가보는 포항, 바로 포스텍에 본부를 둔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CTP)가 주최하는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과커스)’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올해 과커스의 공지사항을 접한 건 지난 6월 중순이었다. 7월 초에 경력과 자기소개서 자료와 함께 신청서를 내고 7월 중순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7월 말까지 글쓰기 사전 과제를 제출했고 8월이 되어서야 포항에 가게 된 것이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과커스는 소수 정예로 운영한다. 전국 이공학도를 대상으로 20명 남짓 학생을 모은다. 과학저술가로 유명한 선생님들이 ‘저자 직강’을 해주시고, 학생들의 글과 발표를 지도하고 평가해주다. 참가비는 무료, 포스텍 기숙사를 이용하고 학생식당의 식사가 제공되며 차비만 본인 부담하면 된다. 과커스의 선생님들께 들은 바로는 경쟁률이 평균 4 대 1 정도라고 한다. 내가 참여한 이번 스쿨은 10기인데, 10기까지 운영해온 만큼 체계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이번 10기 학생들의 과제는 ‘물리학의 눈으로 본 생명의 본질’. 석학 분들을 모셔놓고 토론을 벌여도 판이 안 끝날 것만 같은 이 어려운 주제가 학부생에게 주어진 2박 3일의 과제라니!
(아태이론물리센터는 방학 때마다 이공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을 연다. 학기가 끝나기 직전(기말 고사 기간 즈음)에 첫 모집 공고가 나가는데 이 때에 양식에 맞춰 지원해야 한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홈페이지는 http://www.apctp.org이다.)
눈코뜰 새 없이 진행된 강의와 과제 일정
첫날(8일) 오후 3시 30분, 첫 강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천문연구원 이명현 박사님의 ‘과학 글쓰기’ 강의였다. 그 뒤에 쉬지 않고 포스텍 윤혜신 교수님의 프레젠테이션 강의가 이어졌다. 또 저녁 시간의 특별 강연으로는 <종교 전쟁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의 공동 저자인 신재식 교수님과 장대익 교수님이 특별한 대담을 들려주셨다. ‘과학과 종교의 만남’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두고서, 종교관이 서로 다른 이공학도 스물네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날카로운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열린 공간에서 편하게 학생들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눠주신 두 분 덕에 대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저녁 9시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대담은 밀려드는 질문 탓에 한참이나 더 이어져야 할 정도였다.
이튿날 이어진 프레젠테이션 수업에서는 과학저술가 이정모 선생님 외 세 분의 지도로 과학 프레젠테이션을 배우고 준비하는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사전에 임의로 짜여진 조별로 이번 주제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생명의 본질’에 관한 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하루 만에 이 어려운 주제를 놓고서, 처음 만난 친구들이 어울려 하나의 발표를 해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개인별 사전 과제였던 글쓰기를 최종 수정해서 제출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물리학과 생명의 본질이라는 이번 주제와 관련해 최무영 서울대 교수님의 강의까지 들었다. 2박3일 치고는 상당히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렇게 빠듯했는데도 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책으로만 만나던 분들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소수 정예인지라 교수-학생, 학생-학생 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다는 것이 학생들이 꼽은 가장 큰 장점이다. 묻고 싶은 걸 언제나 물을 수 있었고,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스쿨’ 다운 면모!
과커스에 참가한 학생들은 나처럼 과학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두거나, 또는 이공학도한테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배우러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학생들의 몰입도는 굉장했다. 수업도 수업이거니와 과제도 마찬가지였다. 글쓰기의 경우, 주제도 워낙 어려운 데다 개인별 과제이고, 마감시간이 촉박해서 밥 먹는 시간까지 반납하며 글을 준비하고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 또 프레젠테이션의 경우, 반나절 만에 발표 자료와 준비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팀이 기숙사에서 밤을 새웠다. 우리 팀도 치킨을 먹으며 발표 준비를 했는데, 브레인스토밍부터 제작, 발표 준비와 의견 정리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장 일찍 끝난 팀인데도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잠들었으니.
‘생명의 본질’ 주제는 무거웠지만 열린 토론의 즐거움
주제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생명의 본질’과 관련해서, 학생들에게는 참고 도서 세 권이 공지되었다. 스튜어트 카프만의 <혼돈의 가장자리>, 존 그리빈의 <딥 심플리시티 (Deep simplicity)>, 그리고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였다. 세 권 모두 다 읽고 온 학생, 일부만 읽고 온 학생, 아예 읽지 않고 자기 논지를 정리해온 학생 등 다양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하도 어려워서 읽어도 읽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특히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을 서술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학생들에게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발표의 가이드가 되는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학생들은 슈뢰딩거가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음의 엔트로피’ 개념을 사용하여 생명을 설명했다. 일부의 경우에는, 뉴턴의 제3법칙인 작용-반작용을 생명 현상 중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한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물리학적 법칙으로 생명을 설명하는 것은 ‘접근 방식’일 뿐, 우리의 주제인 ‘본질’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관점에서 논지를 풀어나갔다. 모든 학생들의 글은 ‘사전과제와 첨삭’ ‘최종 제출본과 첨삭’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본된 상태로 마지막 날 받았다. 다른 학생들의 생각과 문제 해결 방식, 또 서술 방식까지 알 수 있고 첨삭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꼼꼼한 참고용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사소한 배려까지 아끼지 않는 과커스에 너무 감사했다.
(이 중에서 수상작은 아태이론물리센터의 웹진인 <크로스로드>의 홈페이지에도 게시된다고 하니, 미흡한 내용과 부족한 서술이지만 학계에 계신 분들도 한 번쯤 봐주시길 바란다. 주제의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서술을 ‘잘’ 해내느냐 보다는 학부생 수준에서의 접근 방식과 그들의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노력과 열정 자체로 의미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썼던 글인 “이공계 글쓰기 울렁증, 어찌하오리까?”에서도 얘기했듯이, 많은 이공학도들이 글쓰기나 발표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상상 이상이다. 스쿨에서 만난 학생들이 참가 동기로 가장 많이 꼽았던 것도 비슷했다. 교양 수업에서 보는 인문사회학도들의 발표와 글쓰기는 선망의 대상이고, 이공학도들도 이에 능숙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잘하고 싶다”고들 말한다. 아는 것을 보여주고 자신을 알리는 피아르(PR) 시대인 만큼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잘 표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서로 초면이었지만 토론과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하는 태도는 날카로웠고 서로의 생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과정도 진지했다. 부끄럽지만 지적과 질문을 받는 과정도 의미 있는 배움이라는 열린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고민을 나누고, 같은 목표를 지닌 친구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협력하여 일종의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열린 태도와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뭉쳐 있었기에 시너지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의 경우만 봐도 이공계 학생으로 여러 곳에 글을 쓰고 있다고 소개하면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었고, 혹여 전공에 관련된 글쓰기 과제가 있으면 그에 임하는 태도가 학우들과 너무 달라 속상했던 적이 많다. 하지만 과커스에 온 친구들은 모두가 이런 고민을 해온 적이 있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았던 것 같다. 또 개인적으로는 전공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생기는 계기도 되었는데,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내실 있는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되려면 ‘잘’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학기 시작을 앞두고 좋은 자극이 되었고, 좋은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다는 꿈에도 힘을 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공학도 커뮤니케이션 교육 더 많아지길
그렇게 빠듯한 2박3일의 스쿨 과정이 끝난 뒤에 학생들은 “아쉽다”, “하루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부족해 준비가 미흡했던 점이나 다른 조 학생들과 더욱 많은 의견 교환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아쉬웠다는 평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을 3박4일로 진행하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고는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아 보였다. 교양과목으로 발표나 글쓰기 수업을 들을 때에는 인문사회학도들과 비교되고 또 낮은 학점을 받은 경험이 많았던 이공학도들.... 이를 보완해 줄 ‘이공학도들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따로 받기가 힘들던 와중에 참가비도 없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났기 때문이다.
많은 이공학도들이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비단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태이론물리센터 사무총장을 맡고 계신 김승환 포스텍 교수님은 인사말에서 “지난해 국내 초판 간행된 학술도서 중 인문·사회·한국학 분야가 약 250여 종인 것에 비해 자연과학 분야는 62종 밖에 못 미친다”며 아직도 국내의 과학 저술활동 지원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이미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뿐 아니라, 앞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할 이공학도들이 연구자 집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과 함께 소통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공학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또 오고 싶다”, “이런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대학별로 차이가 있지만 이공계 대상의 커뮤니케이션 과목은 상당히 부족하다. 또 있다 한들 과학커뮤니케이터에게 직접 배우는 곳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배우려는 열린 태도를 지닌 이공학도들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더 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접할 기회를 주신 아태이론물리센터에도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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