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이공학도, 우리들이 사는 세상"

숱한 과제에 시달리고 퀴즈에 쫓기고 실험실에서 죽치는 생활엔 힘겨움과 고민도 숨어 있지만 이공계의 젊음은 여전히 팔팔하고 꿈도 많다. 다양한 갈래의 이공학도들이 그 희노애락의 이야기를 전한다.

[연재] 이공계 새내기 시절, 대학생활의 꿈과 현실 사이

이공학도, 우리들이 사는 세상 (10)



00spring » 이상 기후로 인해 4월 중순의 문턱이 되어서까지도 서울의 벚나무는 꽃봉오리를 틔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학기의 상징은 역시 벚꽃이다. 사진은 2009년 충남대학교의 벚꽃축제 모습. 사진사진/ 충남대학교




바야흐로 그 때는 춘삼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입시 터널을 지나니 하얀 벚꽃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멋진 선배들, 나처럼(?) 파릇파릇한 동기들과 한 데 어우러져 술도 많이 마시고, 이런저런 활동도 함께하고, 수준 높은 전공 공부를 하며 궁금증을 풀고, 책도 많이 읽어 교양도 좀 쌓고, 연애도 하고…. 나의 신입생 시절은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사실 거짓말이다. 물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나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동아리 활동도 했지만, 갑작스레 마주한 대학 문화는 내가 대학생활에 걸었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며, 때론 당혹스러웠다.

 

새내기는 아직 대학 풍경에 녹아들지 않은 주변인으로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차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공계 새내기의 눈에 비친 이공계 대학의 시스템과 문화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새내기들은 어떤 대학 풍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어떤 경험들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생각을 품을까? 새내기가 듣는 강의들, 그리고 이공계의 대학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전공 닮은 ‘이공계 교양’의 위엄

 

대학교 교양 수업을 생각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문학적 소양을 쌓아주는 문학 수업들,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철학·미학 수업들, 요새는 필수로 들어야 한다는 경제학원론 같은 수업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영혼을 살찌울 것만 같은 그런 수업들 말이다.

 

그러나 이 바닥은 그렇지 않다. 이공계 신입생들은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일반 물리학, 화학, 생물학, 미적분학 같은 것을 의무 과목으로 수강해야 한다. 이런 과목이 ‘이공계 교양’의 범주에 든다고 해서 가볍게 넘어가진 않는다. 전공 공부를 위한 초석으로 강조돼 꽤 높은 수준으로 다루어진다. 심지어 나는 1학년 1학기 때 수강한 화학, 생물학, 통계학(과목마다 실험이 하나씩이 더해져 있다)이 전공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학기 말에 받은 성적표에 떡하니 ‘교양’이라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 한 적이 있다. 이러니 이공계 학부 1학년은 ‘고등학교 4학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신입생들은 1학년부터 준전공의 과목들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에 부담감이 있지 않을까?

 

“새내기 이공계생의 자연과학 교양수업은 대개 수강생이 모두 다 고등학교 과학2 과정까지 배웠다는 가정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물리2를 배우지 않고서 교양 물리학을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학과에 진학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친구들은 교양 물리학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고교 물리2를 따로 공부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오아무개,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저는 지금 교양과목이라는 이름으로 고급물리학, 미적분학, 통계학, 물리학실험, 통계학실험을 듣고 있는데요, 모두 좋은 과목들이긴 한데 교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공을 공부할 때 필요한 과목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아무개,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두 사람의 얘기처럼, 고등학교에서 화학1까지만 배운 학생은 대학교 일반 화학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다. 하지만 학생들은 힘들다는 이유로 이런 교양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양과목으로 기초과학 과목을 수강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공계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기초과학 교양과목들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대는 융합학문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예컨대 비교적 먼 학문이라고 생각되던 물리학과 생물도 생물물리학(Bio-Physics)라는 학문으로 융합되었죠. 이처럼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필수적이며, 신입생 때 들어둔 기초과학 교양과목들은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문제는 이런 과목들이 필수로 들어야 한다는 데 있다. 학점 이수 규정이 없는 학과는 없지만, 이공계는 1학년 때 의무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 전공과목이 지정돼 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2학년 때 전공 진입을 하려면 (a, b, c) 과목은 꼭 들어야 하고, (x, y, z) 과목 중에서 하나는 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특히 공대의 경우에는 이런 사정이 굉장히 심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한 학기에 한두 개 밖에 없을 정도다. 그러니 ‘교양’ 때문에 듣고 싶은 교양을 듣지 못하는 셈이 되어, 대학에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쌓는 것을 기대했던 많은 신입생들이 실망을 하기도 한다.

 

“저는 과학고 졸업생이라 그런지 일반고 졸업생인 과 동기들에 비해서는 이러한 과목을 수강한다는 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제가 생각하던 ‘교양’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1학년 1학기 시간표를 짜며, 선택의 여지가 배제되었다는 측면에서 제가 상상했던 대학의 ‘교양’수업 과는 너무 달라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때문에 저의 경우에, 대학에 와서 인문사회학적인 과목들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별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워낙에 시간표가 정해져 있는지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한 학기에 한두 개밖에 없었어요. 단점은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거. 물론 장점도 있어요. 선택이 불가능하니 마음을 비우면 된다는 거!“ (주아무개,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부 석사 졸업)

 

 

 

인문·사회학 교양에 치이는 이공계생

 

새학기부터 들이닥치는 시험과 퀴즈, 보고서 때문에 놀고 싶은 꿈의 날개가 꺾이이곤 하지만, 사실 수학, 과학 교양 수업은 할 만하다. 늘 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점점 어려워지기는 하지만 학문에 필요한 기본 지식, 학문을 다루는 방식, 문제를 푸는 방법 등은 이미 익숙한 그것이다. 신입생들이 진짜 ‘문화 충격’을 받는 곳은 바로 인문·사회학 교양 수업 강의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과-이과가 극단적으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noname01 » 6, 7차 교육과정 비교. 자료/한겨레

 

7차 교육과정부터 이공계 학생들은 사회탐구 영역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딴짓 하지 않고 착실히 교육과정을 밟은 이공계 학생이라면 정말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갖추기 힘들다. 게다가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선 거의 들은 바 없다. 일부 대학에서는 입시 철에 이공계 학생들에게도 논술 실력을 요구하지만, 인문계 논술과는 달리 ‘얼마나 글을 조리 있게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하느냐’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글을 잘 쓸 필요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두두두둥! 갑자기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는 인문계 학생들과 같은 수준의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 인문·사회학 지식을 요구한다!

 

”수학 능력을 평가할 때, 인문계냐 이공계냐에 따라 그 기준을 다르게 했으면 해요. 이공계 학생이 글쓰기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감안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열심히 공부할 때인 고등학생 시절에 인문계와 이공계 학생은 글쓰기에 대한 마인드부터 다르게 배웠습니다. 1학년 때부터 어려운 기초과학 교양에, 열심히 해도 성적이 안 나오는 인문계열 교양 과목에…. 이공계 신입생은 치여 살려고 입학한 게 아니에요.“(이아무개,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학부 3학년)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많은 이공계 학생들이 인문학적인 교양이 부족하고 사회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학생들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학에서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이공계 학생들에게 ‘문과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감안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공계 신입생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력이나 글쓰기 능력, 지식을 강요하는 것 같아요. 저나 제 주변 친구들도 교양수업을 처음 들으면서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나 사고의 전개방식을 접하게 되어 조금은 당황했던 것 같고요. 인문계 학생들을 위한 교양 수업처럼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교양 수업도 좀 더 다양하게 개설되면 좋겠어요.”(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글쓰기라는 것이 글을 계속 써버릇하면서 남들에게 평가도 받아야지 느는데, 그런 경험을 별로 겪지 못하다보니 글쓰기를 하는 교양과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나중에는 시험 위주로 생각해 교양 과목을 골라서 들었죠. 강의 계획서에서 학점을 어떻게 매기는지 유심히 보면서.“(주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석사 졸업)

 

00koreahis » 나는 국사를 조선시대까지 배웠다.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나의 입시 준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이공계 학생들이 글쓰기에 대해 느끼는 어려움은 앞의 연재 글에서 이승아 님이 잘 정리해주셨는데, 그 글을 읽다가 생각난 몇 가지 점들을 조금만 더 덧붙이겠다. 서울대학교에는 ‘인문사회계열을 위한 수학’, ‘경제학을 위한 수학’처럼 수학 과목에 취약한 인문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이공계열을 위한 경제학’, ‘이공계열을 위한 국사’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능에서 경제, 국사 과목 시험을 보고 들어 온 인문계생들과 전혀 배운 바 없는 이공계생들은 그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사를 배우고 싶어 관련 인문학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미 어느 정도 배우고 들어온 인문계 학생들과 또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춘 이공계의 고학번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비교되니, 이건 게임이 되지 않았다. 당시 들었던 내 감정은 정말이지 절망감과 억울함이었다.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하지 못한 내 탓도 있겠지만, 이공계생들은 교육 제도에서 최소한의 배려도 받지 못하고도 사회에 관심 없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한 마음마저 든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까지 제 전공 관련 과목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멍청한 생각임을 아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요, 그때부터 인문사회과목 쪽으로의 갈증을 느껴 책을 찾아 읽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입학하면 반드시 이러한 교양 과목들을 수강해 제 모자란 지식을 채워나가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부족하다는 데에서 열등감을 느꼈다기보다는 그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새내기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오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그래도 이런 ‘악조건(?)’에서도 전공 외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뻗혀 이 강의 저 강의를 수강하고 책을 스스로 찾아 읽는 이공계 학생들이 많다. 나도 뒤떨어지는 독해력과 중학생 수준의 지식으로 낑낑되며 이것저것에 손대곤 했다. 그렇지만 교양 쌓기를 개개인의 노력에 맡기면서 사전 지식이 상대적으로 더 부족한 이공계생들을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대학 차원에서 좀 더 구조적인 지원을 해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못내 남는다.

 

 

 

신입생 시절에 기대했던 대학생활, 대학문화

 

신입생들은 대학생활에서 무얼 기대할까? 사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설렘보다는 이제까지 겪은 생활과는 아주 다르고, 또 새롭고도 자유로운 대학문화 아니겠는가! 특히 우리 세대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일단 들어오는 데 성공한 새내기들은 대학생활에서 기대하는 바가 매우 크게 마련이다.

 

대학에 입학하면 선후배, 동기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관계는 같은 반 친구, 동네 오빠, 학원 친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또 처음 접하는 ‘술놀이 문화’와 결합해 새로운 형식의 관계 맺음과 행동 양식을 만들어내는데, 대부분 신입생들은 이런 부분에 많은 기대를 한다. 이공계 사람들이 접하는 놀이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직 입학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면 ‘술을 많이 마신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은 놀이 문화가 술과 지나치게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우리 반에는 여자가 없어요(전기컴퓨터공학부 10학번에서 제가 속한 반에서는, 약 40명 중 여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는 장소는 당구장, 피시방, 노래방, 또는 술집 등으로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입학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서는 서로 지겨워하면서도 막상 마땅한 다른 놀거리가 없다고 불평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오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다른 몇몇 새내기 친구들한테도 그동안 무얼 하며 놀았느냐고 물으니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답들이 즉시 돌아왔다. 대학생의 놀거리가 부족한 것이다. 이런 풍토는 요새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지만 인문·사회계열에 비해 학생회나 학회 활동이 많이 죽어 있는 이공계의 경우에는 특히 더 심한 것 같다. 친구들과 술을 먹는 것은 정말이지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를 사랑하고 여기에 굉장히 잘 적응하는 친구들도 많다. 하지만 오직 대학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학생회 활동, 학생들 간의 토론 같은 것들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전공 공부를 따라가기만 하는 것도 벅찬 이공계의 현실 속에서,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대학 생활’을 기대했던 신입생들은 1학년 1학기가 지나면 곧 현실의 대학 생활에 실망을 하곤 한다.

 

“대학에는 소모적 놀이문화가 아닌 좀더 생산적인 놀이문화가 있기를 바랐지만 제 주변 친구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즐기며 소비하는 데 만족하는 것 같아 새내기 당시 그 점이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오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학생들이 학교의 정책이나 행정적인 문제에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실망스러운 점 중 하나에요. 대학생들은 고등학생들보다 좀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학교의 일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등학생 때의 경험과 비교해 봐도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는 얼마 전 자연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으니까요.“(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대학생활의 '핑크빛 낭만'은 어디에~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이성애 관계이다. 그러나 이공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또한 극단적인 성비가 아니던가. 공대에는 여자가 한 명도 없는 반이 있으며, 의류·식품영양학과에서는 60명 중에 남자가 10명만 넘어도 ‘대풍년’이라고 한다. 캠퍼스 커플을 이루려는 핑크빛 꿈은 대개 봄꽃이 떨어지면서, 그렇게 잔인하게 사라진다.

 

“옛날 공대생 개그를 볼 때, 공대생이 자주 하는 말 3개로, ”밥 먹었냐?“ ”숙제 다 했냐?“ ”저 여자 예쁘다“인 것을 봤는데, 진짜더군요. 친구들과 교양 강좌 때문에 가끔씩 인문대·사회대 등 평소 안 가던 곳을 가면 여자들이 갑자기 많아지잖아요. 외딴 공대에 있던 남자들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고 막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게 됩니다. 딱히 엄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표정 관리가 잘 안 됩니다. 마치 야만인이 문명 세계에 온 것처럼. 가끔씩 과CC가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많이는 안 생깁니다. 왜냐면 여학생들은 늘 주목받고 있거든요.”(주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석사 졸업)

 

지나치게 치우친 성비는 이공계의 특징 중 하나로, 이공계 문화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많은 친구들이 ‘미팅, 소개팅을 잡기가 쉽다’는 것을 큰 장점으로 꼽았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딱히 두드러지는 장점을 찾기 힘들다.

 

“공대에는 ‘여학우 모임’이 있고, 식품영양학과에는 ‘남학우 모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뭉쳐 봤자 별 소용이 없기도 해요. 예컨대 MT 갈 때 남학우들에게만 짐을 몰아서 주는 것 같은 일들이 있지요.“(이아무개, 식품영양학과 학부 3학년)

 

”우리 반에는 여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도적인 몇 사람에 의해 개강 및 종강파티, MT를 거의 전부 다른 (여)대학/과와 같이 치룹니다. 그런데 약 40명 중 한두 명 정도의 여학생이 있는 다른 반의 경우, 이 여학생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여학생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다른 여대와 MT를 같이 가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기도 하며, 이 여학생들은 과반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오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학부 2학년)

 

“여자라는 성별이 뭐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의 권력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여학우들 입장에선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남자인 저의 입장에선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여학우들이 받는 혜택이 꽤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교우관계나 선후배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많았던 것 같고요. 그래도 부정적인 측면들이 크게 부각되는 건 아니라 ‘이런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단언할 수는 없는 것 같지만요.”(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00spring2 » 대학 캠퍼스의 봄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류우종 기자

 

 

 

 

그래도 꿈의 발판, 나의 대학생활

 

얘기하다보니 너무 안 좋은 얘기만 한 것 같다. 이 글은 그래도 부족한 면들을 들춰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땅의 모든 새내기와 헌내기들이 좀 더 즐거운 대학생활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출발한 것이다 보니, 이미 대학생활이 즐겁다 느끼는 학생들에게는 다소 가혹한 글이 됐을 수도 있다. 여기는 들어야 하는 수업도 많고, 사람들 만나면 술 먹고 피시방으로 향하는 이공계이지만, 이공학도들이 대학생활에서 느낀 만족스러운 점들도 물론 많이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하겠다.

 

“대학에 와서 좋았던 점은 역시,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었단 점이에요. 공부도, 노는 것도 각자 관리하기 나름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연애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 좋았네요.”(주아무개, 전기컴퓨터공학부 석사 졸업)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제가 듣고 싶은 강의들을 신청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아요. 특히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자주 느끼는데, 이미 커리큘럼에 들어있으니까 억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의 강의를 신청해서 듣는 거니까 수업에 집중도 잘 되고 이해도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시간을 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좋다는 것도 만족스러운 점이고요. 동아리 활동이 정말 활성화되어있다는 점도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활동을 정말 ‘제대로’ 한다는 느낌일까요. 예를 들어 사진 동아리라면 단순히 사진을 찍는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현상, 인화부터 촬영까지 거의 전 과정을 다 배운다던데, 이렇게 제대로 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손아무개, 물리천문학부 학부 1학년)

 

“고등학교 때까지 ‘나, 가족, 단짝친구들’의 품안에서 큰 갈등 없이 자라왔지만, 대학생활 중에는 나와 가치관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게 되었어요. 따라서 대인관계에 대한 고민도 많아지고, 여러 고민과 갈등을 거쳐 더 큰 사회로 나갈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학과 사람들과,  또는 선배들과 만나면서 대인관계가 넓어질수록 여러 가지 재미있는 기회도 많이 생기고요. 예를 들어 과외나 아르바이트 소개를 받는다든지,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 공부도 할 수 있고….” (이아무개, 식품영양학과 학부 3학년)

 

하려는 의지와 할 수 있는 최소의 여건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게 이들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여전히 해야 할 일들에 파묻혀 즐길 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유가 주어진 시기, 대학생 시절만큼은 공부나 밥벌이 이외의 활동을 해보는 것, 우리는 그것을 대학에서 얻어내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요즘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는 카이스트의 얘기를 다루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 진단과 대안들이 여러 매체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이 있다면 모아서 '우리들의 진솔한 이야기'로 담고자 해보겠습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고 싶습니다. 또한 카이스트 학생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인 분들의 목소리도 모두 환영합니다. dbdps90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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