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뇌영상과 정신의학"

현직 정신과 의사인 필자가 최근 뇌영상과 정신의학 연구의 성과를 아우르며 뇌영상에 바탕을 둔 정신질환 해설에 나선다. 정신질환에 대해 여전히 큰 편견과 오해를 풀어주고자 한다.

외모 바꾸는 보톡스, 마음까지 바꿔놓는걸까?

[26] 보톡스와 표정, 감정


00face2.jpg » 얼굴 표정은 감정을 표현한다. 출처/ pixabay.com


원의 환자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밖에 있을 때와 달리 꾸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똑같은 환의를 입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입원했던 여성 환자 한 명은 멀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크고 입체적인 이목구비, 색깔이 남달리 진한 눈썹과 입술, 나이에 맞지 않게 팽팽한 피부. 도드라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물증은 없었지만 의술의 도움을 받았으리란 심증이 들었다. 일부 환자들도 역시 그가 ‘성형 미인’이라고 수군댔다.


환자와 조금씩 친해지면서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외모에 열등감이 많았던 그는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으면서 기분이 고양될 때마다 성형 수술, 문신을 이용한 반영구 화장, 보톡스 주입과 같은 시술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들어서일까?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화려하지만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들뜬 상태였던 그 환자의 기분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환자의 기분이 변하면서 오히려 그의 정동(情動, affect)을 살피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아직 회복 중인 터이라 기분의 불안정(labile mood)을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뭔가 오랫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갈고 닦아온 정동 탐지 레이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 환자의 수술 혹은 시술이 얼굴 표정을 바꿔 정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 기분(mood) : 장기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정서 상태

☞ 정동(affect) : 단기간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관찰되는 정서 상태


모르는 것은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하는 법. 이전에 성형 수술에 관한 글[1]을 쓸 때 도움을 줬던 성형외과 의사 친구 우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톡스 때문이지 않을까? 얼굴 표정에는 수술보다 보톡스 같은 시술이 더 영향을 끼치거든.” 역시 전문가의 의견은 날카로웠다. 오리무중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성형 수술에 관한 글을 쓸 때처럼 이 숙제도 역시 내가 풀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2014년 한 해 우리나라 성형외과에서 시행한 시술 중 51 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보톡스가 이미 너무나도 흔해졌기 때문이다.[2]



독에서 약으로, 변신을 거듭한 보톡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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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Botox)는 세균(Clostridium botulinum)에서 생성된 보툴리눔 독소(botuluium toxin)를 주성분으로 한 의약품이다. 보툴리눔 독소는 매우 치명적이어서 이상적인(?) 조건에서 이론상으로는 공기 중에 1그램(g)만 살포해도 무려 100만 명 이상을 죽일 수 있다.[3] 신경접합부(synapse)에서 근육 수축에 필요한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억제되는 것이 이유인데, 대게 호흡 근육이 마비되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보툴리눔 독소로 인해 나타나는 보툴리즘(botulism) 증상은 보통 상한 음식을 먹고서 발생한다. 19세기 초 이 증상을 처음 규명한 의사 케르너(Kerner)는 상한 소시지를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나중에 세균이 동정(同定)되었을 때 소시지를 뜻하는 라틴어 ‘보툴루스(botulus)’를 빌려와 세균의 이름이 붙여졌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고된 보툴리즘 증례도 역시 일가족 3명이 찜질방에서 진공 포장된 소시지를 날 것으로 먹은 뒤에 발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00botox1.jpg » 경미한 보툴리즘 상태인 17세 환자. 근육이 제대로 수축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을 때 눈꺼풀이 처지고, 동공이 확장되고,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는 모습이 관찰되며(왼쪽), 최대로 웃을 때에 눈 주변의 주름이 보이지 않고, 웃는 표정이 비대칭으로 나타난다(오른쪽). 출처/ 각주[3]

 

1,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맹독성의 보툴리눔 독소를 세균전에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연구는 극비리에 진행되었지만, 보툴리눔 독소의 치사율이 일정하지 않고 쉽게 비활성화되며, 2차적 감염이 일어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실전에는 사용되지 못했다.[5] 하지만 연구 과정 중에 보툴리눔 독소를 정제해 추출하는 방법이 발견되었고, 이는 훗날 치료 목적으로 사용될 보툴리눔 독소 생산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


보툴리눔 독소의 의학적 사용은 처음 안과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안과 의사 앨런 스콧(Alan Scott)은 사시(두 눈이 정렬되지 않고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시력 장애)의 비수술적 치료 방법을 찾고 있었다. 수술을 통해 사시를 갖게 된 원숭이의 외안근에 여러 가지 물질을 넣어보던 중 보툴리눔 독소의 치료적 효과가 매우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6] 이후 여러 차례 임상 실험을 거친 뒤 1979년 보툴리눔 독소는 사시 치료 목적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독이 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00botox2.jpg » 최근 보톡스가 치료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질환들. 출처/ 각주[7]

이상운동질환을 다루는 신경과 의사들도 보툴리눔 독소 연구에 뛰어 들었다. 1980년대에 보툴리눔 독소를 이용해 진전(tremor)이나 경련(spasm)을 치료하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1989년 미국 식품의약국은 보툴리눔 독소의 적응증을 비자발적 근육 수축, 안검경련(blepharospasm), 편측 안면경련(hemifacial spasm)으로 확대했다. 요즘은 사경(목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질환), 근이상긴장, 성대 장애, 뇌성 마비, 두통 등 다양한 질환의 치료에 보툴리눔 독소가 사용되고 있다. 보툴리눔 독소가 한 때 세균전의 유력한 후보자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편 미용 분야에서는 보툴리눔 독소가 우연한 계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8] 1987년 캐나다의 안과 의사 진 캐루더스(Jean Carruthers)는 보툴리눔 독소를 이용해 안검경련을 치료하던 중 한 환자로부터 주사를 맞으면 눈이 잘 떠질 뿐만 아니라 주름이 사라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날 밤 피부과 의사였던 남편 알테어 캐루더스(Altair Carruthers)에게 이를 말했지만, 남편은 반신반의했다. 진 캐루더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날 병원의 접수처 직원의 얼굴에 보툴리눔 독소를 주입한 뒤 남편에게 보여줬다. 이번에는 굳이 설득이 필요 없었다. 직원의 얼굴이 너무나도 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주름 제거술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했지만 너무나 생소한 개념 탓인지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이에 진 캐루더스는 직접 자신의 이마에 보툴리눔 독소를 주입하는 노력까지 기울였다. 4년 뒤 총 18명의 자료가 모였고, 부부는 19991년 미국피부과학회에서 연구 결과[9]를 발표했다. 기대와 달리 청중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학계의 한 유명 인사는 “아무런 성과가 나지 않을 미친 생각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부부는 연구를 이어 나갔고, 여러 학자들이 속속 관련 연구에 참여했다. 시간이 흘러 2002년 미국 식품의약국은 마침내 보툴리눔 독소를 이용한 주름 제거술을 승인했다. 독에서 약으로 탈바꿈했던 보툴리눔 독소가 미용 시술용으로 또 한 차례 변신을 이룬 것이었다.



배우 조민수가 보톡스를 맞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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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 미용 목적으로 사용되는 보툴리눔 독소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어떤 주름 제거술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간편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보툴리눔 독소라는 무서운 이름 대신에 개발을 주도한 제약회사 엘러간(Allergan)이 붙인 보톡스(Botox)라는 상품명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전후로 입소문이 나면서 미용 목적의 보톡스 사용량이 늘기 시작했고, 2002년 고(姑) 노무현 대통령이 시술을 받으면서 널리 알려졌다(정확히는 노 대통령의 이마에 주입된 것은 보톡스가 아니라 다른 회사가 만든 디스포트(Dysport)라는 상품명의 보툴리눔 독소였다).[10]


00botox3.jpg » 보톡스를 맞은 뒤(회색 막대), 맞기 전(하얀 막대)에 비해 분노나 슬픔을 유발하는 글을 읽을 때 감정을 느끼는 데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주[12]

톡 스 한 방이면 주름이 사라지고, 인상이 바뀌고, 동안이 되는 마법(?)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러나 보톡스를 반복적으로 맞거나 혹은 다른 시술과 함께 받는 경우가 늘면서 피부가 지나치게 팽팽해져 얼굴이 부자연스러워진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대중 앞에 자주 서는 연예인들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마틴 스콜세지나 바즈 루어만 같은 감독은 보톡스의 인기가 늘어난 뒤 얼굴 표정을 제대로 지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들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불만을 토로했다.[11]


보톡스가 정말 감정 표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먼저 미국의 데이비드 하바스(David Havas) 교수가 2010년 발표한 연구[12]를 살펴보도록 하자. 연구진은 보톡스 시술로 눈썹 사이의 주름, 일명 내천(川)자 주름을 지우려는 여성 41명을 모집했다. 참가 여성들이 보톡스 시술 전과 2주 후에 분노, 행복, 슬픔을 유발하는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면 키보드의 단추를 누르는 방식으로 실험이 진행되었다.


눈썹을 가운데로 모아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 눈썹주름근에 보톡스를 넣은 결과 참가자들이 주어진 글을 읽은 뒤 글에 담긴 감정을 이해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의 차이가 발생했다. 분노나 슬픔을 불러 일으키는 글을 읽을 때에는 이전보다 이해하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반면 행복이 느껴지는 글은 속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속도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참가자들이 보톡스로 인해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얼굴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뇌에서도 이런 감정을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결과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를 이용한 뇌영상 연구[13]에 서도 확인된다. 연구진은 이마에 보톡스를 맞은 19명의 여성과 대조군 19명의 여성에게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표정을 바라보거나 따라하도록 하면서 이들의 뇌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대조군에 비해 보톡스를 맞은 집단에서 화난 표정을 지을 때 감정 조절의 충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편도체(amygdala)의 활성도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보톡스를 맞은 뒤 얼굴을 제대로 찡그리지 못하면서 관련 감정도 역시 덜 느끼게 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00botox4.jpg » 화난 표정을 지을 때 보톡스를 맞은 사람들에서 좌측 편도체가 덜 활성화하고 있다. 출처/ 각주[13], 변형


00botox14.jpg » 얼굴 주름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배우 조민수. 한겨레 자료사진 톡스와 감정의 연관성을 살피고 보니 문득 배우 조민수가 떠올랐다. 그는 영화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찌그러진 자신의 얼굴 주름이 마음에 걸렸지만, ‘선배, 그런 거 안 보여요. 감정이 보이지’라고 말했던 후배와의 일화를 전하면서 향후에도 시술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14] “배우는 희로애락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밝힌 배우에게 설령 그 정도가 미미하더라도 보톡스 시술로 인한 표정과 감정의 변화는 당연히 피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위기의 주부들을 갈등으로 이끈 보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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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botox6.jpg » 웃어서 행복함을 전파하는 긍정의 화신 노홍철. 출처/ MBC보톡스를 사용한 일련의 연구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얼굴 표정이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 ‘얼굴 되먹임 가설(facial feedback theory)’이라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기쁜 일이 있으면 웃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운다. 그런데 얼굴 되먹임 가설에 따르면 그 반대, 즉 웃어서 기쁨을 느끼고, 울어서 슬퍼지는 것도 가능하다. 엠비시(MBC) <무한도전> 속 노홍철의 긍정 어록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가 나름 과학적 근거를 갖춘 주장이었던 것이다.


굴 되먹임 가설은 타계한 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Robert Zajonc)의 1989년 연구 결과에서 간단하고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15] 연구진은 26명의 심리학과 남학생들에게 일곱 종류의 모음(i, e, o, a, ü, ah, u)을 발음하도록 한 뒤 기분이 어떤지 점수 매기도록 했다. 실험 결과 얼굴에서 미소를 짓게 하는 장모음 ‘e’나 기쁨으로 깜짝 놀랄 때와 같은 ‘ah’를 발음할 때 참가자들의 기분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입을 뾰족히 내밀며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모음 ‘u’나 독일어 모음 ‘ü’를 발음할 때 기분이 가장 나쁜 것으로 묘사되었다.


00botox7.jpg »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부정적인 표정을 지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출처/ 각주[15]얼굴 되먹임 가설은 사회 생활에서 필수적인 모방(mimicry) 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실연을 당해 울먹거리는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나도 모르게 친구의 슬픈 표정을 따라 지으면서 친구의 우울한 감정을 나도 느끼는 식으로 모방이 이뤄진다. 모방이 잘 이뤄지지 않았을 때 친구에게 건네는 위로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얼굴 표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보톡스는 이 과정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보톡스와 함께 주름 제거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필러(filler)를 실험에 같이 사용한 미국의 데이비드 닐(David Neal) 교수의 2011년 연구[16]를 살펴보자.


연구진은 31명의 실험 참가 여성을 두 집단으로 나눠 16명에게는 보톡스를, 15명에게는 필러 약물 중 하나인 레스틸렌(Restylane)을 이들의 얼굴 주름에 주입했다. 근육의 수축을 억제해 얼굴 표정에서 뇌로 들어가는 되먹임을 감소시키는 보톡스와 달리 피부 아래(subdermal tissue)에 주입되는 필러는 근육의 기능을 바꾸지 않아 되먹임 역시 보존된다. 이후 연구진은 사진 속 인물의 눈 표정에서 감정 상태를 알아 맞추는 ‘눈으로 마음 읽기 검사(Reading the Mind in the Eyes Test; RMET)’를 참가자들에게 시행했다.


00botox8.jpg » 눈으로 마음을 읽는 검사의 한 예. 다음 인물의 감정/생각을 잘 묘사하는 단어를 선택하세요. ①진지한 ②부끄러운 ③불안한 ④당황한. 정답은 단락 마지막에 공개. 출처/ 각주[17]

 

00botox9.jpg » 필러를 맞은 집단(회색 막대)에 비해 보톡스를 맞은 집단(검은 막대)에서 눈으로 마음 읽기 검사의 정확도가 낮게 나타난다. 출처/ 각주[16] 험 결과 보톡스를 맞은 집단은 약 70퍼센트(%)의 정확도로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알아맞혔지만, 이는 필러를 맞은 집단이 약 77퍼센트(%)의 정확도를 보인 것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였다. 감정이 실려 있는 다른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볼 때 빠르게 자동적으로 일어나야 할 모방이 보톡스로 인해 제한되면서 타인의 감정을 상대적으로 잘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보톡스를 맞은 뒤 동안이라는 외면의 미를 얻었지만 공감 능력이라는 내면의 미를 잃어버린 셈이다.


2000년 중반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이란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교외 중산층 동네에서 친구로 지내던 주부들이 마을의 비밀과 사건에 따라 다툼과 불신을 보이며 이합집산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갈등에 보톡스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일부 배우들의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18] 보톡스를 맞은 뒤 상대의 표정을 잘 모방하지 못해 상대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서(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눈으로 마음 읽기 검사’ 사진에서 ‘진지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나타난 공감 부족 때문에 드라마 속 ‘주부들’이 더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우울증을 치료하는 보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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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 시술을 받은 사람에게 지금까지 살핀 내용은 심리적 측면에서 “보톡스는 영 아니올시다”로 다가올 수 있다. 주름 없는 젊은 얼굴을 만들려고 보톡스를 맞았는데 감정도 잘 못 느끼고, 공감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니. 글이 계속 이런 방향이면 얼굴 표정에 관한 고급 정보를 건네 준 친구도 병원 방문객이 줄까 봐 곤란해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 시작은 미국의 피부과 의사 에릭 핀치(Eric Finzi)에서 출발한다.


치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19] 특별히 심리학을 배운 적 없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얼굴 표정에서 기분이 어떤지를 예상하곤 했다. 어머니의 콧잔등에서 찌푸림이 유달리 두드러지거나 깊어진 주름 때문에 눈 주위의 음영이 짙어질 때 핀치는 어머니의 우울증이 나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말이 아닌 표정을 통해 어머니의 마음 속 고통을 느꼈던 기억은 오랫동안 핀치의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다.


성인이 된 핀치는 시술을 주로 하는 피부과 의사가 되었다. 여가 시간에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심리학 관련 책을 읽거나 또 다른 개인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를 했다. 핀치가 36살이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어머니의 우울증은 매우 악화되었다. 미간 사이의 주름은 다시 깊어졌고, 치료를 받아도 호전되지 않는 어머니의 증상에 핀치는 무력감을 느꼈다. 결국 어머니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은 직후 핀치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던 여성들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어머니의 찡그린 얼굴 표정을 연상시키는 사진 속 여성들을 보면서 핀치는 얼굴 표정과 우울증과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얼굴 되먹임 가설을 접하게 된 핀치는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우면 고통 그 자체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핀치에게는 매우 유용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보톡스였다.


00botox10.jpg » 자신이 그린 그림 앞에 서서 보톡스와 우울증을 설명하고 있는 핀치. 출처/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lmDmlRhMjq4 갈무리 2003년 핀치는 본격적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중등도 이상의 증상을 보이는 10명의 우울증 환자의 패여 있는 양 눈썹 사이에 보톡스를 주입했다. 이곳이 슬픔, 분노,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잔뜩 주름이 생기는 부위였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 달 뒤 10명 중 9명의 환자의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얼굴 되먹임 가설에 바탕을 두고 보톡스를 이용한 우울증 치료가 최초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핀치의 연구 결과는 2006년도에 <피부외과저널(Journal of Dermatological Suregery)>에 발표되었다.[20] 하지만 작은 규모의 증례 위주 연구였고, 방법상 많은 제한점을 지녔던 논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연구를 둘러싼 의심이 넘쳐나거나 예능 프로에서 가끔 잡담거리로 다뤄질 뿐이었다.


00botox11.jpg » 보톡스 집단(검은 점)과 위약 집단(하얀 점)에서 우울증 척도(HAM-D) 점수의 변화. 출처/ 각주[21] 반전의 계기는 2012년에 생겼다. 핀치의 연구에 영감을 얻은 독일의 연구진이 조금 더 정교한 방법을 사용해 보톡스로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호전시킨 연구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21] 연구진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30명의 남녀를 보톡스 집단 15명, 위약 집단 15명으로 나눈 뒤 추적 관찰을 시행했다. 그 결과 불과 6주 만에 보톡스를 맞은 사람들에서 우울증의 심각도를 보여주는 척도(Hamilton Depression Rating Scale; HAM-D)의 점수가 47.1퍼센트(%)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위약 집단에서 호전된 정도는 9.2퍼센트(%)에 그쳤다.


지만 독일 연구진이 시행했던 연구 역시 제한점을 갖고 있다. 특히 참여한 환자들의 주름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거나 이들의 우울증이 치료 저항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에게도 보톡스가 효과적일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핀치는 계절성 정동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를 처음 규명하고 광선 치료(light therapy) 분야를 개척한 노먼 로젠탈(Norman Rosenthal) 교수와 팀을 이뤄 보다 큰 규모의 연구에 착수했고, 그 결과는 2014년 발표되었다.[22]


00botox12.jpg » 보톡스(빨간 점) 혹은 식염수(파란 점)를 맞은 후의 환자들에서 우울증 척도(MADRS) 점수의 변화. 출처/ 각주[22] 총 74명의 남녀 우울증 환자가 실험에 참여했는데, 이들 중 33명에게는 보톡스가, 나머지 41명에게는 식염수가 주입되었다. 6주 뒤 이들의 우울증 정도를 살펴본 결과는 10여 년 전 핀치가 예상한 대로였다. 보톡스를 맞은 환자들에서 우울증 척도(Montgomery-Åsberg Depression Rating Scale; MADRS) 점수의 감소치가 47퍼센트(%)였던 반면에, 대조군 환자 집단에서는 20.6퍼센트(%)에 그쳤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진이 24주간 비슷하게 시행한 연구에서도 보톡스 시술은 우울증의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23]


불현듯 나도 보톡스 시술을 미리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환자 입장에서는 보톡스를 맞은 뒤 주름도 없어지고 우을증도 사라지는, ‘일석이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근무하고 있는 병원 입구에 “보톡스로 우울증을 치료합니다”라고 광고하면 흰소리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아무래도 조만간 성형외과 의사 친구에게 밥 한 번 사야 할 것 같다.



보톡스 치료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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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가 표정과 감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었던 환자는 퇴원 후에 병원을 방문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왜냐하면 보톡스 시술을 받아 얼굴의 표정이 바뀐 뒤에 발생할 수 있는 내면의 변화(감정의 무디어짐, 공감 능력의 감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비록 그 정도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 세세하게 환자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이 정신과 의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 환자 덕분에 보톡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톡스는 곱씹어볼수록 참 재미있는 약물이란 생각이 든다. 식중독을 일으키는 소시지 독에서 세균전의 후보 물질을 거쳐 여러 질환을 치료하는 근육 마비제, 이어서 미용 목적의 주름살 제거제로. 그리고 앞으로는 우울증 치료제가 될 가능성까지 있다니, 보툴리눔 독소는 마치 변신의 귀재인 카멜레온 같다. 어쩌면 보톡스의 진가는 이제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보톡스의 또 다른 변신을 기다려본다.


[주]



[1] http://scienceon.hani.co.kr/?mid=media&category=90222&page=2&document_srl=155736

[2] http://www.isaps.org/Media/Default/global-statistics/2015%20ISAPS%20Results.pdf

[3] Arnon, S.S., et al., Botulinum toxin as a biological weapon: medical and public health management. JAMA, 2001. 285(8): p. 1059-70

[4] Yi, H., et al., A Familial Outbreak of Food-borne Botulism. J Korean Neurol Assoc 2004. 22(6): p. 670-2

[5] Ting, P.T. and A. Freiman, The story of Clostridium botulinum: from food poisoning to Botox. Clin Med (Lond), 2004. 4(3): p. 258-61

[6] Scott, A.B., A. Rosenbaum, and C.C. Collins, Pharmacologic weakening of extraocular muscles. Invest Ophthalmol, 1973. 12(12): p. 924-7

[7] http://www.hkma.org/english/cme/onlinecme/cme201209main.htm

[8] http://www.minyanville.com/special-features/articles/botox-beauty-patent-neurotoxicity-anti-age/7/6/2010/id/28853?refresh=1

[9] Carruthers, J.D. and J.A. Carruthers, Treatment of glabellar frown lines with C. botulinum-A exotoxin. J Dermatol Surg Oncol, 1992. 18(1): p. 17-21

[10]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1 : 노무현 시대의 명암. 2011: 인물과사상사

[11] http://www.theguardian.com/uk/2003/feb/09/film.filmnews

[12] Havas, D.A., et al., Cosmetic use of botulinum toxin-a affects processing of emotional language. Psychol Sci, 2010. 21(7): p. 895-900

[13] Hennenlotter, A., et al., The link between facial feedback and neural activity within central circuitries of emotion--new insights from botulinum toxin-induced denervation of frown muscles. Cereb Cortex, 2009. 19(3): p. 537-42

[14] http://star.mt.co.kr/stview.php?no=2012090308174350857&type=&SVEC

[15] Zajonc, R.B., S.T. Murphy, and M. Inglehart, Feeling and facial efference: implications of the vascular theory of emotion. Psychol Rev, 1989. 96(3): p. 39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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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aron-Cohen, S., et al., The “Reading the Mind in the Eyes” Test revised version: a study with normal adults, and adults with Asperger syndrome or high-functioning autism. J Child Psychol Psychiatry, 2001. 42(2): p. 241-51

[18] http://www.huffingtonpost.com/2010/08/11/teri-hatcher-naked-makeup_n_678912.html

[19] http://www.psmag.com/health-and-behavior/can-botox-cure-your-depression-facial-paralysis-emotions-feeling-84227

[20] Finzi, E. and E. Wasserman, Treatment of depression with botulinum toxin A: a case series. Dermatol Surg, 2006. 32(5): p. 645-9; discussion 649-50

[21] Wollmer, M.A., et al., Facing depression with botulinum toxin: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J Psychiatr Res, 2012. 46(5): p. 574-81

[22] Finzi, E. and N.E. Rosenthal, Treatment of depression with onabotulinumtoxinA: a randomized, double-blind, placebo controlled trial. J Psychiatr Res, 2014. 52: p. 1-6

[23] Magid, M., et al., Treatment of major depressive disorder using botulinum toxin A: a 24-week randomized, double-blind, placebo-controlled study. J Clin Psychiatry, 2014. 75(8): p. 837-44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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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 과장
우울하던 의과대학 시절에 운명처럼 찾아온 정신과학과 여전히 연애 중인 정신과 의사. 환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정신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자 늘 고민한다.
이메일 : ir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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