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호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영국 대학의 첨단 실험실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던 정준호님이 어느 날 의료봉사단을 따라 아프리카 스와질랜드로 날아갔습니다.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아프리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의학의 모습을 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낯설게 다시 바라봅니다.

[연재] 쫓고 쫒기는 인류와 기생충, 그 과거와 미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4)


 배추 씻은 물. 농장주 말로는 닭과 소의 분변으로 만든 퇴비를 사용한다 함. 정체불명의 다세포 생물. » 배추 씻은 물을 관찰하다. 농장주 말로는 닭과 소의 분변으로 만든 퇴비를 사용한다고 함. 정체불명의 다세포 생물. (정준호 님의 블로그 6월7일에서)

   

구충의 미래

 

 

 

매주 클리닉을 방문하는 환자들 중 몇 분은 꼭 기생충약을 타가곤 한다. 대변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더 심한 경우에는 입에서 회충이 나왔다며 티슈에 곱게 싸서 들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장내 기생충 감염은 대단히 흔한, 거의 일상에 가까운 일이다. 비록 증상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감염이 심각한 사람들은 드물지만, 기생충 감염으로 인해 낭비되는 영양분과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이런 극빈 지역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이런 장내 기생충 관리와 박멸은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약물을 통한 장내 기생충 관리는 주로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일정한 투약 지침을 시행해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약물 투여(Mass Drug Administration, MDA)는 큰 장점이 있다. 지금 있는 산골 마을 주변에는 여섯 개 학교에 이천여 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이 성장기의 학생들만 감염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일년에 한두번씩 국가에서도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생충약을 나눠준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투약 지침이나 교육 없이 무조건 약만 줘서는 한계가 있다. 또 지난번 MDA에서는 학생들의 체중이나 감염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투여해 약물 부작용으로 수십명의 학생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번도 제대로 된 기생충 유병률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상황에서 투약을 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또 기생충 감염량은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혹은 환경적으로 기생충에 취약한 일부 사람들의 감염량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은 양상을 보인다. 전체 감염량을 비교해보면, 약 10%의 사람들이 전체 기생충 숫자의 90%를 뱃속에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일부 사람들을 초전파자(super-spreader)라고 하며, 이 전파자들이 기생충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감염량이 높은 일부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해 꾸준히 관리하는 것은 기생충의 전파를 막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또 어떤 기생충이 유행하고 있는지 파악해 각각의 기생충에 가장 효과적인 약물을 정확히 투약하는 것도 또한 앞에서 얘기한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위험성을 낮추고, 장기적으로는 기생충의 약물 저항성 획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00chart » 차트 복습 중 발견한 구충 감염으로 추정되는 아이의 기록을 발견. 이상한 물건을 집어 먹는 증상인 pica는 구충감염에서 종종 보이는 증상. (정준호 님의 블로그 5월11일에서)

 

 

'동네에서 똥 받으러 다니는

털복숭이 아저씨'

 

이런 이유로 인해 학교를 중심으로 해 본격적으로 장내 기생충 감염 조사를 시작했다.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기생충 검사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채변을 하는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검사하면서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나눠준 채변통의 회수율은 80%가량으로 높은 편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니 흙이며 지푸라기, 쓰레기를 채워온 아이들도 있고 먹다 남은 과자를 우겨 넣어온 아이들도 있다. 한국도 옛날 채변검사를 하면 개똥을 대신 담아 갔다는 이 야기들이 전해지니, 여기도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렇게 열심히 채변검사를 하러 다녔더니, 마을에서 나의 이미지는 이제 ‘똥 받으러 다니는 기묘한 털복숭이 아저씨’ 정도로 굳어졌다.

 

받아온 대변들을 검사해보니, 의외로 지역내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번에 검사한 41명의 학생 중 회충에 감염된 아이가 한 명, 구충에 감염된 아이가 다섯 명이었으니 약 15% 남짓인 셈이다. 한국의 현재 장내 기생충 감염률이 약 2~3% 남짓이니, 스와질랜드의 상황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셈이다. 물론 더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봐야 비교적 정확한 감염률을 예측해 볼 수 있겠지만, 최근 스와질랜드에서 인분을 비료로 이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화장실 사용을 적극 권장한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00africa2 » 해질녁. (정준호 님의 블로그 5월10일에서)

 

 

100년전 미국의 기생충 대처법

"땅에 구멍을 파고 그곳에 대변을 보라"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미국 남부 지역이 구충 감염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시행한  방법도 이와 비슷했다. 당시 구충 감염은 미국 남부의 경제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였다. ‘미국 남부인들은 게으르다’라는 편견이 심어진 것도 이때였다. 구충 감염이 너무 심해 하루 200ml가 넘는 혈액 손실이 일어나 심각한 빈혈로 이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빈혈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게으르게 보인 것이다.

 

이런 구충 감염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박멸 프로그램을 시행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것은 당시 미국 낙농 사업국에서 일하고 있던 저명한 기생충학자인 찰스 스타일스(Charles Stiles)였다. 기존의 소극적인 박멸프로그램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스타일스는 당시 최고의 거부였던 록펠러를 설득했다. 스타일스의 설득으로 록펠러는 100만 달러를 투자하여 ‘구충 박멸을 위한 록펠러 공중 위생 위원회(Rockefeller Sanitary comimission for the Eradication of Hookworm Disease)’를 발족하게 된다.

 

이 위원회가 가장 처음 한 일은 구충의 위험성과 감염 경로, 예방법을 홍보한 것이다. 예방법은 단순했다. 아무 곳에나 대변을 보는 대신, 구멍을 파고 그 곳에 대변을 보는 것이다. 구충은 대변을 통해 배출된 유충이 토양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 피부에 파고 들어가 감염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오염된 대변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흘러들지만 않도록 막는다면 감염은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이후 곳곳에 공중화장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마다 화장실 사용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가 붙여지고 간판이 세워졌다. 지역에 따라 50%가 넘던 감염률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이뤄낸 가장 중요한 기생충 감염 예방책은 바로 경제개발이었다. 경제개발은 더 나은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자연히 집집마다 화장실이 생기고 구충의 감염 경로가 하나하나씩 차단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 전역에서 구충은 찾아보기 힘든 기생충이 되었다.

 

00worm1 » 달팽이에서 긁어낸 점액에 있던 선충. 잘 보면 허물 벗는게 보인다. 동영상도 있지만 용량 때문에 업로드 포기. (정준호 님의 블로그 6월12일에서)

  

 

한국의 박멸사업 성공사례, 

더 많이 세계와 공유할 길을 찾자  

 

한국도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불과 30여년 전 70%를 넘던 장내 기생충 감염률은 적극적인 박멸 사업의 진행과 경제개발,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이제 2~3%대로 낮아졌다. 기생충 박멸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단기간에 엄청난 효과를 본 나라는 드물다. 지금도 한국의 기생충 박멸 사업 진행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성공적인 노하우를 필요한 나라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한국건강관리협회는 1960년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에서 출발했다. 현재 건강관리협회는 탄자니아나 수단 등 아프리카의 저소득국가들에 기생충 박멸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박멸 사업 기록이나 노하우들이 정작 국내에서는 제대로 기록되거나 전수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구충 박멸 위원회는 꾸준히 성장해 록펠러 재단이 되고 현재의 록펠러 대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구충 박멸 사업 당시 얻어진 노하우와 철학으로 존스홉킨스와 하버드에 공중보건대학원이 생겼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중보건 연구소가 되었다.

 

회충, 촌충, 구충 같은 장내 기생충증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감염성 질환이다. 현재 감염자는 세계 인구의 약 5분의 1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7년 노먼 스톨(Norman Stoll)이 쓴 “기생충 가득한 이 세상(This wormy world)”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처음으로 전세계 기생충 감염 규모를 체계적으로 추정해냈다. 이 논문에서 스톨은 세계 인구 중 5분의 1이 구충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한 알로 대부분의 장내 기생충을 제거할 수 있는 신약들이 개발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엄청난 규모의 원조가 쏟아졌지만 감염자 비율은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동안 인구는 세 배로 늘었으니 절대적인 감염자 수는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또한 유럽이나 미국, 아시아 일부 국가들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구충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즉 현재 구충이 유행하고 있는 빈곤국에서는 오히려 과거에 비해 감염자 규모가 늘어났다는 말이 된다. 여전히 장내 기생충은 빈곤국을 좀먹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인 것이다.

 

찌는 듯한 여름에, 호수에서 물장구 치고 돌아와서는 주혈흡충에 감염되어 피오줌을 싸는 소년들. 요충 때문에 엉덩이 긁느라 잠 못 이루는 아기. 입으로 나온 회충을 신나는 얼굴로 휴지에 고이 싸서 들고온 청년. 대변에 섞여 나오는 장내기생충들에 부끄러워 속앓이 하는 아가씨. 클리닉에서 나눠주는 약 한두알은 단기적인 해결책만 제시해줄 뿐이다. 기생충약은 예방효과가 없어 언제든 재감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박멸 사업이 필요하고, 이런 노하우를 전수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한국에서 지난 수십년간 쌓아온 성공적인 공중보건사업의 노하우를 필요한 나라들의 현실에 맞추어 공유해 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또 나아가 이렇게 노하우를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전공자 부족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기생충학, 나아가 기초의학도들도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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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호 기생충 애호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저자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 석사학위를 받았다(2008).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자원봉사자로 1년간 기생충 관리 사업과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며(2010-2011), 다시 1년 간 굿네이버스 탄자니아에서 주혈흡충 관리사업 책임자로 있었다(2013-2014). 지은 책으로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2011)가 있으며,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말라리아의 씨앗>(2014), <바이러스 사냥꾼>(2015)이 있다. 2016년 현재는 소속 없이 독립 연구자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 byontae@gmail.com       트위터 : @byon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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