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전은 운명? -후성유전학은 무얼 말해주는가

 
디엔에이(DNA) 염기서열은 똑같아도 유전자가 발현되는 표현형은 달라질 수 있으며 거기에서 유전자 발현에 끼치는 환경의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후성유전학'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과학저널 <네이처>에 한 명은 어떤 질환을 앓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은 일란성 쌍생아의 유전체와 후성유전체를 비교 분석해보았으나 별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연구논문이 발표돼 연구자들한테 당혹스러움을 던져주었다. 유전체와 알려진 후성유전물질에서 질환을 일으키는 특이한 차이가 예상과 달리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이처>는 이 연구결과에 대한 전문가 평들을 보도하면서 '질병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연구라고 평했다.  후성유전학의 흐름과 최근 뉴스를 사이언스온의 상임필진인 김우재 박사가 풀어 정리했다.

 

00twin » 리투아니아의 쌍둥이 자매. 한겨레 자료사진/ 최대석 제공

 

 

 

 유전은 운명인가? 쌍생아의 차이

 

 

 

 

 

‘유전자’라는 개념의 정의는 생물학의 발달과 맞물려 변해왔다. 멘델의 시대에도, 다윈의 시대에도, 유전자의 물리적 실체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었다. 미국 생물학자인 토머스 모건이 처음으로 유전자를 염색체 위에 정렬시켰을 때에도 여전히 유전자의 화학적 조성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에 분자생물학은 유전자를 일종의 단백질을 코딩하는 DNA의 일정 부위로 정의했고, 이처럼 단순한 정의가 생산적 결과를 가져오는 한 과학자는 유전자의 정의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생물학의 발전은 유전자에 대한 정의가 지나치게 협소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했다. 이제 “염색체상에 가지런히 배열된 유전자”라는 관점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심지어 유전자 개념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다는 관점이 대두하고 있다.1)

 

     '후성유전학'이라는 신생 학문의 등장

 

‘생명’이라는 정의하기 어려운 현상을 연구하다 보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깨닫게 된다. 생명엔 언제나 ‘예외 현상’이 존재한다. 따라서 생물학자는 실용적 개념을 선호한다. 개념은 두루뭉술하게 정의되고, 생물학의 발전을 따라 함께 진화한다.2) 그래서 개념으로 생물학을 분석하려는 과학철학자들의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현장의 과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개념이 아니다. 개념은 실용적으로 정의되고 변화한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처럼 극단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 개념도 없을 것 같다. 이 말을 처음으로 쓴 콘래드 워딩턴은 후성유전학을 ‘발생 과정에서 어떻게 유전형이 표현형을 창출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현대생물학에서 후성유전학은 ‘DNA 염기서열의 차이에서 기인하지 않았지만 대물림되는 유전자 발현에 관한 연구’로 정의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대물림되는 현상에 관한 연구인 셈이다. 이러한 정의는 후성유전학이 무엇인지 규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후성유전학이 아닌지를 규정한다. 전통적 의미의 대물림 현상이 아닌 어떤 것, 그것이 후성유전학의 포괄적인 연구 주제가 된다.3)

 

후성유전학은 DNA에 달라붙는 생화학물질 ‘메틸기’의 패턴에 의해 유전형과는 다른 표현형의 변이가 나타나고 그것이 대물림된다고 본다. 좁은잎해란초(toadflax flowers)의 꽃은 DNA의 메틸화에 의한 표현형의 변이가 몇 세대에 걸쳐 대물림됨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또 식물과 곰팡이는 유전자 염기서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서도 대물림되는 다양한 표현형 변이의 창고다. 아구티라는 쥐의 털 색깔에 관한 연구결과는 메틸화에 의한 대물림 현상이 포유류에게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유전적으로 동일하지만, 아구티 유전자의 메틸화 패턴이 다른 부모에게서는 새끼들도 다양한 색깔을 지닌 채 태어난다.

 

후성유전학이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라마르크식 ‘획득 형질’을 닮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유전자에 흔적을 남기고, 흔적이 유전된다. 유전자는 환경의 흔적을 ‘기억’한다. 내 할아버지가 경험한 환경의 흔적이 나에게 유전된다. 1944년 네덜란드의 기근으로 인한 신생아들의 체중 저하와 당뇨병 증가는 인간도 후성유전학적 대물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4) 임산부의 행동 양식이 태아의 DNA 메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도 있다.5) 실제로 환경의 변화가 DNA의 메틸화에 영향을 끼치고, 그 영향력이 몇 세대에 걸쳐 대물림된다는 증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6) 그 작동 방식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환경이 몇 세대에 걸쳐 생리 현상과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다.   

 

 

최근의 쌍생아 연구가 보여주는 당혹…'질병의 복잡성'

 

일란성 쌍생아 연구는 유전학의 꽃이다. 일란성 쌍생아와 이란성 쌍생아는 환경 요인을 차단하고 유전적 요인만을 분석할 수 있는 최적의 비교연구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21세기 초엽부터 이런 기반을 뒤흔드는 예외가 발견됐다.7) 예를 들어 일란성 쌍생아들의 DNA 메틸화 패턴이 어릴 때는 비슷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달라지고, 그래서 표현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8)

 

성격이나 심리 상태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일란성 쌍생아 연구를 유전자결정론의 대표적인 예로 만드는 것은 유전적 질병 때문이지만, 일란성 쌍생아가 동일한 유전병에 걸릴 확률조차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단순히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질병에 걸릴 확률을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이 대표적인 예다. 다발성 경화증은 환경적 요인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알려진 퇴행성 신경질환이다.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으로 면역세포가 신경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인 ‘수초’를 외부 물질로 인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구 집단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이 질병에는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다. 얼마 전에 <네이처>에 한 명은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고 한 명은 그렇지 않은 일란성 쌍생아의 유전체를 해독한 결과가 보고됐다.9)

 

환경 요인이 중요하다고 알려진 질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대한 기존 연구결과들은 혼란스러웠다. 과거의 일란성 쌍생아 연구들은 분명히 일란성 쌍생아라 할지라도 이 질병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다. 하지만 유전학자는 기어이 다발성 경화증에서 차이를 보이는 일란성 쌍생아들의 유전체에서 유전적 차이를 찾아냈다. 다발성 경화증에 유전적 요소가 결정적인지 아닌지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번에 <네이처>에 실린 연구는 다발성 경화증에서 차이를 보이는 여성 일란성 쌍생아의 유전체를 완전히 해부한 결과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RNA의 발현 패턴, 메틸화 패턴, 단일 염기의 다형성(SNP) 등 현재의 기술로 조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전체적 변화가 분석됐다.

 

150만 달러가 들어간 이 연구의 결론은 허무하다. 연구진은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쌍생아와 그렇지 않은 쌍생아 간에 아무런 유전적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유전적 차이뿐 아니라 현재까지 알려진 DNA 메틸화 패턴에서도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고, 유전자 발현 패턴도 다르지 않았다. 연구진이 무엇을 의도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다발성 경화증의 유전적 기반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유전적 요인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이 다발성 경화증을 유도하려면 환경적 요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감염에 의한 것인지, 식습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유전자는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유전학은 결정론’이라고만 보는 철학적 결정론

 

후성유전학 연구는 급속하게 성장 중이다. 2006년에만 2500여 개 논문이 발표됐다. 암과 관련된 후성유전학 연구도 활발하다. 유전학은 유전자라는 확실한 실체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후성유전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생물학은 후성유전학이라는 학문에 의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존 관점들이 재고되고 있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외치던 모호한 사회과학자들의 변명은 그들이 증오하던 분자생물학자에 의해 연결고리를 찾아가고 있다. 분명히 환경은 중요하다.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을 닮았다는 이유로 많은 철학자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후성유전학적 변이의 대물림이 얼마나 안정적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다. 과학자들은 DNA 메틸화를 측정하는 방법론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하고 있다. 분명 염기서열의 변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물림 현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분자적 기제로 가장 적합한 것은 후성유전학적 변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고 해도 얼마나 일반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식적인 과학자들이 언제나 논문의 말미에 적어두듯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분자생물학은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오해와 환원주의라는 오해 속에서 성장해왔다. 이제 그 결정론자이자 환원주의자인 분자생물학자가 우리의 유전체 속에서 비결정론적 현상을 발견했건만, 철학자는 별반 관심이 없다. 분자생물학자는 여전히 환원주의자로 남아 있지만, 점차 비결정론에 물들어가고 있다. 생물학은 이렇게 발달하고 있는데, 철학자는 ‘분자생물학은 환원주의적 결정론’이라고 바라보는 과거의 굴레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과학에 대한 판단을 철학자에게 맡기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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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원, 행동유전학
“생명에 취한 사람, 초파리들의 날개짓 속에 편안함을 느끼는 몽상가.” 초파리를 이용해 행동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메일 : heterosis.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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