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오빠는 박사 따면 뭐할거야?”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s2e16.jpg » 삽화 / 박종애 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길영과 정원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길영은 준상과 팀을 이뤄 논문 제출에 성공했지만, 보영과 함께한 정원은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에러 때문에 제출에 실패한다. 논문 마감 후 모두 슬럼프에 빠진 가운데, 길영과 보영은 박사과정에 지원하고, 전문연구요원인 국현은 4주 간의 군사훈련을 받으러 간다. 얼마 뒤, 가을학기가 개강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정길은 애인이 생긴다. 정길은 연애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은 논문 발표를 밤 새워 준비해서 겨우 해낸 뒤, 다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
  



#16. 참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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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논문 발표 준비를 하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자서가 아니다. 예은이 때문이다. 예은이가 미소 한 번 지을 때마다 진짜 죽겠다. 문자 그대로, 심장이 터지려고 한다. 데이트하다 돌연사하진 않아야 할 텐데.


둘은 족욕카페에 있다. 예은이가 오자고 했다. 정길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다. 사실 일찍 들어가서 자게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예은도 안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어서 그건 안 되겠다고 했다. 사랑과 배려를 동시에 잡는 두 마리 토끼 같은 여자라니. 연애 4일차. 정길은 결혼을 마음먹었다.


탁자 위로 손을 만지작거리고, 밑으로 발을 간질였다. 피곤도 잊고 나이도 잊었다. 광활한 우주에 정길과 예은 뿐이었다.

 

“오빠는 박사 따면 뭐할거야?”

 

예은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곧잘 정길을 사지로 내몰던 그 미소를 띠면서.


한 조사 결과[1]에 따르면 대학원생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은 “졸업 언제 해?”라고 한다. 2위는 “결혼 언제 해?”, 그리고 3위가 “학위 받으면 어디로 가?”다.


정길이 이 질문을 한 두 번 받아봤겠나. 레퍼토리야 넘쳐난다. 친구에겐 ‘박사부터 따고 생각해봐야지’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말을 돌린다. 부모님껜 ‘아, 그런 거 좀 묻지 말라고’ 하며 화낸다. 친척 어르신들께는 ‘연구소나 대기업 같은 데로 갈 것 같은데, 천천히 알아보려고요’라며 대충 둘러댄다. 교회에 다닌 뒤부터는 ‘주님은 아시겠죠’가 더해졌다.


하지만 예은이 묻는다. 피곤할 테니 그냥 자라고 하고도 싶지만 너무 보고 싶어서 족욕카페에 데려온 예은이 묻는다. 눈가 주름마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려준 듯한 예은이 묻는다. 카톡 하나를 써도 김수현 작가가 대필해준 듯한 예은이 묻는다. 제일 사랑하고, 제일 사랑해주는 예은이 묻는다.

 

“솔직히 모르겠어. 내가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고 학교로 온 게, 정말 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거든. 공부도 더 하고 싶고 연구도 더 하고 싶어서 온 거야. 이왕 왔으니 학위는 꼭 따고 싶지만, 그걸 이용해서 뭐가 돼야지, 이런 생각은 없어.”

 

정길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정길은 스스로도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꺼내보는 초심이다.

 

“멋있다….”

 

예은은 반짝거리는 따뜻함으로 정길을 응시했다. 정길은 좀 쑥스러워졌다.

 

“에이, 뭘. 사내라면 큰 포부가 있어야 하는데, 그치?”

“아냐. 난 이런 게 더 멋있어. 역시 우리 오빠 최고다.”

 

내심 바라던 바로 그 대답을 해준다. 정길은 예은의 부모님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분일까? 날 마음에 들어 하실까?




은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정길은 예은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오빠, 지영이 있잖아, 어린이집 교사하는 애, 걔가 그러는데, 어린이집 교사는 자기 자식은 절대 어린이 집에 안 맡기려고 한대. 불안해서 못 맡기는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아이들한테는 엄마가 더 필요하겠구나, 그런 걸 느끼나봐. 교사 한 사람이 아이 세 명씩 돌봐주게 되는데, 그것부터 좀 한계가 있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애를 낳으면 적어도 세 살까지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경력단절이니 뭐니 하지만, 그래도 내 아이가 제일 소중하잖아. 안 그래?”


정길은 이 말을 듣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어린이집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어린이집 교사가 아니라 그 부모부터 욕하던 부모님이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엄마가 키워야지, 어떻게 핏덩이를 남들 손에 맡기냐는 것이다. 넌 그런 여자 데려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하셨다.


그 때마다 정길은 반박했다. 요즘 시대에 혼자 벌어서 먹고 살기 힘든 거 모르느냐, 요즘 시대에 집에서 살림만 하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느냐, 아예 결혼을 하지 말란 소리냐, 하면서. 하지만 내심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를 데려오고 싶었다. 이왕이면 부모님께 예쁨 받는 며느리가 좋으니까.


그런데 예은이 먼저 이런 말을 해주다니. 정길은 후손들에게 미안해졌다. 향후 10대손 정도까지의 행운은 자기가 다 끌어다 쓴 거 같아서.


정길은 겨우 이와 발만 닦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예은에게 보낼 카톡을 쓰다가 전송 버튼을 못 누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 부족한 몸에 뜨끈한 물로 족욕까지 한 탓이다. 피곤과 노곤과 행복. 정길의 밤은 달았다.




길은 11시간이나 잤다. 깨자마자 아침 인사를 하려고 핸드폰부터 찾았다. 그런데 쓰다만 카톡이 보인다. 풉.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군. 간밤의 카톡도 보인다. ‘오빠 벌써 잠든 거야?’, ‘잠들었나 보네. 많이 피곤했지이? 잘자요! 예은이 꿈꿔!!!!’ 하는 예은의 카톡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예은이 꿈은 꾸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든 탓일 게다. 아쉽다.


정길은 다시 어젯밤의 추억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5일째인가? 와, 시간 정말 안 간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예은의 질문도 떠올랐다. “오빠는 박사 따면 뭐 할 거야?” 다른 말도 떠올랐다. “애를 낳으면 적어도 세 살까지는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정길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애를 대신 낳아줄 수는 없다. 젖을 대신 물릴 수도 없다. 그러니 세 살까지 직접 키운다면 주된 역할은 예은이가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다. 정길이 박사를 따고 뭔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예은이가 육아에 전념할 수 있다.


‘박사는 딸 수 있을까?’


정길은 여기서부터 막혔다. 박사과정 3년에 논문이라곤 워크숍 논문 하나.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준비하는데 이제 겨우 쌀밥 한 번 안 태우고 지어봤다고 보면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박사를 받으려면 학회나 저널 논문 2개 분량은 있어야 할 것이다. 교수님이 정해놓은 기준이다. 그리고 워크숍 논문은 학회나 저널 논문 0.5개 정도로 어림잡을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9년쯤은 더 있어야 박사가 된다는 말이다. 정길의 나이 서른 셋. 첫째부터 늦둥이 삼고 싶진 않다.


그래, 실력이 점점 증가하는 걸 감안해보자.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가락이 있으니까. 실력이 두 배씩 증가한다고 가정하자. 3년 만에 0.5개의 논문을 썼다. 실력이 두 배씩 증가한다고 가정했으니까 3/2 = 1.5년만 더하면 0.5개를 더 쓸 수 있다. 그러면 저널이나 학회 논문 1개가 된다. 합이 4.5년이다. 여기서 다시 학회나 저널 논문 하나를 추가하려면 얼마나 걸리는 거지? 3/4 + 3/8 = 9/8로 잡아서 1.125년으로 계산하는 게 맞나? 아니면 처음 논문 1개가 4.5년이니 4.5/2로 해서 2.25년으로 잡는 게 맞나? 더 작은 숫자로 하자. 4.5 + 1.125를 계산하면….


물론, 그리 될 리 없다. 인생사가 언제는 내 마음대로였나. 정길은 차라리 회사나 계속 다닐 걸 싶었다. 그러면 지금쯤 돈은 좀 모아뒀을 텐데. 왜 박사를 따러 와서….


‘아. 그럼 예은이를 못 만났겠지.’


정길은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정길은 늘 “딴 건 모르겠고, 군대 제대한 다음”이라고 답해왔다. 이젠 그 답을 바꿔야겠다. “안 돌아갈래.”


어쨌거나, 연구를 더 열심히 해야겠지. 박사를 따려해도, 취직을 하려해도. 오늘부턴 데이트 후에 다시 연구실로 가야겠다.




은 출근을 하고 데이트를 했다. 예은이를 생각하고, 예은이를 만났다. 찰나이자 영겁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예은의 집 앞이었다.


“오빠, 이제 기숙사 가서 잘 거야?”

“아니, 나 연구실 가려고.”


“정말? 어떡해…. 할 일 많아? 미안해…. 내가 오빠 시간 많이 뺏었지….”

“아냐,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예은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데, 뭘 뺏어. 예은이한테 멋진 남자친구 하고 싶어서 연구 더 열심히 하려는 거야.”


“나 때문에 오빠가 고생하는 거 싫어….”

“예은아. 너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냐. 널 위해서 고생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고생하는 것도 아냐. 조금 늦게 자는 거지, 충분히 잘 거야.”


“알았어…. 그럼 잘 때 꼭 카톡하기!”

“그래, 그래. 예은아, 늦겠다. 어서 들어가.”

“어? 대박. 10시 1분이네. 나 빨리 들어갈게!”


후다닥 뛰는 예은의 뒷모습. 정길은 마음속으로 사랑한다고 스무 번쯤 외치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도 논문 2개는 쓰고 졸업해야 할 텐데…. 어떡하지….’


그 때였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워크숍 논문을 확장할 거리다. 그리고 다른 아이디어도 하나 떠올랐다. 주제만 떠오른 게 아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될지, 구현 해보려면 어떤 도구를 써야 좋을지, 어떤 실험 데이터가 필요할지 한 번에 다 떠올랐다.


‘와, 대박.’


정길은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급히 메모장 앱을 켰다. 생각이 흘러가기 전에 적어놓아야 한다. 오타가 나든 말든 재빨리 적어 내려갔다.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중간중간 빠진 고리가 있다. 애써 머리를 굴려 겨우겨우 채워놓았다.


희망이 생겼다. 이대로만 되면 졸업이 가능하다. 졸업을 하면, 졸업만 하면, 그래도 취직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예은이와도….


안 그래도 부푼 가슴이 더욱 부풀었다. 정길은 아이디어를 계속 되새기면서 연구실로 갔다.




10시 30분. 연구실엔 준상만 남아 있다.


심정길(박3): 안 들어갔네?

강준상(박4): 어? 벌써 10시가 넘었네요.

심정길(박3): 10시만 되면 퇴근하던 애가, 뭐하는데?

강준상(박4): 다음 주 논문 발표 제 차례잖아요. 발표할 논문 좀 고르고 있었어요.

심정길(박3): 뭐 재밌는 거 있어?

강준상(박4): 그냥 이거 저거 보고 있어요.


정길은 준상의 모니터를 봤다. 논문 저자가 만들어놓은 듯한 발표 자료가 떠 있다. 어? 근데 어디서 많이 본듯…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아까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심정길(박3): 이거, 논문 뭐야?

강준상(박4): 네?

심정길(박3): 제목이 뭐야? 어디 나온 거야?

강준상(박4): 이거 이번 ISCA[2]에 나온 건데요, 제목은 여기….


준상은 발표 자료 첫 페이지에 있는 제목을 보여줬다. 정길은 제목을 재빨리 외워서 자리로 갔다. 발표 자료와 논문을 검색해서 내려 받았다.


정확하게 정길이 생각했던 두 번째 아이디어와 같다. 게다가 훨씬 더 자세하고 명료하다. 정길이 이 논문을 보지 못한 채로 논문을 썼다면, 신경숙과 같은 말을 해야 했을지 모른다. “내가 읽지도 않는 논문을 표절할 리가 있나.”[3]


정길은 저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첫 번째 저자를 검색해봤다.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박사과정 학생이다. 출판된 논문이 몇 개 있다. 정길이 연구하고 있는 분야다. 논문 하나의 제목이 수상하다. 찾아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평행이론은 진리다. 케이블 예능에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4] 그 논문은 정길의 첫 번째 아이디어, 그러니까 워크숍 논문 확장을 위해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실현이었다. 심지어 정길의 워크숍 논문이 인용되어 있다. 평행할 거면 시간적으로도 평행하던가. 왜 자신에겐 이제야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박사를 받는 게 빠를까? 내가 사업을 해서 대박 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논문을 써서 박사가 되는 게 빠를까? 예은이한테 그런 말만 안 해놨어도…. 완전 연구가 하고 싶어서 박사 온 걸로 말해놨는데 또 그만 두면…. 아니 근데 이 나이에 박사도 아니면 어디에 취직해….’


이런 생각을 하던 정길은, 드디어 결론에 다다랐다.

 

심정길(박3): 준상아. 안 바쁘면 나랑 술 마시러 가자.

강준상(박4): 네?

심정길(박3): 바빠?

강준상(박4): 아뇨. 그건 아닌데….

심정길(박3): 그럼 술 한 번 먹자.

강준상(박4): 이왕 마실 거면, 치맥(치킨과 맥주) 어때요? 마침 배도 출출한데.

심정길(박3): 좋아. 가자.


준상은 기숙사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운동은 건너뛸 심산이었다. 이왕 쉬는 거 술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정길은 옆방에 혼자 남아 있던 정원도 불렀다. 정원도 순순히 나왔다.




은 치킨집에 자리를 잡았다. 오로지 먹히기 위해 살찌워진 닭이 해체되어 앞에 놓였다.


김정원(박4): 이렇게 모이니까 딱 고년차 모임인데요.


초등학교를 4학년부터 고학년이라 부르는 것처럼, 박사과정은 3년차부터 고년차라고 부른다. 물론 연구실 분위기에 따라 4년차쯤은 되어야 고년차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환갑잔치’의 의미가 퇴색된 것처럼.


심정길(박3): 그러네.

김정원(박4): 그럼, 고년차끼리 모였으니 졸업이야기나 해볼까요?


평소 같았으면 정원을 구박했을 정길이다.[5] 술 마시러 와서까지 굳이 졸업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심정길(박3): 그래, 준상이 넌 디펜스[6]가 언제야?

강준상(박4): 이제 얘기를 꺼내긴 해야 하는데….

김정원(박4): 너야, 말만 하면 되지. 논문도 넘치도록 있겠다, 교수님도 딴 데로 옮겨가시니 붙잡을 이유도 없겠다, 빨리 해라.

강준상(박4): 뭐, 11월쯤 많이 하니까, 그 때로 이야기해 보려고.

심정길(박3): 박사 받고 나서는? 생각해 봤어?

강준상(박4): 그게 문젠데요, 일단 포닥[7]을 나가고 싶긴 한데….

심정길(박3): 미국으로?

강준상(박4): 그쵸.

김정원(박4): 여자친구는 어쩌고?

강준상(박4): 그게 문제야. 내 마음대로 하자면 결혼해서 데리고 나가고 싶은데, 여자친구도 직업이 있고, 또 부모님도 한국에 계시고 하니까….

심정길(박3): 그래도 이런 유망한 친구한테 시집가는 게 괜찮을 텐데.

강준상(박4): 유망하긴 뭘요.

심정길(박3): 근데, 포닥 갔다 오면? 그 다음엔 뭐할 거냐?


사실 이것을 묻고 싶었다.


강준상(박4): 글쎄요, 교수 자리도 생각은 있는데, 그게 마음대로 돼야죠. 대학에서도 학과 별로 교수를 뽑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딱, 컴퓨터 그래픽 전공한 교수가 은퇴할 때쯤 컴퓨터 그래픽 전공하는 교수 한 명 뽑고 이런 식이라면서요.

심정길(박3): 그래, 그거 타이밍 잘 맞아야 된다더라.

김정원(박4): 거기다 해외에서 박사 받은 사람들이 드글드글할 텐데요. 외국에서 포닥이나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한국 대학에 자리 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대요.

심정길(박3): 그럼, 우린 연구소 자리 알아보면 되는 건가?

김정원(박4): 연구소도 논문이 있어야 가죠. 최소한 SCI급[8]으로 2개는 있어야 한다던데.


정길은 자신의 워크숍 논문을 생각했다. 아침에 계산한 게 몇 년이었더라…. 앞으로 3년쯤 더 하면 되는 것이었나?


강준상(박4): 근데 그게 또 학회 논문은 안 쳐준다면서요. SCI급 저널로만 2개래요.

심정길(박3): 하나 쓰기도 막막한데 어느 세월에….

강준상(박4): 근데 또 우리 분야는 학회 논문을 더 쳐주잖아요. 교수님도 학회 논문을 먼저 쓰려고 하시고. 그런데 연구소에서는 저널 논문만 쳐주니까, 이걸 어떻게 하기가 힘든 거죠. 저도 지금 연구소 알아보려면 논문 2개밖에 없는 거래요.


라고, 학회 논문 2개, 저널 논문 2개의 저자인 준상이 말한다. 번듯한 논문 하나 없는 정원과 정길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심정길(박3): 아씨. 그럼 너랑 나는 역시 기업 쪽으로 가야겠네.


정길은 유일한 동지인 정원을 보며 말했다. 회사를 그만 두고 대학원에 온 정길이다. 어차피 다시 회사로 갈 거라면, 뭐하러 공부를 했을까? 실무경력이나 더 쌓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돈도 더 많이 버는데.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연예기획사 오디션을 보는 학생들이 많다. 멀쩡히 학교 잘 다니다가도 오디션을 본다. 부모님이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오디션을 본다. 꿈을 포기하지 못해서다. 애써 합격하면 연습생이 된다. 데뷔는 요원하다. 몇 년이고 연습만 하다가 포기하기도 한다. 겨우 데뷔해서 망하기도 한다. 꿈을 취미 삼았다면 적당히 돈 벌며 즐겁게 살았을 사람들이, 젊은 시절의 경력에 지우개를 댄다. 정길에게 박사란 아이돌 같은 것이었을까?


김정원(박4): 솔직히, 우리 정도 학벌이면 대기업 취직은 쉽죠. 학교에 취업설명회도 엄청 자주 하잖아요.

심정길(박3): 그래. 그럼 돈은 많이 벌겠지.

김정원(박4): 근데 그건 계산을 해봐야 하지 않아요? 대기업에서 55세 넘기기가 힘들다던데. 국가연구소는 정년도 보장되고, 이게 공무원처럼 돼서 오래 다니면 연금도 나오잖아요.

심정길(박3): 55세? 그럼 난 애들 대학도 못 보내는 거야?

강준상(박4): 그래도 박사 따고 들어가면 좀 낫지 않을까요? 요즘 임금피크제다 뭐다 해서 정년 연장도 한다던데.

심정길(박3): 그래봤자 60 아냐? 애들 시집, 장가는 어떻게 보내냐.

김정원(박4): 그 다음은 치킨집이죠. 원래 공대생 커리어의 끝은 치킨집이잖아요. 혹시 몰라요, 저기 저 사장님도 왕년에 공대생이었을지.


심정길(박3): 너, 치킨집은 아무나 하는 줄 아니. 요즘 치킨집도 진짜 박 터질 걸. 동네마다 두 세 군데는 기본으로 있잖아. 사람들이 치킨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강준상(박4): 저도 얼마 전에 봤는데,[9] 재료값 나가고, 인건비 나가고, 카드 수수료 나가고, 프랜차이즈 수수료 나가고, 그렇게 다 빼고 나면 진짜 알바생만큼 벌기도 만만치 않다던데요.

심정길(박3): 핵심은 임대료지. 장사가 잘 되면 더 올려서 달라고 한다며. 진짜 장사 잘 되면 내쫓고 건물주가 직접 해버리고.

김정원(박4): 역시, 돌아, 돌아 건물주가 답인 건가요.

심정길(박3): 그래, 요즘 세상에, 한 15억만 있으면 어디서 건물 하나 사다가 월세 받아먹고 살면 딱이지. 진짜 돈 욕심 있는 것만 아니라면.[10]

김정원(박4): 건물만 있으면 취미 삼아 치킨집 해도 좋겠네요. 본전치기만 해도 뭐 어때요. 내가 먹을 치킨 내가 튀겨 먹는 맛만 해도 쏠쏠할 것 같은데.

심정길(박3): 그래, 근데 15억이 애들 장난이냐. 내 집 하나 마련하기가 힘든 세상인데. 애들 생기고 하면 집도 좀 커야 할 거 아냐. 재산 모으긴 뭘 모아, 모으는 족족 집 한 칸 사는 데 쏟아 붓겠지.


강준상(박4): 우울한 얘기들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요.

심정길(박3): 야, 인생도 쓴데, 우리 소주 한 잔 하자. 사장님, 여기 참이슬 하나요!

김정원(박4): 형, 근데, 결혼도 안 해놓고 자꾸 애들 얘기하는데, 애인 생겨서 그러는 거예요?

심정길(박3): 어? 너 어떻게 알았어?

김정원(박4): 푸하하하, 어떻게 미끼도 없이 던진 낚시에 걸려요? 일요일 아침에 만났던 그 여자에요?

심정길(박3): 너, 봤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11]


사장님이 참이슬 한 병과 소주잔을 갖다 주셨다. 정원이 술병 밑동을 툭툭 때리고 뚜껑을 열어 잔에 따르면 말했다.

 

김정원(박4): 여자친구도 생긴 분이 인생이 쓰긴 뭘 써요. 그럼 우리 소주 한 잔 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교회에서 만났어요?


고년차들은 정길의 따끈따끈한 연애 이야기로 웃음을 찾았다. 술맛을 찾았다. 어차피 답 없는 진로 따위. 참, 진, 이슬, 로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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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5년 10월 25일에 조사된 결과로 대학원생 1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응답률은 100%다. (그 대상자는 나다.)

[2] 이스카(ISCA, International Symposium on Computer Architecture): 매해 열리는 컴퓨터 관련 국제학회로, 주로 컴퓨터 하드웨어에 관한 분야를 다룬다.

[3] 한윤정 선임기자. 신경숙 ‘표절 의혹’ 확산 - “문학이란 땅에서 넘어졌으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겠다”. 경향신문. 2015년 6월 23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506230600035&code=960100

[4] ‘평행이론’은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과학적 증거는 없고, 우연 몇 개를 끼워 맞추어 증거 삼는 것이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한 엠넷의 “비틀즈코드”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재로 사용했다.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1) 놀이 - http://scienceon.hani.co.kr/303642

[6] 디펜스(defence):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을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교수님들 앞에서 박사학위논문 내용을 구두발표하는 것으로 심사 받게 된다. 구두발표를 마친 후에는 교수님들을 질문을 던지는데, 여기에 대답까지 잘 해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교수님들의 공격(질문)을 잘 막아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과정을 디펜스(defence, ‘방어’라는 뜻)라고 한다.

[7] 포닥: 포스트닥터(Post-Doctor)의 줄임말. 한국어로는 ‘박사 후 과정’이라고 한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학교 연구실에 소속이 되어 연구하는 기간제 계약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사 학위 취득 후에 연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남아서 하는 경우도 있고, 다른 학교(해외를 포함한)로 가서 새로운 연구 경험을 하는 경우도 많다.

[8] SCI급: SCI(Science Citation Index)는 직역하면 “과학논문인용색인”이란 의미로, 소위 ‘급’이 되는 논문들을 모아놓은 목록이다. (http://ip-science.thomsonreuters.com/mjl/ 에서 확인 가능) ‘SCI급 논문’이란 이 목록에 속한 저널에 실린 논문이라는 의미이다. ‘SCI급 논문’ 개수는 연구 실적의 중요한 기준이 되며, 학교에 따라서는 자신이 제1저자인 ‘SCI급 논문’이 있어야만 박사학위를 주기도 한다.

[9] 프로그래머의 치킨집 차리기.jpg ?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097&iskin=webzine&l=441993

[10] 실현시킨 사람도 있다. 5억으로. 직장생활 22년 동안 모은 5억으로 시골에 집 한 채 짓고 오피스텔 2채 사서 월세 120만원 받으며 사는 것이다. 일단 5억 모으는 게 관건이긴 하지만. 박창욱 기자. “‘120만원으로 한달 살기’ 2년째 했더니...” 머니투데이. 2013년 12월 6일.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3120508085078965&type=1

[1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5) 멀티태스킹 - http://scienceon.hani.co.kr/329928


  ■ 작가의 말

한 독자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여자친구가 대학원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의 링크를 보낸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저는 가끔 불안할 때가 있어요. 이 소설을 읽는 분들이 마치 이것이 대학원 생활의 전부인 양 오해하시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학원생의 생활상은 정말 다양하거든요. 그런데 소설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또, 제가 캐릭터들을 잘 못 살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처음 기획할 땐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양한 측면을 서술하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아무래도,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를 검인정 체제로 바꿀까 봐요. ^^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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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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