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8세기 아동과학의 스타 '망원경 선생'
과학과 문화의 화학반응 (1)
| ●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가 과학 만화를 읽고 또 읽는다고 애 엄마가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어떤 만화길래 푹 빠졌나 싶어 나도 한 번 들춰본다. ● 이런 걸 액션 어드벤처 에스에프(SF)라고 해야 하나? 악당이 등장해 바이러스, 곤충, 자석 같은 무기로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면 꼬마 영웅들이 과학적인 원리로 악당을 물리친다. 이런 유치한 만화가 뭐가 좋을까? 나도 애 엄마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앞선다. ● 과학이랑 상관없이, 그저 거기 나오는 액션 영웅담이 재밌는 건가? 조카랑 얘기를 해 보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이는 그 안에 담긴 과학의 내용들도 꽤 흥미로워 하고 있다. ● 이런 책들을 통해 과학을 만나고 있는 내 조카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또는 이 아이는 과학에 어떤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일까? 자연에 대한 올바른 지식? 악당을 물리치는 무기를 만드는 유용한 지식? 아니면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로움 그 자체? 아마도 과학이 내 조카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의 과학문화, 즉 과학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 아직 내 조카는 이런 내 질문에 시원스레 답해줄 만큼 충분히 크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내 조카의 눈높이에서 그 아이의 세계를 이해할 만큼 충분히 크지 않은 것 같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 속에서 과학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통해 다른 세계로의 눈높이 훈련을 하다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 그런 생각에서 18세기 영국의 과학문화라는 새로운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영국 사회에서 유행했던 과학문화의 한 장면을, 마치 당시 사람인 양 바라보면서 지금의 과학문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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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 완전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신기하게도,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마치 누군가 관련 데이터를 내 머릿 속으로 급하게 입력해 주는 것처럼, 그에 대해 나 스스로 대답을 한다.
여기는 영국 런던의 우리집 침실, 지금은 1763.
런던? 우와~ 신난다! 그런데, 1763년? 250년이나 과거로 온 거라고?
돌이켜 보면 진짜로 이상했던 것은 이런 낯선 장소, 낯선 시대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나 자신이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아메리카 식민지로 가는 배에 차를 선적해야 하고, 프랑스로는 도자기를 실어 보내야 한다. 또, 인도에서 오는 배에 실린 물건들도 확인해 보아야 한다.
과학을 알아야 '젠틀맨'
오전 중에 바쁘게 일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보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로크의 책이 보인다. 아이 교육 때문에 읽어 보게 된 책이다. 얼마 전 문득 생각해 보니 이제는 자식 교육에도 좀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내 대에서 무역으로 돈은 꽤 벌었으니 내 아이는 그 재력을 발판 삼아 좀 더 좋은 길을 걷도록, 더 높은 신분으로 올라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젠틀맨과 레이디에 걸맞는 교육을 시켜야 할 것 같다.
젠틀맨에 걸맞는 교육이 뭔데? 누군가 존 로크(John Locke)의 <교육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693)>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거기 보니 로크 선생이 어린 젠틀맨들이 과학에 충분히 익숙해 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사람, 뉴턴이랑 친구라고 하더니, 그래서 이런 얘기를 했으려나... 이 사람 영향 때문인지, 혹은 유명한 뉴턴 선생 때문인지 나 어렸을 때보다 과학교육을 더 많이 강조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학교에서도 자연철학이나 수학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고 동식물 보감 같은 자연사 책도 꽤 늘어난 것 같다.
1690년대 말 로크가 마샴 경의 열두살짜리 아들 가정 교사를 할 당시 썼다는 짧은 글도 한 편 읽어봤다. 자기 학생에게 읽힐 요량으로 쓴 글이었을 텐데, 꽤 반응이 좋아서 한 십년 전부터인가 따로 출판되어 읽히고 있다고 한다. "자연철학의 요소들(Elements of Natural Philosophy)"이라는 제목의 이 짧은 글에서 로크는 물질과 운동부터 그의 유명한 <인간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4쪽짜리 축약본까지 다양한 자연철학적 주제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과학적 주제들을 다루었다. 지금 우리 아이도 로크가 가르쳤다는 마샴 경의 아들 또래니까 이런 류의 자연철학을 가르치면 젠틀맨으로서 부족함이 없겠지. 그런데, 아이가 읽기에는 이 글이 좀 재미없어 보이기도 하고... 뭔가 더 좋은 책이 없을까?
꼬마 신사 숙녀를 위한 뉴턴 과학
짬을 내서 웨스트엔드 근처의 책방에 들린다. 책방 주인에게 아이에게 읽힐 만한 쉽고 재미있는 과학책이 있을까 물었더니 대뜸 책 한권을 집어든다. 요즘 최고로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어린 신사 숙녀를 위한 뉴턴주의 철학 체계>(1761)1)
금빛 커버에 100쪽이 조금 넘는 책이다. 저자가... 톰 텔레스코프(Tom Telescope)? "망원경" 선생이라고?
과학을 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인가? 혼잣말을 하는데 옆에 있던 책방 주인이 말을 거든다. "필명일 게요." 그럼 그렇지, "망원경"이란 성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책방 주인이 몇 마디 더 거든다. "존 뉴베리(John Newbery)라는, 그 책 출판업자가 썼다고들 하더군요. 아동서적 업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게에도 그 사람이 만든 책이 꽤 있어요."
금빛 커버를 들춰본다. "작은 사람들의 모임(Lilliputian Society)"에서 "망원경" 선생이 했던 6개의 강연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목차를 보니 각 강연에서 어떤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I. 물질과 운동
II. 우주, 특히 태양계에 대해
III. 공기, 대기, 유성
IV. 산, 샘, 강, 바다
V. 광물, 식물, 동물
VI. 인간의 오감과 오성(understanding)
뉴턴 하면 물질, 운동, 만유인력, 중력, 태양계, 이런 것만 연구한 줄 알았는데, 목차를 보니 아닌가 보다. 공기, 대기, 유성, 산, 샘, 강, 바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까지 꽤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네. 오호~ 역시 천재 뉴턴 선생이야. 그런데, 옆에서 책방 주인이 또 한 마디 거든다.
"제목에는 뉴턴철학이라 나와 있지만, 실상은 자연철학과 자연사의 인기 있는 주제들을 다 모아 놓은 책입니다. 사실 뉴턴 철학만 다루면 어렵기도 하고 재미가 없기도 하니까요."
"그럼 뉴턴의 이름을 마켓팅에 활용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과학계에서 워낙 권위 있는 사람이니까요. 과학계 밖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선왕 폐하 부부와도 친하게 지내면서 지금의 폐하 교육에 관해서 조언도 많이 했다나 보더군요."
뉴턴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포장한 것 같아 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똑같이 장사하는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사들고 집으로 온다.
"팽이와 공의 철학(Philosophy of Tops and Balls)"
아이에게 책을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읽어 볼 요량으로 책을 집어든다. 권두화(아래 그림)에는 제대로 차려 입은 부모와 아이들이 탁자 주변에 앉아 있고 탁자 위에는 젠틀맨 복장을 제대로 입은 어린 아이, 아니 어린 아기가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아기가 "망원경" 선생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이 조그만 아기가 뉴턴철학을 설명해 주는 바로 그 망원경 선생이란다.
책이 쉽고 재미있군. 망원경 선생이 카드 놀이에 지친 네 명의 어린 젠틀맨과 레이디들에게 순수한 재미를 선사하겠다며 과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카드 놀이보다 재밌을 수 있겠어? 라며 코웃음을 쳤는데, 이 정도면 카드 놀이에 지쳐 있을 무렵에는 재밌게 읽히겠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팽이나 공 같은 익숙한 장난감을 가지고 일식이나 월식, 지구의 공전, 자전 같은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 것도 괜찮군. 아이들이 과학을 낯설게 느끼지 않을 수 있고, 자기 장난감을 가지고 직접 해 볼 수도 있을테니 말야. "팽이와 공의 철학"이라는 책의 광고 문구가 과장은 아닌 것 같아. 뉴턴 과학이라지만 꼬마 신사 숙녀에게 복잡한 수학 공식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이렇게 익숙한 것들을 통해 접근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긴 할 거야.
과학을 놀이처럼 제시하는 방식이 이 책의 강점으로 보인다.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거나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실용적 유용성을 강조했다면 교양 있는 젠틀맨이나 레이디에게는 맞지 않는 실용서처럼 생각되어서 책이 낮게 평가되었을 텐데, 마치 카드 게임처럼, 그러면서도 소모적인 카드 게임보다는 더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수준 높은 게임처럼 과학을 제시하고 있어서 젠틀맨과 레이디를 위한 교육에 적합해 보인다.
뉴턴과학으로 '바른 생활'을 가르치다
조금씩 책에 빠져 들어갈수록 장사꾼의 눈으로 책을 평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꽤 상품성도 있어 보인다. 이 책을 다음 번 아메리카로 보내는 무역품에 포함시켜보면 어떨까? 식민지에서도 잘 팔리려나? 식민지만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수요가 더 있을 것 같고 유럽 대륙 쪽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읽어보니 단순히 뉴턴 과학만 전달하는 책은 아닌 것 같네. 젠틀맨이 갖춰야 할 예의범절도 잘 드러나 있고. "망원경" 선생의 말마다 딴지를 거는 심술궂고 무례한 어린 신사 톰 윌슨은 바로 그 역할을 위해 만들어낸 것 같아. 예의바른 "망원경" 선생과 어찌나 대비가 되는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보면 젠틀맨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금방 배울 수 있다니까. 이런 부분이 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에게 어필할거야. 그 사람들,영국의 젠틀맨과 레이디에 대한 동경이 있을테니 말이야. 우리 같은 상인 계층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상류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고.
종교적으로 꽤 안전하다는 점도 책의 상품성을 높일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과학이 신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그려내서 교회의 미움을 살 수도 있을텐데, 이 책은 오히려 과학으로 신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야. 사막에 자라는 선인장, 곤충의 변태, 지구가 완벽한 구형의 모습을 띠는 것을 힘들게 하는 울퉁불퉁한 산, 이 모든 게 다 이유가 쓸모가 있고, 그게 모두 신의 지혜를 보여주는 거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 과학이 기독교적 신실함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는 셈이지.
이래서 이 책이 <과학자가 되려는 어린이를 위한 뉴턴의 철학체계>가 아니라 <어린 신사 숙녀를 위한 뉴턴의 철학체계>인가 보군. 수학 실력도 별로 없어 스스로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로크 선생이, 그러면서도 젠틀맨 교육에 과학이 필요하다고 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는 알 것 같네.
과학을 '올바른 지식'으로만 그려냈다면 아마 이 책은 인기를 얻기 힘들었을거야. 다른 유익한 지식도 많은데 굳이 왜 과학을 통해 머리 아픈 지식을 배우려고들 하겠어. 성경 읽기도 바쁜데 말야. 그렇다고 기술을 개량하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 같은 과학의 실용성을 강조했다면 이 책은 젠틀맨이나 레이디를 위한 책이 될 수 없었을거야. 젠틀맨이나 레이디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어. 나라도 비싼 돈 써가며 내 아이에게 그런 책을 사주지는 않을거야. 책을 사는 사람들은 내 아이를 교양있는 젠틀맨과 우아한 레이디로 만들고 싶어하는 거니까 말야.
이 책 만든 뉴베리라는 사람, 정말 마켓팅 포인트를 잘 잡아냈어. 과학책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사람들이 과학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잘 집어냈군. 정말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수출하는 문제를 진짜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어. 참, 그전에 우리 애한테 먼저 읽혀야지. 우리 아이들도 저 책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지식과 도덕을 겸비한 상류 사회의 젠틀맨이나 레이디가 되어야 하니까.
아, 너무 오랜 만에 책을 집중해서 읽어서 그런가, 오늘은 유독 피곤하군. 이제 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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