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과학 학술출판 공룡기업에 과학자들 반기 들다

오철우 2012. 02. 13
추천수 0

세계 연구자 수천 명, 거대 출판사 엘서비어에 보이코트 서명 중

"고가 구독료, 끼워팔기 관행" 비판...투고와 심사 참여 거부 확산


00elsevier3

과학기술 분야에서 매우 많은 학술저널을 출판하고 있는 엘서비어 출판사의 상징 문양.



학자들이 뿔났다.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새로 건져올린 지식은 연구자의 여러 분석과 검토를 거쳐 작성된 논문으로 세상에 공개되며, 이렇게 공개된 논문을 두고서 학자들은 검증, 토론, 반박을 벌이며 새로운 지식의 진전을 이룬다. 그러니 학술지의 출판과 유통은 곧 지식의 발견 선언과 확산의 과정인 셈이다. 이런 학술 논문을 출판하는 거대 출판기업이 과학 학술 출판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다며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해당 출판사에서 나오는 학술지들에 논문 투고나 편집위원회 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보이코트 선언을 하고 나섰다.


불명예의 보이코트 대상이 된 출판사는 1880년 세워진 네덜란드 기반의 거대 출판기업 ‘엘서비어(Elsevier)’로, 이 기업은 과학·의학과 기술 분야에서 <셀>, <랜싯>을 비롯해 2000여 종의 학술저널과 수만 권의 과학 책을 출판·유통하고 있다. 2월13일 오전 현재(한국시각 기준)까지 ‘지식의 비용(the cost of knowledge)’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서명 웹사이트에서 5000명이 훨씬 넘는 세계 각국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엘서비어에서 나오는 저널에 논문을 내지 않겠다” “논문 심사 참여나 학술지 편집위원회 참여를 거부하겠다” 등의 보이코트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왜 화가 났을까? 온라인 서명 웹사이트를 보면, 과학자들은 ‘엘서비어 보이코트’를 벌이는 이유를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엘서비어는 개개 학술저널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구독료를 매긴다.
둘째, 이처럼 구독료가 비싸다보니 많은 도서관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큰 ‘꾸러미’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꾸러미에는 도서관들이 실제 원하지 않는 많은 저널들도 포함돼 있으며, 엘서비어는 꾸러미에 꼭 필요한 일부 저널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엄청난 이윤을 얻고 있다.
세째, 엘서비어는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제약하는 SOPA, PIPA와 연구물법(Research Works Act: RWA) 같은 조처들을 지지하고 있다.


보이코트는 엘서비어 출판사의 나쁜 관행을 직접 문제 삼고 있으나, 더 넓게 보면 이번 사태의 큰 배경에는 인터넷과 온라인 출판이 전통적인 종이 학술지 출판 체계에 가한 변화 때문인 것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엘서비어 보이코트를 주도적으로 제안한 연구자 그룹 34명이 지난 8일 공개한 성명서 '지식의 비용'을 보면, 보이코트 주창자들은 온라인 전자저널이 새로운 학술출판의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생겨난 여러 변화를 강조하면서 비용을 낮추는 이런 추세와는 대조적으로 상업출판사들이 높은 구독료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세계는 눈에 띌 정도로 변했다. 저자들은 자신의 논문을 전자 식자를 이용해 스스로 식자한다. 출판과 유통 비용은 예전처럼 많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 지식의 확산이 저널 책자의 물질적 유통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 지식의 확산은 주로 전자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확산의 수단이 공짜는 아니지만, 가격은 훨씬 싸며 지식 확산의 대부분은 (인쇄물인) 수학저널들과는 완전히 별개로 일어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식자 비용이 출판사에서 저자들한테로 옮겨지고 있기에 저널 출판 비용은 떨어지고 있으며 출판과 유통 비용도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반면에 대학 도서관에서 저널 구입을 위해 쓰는 비용 규모는 끝 모를 정도로 계속 오르고 있다. 비용을 더 이상 정당화하지 못하는 그런 가치의 서비스를 위해서 수학자들이 왜 이 자발적인 노동을 계속 갖다받쳐야 하며 수학자를 고용한 기관들은 왜 이런 돈을 써야 하는가?" ('지식의 비용' 성명서 중에서)


보이코트 주창자들은 이처럼 높은 구독료와 끼워팔기를 내세우는 상업출판사들의 관행이 유독 엘서비어만의 문제는 아니며, 다만 엘서비어가 가장 두드러지게 이런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보이코트 대상으로 삼게 됐다고 설명했다.


00Elsevier2엘시비어 보이코트 서명 작업을 벌이고 있는 웹사이트 '지식의 비용' 첫 화면.


서비어 보이코트 운동은 애초 수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수학 교수인 티모시 고워스(Timothy Gowers)는 지난달 21일 자신의 웹블로그에다 엘서비어 출판기업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수학자들한테 엘서비어 보이코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거대 출판기업인 엘서비어에서 나오는 학술저널들과는 관련을 맺지 말자는 보이코트 운동을 수학자들한테 공개 제안하며서 다른 연구자들도 이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공개 사이트가 하나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 글은 금세 화제가 되어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이어 미국 대학의 한 젊은 연구자가 실제로 서명 웹사이트 ‘지식의 비용’을 개설하면서 각국 과학자들이 보이코트 서명에 줄이어 동참하고 있다.


보이코트 서명 운동은 기존 상업출판 관행의 문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데 일단 성공한 듯하다. 여러 과학 전문매체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보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과학 전문 잡지인 <더사이언티스트>("엘서비어를 점령하라?")와 영국 과학저널 <네이처>("엘서비어 보이코트 가속화")는 관련 뉴스를 전하며 이번 보이코트 운동의 배경과 연구자들 내부의 반응을 자세히 보도했다.


보이코트 참여에 서명한 연구자들은 2월13일 오전 현재(한국시각) 5600명을 넘어섰으며 온라인 서명이 계속되면서 참여자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연구자들은 엘시비어에서 출판·유통하는 학술 저널에 논문을 내지 않겠다거나, 이 저널에 실리는 논문의 편집위원회 활동이나 동료심사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식의 세 가지 서약 중 원하는 서약을 선택해 서명하고 있다. 서명에는 한국인 연구자들도 여럿 참여했다. 애초에 수학자들 사이에서 촉발된 이 보이코트에는 수학자들이 대략 20% 참여하고 있지만, 생물학자, 물리학자를 비롯해서 여러 분야로 서명자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네이처>는 엘서비어 출판사에서 나오는 유력한 수학학술지는 별로 없어 수학자들의 보이코트가 큰 타격을 주진 않겠지만 생물학자들의 보이코트는 엘서비어에서 나오는 <셀(Cell)>이나 <랜싯(Lancet)> 같은 유력 저널에 타격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보이코트를 선언한 생물학 연구자한테 자기 희생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엘서비어 쪽은 "보이코트 주장 대부분이 오해에서 비롯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네이처>와 <더 사이언티스트>는 엘서비어 관계자들이 "학술저널의 구독료는 평균 수준이며 특별히 비싼 편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전자논문의 다운로드 비용은 10년 전과 비교해 5분의 1로 낮아졌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엘서비어 쪽은 끼워팔기 관행도 강제적이지 않으며 도서관에 더 많은 전자저널을 구독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연구물법(RWA)에 대한 지지는 학술저널의 동료심사 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는 정부 법안에 반대에 뜻을 표명한 것이지 학문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제한하자는 뜻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전통적인 상업출판사에 저자들이 반기를 든 사건은 공개된 성명서에서도 엿보이듯이 온라인 전자출판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학술출판 체제에도 무언가 변화가 불가피해졌음을 보여주는 사태로도 풀이된다 (참조 기사:  "공개접근 과학논문 10년 새 10배 늘어")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문헌정보팀의 김상준 팀장은 현재의 쟁점을 ‘온라인 출판시대가 맞이한 학문 출판 구조의 변화’라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도서관들이 인쇄 학술지 중에서 필요한 학술지를 골라 구독했지만, 지금은 인쇄물 없이 온라인 전자저널로만 논문을 출판하고 또 전자저널로 논문을 구독하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상업출판사의 도움 없이도 연구자들이 주도해 전자저널을 직접 창간하는 일도 훨씬 쉬워졌다. 굳이 상업출판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갈등 사태는 상업출판사들이 이제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고 그런 과정에서 비롯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온라인 전자저널이 대안으로 얘기되고 있지만 논문을 투고하고, 심사하고, 출판하고, 유통하는 전체 시스템에서 볼 때 전자저널의 대안을 실현하는 데에도 상당히 복잡한 현실적 요소들에 얽혀 있어, 전통적인 출판 체제를 바꾸는 데에도 여러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엘서비어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판의 표적이 된 데에는 이 출판사의 출판관행이 그동안 불신을 자초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 자료실에 있는 권혜경 연구원은 "엘서비어가 고가의 구독료 정책을 취해온 데다가 구독계약의 가격 조건 등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불신을 부추긴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서비어 보이코트의 사태는 현재 진행 중이다. 이미 상당한 규모로 커진 이번 보이코트가 일회성의 사태로 끝날지 또는 그 여파가 과학 지식의 전통적인 출판과 유통 체제에 어떤 변화를 남길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관심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트위터 : @wateroo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어릴적 충분한 잠이 뇌 발달 단계에 중요’ -초파리 실험’어릴적 충분한 잠이 뇌 발달 단계에 중요’ -초파리 실험

    뉴스오철우 | 2014. 04. 23

    미 연구팀 "어릴적 잠 부족, 어른된 뒤 행동능력과 연관""수면신경회로 활성 억제하는 도파민 분비 적어 많은 잠" 동물은 왜 생애 중 많은 시간을 잠자며 보낼까? 생애 초기인 어린 시기에는 왜 유난히 더 많은 잠을 잘까? 생물학적으로 잠은 어떤...

  • 국내 연구진, 성인 체세포로 복제배아 줄기세포 첫 확립국내 연구진, 성인 체세포로 복제배아 줄기세포 첫 확립

    뉴스오철우 | 2014. 04. 18

    차병원 연구팀, 성인 남성 세포와 난자 핵 치환 방식 지난해 미국 이어 두 번째..'성인세포 이용'으론 처음국내 연구팀이 성인의 체세포와 난자를 이용해 인간 체세포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5월 미국 연구팀이 복제 ...

  • 원시 수렵채집과 현대도시 생활, 장내미생물 많이 다르네원시 수렵채집과 현대도시 생활, 장내미생물 많이 다르네

    뉴스오철우 | 2014. 04. 17

    탄자니아 하드자 부락인과 이탈리아 도시인 장내 미생물 비교독일 등 연구팀 “장내 미생물은 생활환경 적응 공진화 파트너” '원시 수렵채집과 현대 도시 생활처럼, 다른 생활방식에선 장내 미생물 생태계도 확연히 다르다.’ 구석기의 수렵채집 원시...

  • ‘문워크 초파리’의 뒷걸음질 신경세포들‘문워크 초파리’의 뒷걸음질 신경세포들

    뉴스김준 | 2014. 04. 15

    오스트리아 연구팀, 열유전학 기법 이용해 탐색“앞으로 걷기 기본 신경회로 꺼 뒷걸음질” 추정 Moonwalking flies논문 부록에 실린 문워크 초파리 실험 동영상들을 자세히 보려면 ☞http://www.sciencemag.org/content/suppl/2014/04/02/344.6179.97.DC1....

  • 나쁜 환경의 스트레스가 텔로미어 길이 단축할까나쁜 환경의 스트레스가 텔로미어 길이 단축할까

    뉴스오철우 | 2014. 04. 10

    미 연구팀 “어릴적 열악한 가정 환경과 짧은 텔로미어 관련”관련논문 31편 종합분석 “상관관계 근거 아직 약해” 주장도 나쁜 가정 환경이 텔로미어 길이를 줄여 생물학적 노화를 촉진한다?미국의 아홉 살 소년 40명을 조사했더니 열악한 가정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