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글씨의 물리학: 펜과 종이 모세관의 잉크 줄다리기

김호영 교수 연구팀, '잉크의 유체역학' 국제학술지 게재예정

번짐과 선의 모양과 두께 결정하는 모세관 힘 등 이론식 제시


00writing실제 종이에 나타난 잉크 글 쓰기의 모습. 왼쪽은 펜을 멈춰서 번짐이 일어나는 현상을, 오른쪽은 선을 긋다가 펜촉을 종이에서 뗀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그림에서 선의 끝 부분은 포물선 모양인데, 연구팀은 "종이가 아니라 실리콘웨이퍼를 이용한 실험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포물선 모양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출처/ 미국물리학회(APS), 김호영 교수 연구팀




속에 있던 잉크는 어떤 힘의 작용과 물질의 성질 덕분에 종이 표면으로 흘러가 글씨를 만들어낼까?


마이크로 세계의 물리학으로 생각하면, ‘종이가 잉크를 빨아들이는 힘이 잉크를 머금고 있는 힘보다 클 때에 잉크가 펜에서 종이로 빨려갈 것’이라고 답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종이 표면에 있는 다공성 구조가 만들어내는 빨아당기는 모세관 힘이 펜이 잉크를 빨아들이는 모세관 힘보다 클 때에 종이 표면의 구멍 속으로 잉크가 빨려들어가  글씨가 써진다는 물리학 실험결과와 이론식이 제시됐다.


이름난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를 비롯해 여러 물리학술지를 내는 미국물리학회(APS)는 이 학술지에 실리는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뽑아 전하는 보도용 자료에서, 김호영 서울대 교수(기계항공공학부)가 이끈 연구팀이 이런 연구결과를 이론과 실험으로 확인해 ‘잉크로 글씨 쓰기의 유체역학’에 관한 논문을 곧 이 학술지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제물리학회인 아이오피(IOP)가 운영하는 물리학 뉴스 사이트인 피직스월드(physicsworld.com)도 ‘글씨 쓰기의 물리학이 마침내 나왔다’는 제목으로 “펜과 종이의 모세관 속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 경쟁’에 따라 종이로 흘러드는 잉크의 유량이 달라진다”는 연구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했다.


이번 연구가 제시한 이른바 ‘글씨 쓰기의 물리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잉크 펜으로 종이에다 글씨를 쓸 때 어렴풋이 경험할 수 있는 바를 수학적인 비례식으로 이론화하고, 뒤이어 실제 실험에서 이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에 따르면 매끈한 종이보다 어느 정도 거친 종이에서 잉크 글씨가 더 잘 써지고, 매끈한 유리 표면의 위에는 잉크 글씨를 쓰기 어려운 이유도 이번 연구에서 해명된 셈이다.



00pen2 » 김지하 시인의 원고지, 만년필, 안경. 한겨레 자료사진(2004년).

구팀은 먼저 간단한 물리적 모형을 상정하고서, 잉크가 종이 위에서 머물거나 움직일 때 잉크 반점 또는 선이 어떤 모양과 두께로 형성되는지 보여주는 수학적 비례식을 세웠다. 여기에는 펜의 모세관 힘, 종이 표면에 있는 구멍들의 모세관 힘, 잉크의 표면장력, 그리고 잉크의 점성이 네 가지의 주요 요인으로 다뤄졌다. 펜을 움직여 글씨를 쓸 때에는 펜의 운동속도가 새로운 요인으로 추가된다.


여기에 사용된 물리적 모형은 어떤 것일까? 연구팀은 모형의 비례식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단순한 형태를 찾았다. 김 교수는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 온>과 한 전화통화에서 “예컨대 중세시대에 썼던 갈대 펜처럼 단순하게 모세관 구조만을 갖춘 ‘최소 펜(minimal pen)’을 펜의 모형으로 삼고, 마이크로미터 규모의 지름과 높이를 지닌 작은 원통 기둥이 촘촘히 또는 성기게 박힌 구조를 종이 표면의 모형으로 삼아서, 이런 비례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마이크로 기둥들이 촘촘하게 붙은 종이 표면(거친 종이)에선 기둥 사이에 적당한 틈새(구멍)가 생겨, 종이 표면의 모세관 힘은 커진다. 반면에 마이크로 기둥들이 드문드문 박힌 종이 표면(매끈한 종이)엔 기둥 사이 틈새도 넓어 모세관 힘이 제대로 생기지 않는다. 김 교수는 “이런 모형을 바탕으로 모세관 힘과 다른 요인들을 계산식에 넣어 잉크 글씨의 두께, 번지는 속도 등에 관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학적 모형을 만든 다음에, 연구팀은 이런 모형 가설을 실제로 검증하기 위해 실험 관측을 하기에 좋은 색다른 펜과 종이를 제작했다. 먼저 실험용 종이다. 연구팀은 실리콘웨이퍼에다 10~20마이크로미터 지름과 높이를 지닌 원통 기둥 패턴을 배열해 새겨넣었다. 마이크로 기둥을 어떤 표면에선 촘촘하게, 어떤 표면에선 성기게 만들었다. 거친 종이와 매끈한 종이의 효과를 대신하는 실험재료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실험용 펜이다. 연구팀은 지름 0.5~2밀리미터의 유리 모세관을 이용했다. 또 갖가지 농도 용액을 잉크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실험용 펜과 종이로 글씨를 쓰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했으며, 이 동영상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랬더니 모세관 힘, 점성, 표면장력, 운동속도을 쉽게 측정할 수 있는 실험 상황에서, 수학적 비례식이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


실제 종이와 펜을 이용해서도 실험을 했다. 피직스월드의 보도를 보면, 연구팀은 0.1밀리미터 지름의 펜촉을 일반 종이 위에서 1초당 5밀리미터의 속도로 움직일때 이론식에서는 0.82밀리미터 두께의 선이 그어질 것으로 예측됐는데, 실제에서도 0.7밀리미터가 나와 예측과 비슷했다. 그러나 종이 위에서 2초 동안 펜을 멈춰 서 있을 때에는 지름 3밀리미터의 반점이 생길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1.3밀리미터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실리콘웨이퍼를 이용한 실험과는 달리, 실제 종이는 잉크를 흡수하면 부풀어올라 틈새 구멍의 크기가 커지면서 애초 구조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실제 종이에서는 이론식의 예측값에서 벗어난 수치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수는 “표면이 거친 종이에서 잉크가 잘 번지고, 매끄러운 종이에는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 것은 주로 모세관 힘의 차이 때문”이라며 “유리 표면에서 잉크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 것도 유리 표면이 다공성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섬유질 옷의 주머니에 뚜껑 열린 잉크 펜을 넣어둘 때 쉽게 잉크 반점이 생기는 것도 옷의 섬유질에 있는 다공성 구조의 모세관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공성 표면 구조의 섬유질이 아닌 가죽 같은 재질의 옷에서는 이런 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잉크로 쓴 글씨의 맨 끝 쪽에는 타원이나 정원이 아니고 늘 정확하게 포물선 모양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글씨를 이루는 선의 끝은 언제나 정확하게 포물선 모양을 이루는데, 이 또한 이론과 실험에서 모두 입증됐다”고 말했다(아래 동영상과 위 사진 참조). 움직이는 펜촉의 앞쪽 방향에 있는 종이 표면의 구멍들은 모세관 힘의 작용으로 잉크를 빨아들이는 데 비해, 지나온 뒤쪽의 구멍들은 이미 잉크로 채워져 있어 그 힘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포물선 모양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논문의 제1저자인 김정철(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박사과정)씨는 "잉크가 종이 위에 멈춰 있을 때에 번지는 반점의 크기가 시간의 2분의1승에 비례하기 때문에 반점이 운동할 때에는 선 끝에 포물선 형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영상]  위에서 찍은 영상으로, 실리콘웨이퍼 위에서 펜이 왼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다. 액체(물-글리세린 용액)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퍼지는 모습이 보인다.



100m 높이까지 물 끌어올리는 나무의 모세관 힘 연구가 목표


류가 파피루스 위에 글씨를 써 남긴 이래, 종이에 글씨를 써온 역사는 5천여 년이나 됐다. 그만큼 종이에 잉크로 글씨 쓰기는 우리한테 너무도 익숙한, 지금도 계속되는 문화 유산이자 그 기초이다. 그런 글씨 쓰기의 마이크로 세계에서 벌어지는 물리 현상을 잉크의 유체역학으로 설명하는 이번 연구는 그 자체로 흥미로움을 전해준다. 논문 저자들은 어떤 동기로 이런 연구를 했을까?


김 교수는 “잉크 글씨의 역사는 오래 됐고, 잉크 글씨가 (마이크로 세계의 수준에서) 어떻게 써지는지는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여길 수 있는 주제인데도 사실 아무도 연구한 적이 없다”며 “솔직히 궁금했고 흥미로워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굳이 왜 이런 연구를 하느냐고 또 묻는다면… 뿌리에서 높은 잎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나무의 능력에 관심을 두어 왔는데 이번 연구는 그런 관심사를 연구하는 데 기초가 될 수도 있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떤 나무는 높이가 무려 100미터나 돼 뿌리부터 나무 꼭대기까지 100미터 넘게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나무는 물을 이동시키는 데 매우 효율적인 기계라고도 볼 수 있다”며 “물을 이동시키는 더 좋은 기계를 만드는 데 이런 연구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1저자 김정철씨는 "종이나 휴지의 마이크로 섬유에서 액체가 어떻게 퍼지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이론식은 아직 없는데, 이런 분야의 마이크로 유체역학과 관련한 수학적 모델링을 처음 제시한 이번 연구가 이 분야의 연구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학술논문의 연구성과에 관한 보도는 논문 발표 이후에 하는 게 관행이지만, 학술지 발행 기관(APS)이 따로 엠바고를 설정하지 않았으며 또한 발표될 논문 내용을 대중매체에 보도자료로 이미 발표했고, 해외 매체에서도 이미 보도됐기에, 사이언스온은 논문 발표 이전에 취재, 보도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논문 저자도 취재에 응해주셨습니다.]

[고침] "기원전 2천 년 무렵에 인류가 파피루스 위에 글씨를 써 남긴 이래, 종이에 글씨를 써온 역사는 5천 년이나 됐다"라는 원래 문장에서 "기원전 2천 년 무렵에"를 삭제합니다. 종이에 글을 써온 역사 5천 년을 잘못 역산해서 생긴 착오인데, 또한 파피루스 기원의 정확한 연대 설명을 짧은 문장 안에 쓰기도 곤란해 아예 뺐습니다. 2011년 11월30일 오후 5시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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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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