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두려움에 면역 따윈 없는 걸까?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s2e13-final.jpg » 삽화 / 박종애 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길영과 정원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길영은 준상과 팀을 이뤄 논문 제출에 성공했지만, 보영과 함께한 정원은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에러 때문에 제출에 실패한다. 논문 마감 후 모두 슬럼프에 빠진 가운데, 길영과 보영은 박사 진학을 결심한다. 그리고 국현의 훈련소 입소와 길영과 보영의 박사 면접 시험을 앞두고 엠티를 다녀온다. 드디어 박사과정 면접 날….
  



#13. 두려움

00dot.jpg



“자네, 박사는 왜 하려는 건가?”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세 교수 중 한 명이 물었다. 길영은 준비한 대로 답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꿈이었습니다.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면서, 컴퓨터 그 자체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의 작동 원리가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석사과정은 단순히 배우는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다시 제 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프로그래머를 꿈꾸지는 않습니다. 컴퓨터 자체를 발전시켜서, 새로운 컴퓨터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 심도 있는 연구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다야?“


가운데 앉아 있던 교수가 길영의 말을 끊었다.


“네?”


말을 끊어놓고는 그게 다냐고 묻다니.


“그게 다냐고. 요즘 애들은 하나 같이 거짓말쟁이인 건지, 아니면 순진하고 멍청한 건지. 솔직하게 좀 얘기해봐. 평생 수입의 총합을 계산해보니까 박사를 따는 게 낫기 때문이라든가, 석사 따봐야 어디서 인정도 못 받으니까 한다든가, 이왕이면 박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고 싶다든가, 아니면 또 뭐야, 지금 취업하긴 무서우니까 학교에서 몇 년 더 삐대고 싶다든가, 군대 가기 싫어서 전문연구요원으로 편하게 처리하고 싶다든가, 야, 엄청 많네. 뭐 이런 진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너 같은 애들이 들어와서 교수 눈치나 살살 보고 그러다가 데이터 조작하고 그러는 거라고. 알어?”


감정 섞인 말투였다. 왜 하필 자기 차례에 이러시나? 길영은 억울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정말로 컴퓨터를 발전시키는 것이 제 가슴이 뛰는 일이기 때문에….”


“아니면 창의력이라도 있던가. 어떻게 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앉았냐? 아, 지겨워.”


교수의 표정이 구겨진다. 길영은 구겨져서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느낌이다.


“자, 다시 한 번, 솔직하게 얘기해봐. 박사는 왜 하는데?”


길영은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2주가 걸렸다. 자신이 왜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2주 내내 고민했다. 그 결과를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이유를 대라니.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석사를 해보니까 논문 쓰는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내가 컴퓨터 발전에 기여한다는 생각에,”


“야, 됐어! 나가봐. 창의력도 없는 애들을 데리고 무슨 논문이 나오겠어. 이런 애들 다 떨어뜨려야 돼. 안 그래요 교수님?”


질문하던 교수가 양 옆의 교수에게 물었다. 한 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 명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의미는 같다. 이런 애들 다 떨어뜨려야 한다는 거다. 세 분이 나란히 종이에 뭔가를 적는다. 손짓을 보니 ‘X’ 같다.


길영은 당황했다. 분명 박사면접은 똥만 안 싸면 합격이라고 했다.[1] 성적이 나쁘면 잔소리를 좀 듣는 경우는 있으나, 별 거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심장이 싸하게 식는다. 온 몸의 땀샘이 차갑게 운다. 정말, 떨어지는 건가? 혹시 받아주기로 했던 교수님이 내친건가? 그럼 어떡하지? 다른 학교 대학원을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취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지금 매달려보기라도 하는 게 맞겠지? 아까 뭐가 솔직한 이유랬지? 군대랑….


“안 들려? 그만 나가 보라고.”


길영은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뭔가가 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조교!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길영은 일어나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길영은 한 발짝을 떼고 있었다. 다음 순간, 발을 헛디뎠다. 넘어졌다.


“악!”



정신을 차렸을 때, 길영은 침대 밑에 있었다. 꿈이었다. 넘어진 게 아니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박사면접 날 아침 6시 50분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다. 기쁨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씻고, 정장을 입고, 준비한 자기소개 멘트를 읊조렸다. 꿈속의 교수가 현실엔 없기를 바라면서.


바람은 이루어졌다. 길영의 면접은 별 탈 없이 끝났다. 교수님들은 빤한 질문만 하셨다. 대답을 대충 듣더니 나가라고 하셨다. 길영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됐다.




영은 잘 잤다. 하지만 걱정은 더 컸다. 아직 자신을 받아준다는 교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련 분야 교수님들은 모두 연락드려 보았다. 하지만 확답은 못 들었다. 한 분은 남는 티오(T.O.)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연구실의 석사 학생이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려고 한다고 하셨다. 다른 한 분은 되도록 추가 인원은 안 뽑으려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보영의 면접도 별 탈 없이 끝났다. 교수님의 관점에서는.


“어유, 예쁜 여학생이네.”


면접관이 ‘인사’를 했다. 보영은 예감이 안 좋았다. 애써 좋게 생각하려 했다. 외모도 스펙이라고, 어느 랩퍼도 말했으니까.[2]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교수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어이구, 수업도 열심히 들었네. 딱 부러진 여학생이구만. 그래, 석사 졸업 논문은 뭐에 대해 쓰려고 하지?”


‘딱 부러진 여학생.’ 칭찬으로 쓰는 말이다. 조금 전에 ‘예쁜 여학생’ 소리만 안 들었다면 보영도 칭찬으로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자신이 남자였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똑똑하다, 혹은 성실하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래도 칭찬으로 넘겨야겠지. 여기선 민감해지면 안 된다.


석사 졸업 논문 주제는 선배들이 이야기한 단골 질문 1번이었다. 보영은 준비한 답변을 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연구가 별로 되어 있진 않으니까. 전문가인 교수님들 눈엔 단점이 죄다 보일 것이다. 그래가지고 석사는 따겠느냐고 혼나면 어떡하지?


“음, 그래요. 혹시,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동답서문이 나왔다.


“네?”


회사 면접 때 이런 질문이 곧잘 나온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박사과정 면접에서 들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생각해보니 남자선배들하고만 면접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자 선배를 찾아서 물어봤어야 했던 건가. 그런 과정이 필요했던 건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급하게 답할 땐, 가장 솔직한 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당분간은 계획 없습니다. 지금은 남자친구도 없고요.”


“그래요. 잘 했어요. 박사과정은 가장 집중해서 연구해야 하는 시기에요. 근데 여학생들이 중간에 결혼을 하고 나면 집중을 못 하더라고. 집안일 한다고 저녁 되면 꼬박 꼬박 집에 가버리지, 주말엔 얼굴도 안 비추지, 애라도 생기면 휴학까지 해버리니까. 진득허니 연구할 시간이 없는 거야. 이게 또 연구 주제가 생기면 제때 제때 논문을 써 줘야, 어디 저널에 붙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졸업만 무한정 늦어지잖아. 또, 본인 졸업만 문제야? 그 연구실 입장에서도 논문거리 하나 놓치는 게 된단 말이야.”


보영은 아득해졌다. 아무리 어른들의 특기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꼰대질하는 거라지만, 왜 지금, 왜 내가, 왜 이딴 말들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이게 또 졸업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우리 학교가 국가지원금을 얼마나 받는지 알아? 보영 학생을 비롯해서, 이게 다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라고. 그렇게 박사를 땄으면, 연구소 같은 데 가서 계속 열심히 연구를 해줘야 되잖아. 그게 보답하는 길 아냐. 그런데 여학생들은 하나 같이 몇 년 만에 그만 둬버리고 말더라고. 이게 혈세 낭비지. 안 그래? 흠, 흠. 뭐,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 말라는 건 아니고, 그래, 그 임신을 해서도 흐름이 안 끊기게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이거에요. 그 얼마 전에 보니까 요즘 임신부들은 수학의 정석 풀면서 태교한다며?[3] 그럼 논문으로 태교를 하면 되겠네. 얼마나 좋아? 애가 아주 과학 꿈나무로 자랄 거 아냐. 안 그래? 허허허.”


농담이라고 강조라도 하듯, 교수는 웃었다.


보영은 정말 박사를 가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지원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저런 사람들 틈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건 계산에 넣지 않았었다. 정말 이렇게라도 박사과정을 해야 하는 것인가.


“어허, 김 교수, 말이 좀 심하네.”


옆에서 가만히 듣던 교수님이 말했다. 보영은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하진 말아요. 작년에 김 교수네 여학생 한 명이 속도위반을 해서 임신을 해버렸거든. 그 바람에 결혼한다 뭐한다 해서 휴학을 하더니, 1년 넘게 돌아오질 않고 있어. 그래서 김 교수가 요즘 좀 민감해. 학생이 좀 이해해 줘요. 논문 태교는, 뭐, 맞는 말이잖아, 안 그래요?”


댐이 하나 있다. 물이 가득 차오른 댐,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댐이다. 그런데 저기서 돌을 던진다. 아주 큰 돌을 던진다. 균열에 정확히 맞춘다. 구멍이 뚫린다.


‘안 돼!’ 보영이 몸을 던져 구멍을 틀어막는다. 자신의 몸을 구겨 넣어 꽉 맞춰 끼운다. 물이 새나가면 안 된다. 수압이 세다. 아주 세다. 버틴다. 몸이 떨린다. 하지만 떨리는 게 보여서도 안 된다. 속으로 힘을 꽉 준다. 버틴다. 꽉 버틴다.


“네,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영은 대답했다.


“그래요. 말이 통하는 친구구만. 좋아요. 나가봐요.”




영은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면접 담당 조교에게 갔다. 자연스럽게 면접이 끝났다는 걸 확인 받았다. 자연스럽게 건물 구석진 곳으로 갔다. 아무도 없는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댐이 터졌다. 댐이 터지면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쌍욕을 퍼부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물만 흘렀다. 댐이 아니라 눈물샘만 터졌다. 더 기분 나빴다. 여자라서 우는 것 같아서.


김 교수네 학생 이야기, 보영도 들었다. 남자도 같은 과랬다. 그럼 모든 남학생에게 사고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안 하겠지. 항상 여자만 도매급이지. 그리고 뭐? 세금? 세금 타령하고 앉아 있네. 정확히 하자. 세금으로 교수들 월급 주는 거다. 그 월급 때문에 강의하고 논문지도 하는 거다. 대학원생 월급은 대학원생이 과제해서 번다. 학교에서 이거 저거 제공해주지 않느냐고? 대학원생이 힘들게 과제하면 중간에 떼 가는 돈이 얼만데. 연구소를 그만 둔다는 건 또 무슨 헛소리야. 눈치로 해고하는 거 아냐. 박사까지 따놓고 애만 키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4] 아니, 대체 왜 내가 여기서 여자를 대표해야 하는 건데. 난 학생이라고, 여학생말고, 학생!


너무 안일했다. 더 두려워했어야 했다. 더 단단히 마음먹고, 더 단단히 대비하고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멋지게 대꾸하는 것까진 못했겠지. 그래도 귓등으로 흘려 듣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훌훌 털어버리고 걸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영은 더 울었다. 여자같이 울었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대놓고 박사 가지 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제 딴엔 진심어린 조언일  것이다. 본인의 경험 통계에 의하면,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피해의식은 실제 피해사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보영은 자신도 그 사례 중 하나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느꼈다.


면접이 끝났다. 길영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됐다. 보영의 두려움은 이제 시작됐다.




드려 자던 정원이 눈을 떴다. 베고 잔 왼팔이 너무 저리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다. 엎드린 채로 왼팔만 책상 밑으로 뺐다. 오른팔로 왼팔을 주물렀다. 조금씩 왼팔이 내 팔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주 띵하다. 허리도 아프다. 다리도 저릿하다. 오른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시간을 봤다. 8시다. 한 시간이나 잤군.


흔히들 점심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온다고 한다. 엄밀하지 않은 가설이다. 일어나서 두 끼째를 먹고 나면 식곤증이 오는 것이다. 정원은 늘 느지막히 일어나 점심을 첫 끼로 삼는다. 그래서 오후엔 식곤증이 없다. 대신 저녁을 먹고 나면 꼭 한 번씩 정신을 잃곤 한다.


겨우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보영이 없다. 박사 면접이랬는데,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 면접 보느라 고생했으니 오늘은 방에서 쉬겠지.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을 열었다. 몇몇 후배들이 박사 면접 후기를 올려놓았다. 보영은 잘 봤을까. 그래야 할 텐데.


어쨌거나 보영인 내일이나 올 것 같다. 다행이다. 그렇다면 실험 결과는 오늘 밤 안으로만 확인하면 충분하다. 보영과 함께 하던 그 연구[5]의 실험결과 말이다. 어차피 교수님은 요즘 별 신경을 안 쓰시니 괜찮다. 하지만 보영이 눈치가 보인다. 자기가 연구를 얼마나 안 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으니까. 명색이 박사 4년찬데, 쪽팔리기도 하다. 어쨌거나, 오늘 퇴근 전에만 하면 오늘 논 게 티가 안 날 테니….


사실 별 이상이 없다면 어제쯤 끝났어야 하는 실험이다. 하지만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 지난 번[5]처럼 중간에 멈췄을 수도 있다. 그러면 고쳐야 한다. 정상적으로 끝났다면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좋지 않다면 그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 결과가 잘 나왔다면 다음 실험을 구상해야 한다. 논문 쓸 궁리도 해야 한다. 당장 순서도라도 그릴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정원은 자잘한 업무, 자잘한 정리를 먼저 했다. 요일별로 봐야 하는 예능부터 봤다. 밥 때 되면 밥이 우선이었다. 졸리면 못 이긴 척 잤다.


두려워서다. 중간에 멈췄다면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결과가 안 좋다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가 너무 막막하니까. 결과가 좋다 해도 이것으로 논문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쓴다고 해도 어디 저널에 붙기는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려우니까. 경험을 기반으로 예측컨대 좋을 리가 없으니까.


정원은 다시 모니터를 쳐다봤다. 페이스북이 열려 있다. 의미 없는 휠 굴리기를 시작했다. 눈은 글을 봤지만 머리는 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굴리기도 지겨워질 무렵, 국현이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 옆으로 구레나룻이 깔끔하게 밀려 있다.


 김정원(박4): 오! 내일 입소[6]라더니, 너 머리 깎고 온 거야?

 김국현(박3): 머리는 아까 오후에 깎았고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시죠.

 김정원(박4): 그래! 환송회는 한 번 해줘야지. 크크, 술 마시러 가면 모자 벗은 거 한 번 보여주는 거지?


정원은 잠시 실험 결과를 생각했다. 하지만 국현이는 내일부터 한 달이나 못 볼 건데, 환송회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훌륭한 핑계다.

 

김국현(박3): 알았어요. 근데 보영인 없어요?

김정원(박4): 오늘 면접 본다더니, 연구실에 안 오네.

김국현(박3): 쉬나보죠, 뭐.

김정원(박4): 내가 연락 해볼게.

김국현(박3): 에이, 쉬게 놔두세요. 어차피 한 달만 갔다 오는 거….

김정원(박4): (국현의 머리를 힐끗거리며) 그래도 좋은 구경은 시켜줘야지.

 

국현은 옆방에 있던 준상, 정길, 길영도 불러 모았다. 예고 없이 모았지만, 모두 모였다.

 

남정네들은 치킨이 맛있는 맥주집에 자리를 잡았다.

 

김국현(박3): (정원을 바라보며) 형, 보영인 온대요?

김정원(박4): 응, 곧 나온대.

심정길(박3): 야, 너 총은 사놨지?

김국현(박3): 네? 총을 왜 사요?

심정길(박3): 너 훈련소 들어갈 때 총 사가야 되는 거 몰라? 피엑스(P.X., 군대 내 매점)에서 사면 바가지 엄청 쓴단 말야. 밖에서 사가야 되는데… 벌써 밤인데 어떡해.

김국현(박3): 진짜요? 아씨, 군대 물품으로 바가지 쓰기 싫은데…. 어떡하지? 형은 어디서 샀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문 여는 데 없어요? …… 라고 말하길 기대한 거예요? 아유, 형, 개그가 너무 식상하잖아요. 그 정도는 이미 조사 끝났다구요.

심정길(박3): 에이, 안 통하네.

김정원(박3): 형, 좀 과하게 옛날 개그다 싶었어요.

김국현(박3): 그런 거 말고, 좀 제대로 된 도움말 좀 주세요. 가면 뭘 조심해야 돼요?

심정길(박3): 왜, 군대 간다니까 무섭냐?

김국현(박3): 아뇨, 그건 아니고….

강준상(박4): 딱 보니까 무섭구만 뭐.

김국현(박3):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왕 군대를 가는데, 이왕이면 좀 잘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군생활 잘하는 팁을 좀 달라는 거죠.

심정길(박3): 오케이, 나쁘지 않은 핑계야. 그런데, 맨입에?

김국현(박3): 아이, 참. 오늘 제가 쏩니다! 됐죠?

심정길(박3): 오, 니가 웬일이야!

김국현(박3): 어차피 한 달 동안은 돈 쓸 일도 없잖아요.


당연히 국현은 두려웠다. 익숙하지도 않고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게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간 <진짜 사나이>[7]도 독파했다. 사람들을 모은 것도 겁나서다. 혼자 있으면 괜히 이상한 상상만 할까봐서. 차라리 진짜 경험담이라도 듣고 가면 좀 나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술 먹고 잠이나 빨리 들면 좋고.


심정길(박3): 알았어! 그럼 친히 군생활 비법을 알려주지. 일단, 줄을 잘 서야 돼! 무엇보다, 제일 앞이나, 제일 뒤로 가면 안 돼. 무조건 중간! 중간을 사수해.

김국현(박3): 근데, 제일 앞은 그렇다 치고, 제일 뒤가 안 되는 건 왜 그래요?

심정길(박3): 이야, 진짜 군대 안 갔다 온 티가 팍팍 나네. 너, ”뒤로~ 돌아!“ 몰라?

김국현(박3): 아….

심정길(박3): 그래, 임마. 그럼 제일 뒤가 제일 앞이 되는 거잖아. 그럼 별 거 다 해야 돼.

김정원(박4): 형, 저도 군대 갈 때 그 말 들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중간에 섰어요. 그랬더니 뭔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조교가 갑자기 중간을 잘라서 두 줄로 만드는 거 있죠. 그래서 제 바로 앞에 있던 애가 분대장이 됐어요. 이야, 진짜 어찌나 식겁했던지.


정길, 정원, 준상만 크게 웃었다. 국현과 길영은 분대장이 뭔지도 몰랐다. 줄반장 같은 거라고 대충 짐작했다.


정원은 다시 실험이 생각났다. 아직 결과를 열어보지 않은 그 실험 말이다. 생각해보니 국현이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과, 자신이 실험 결과 열어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비슷한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두렵고,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하니 두렵고. 정원은 군복무를 마쳤다. 군대에서의 모든 두려움을 잘 이겨냈다. 그런데 왜 다시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움에 면역 따윈 없는 걸까?




“슈뢰딩거의 고양이”[8]란 유명한 사고실험[9]이 있다. 닫혀 있는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 있다. 상자는 완벽히 밀폐되어 있다. 안을 볼 수 없다. 소리나 냄새도 전혀 새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장치가 들어 있다. 이 장치가 작동할 확률은 50%다. 여기서 문제.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일까, 죽어 있는 상태일까?“


정답은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기 전에는 고양이는 50% 살아있고 50% 죽어있다. 살아있는 고양이와 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상자를 열어봐야 한다. 고양이 시체를 마주하는 게 두렵더라도 열어야만 한다. 상자를 계속 닫아둔다면, 운이 좋아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굶어 죽게 될 것이다.


00phD44.jpg

 


[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2, (10) 늪”에서 김국현이 했던 말이다. http://scienceon.hani.co.kr/292991

[2] 매드클라운(Mad Clown)의 <커피카피아가씨>란 노래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대학교를 졸업 후 취업서류 면접 광탈 / 외모도 스펙이란 걸 깨닫고 난 후 움직였지 당장 / 시원히 깎아버렸지 / 옛 얼굴 갖다 버렸지 / 엄만 울고 커피도 울었지 / 왜 울음이 나왔는지 몰라도”

[3] 전승민 기자, “임신부가 ‘수학의 정석’ 푼다? 엇나간 태교 문화”, 동아사이언스, 2015년 8월 2일.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7749

[4] 오철우 기자, “엄마와 과학자, 어떤 땐 두 얼굴처럼 느껴졌죠”, 한겨레 사이언스온, 2013년 2월 14일. http://scienceon.hani.co.kr/82709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2, (8) 직감”  http://scienceon.hani.co.kr/282571

[6] 박사학위 과정 동안에 연구하는 것으로 병역 의무를 대체하는 ‘전문연구요원’ 제도라는 것이 있다. ‘산업기능요원’으로서 병역특례업체에서 근무하는 것과 비슷한데, 근무지가 학교라고 보면 된다. ‘산업기능요원’과 마찬가지로 병영생활은 하지 않지만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은 받는다. 이 때문에 복무 도중 훈련소에 입소한다.

[7] 진짜 사나이: 매주 일요일 MBC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연예인들이 실제 군생활을 체험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방송한다.

[8]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은 물리학에 불확정성을 도입했다. 예를 들면, 특정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여부를 확률로 표현한다. 어떤 방사능 원소가 붕괴되었을 확률이 50%, 아닐 확률이 50%라고 하는 식이다. 물론 관측을 하면, 붕괴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방사능 원소가 50% 붕괴된 상태이고, 50% 붕괴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한다.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이런 불확실한 설명을 싫어했다. 불완전한 물리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설명인지를 보이기 위해 사고 실험[9]을 제안했다. 본문에 설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그것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완전히 밀폐되어 밖에서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는 상자가 있다. 상자 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방사능 원소가 들어 있는 함이 있다. 이 함은 망치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 방사능 원소가 붕괴하면 망치가 떨어지게 되고, 붕괴하지 않으면 안 떨어진다. 망치가 떨어질 경우 독극물이 들어 있는 병이 깨지게 되고 고양이는 죽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있게 된다. 방사능 원소가 1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50%라고 하자. 1시간 뒤에, 이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이 질문에 대한 양자역학적인 설명은 "고양이는 50% 살아 있고 50% 죽어 있다"는 것이다. 즉,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물론 관측을 통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관측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는 확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걸로 보인다. 살았으면 살아있는 거고, 죽었으면 죽은 거니까. 관측을 하기 전까진 모른다니, 이 무슨 막말인가.'

바로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슈뢰딩거가 이런 사고실험을 고안한 것이다. 양자역학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쉽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예화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 자료]
   (1) https://ko.wikipedia.org/wiki/슈뢰딩거의_고양이
   (2)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슈뢰딩거의 고양이". 들녘 출판. 12-25쪽.
   (3) 크리스토프 드뢰서 지음. 전대호 옮김. "물리학 시트콤". 해나무 출판. 191-210쪽.

[9] 사고실험: 머리 속에서 상상만으로 하는 실험.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을 실험할 때 사용한다. 오로지 논리로만 평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극도의 논리가 요구된다. 하지만 머리만 굴리면 된다는 측면에서, 꼭 사고실험만으로 논문을 써보고 싶다. 본문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사고실험이라고 했다. 하지만 왠지 실현이 가능해 보인다. 기술이 너무도 발전해버린 탓이다. 슈뢰딩거가 제안했을 당시엔 도무지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 작가의 말

어쩌면 우린 두려움 덕에 성공합니다. 두려움 덕에 준비를 하고, 두려움 덕에 위험을 피해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 때문에 실패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않고, 두려움 때문에 위험만 피하려고 하니까요.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scienceon

트위터   https://twitter.com/SciON_hani

한겨레 스페셜   http://special.hani.co.kr

  • 구글
  • 카카오
  • 싸이월드 공감
  • 인쇄
  • 메일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에필로그: 새벽 세 시. 새로운 꿈이 시작됐다에필로그: 새벽 세 시. 새로운 꿈이 시작됐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6. 10

      …에필로그…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에필로그. 감사의 글 깊은 밤. 정원은 박사학위논문 감사의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잡았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제가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 마지막이다마지막이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5. 27

      마지막회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

  • 한 시간 만에 끝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한 시간 만에 끝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5. 13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

  •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4. 15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

  • 소설: ‘케이-알파맨’소설: ‘케이-알파맨’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18

    김창대의 단편소설알파고 쇼크 또는 열풍이 한국사회에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니 여전히 많은 담론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사이언스온의 연재소설 작가이자 카이스트 전산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김창대 님이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의 연재를...

자유게시판 너른마당

인기글

최근댓글

트위터 팔로우

sub2 untit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