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s02e12.jpg » 삽화 / 박종애 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길영과 정원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길영은 준상과 팀을 이뤄 논문 제출에 성공했지만, 보영과 함께한 정원은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에러 때문에 제출에 실패한다. 논문 마감 후 모두 슬럼프에 빠진 가운데, 길영과 보영은 박사 진학을 결심한다. 그리고 모두 함께 엠티(MT)에 간다. 엠티의 밤, 정원은 게임에 자꾸 져서 술을 몽땅 마신다. 다음 날 아침…
  



#12. 찌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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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깼을 땐, 끓는 라면에서 나온 증기가 정원의 코털을 촉촉하게 적신 뒤였다.


밤새도록 바이킹이라도 탄 듯 속이 울렁거린다. 그런데도 위는 여전히 꿀렁꿀렁 댄다. 정말 기분 나쁘다. 하지만 위의 입장도 생각해 달라. 가뜩이나 제 몸을 잔뜩 불려 음식물을 받아낸 그다. 홑몸 가누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럼에도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 밤새도록 음식물을 휘젓고 녹여서 장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아직도 산더미다. 혹시 토를 하면 안 되겠냐고 식도 쪽에도 노크해봤다. 돌아오는 건 열심히 삼켜낸 침뿐이었다. 소화액이 부족한 게 아니란 말이다. 공간이 부족한 거란 말이다. 곤란한 건 장도 마찬가지다. 마음만 같아선 위를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융털 사이사이까지 꽉 채워둔 상태다. 배출을 안 해주는 데 어쩌란 말인가. 물량이 워낙 급하게 들어와서 물 흡수도 제대로 못 한 상태다. 부피만 더 커졌다. 밤새도록 항문 초인종을 열심히 눌렀다. 하지만 잠든 정원은 답이 없었다.


정원은 푹 잔 것 같은데도 너무 피곤했다. 몽유병으로 마라톤이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웬만한 내장기관은 죄다 해독과 소화에 동원되었으니. 잠을 잔 건 눈뿐이었다. 변의가 항문 가득 느껴진다. 방광도 팽창계수 측정 실험 중이다. 하지만 쉬이 일어날 수도 없다.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배에 손을 댔다. 술배에도 약손이 통할까.


정원은 눈을 살짝 떴다. 다들 일어나 있다. 자기가 누운 자리를 빼고는 이불도 다 개켜 있다. 일어나긴 해야겠다. 침을 몇 번 더 삼켰다. 목도 마르다.


강준상(박4): 정원이 일어났네, 너 괜찮아?

김정원(박4): 아우, 죽겠다.

강준상(박4): 어서 와서 라면 먹어. 속 풀게.

김정원(박4): 나 먼저 좀 씻을게.


정원은 기다시피 화장실로 들어갔다. 똥을 누었다. 양 참 많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옷을 벗었다.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바디클렌저 냄새가 정말 역겹다. 그래도 안 씻을 순 없다. 겨우겨우 씻었다. 찬물을 계속 맞았더니 정신이 좀 든다.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 그새 보영이가 와 있다.


전보영(석2): 오빠, 괜찮아요?

김정원(박4): 응, 샤워했더니 쫌 괜찮아졌어.

전보영(박3): 라면 좀 드세요. 떠드릴게요.


보영이가 라면을 덜어주었다. 국물을 가득 담았다. 정원이 몇 숟갈 떴다. 피곤에 절어 있는 위장에게 박카스라도 먹이는 느낌이다.


김정원(박4): 아우.

김국현(박3): 속이 좀 풀려요?

김정원(박4): 그래도 좀 낫다 야. 근데 밥 없냐?

강준상(박4): 어제 먹고 남은 거 있어. 떠주리?

김정원(박4): 아냐, 내가 뜰게. 어딨는데?

전보영(석2): 오빠, 그냥 있어요. 제가 갖다 줄게요.



영이가 밥도 한 그릇 떠다 준다. 정원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속이 울렁거려 움직이기조차 싫었으니까.


먼저 라면을 먹고 있던 국현이가 말을 건다.


김국현(박3): 형, 어제 소주로 병샷 한 거 기억나요? 크크크.

김정원(박4): 기억나지. 덕분에 지금 죽겠는데.

김국현(박3): 우와, 그렇게 먹고도 필름이 안 끊겼단 말이에요? 형 대체 주량이 얼마에요?

강준상(박4): 정원이는 자기 주량이 얼만지 모를 걸? 끝까지 가봤어야 알지.


대체 주량이란 게 뭘까? 기준이 뭘까? 주량만큼 마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그것을 주량이라고 하느냔 말이다. 필름이 끊기는 것? 토하는 것? 그 사람 고유의 주사가 나오는 것?


김정원(박4): 근데, 주량에 시간 개념이 도입됐잖아, 한 시간에 한 병 하는 식으로,[1] 근데 거기에 반감기까지 도입하면 주량 모델이 잘 나올 거 같지 않아?

김국현(박3): 네?

김정원(박4): 술을 계속 마시면 그게 쌓이니까, 나중엔 빠른 속도로 못 마시잖아. 그러니까, 처음 한 시간엔 두 병을 마실 수 있다고 하면, 그 다음 한 시간 동안은 한 병을 마실 수 있고, 그 다음엔 반 병만, 뭐 이런 식으로. 사람에 따라 반감기가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두 시간일 수도 있고. 이렇게 하면 겁나 좋은 모델이 나올 것 같지 않냐?

심정길(박3): 야, 정원이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다.

김정원(박4): 아니, 주량이란 게 결국 간이 알코올 해독을 하는 능력이잖아요. 간이 알코올을 해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전에 들어온 알코올부터 분해해야 하니까… 아, 그러면 처음 한 시간 동안 주량 이하의 술을 마시면… 이월을 시켜야 하나?

김국현(박3): 이 정도면 신종 주사네요. 와.

김정원(박4): 알았어, 그만 하면 될 거 아냐.

전길영(석2): 근데, PL 수업[2] 어때요?


길영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본인의 입장에선 뜬금없지 않았다. 누가 무슨 얘길 하든, 길영이는 다음 학기 수업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강준상(박4): 너 다음 학기에 수업 듣게? 너 마지막 학기잖아.

전길영(석2): 졸업하려면 들어야 해서요.

강준상(박4): 너 소프트웨어 분야 아직 안 들은 거야?


꿈꾸는 대학교의 전산학과 대학원 수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석사 학위를 따려면 각 분야에서 최소한 한 과목 이상을 들어야 한다. 의도는 선하다. 폭 넓은 지식을 갖게 해주겠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귀찮다. 그래서 길영이처럼 마지막 학기가 돼서야 부랴부랴 듣기도 한다.


전길영(석2): 네. 그 중엔 그나마 PL이 낫다던데요.

강준상(박4): 교수가 누군데?

전길영(석2): 김호진 교수님이요.

심정길(박3): 나 그 분 수업 들어봤는데, 수업‘은’ 괜찮아.


정길은 유독 ‘은’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전길영(석2): 그 분이 어떻길래요?

심정길(박3): 너 정말 몰라? 거기가 전설의 투-티오-제로-학생(Two T.O, Zero 학생)[3] 연구실이잖아.

전길영(석2): 그게 뭐에요?

심정길(박3): 왜, 우리 매해 석사 신입생 들어오면 연구실 별로 티오(T.O.)가 한 명씩 나잖아. 일부 연구실만 두 명씩 받을 수 있고. 그런데 어느 교수가 두 명씩 데려가느냐를 강의평가를 기준으로 정한단 말야. 근데 김호진 교수가 수업은 진짜 열정적으로 잘해. 학부생들한테도 친절하고. 그러니까 티오(T.O.)가 웬만하면 두 명씩 나오는 거지. 하지만! 실제론 한 명도 못 받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이 지원을 안 하니까. 그래서 거기 외국인 학생이 많은 거 아냐.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간 사람들….



영이 보탠다.


전보영(석2): 거기 올해도 누가 들어갔다가 3일 만에 교과석사[4]로 돌렸대요.

심정길(박3): 그래? 그 정도면 진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친군거지. 교수님이 수업을 잘 하면, 이미지가 좋아가지고 속아서 들어가는 학생도 많거든. 근데 거긴 하도 소문이 파다하니까,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질 않잖아.

전길영(석2): 뭐가 어떻길래 그래요?

심정길(박3): 일단 박사 진학할 거 아니면 석사는 무조건 3년 해야 되고, 박사는 최소 6년 이상 해야 된대. 그 전에는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 졸업을 안 시킨대.

전길영(석2): 논문이 있어두요?

심정길(박3): 논문이 많으면, 더 많이 쓴 다음에 졸업하라고, 그래야 본인한테 이득이라고 그런 소리한다던데. 거기다 무조건 9시 출근 9시 퇴근이래. 토요일 출근은 기본이고.


정원도 거들었다.


김정원(박4): 저도 들었는데, 그 교수, 자기 대학원생들이랑 면담할 땐 엄청 비꼬면서 말한대요. 실실 웃으면서 막 무시하는데, 진짜 기분 나쁘다고.

전길영(석2): 진짜요?


길영의 질문은 옳다. 이 소문들 중에 얼마나 진실일까? 아니 먹은 고기에 냄새 안 난다[5]고 죄다 소설은 아닐 것이다. 아마 김호진 교수는 큰소리치기 보다는 웃으며 말하는 성격일 것이다. 하지만 비꼬면서 말한다고 확신할 순 없다. 같은 말이라도 비꼬는 걸로 듣는 사람도 있고, 좋게 좋게 웃으며 얘기하는 걸로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석사과정에 3년이 걸리고 박사과정에 6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교수가 허락하지 않아서일까? 학생이 게을렀을 수도, 연구 분야의 특성상 오래 걸렸을 수도 있다. ‘투-티오-제로-학생’도 마찬가지다. 한 번쯤은 그랬겠지. 하지만 몇 번이나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교수의 인격 때문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PL은 원래 인기 없는 분야니까. 더군다나, 이런 소문들 때문에 학생들이 기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와전됐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이런 소문들 때문에 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런 말을 했다지 않은가. “유명인의 사진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고 해도, 인터넷에서 본 것을 다 믿지 말라.”[6]


김국현(박3): 근데, 그래도 우리 과는 좀 나은 거 같아요. 전자과 염석진 교수 알죠? 제가 거기 얘기를 좀 들었는데….


국현은 말끝을 흐렸다.


심정길(박3): 뭔데, 뭔데?
김국현(박3): 그 교수는 면담할 때마다 진짜 히스테리 부리고 인신공격 하고 난리도 아니래요. 남자애들도 면담 갔다 오면 눈물 뚝뚝 흘린다던데요.

김정원(박4): 헐. 진짜?

김국현(박3): 거기가 반도체 설계 하는 연구실이잖아요. 매일 자기가 설계한 코드를 공용 서버에 올려야 되는데, 교수가 매일 검사해서 양이 적으면 막 지랄한대요.

김정원(박4): 매일 코드 올린 걸 본다고? 매일 보고서 써내라는 교수는 들어봤어도….

강준상(박4): 뭘 만들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냐? 진짜 양을 본대?

김국현(박3): 네, 몇 줄이라 그랬더라, 여하튼 몇 줄 이하면 어제 뭐한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그런다던데, 그래서 거긴 논문 볼 시간도 없대요. 무조건 앉아서 코드만 짜야 한다고.

심정길(박3): 코드만 짜고 앉아 있으면 논문이 나오나?

김국현(박3): 그러니까 더 윽박지르는 거죠. 애들만 불쌍하지. 진짜 대박인 건요,



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 자극적인 소식을 기다렸다.


김국현(박3): 그 연구실에 완전 천재 학생이 한 명 있었대요. 논문거리를 계속 만들어 내더래요. 근데 교수가 그걸 뺏어서 다른 학생한테 줬다는 거예요. 글쎄, 그 학생은 저자에서 아예 빼버렸대요. 흔적도 안 남기고.

전보영(석2): 아예요? 일저자(논문의 첫 번째 저자)만 뺏긴 것도 아니고요?

김국현(박3): 아예 뺐다니까.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랬대.

김정원(박4): 세 번이나?

김국현(박3): 네, 그래서 학생이 결국 못 견디고 전과를 했대요.

김정원(박4): 전과를 했다고? 연구실을 옮긴 게 아니라?

김국현(박3): 그 교수가 학과에서 힘이 세 가지고, 다른 연구실에서 받아주질 않았대요. 교수가 전과하는 것 가지고도 엄청 지랄했는데, 다행히 그 학생이랑 다른 과 학과장이랑 연줄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겨우 옮길 수 있었다고….

강준상(박4): 그래, 누가 교수끼리 사이 틀어지려고 연구실 옮긴 학생을 받아주겠어.

김정원(박4): 그 학생도 대단하다. 논문거리를 세 개나 만들고, 자기네 학과도 아닌데 학과장이랑 연줄도 있고….

전길영(석2): 아니, 그런데, 논문 뺏어서 왜 다른 학생한테 줘요? 교수 입장에선 어떤 학생이 쓰든 똑같지 않아요? 다 자기 이름도 들어 갈 거 아녜요.[7]

김정원(박4): 그러네, 저기 윗분들처럼 자기가 일저자를 가져간 것도 아니고.[8]

강준상(박4): 혹시 졸업생 숫자 채우려고 하는 거 아닐까? 졸업 늦어지는 학생이 많아지면 교수 평가 깎인다고 들은 거 같은데.

김국현(박3): 아, 맞아요. 그 교수가 뺏은 걸 졸업할 때가 된 학생들한테 줬대요.

심정길(박3): 이야, 이거 완전 찌라시 수준인데.

전보영(석2): 진짜 너무했다….


흔히 증권가에서 유통되는 사설정보지를 ‘찌라시’라고 한다. 누가 어떤 식으로 만드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구독료는 몇 백만 원 수준으로 비싸다고 한다.[9] 하지만 비싼 구독료가 무색하게시리 널리 퍼지는 내용도 있다. 연예계 정보다. 누가 누구랑 사귀고 누구의 성생활이 방탕하고 등등 쓰잘데기 없는 내용들이 각종 메신저로 멀리 멀리 퍼진다. 그런데 왜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증권가 사설정보지에 실릴까? 어떤 연예인이 선배에게 욕을 하는 것과 증시의 등락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대학원 찌라시는 어떤가? 어떤 교수가 욕을 하고 어떤 교수가 학생 논문을 빼앗아 가는 것을 공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약자들간의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비정상적인 교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교수들이 자연도태 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학생들은 찌라시 속 등장인물들을 돕지 않는다. 혀 몇 번 차는 것이 전부다. 교수들을 도태시킬 수도 없다. 티오(T.O.)는 모든 교수가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 그리고 신입생은 자퇴보다는 버티는 걸 선택한다.




권가 찌라시나 대학원 찌라시나 술집의 과자안주일 뿐이다. 할 말 없을 때 씹는 것이다.


강준상(박4): 그 학생은 왜 논문 세 개 뺏길 동안 가만있었대? 바로 옴부즈퍼슨이나 그런 걸로 찔렀으면 되는 거 아냐?


과자안주는 보통 식감이 부드럽다. 쉽게 씹으라고.


심정길(박3): 찌른다고 뭐가 되는 줄 아냐. 찌르면 뭘 어떡할 건데?

강준상(박4): 교수 징계 내리고 논문 저자 다시 바꾸고 해야죠.

심정길(박3): 학교에서 과연 국제저널에다 대고 “우리 학교에서 이런 쪽팔리는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저자 좀 수정해 주십쇼” 할까? 전과하는 것도 한참이나 막았다잖아.

김정원(박4): 처음엔 뺏기는 게 뭔지도 몰랐을 수도 있어. 교수가 학생 모르게 다 처리했겠지.

심정길(박3): 그래, 심한 데가 얼마나 많은데. 너, 지금 우리 연구실에서만 있어서 모르는 거야.

김정원(박4): 그 연구실이, 없어질 예정이란 게 문제죠.


듣기 싫은 이야기는 편집해야 제 맛이다. 국현이 정길의 말을 이어갔다. 


김국현(박3): 맞아요, 얼마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안 봤어요? 인분 교수 이야기요.[10]

심정길(박3): 아니, 뭔데?

김국현(박3): 디자인과 교수 이야긴데, 세상에, 자기 학생한테 똥, 오줌을 먹였대요.

심정길(박3): 뭐? 그 인분이 진짜 그 인분이었어?

전길영(석2): 어우, 비위 상해.

김국현(박3): 심지어 그게 다른 학생들 거였대요.

전보영(석2): 우리 밥상머리에서 꼭 이런 얘길 해야 돼요?


정길은 상을 둘러봤다. 다들 다 먹은 상태다.


심정길(박3): 에이, 다 먹었네 뭐. 그럼 다른 학생들은 거기 협조했다는 거야? 진짜 어른들이 왕따를 하면 별의 별 기적을 다 행하는구만.

김국현(박3):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는데요.

강준상(박4): 아, 토 나와. 진짜 단체로 미친 거 아냐?

김정원(박4): 그러면, 그 다른 학생들은 자기가 싼 거 받아다가 그 학생한테 줬다는, 그런 말이야? 난 누구 앞에 내 꺼 내미는 것만 생각해도 토 나온다. 진짜 미쳤네.



영이 일어나 냄비를 싱크대로 옮겼다. 이미 먹은 것도 올라올 지경이다. 설거지나 해야겠다.


전길영(석2): 아니, 근데, 그 사람들 심리는 뭘까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길영의 말은 문자 그대로 ‘질문’이었다. 마술사에게 “어떻게 빈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올 수 있죠?”라고 묻는 그런 것이었다. 현상이 보이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려는 과학자적 습관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거여야지. 이 질문에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약간 흐른 뒤에야 정길이 입을 뗐다.


심정길(박3): 처음엔 약한 걸로 가다가 점점 심해지지 않았을까? 처음엔 재떨이나 좀 던지고 그랬겠지. 그러다 이거 저거 해보다가….

김국현(박3): 아, 맞아요. 방송에도 그렇게 나온 거 같아요.

심정길(박3): 왜, 왕따도, 처음엔 그저 천 원, 이천 원 뺏다가, 나중엔 만 원, 이만 원 뺏고, 그러다 막 때리고, 그렇게 발전하잖아.


오해마시라. 정길은 왕따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모자를 비어 보이게 만든 다음, 숨겨놨던 비둘기를 날리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다.


강준상(박4): 그런데 말야, 그 피해자도 좀 맹한 데가 있다거나 좀 그러지 않았을까?

김정원(박4): 야,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강준상(박4): 아니, 왕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왕따가 되는 경우는 없잖아. 뭔가 사소하게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긴 하잖아. 말투가 좀 여성스럽다거나.[11]

김정원(박4): 그래서 지금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거야?

강준상(박4):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그 학생들 중에 왜 하필 그 사람이 피해자가 됐느냐를 생각해 본 거지.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분석은, 객관화는, 툭하면 잔인해진다. 준상은 단지 “모자 속에 숨길 수 있도록 비둘기의 성장을 막는 법”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정원은 열 받았다. 그에겐 인분 교수나 준상이나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길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싸우자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심정길(박3): 자자, 준상이도 피해자가 잘못한 건 아니라니까, 이제 그만하고 먹은 거 좀 치우자. 집에 가야지. 정원이 너도 다 먹었지?


정길이 일어나 아직 국물이 남아 있는 그릇을 집어 들었다. 싱크대에 있는 보영에게 갖다 주었다. 그릇을 갖다 주는 데 물이 살짝 튀었다. ‘수압이 너무 센 거 아냐?’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수압은 정말 센 거였다. 보영이 물을 세게 틀어 놓았으니까. 보영은 오빠들의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 왕따. 그 말 때문이다. 보영도 당했던 그 왕따. 보영은 아직도 궁금하다. 왜 자기한테 그랬던 건지. 왜 하필 자기였는지. 그들은 과연 대답해줄까? 어떤 대답을 해줄까? 과연 그 어떤 대답이, 합리적일 수 있을까? 보영은 확신했다. 저 중엔 왕따를 당해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정원도 당해보지 않았을 거라고. 저렇게 순수하게 화를 낼 수 있다면, 아마 사랑받고 자란 사람일 거라고.




원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짐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폭음을 해야 했는가?’ 물론 게임 규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 과음이라고 느끼면서도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가?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직 게임을 끝내면 안 된다는 분위기. 아직 너는 더 마실 수 있다는 분위기. 아직 네가 더 마셔서 웃겨주는 게 우리를 위한 길이라는 분위기. 사회생활 하다 보면 억지로 마실 일도 많을 텐데 지금은 웃으면서 마시는 거라는 그런 분위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


정원은 소름이 돋았다. 분위기가 잘못 과열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보다 주량이 약한 사람이 계속 걸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매년 한 번쯤, 엠티에서 폭음하다 학생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 엠티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러려고 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원 찌라시는 증권가 찌라시와 다르다. 늘 처절한 약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비슷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학원 찌라시는 증권가 찌라시와 같다. 반응이 같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한 뒤, 말줄임표, 끝. 왜 그럴까? 반민특위[12]가 해체된 뒤부터 생긴 민족 특성 때문일까? 징병제로 인해 군대문화가 유일한 공유 문화가 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류의 생존 본능 때문일까?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찌라시의 내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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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5. 백조 http://scienceon.hani.co.kr/198424

[2] PL(Programming Language, 프로그래밍 언어): 컴퓨터는 기계어(0과 1로만 구성됨)만 이해할 수 있다. 기계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좀 더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들고 이 언어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 언어와 프로그램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때 사용하는 언어를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하고, 약어로 PL이라고 한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는 생각 외로 수학이 많이 쓰인다. 그래서 수학은 안 좋아하고 컴퓨터만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진입장벽이 있다. 중요한 학문이지만 딱히 돈이 될 만한 분야는 아니어서 기업에서도 인기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 프로그래밍 언어 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가 많지 않아 학생들이 접해 보기조차 어려운 측면이 있다.

[3] 티오(T.O.)는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 “배정인원”이라는 뜻이다. ‘투-티오-제로-학생(Two T.O, Zero 학생)’은 “두 명을 배정 받았는데 0명의 학생이 실제로 들어왔다”는 의미다.

[4] 교과석사: 보통 석사학위 과정은 학위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대신 수업을 더 듣는 것으로 대체해서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존재하는 학교도 있다. 이 때 받는 학위를 ‘교과석사’라 한다. 교과석사 과정을 밟는 학생은 특정 연구실에 소속되지 않아도 된다. ‘교과석사로 돌리다’는 말은 ‘특정 연구실 소속에서 빠져나와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의미다. 물론, ‘교과석사’가 ‘논문석사’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5] 아니 먹은 고기에 냄새 안 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의 고기 버전이다.

[6] 당연히, 에이브러햄 링컨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다음 사이트에 정말로 링컨 사진 옆에 해당 문구가 쓰여 있는 그림이 있다.
http://weknowmemes.com/2012/07/dont-believe-everything-you-read-on-the-internet/

[7] 본문의 찌라시에 대한 설명은 찌라시 수준의 정보이다. 회자되는 내용이지만 근거는 없다.

[8] 공대, 적어도 컴퓨터 계열에서는 교수 혼자서 논문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현이나 실험 등 해야 할 일의 양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이 첫 번째 저자이더라도, 교수가 공저자로 이름만 올린다면 모두 교수의 실적으로 인정해준다. 교수의 첫 번째 역할은 학생을 연구자로 키워내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학생이 논문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수의 실적이 올라가는 것은 합당하다.

[9] 박수지 기자, “정진엽 복지장관 후보자, 제자들 석사논문 ‘가로채기’ 의혹”, 한겨레, 2015년 8월 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3597.html

[10] SBS <그것이 알고 싶다> 997회: ‘쓰싸’와 ‘가스’- 인분 교수의 아주 특별한 수업 (방송 일자 : 2015. 8. 8 (토) 밤 11:10)

[11] 소설 속 인물의 말은 작가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말투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말투가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다분히 성차별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대 구조를 무시한 채로 남성의 말투를 규정하고 여성의 말투를 규정하는 행위죠.

[12]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 조직의 활동상은 영화 <암살>에서 그려낸 것과 같다. 권력이 정의를 앞선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각인시켜준 위원회다.


  ■ 작가의 말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요즘 세상에 누가 학생 논문을 뺏는 그런 짓을 하겠어요.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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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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