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에이즈 바이러스의 정교한 3차원 모형 선봬

과학시각화 국제대회 당선작...과학+테크놀로지+예술의 합작품

"100여편 최신 논문 참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석 달 걸쳐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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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실뜨개 작품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우주공간의 기괴한 소행성 모습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사람에게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에이즈: AIDS)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인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의 모습을 정교하게 재현했다는 3차원 모형 그림이다. 실제로는 대략 1만 분의 1 밀리미터 지름의 공 모양을 한 HIV의 모습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확대해 재현한 것이다.  회색 털실 같은 것들은 HIV 바깥쪽에 있는 지질 막의 분자 16만 개를 구현한 것.


이 그림은 미국 과학저널 <사이언스>와 미국과학재단(NSF)이 해마다 공동 주최하며 이 분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는 ‘국제 과학·공학 시각화 경연대회(2010년 제8회)’ 일러스트 부문에서 당선작으로 최근 선정된, 러시아 이반 콘스탄티노프 팀의 작품이다. 이 대회에서는 시각화 효과, 커뮤니케이션 효과, 참신성, 독창성 등을 심사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서 오렌지 색 계통은 HIV 자신의 유전체(게놈)에서 유래한 단백질을, 회색  계통은 숙주세포에서 유래한 분자나 단백질을 나타낸 것이다. 모두 17종의 단백질과, 8종의 16만개 지질 분자들이 이 그림에서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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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보여주는 시각 정보를 이용해 HIV 내부를 탐사해보자. HIV와 관련한 최신 논문 100여 편과 이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말을 받아 제작된 그림이니까, 이 그림은 현대 과학이 밝혀낸 HIV의 정체를 쉽게 보여주는 모형인 셈이다. 먼저 HIV가 숙주세포에서 출아할 때에 숙주세포에서 얻은 HIV의 지질 막을 살짝 걷어내면, 오렌지 색의 구조물이 확 드러난다. HIV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단백질의 구조물이다. 공 모양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이른바 주형 단백질(MA 단백질)로 불린다.


아참, 지질 막 위에 여기저기 솟아 있는 털실 꼬리 같은 것들의 정체도 궁금하다. HIV가 숙주세포를 자신의 복제 공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첫 단계로 숙주세포에 달라붙어야 하는데, 털실 꼬리 같은 것들은 이 때에 쓰이는 단백질들이다. 오렌지 색으로 표현된 것들은 숙주가 될 면역세포의 표면에 있는 수용체(CD4 receptor)와 직접 결합하는 구실을 하는 당단백질(gp120/gp41)이며, 회색의 다른 단백질들은 숙주세포에서 획득된 것으로 역시 HIV 감염 과정에 활용된다. 겉껍질에 있는 이런 단백질들은 에이즈 예방 백신 연구의 주요한 표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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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거풀 더 벗겨 HIV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자. 두번째 그림에 표현된 오렌지 색 주형 단백질의 외벽과 아래 그림에서 볼  HIV 외각(껍질, 캡시드, capsid) 사이에는 바이러스의 여러 구조를 형성하거나 여러 기능을 하는 단백질들이 담겨 있다.  역시 회색 계통은 숙주세포에서 획득된 단백질들이, 오렌지 색 계통은 HIV의 자기 유전자가 만들어낸 단백질들을 나타낸다. 위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HIV 유전체가 만들거나 숙주세포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단백질들이 뒤섞여 HIV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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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백질들을 지나 더 깊숙한 곳에 이르면, 원뿔/원통 모양의 속껍질인 외각(capsid) 구조가 나타난다. 거의 대부분이 HIV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단백질(CA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숙주세포에서 획득해 활용하는 단백질(회색)도 약간 섞여 있다. 대체로 외각은 250개의 6량체(단량체 6개로 구성)와 12개의 5량체로 구성돼 있다. 단백질 껍질로 이뤄진 이 '금고' 안쪽에는 바로 HIV의 '존재' 정보가 되는 유전자 9개의 정보가 담겨 있다. 바이러스의 중심부(cor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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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각 안에는 HIV의 복제(증식)에 필요한 정보인 외가닥의 아르엔에이(RNA), 그리고 복제를 돕는 효소 단백질들이 담겨 있다. HIV는 9개의 유전자 정보를 담은 RNA 유전물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이용해 15종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HIV 3차원 모형은 HIV를 실제에 좀 더 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그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전에도 HIV 모형 그림들은 많이 있었고 쓸모 있게 활용됐다. 어찌보면 더 단순하게 그려진 2차원 그림은 HIV의 정교한 구조를 보여주는 데에는 한계를 지니지만, HIV 구조를 훨씬 더 단순하고 빠르게 이해시키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래 그림은 2차원으로 매우 단순하게 그린 HIV 구조이다.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가장 바깥쪽에 지질 막(Lipid Membrane)이 보이며 그 표면 위에 여러 단백질들이 솟아 있다. 그 중에서도 숙주세포에 결합할 때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게 gp120/gp41 단백질체다. 가장 안쪽에는 바이러스 복제에 필수적인 유전정보인 RNA와 효소들이 그려져 있다. 바이러스한테 가장 중요한 이런 유전물질을 비교적 견고하게 감싸고 있는 것은 외각의 단백질(CA)이다. 공 모양의 틀을 만드는 데엔 주형 단백질(MA)이 기여한다. 위의 3차원 모형과 이런 2차원 모형을 함께 참조하면, HIV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더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00HIV_wiki » 출처 / Wikimedia Commons


HIV의 면역세포 감염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도 있다. 아래 그림은 숙주세포(오른쪽, 면역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 단백질(CD4)과 HIV(왼쪽) 표면의 단백질이 열쇠와 자물쇠처럼 들어맞아 결합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런 결합을 거쳐 바이러스의 세포 감염이 시작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HIV는 면역세포 안으로 침입해 면역세포의 유전자를 자기 것으로 빼앗는다. 먼저 HIV 바깥쪽에 있는 단백질들[gp120/gp41]이 면역세포와 결합하면 바이러스의 중심(core)이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일단 안에 들어가며 바이러스는 세포막과 융합하고 이어 바이러스 RNA는 DNA로 바뀌어 숙주세포의 핵에 통합된다. 그러면 숙주세포는 바이러스 단백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이로써 숙주세포는 바이러스 생산 공장이 된다."(출처: <사이언스> 2월18일치)


00HIV_gp120 » 출처 / http://aids.about.com/od/newlydiagnosed/ss/livecycle.htm



HIv의 3차원 모형이 정지영상이기 때문에 단조롭게 느껴진다면 설명이 담긴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 과학잡지인 <뉴 사이언티스트>가 이번 당선 작품인 HIV 모형을 설명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뉴사이언티스트가 제공하는 HIV 구조 설명 동영상


이반 콘스탄티노프 팀이 속한 시각화 전문기업인 ‘비주얼 사이언스 컴퍼니’(http://visualscience.ru/en/)에 가면 이 HIV 모형을 360도로 돌리며 볼 수도 있다.


HIV 모형 360도 회전


‘국제 과학·공학 시각화 경연대회'의 올해 전체 분야의 다른 수상작품들은 물론이고 이전 대회에서 수상한 사진, 일러스트, 포스터 등 분야의 다른 수상작들을 미국과학재단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제 과학·공학 시각화 경연대회 수상 작품들 감상하기


아래는 이번 대회의 일러스트레이션 부문에서 수상한 다른 작품들 중 하나(장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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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분자유전학 분야에서 실험모델로 흔히 쓰이는 애기장대(Arabidopsis thaliana)의 유전자 네트워크 지도다. 애기장대의 유전체 전체 수준에서 그동안 같은 생물학적 과정에 관련하는 것으로 밝혀진 유전자 기능의 상호관계를 실선으로 이어 그린 그림이다. 붉은 색 계통은 좀 더 확실한 유전자들 간의 관계를, 파란 색 계통은 덜 확실한 관계를 뜻한다.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참여한 미국 카네기과학연구소의 생물학 연구자인 이승연(Seung Yon Rhee)씨는 “이런 그림은 사회 네트워크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고 미국과학재단 쪽은 전했다. (그림 출처/  Insuk Lee, Michael Ahn, Edward Marcotte, Seung Yon Rhee, Carnegie Institution for Science)




과학 연구의 최신 흐름 중 하나가 시각화(visualization)이다. 예전에는 신호나 숫자로만 보던 자료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화 자료로 만들거나, 새로운 여러 영상화(imaging) 기법들이 개발되면서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살아 있는 개체 안의 생화학 반응이나 생물학적인 흐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거나, 예전에는 2차원으로만  볼 수 있었던 영상을 3차원으로 구현해 연구대상의 구조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실시간'과 '3차원'은 과학 시각화 분야에서 열쇳말이 됐다.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조'가 신호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능'을 좀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구조' 자체가 '기능'을 설명해주는 경우도 있다. 국제 과학·공학 시각화 경연대회나 이번 HIV 3차원 모형도 이런 시각화 흐름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 연구 성과 못잖게 과학 지식을 정교한 영상 자료로 종합하고 표현하는 시각화가 과학 지식과 과학 문화의 한 분야로 발전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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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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