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힘으로 만든 1·2·3세대 원자시계"

   연구개발 이야기   -원문: <KRISS> 5·6월호


※ 다음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사보’ 형식으로 내는 격월간지 <KRISS>의 2015년 5·6월호 중 38-41쪽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1988년 이래 국내에서 이래 원자시계를 개발해온 표준연이 그 긴 연구개발의 역사를 간추려 전합니다. 글쓴이는 ‘표준연 시간센터’입니다. 이 글은 취재기사가 아니라 연구진 내부의 관점에서 쓰인 글이지만, 그렇기에 쉽게 듣기 힘든 연구 과정의 뒷이야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부 표기를 다듬은 곳이 있으며 그외에는 원문과 같습니다. 유익한 글을 제공해주신 표준연에 감사드립니다. -사이언스온


00KRISS_2.jpg » 연구개발의 현장. 표준연 연구원들이 세슘원자분수시계 장치에서 원자를 측정하고 있다. 출처/ 표준연



우리 힘으로 만든 1·2·3세대 원자시계



2008년 표준과학연구원(KRISS·크리스)는 순수 국내기술로 세계 최고 수준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 ‘KRISS-1’을 개발한다. 상용 원자시계보다 무려 10배 이상 정확한 시계였다. 그리고 6년 후인 2014년에는 차세대 원자시계로 기대되는 이터븀 광격자시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거뒀고, 2015년 크리스-1보다 20배나 정확한 세슘원자분수시계 개발도 성공을 앞두고 있다. 일본의 시간을 빌려다 쓰던 나라에서 세계 최고의 시간표준 강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불과 27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KRISS의 기적 같은 원자시계 개발 스토리를 들어본다.



원자시계 개발, 불가능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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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시계는 흔히 1세대 세슘원자빔 시계, 2세대 세슘원자분수 시계 그리고 3세대인 광시계로 나뉜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1·2·3세대 원자시계를 자체 개발한 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단 세 나라밖에 없다. 처음 원자시계 개발을 시작할 때 미국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 괜히 시간낭비 하지 말고 우리 원자시계를 사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KRISS는 단호히 ‘노!’를 외쳤다. 그리고 불가능을 모르는 도전정신과 우직한 뚝심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이뤄냈다.


자시계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88년. 그때까지 KRISS는 해외에서 수입한 4대의 세슘원자 시계를 이용해 세계협정시(UTCK)와 대한민국 표준시를 생성하고 있었다. 당시 기획부장이던 정낙삼은 국가 과학기술의 먼 미래를 위해서는 시간표준을 우리 힘으로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카이스트 박사과정 중에 있던 이호성(후, 광기술표준부장)을 전격 스카우트 한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원자시계에 대한 기초연구조차 시도된 적이 없었고 연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장비와 기술도 턱없이 부족했다. 원자시계 개발을 ‘맨땅에 헤딩하듯’ 해야 했던 시간실은 미국, 일본 등에서 추진하던 기존의 영구자석 방식이 아닌 레이저를 이용한 광펌핑(optical pumping) 방식을 선택한다.


국제도량형국(BIPM)이 정의한 ‘1초’는 ‘바닥 상태의 세슘 133원자에서 나오는 복사선이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 1초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원자물리에 대한 깊이 있는 학문적 기반을 토대로 원자의 진동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광펌핑을 위한 레이저 기술과 고진공 기술, 마이크로파 합성 기술, 정자장 기술 등을 융합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KRISS의 진공기술은 원자시계 개발에 필요한 10-9 Torr 수준을 구현할 수 없었고 항온·항습·무정전 등의 기본적인 실험실 조건도 갖춰지지 않았었다. 심지어 실험실에서 만든 원자시계를 직접 접해 본 연구원조차 없었다.

00KRISS_1.jpg » 표준연 연구원이 광펌핑원자시계인 'KRISS-1'으로 시각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출처/ 표준연


한국·미국·일본에서 진행된 동시다발적인 연수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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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원자시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원자시계 개발의 중심이던 이호성은 일본에서 열린 국제 정밀전자기측정학회(CPEM)에 ‘억지를 써서’ 참가한다. 원래 논문 발표자가 아니면 참석할 수 없는 학회였지만, 당시 소장이던 이충희에게 특별히 부탁해 간신히 참석 기회를 얻다. 행운도 이어졌다. 한평생을 원자시계 개발에 바친 일본계량연구소(NMIJ)의 고가 박사를 만난 것이었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의 고가 박사는 원자시계 연구를 위해 한국에서 과학자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호성의 손에 자신이 30여 년간 연구한 자료, 시행착오를 통해 얻었던 노하우, 심지어는 세슘 셀까지 쥐어준다.


호성은 얼마 뒤 미국국립표준국(NIST)으로 건너가 1년간 광펌핑 원자시계 개발에 직접 참여하며 실질적인 기술을 익혔다. 귀국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이호성은 NIST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팩시밀리로 KRISS에 보냈다. 그리고 시간실 오차환(후 한양대학교 교수)은 이것을 토대로 레이저와 진공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액수의 국제전화비가 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뒤 전자회로를 담당하던 양성훈이 NIST 연구팀에 합류했고 오차환은 일본 계량연구소로 연수를 떠나 1년간 원자시계 불확도 평가를 배웠다.


KRISS에 돌아온 이호성은 NIST에서 배운 것을 곧바로 연구에 적용했고 1년 만인 1990년 12월 램지공진신호, 즉 세슘원자의 진동수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 원자시계 구현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뛸 듯이 기뻤던 이호성은 크리스마스카드에 램지공진신호 사진을 붙여 함께 일했던 NIST 과학자들에게 보냈다. 카드를 받은 이들은 KRISS가 짧은 시간에 이룬 성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원자시계가 구현되자 권택용(후, 시간주파주그룹장)은 불확도를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세슘원자 복사선의 고유진동수에 영향을 주는 10여 가지 요인을 정확히 파악해 보정하는 기술을 하나둘 개발해 나갔고, GPS와 통신위성을 이용해 세계 각국 표준연구기관에서 운용하는 원자시계들과 시각을 비교·분석하는 시각비교시스템도 구축했다. 그리고 원자시계 개발을 시작한 지 20년 만인 2008년, 드디어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세슘원자시계가 국제도량형국(BIPM)에 등록된다. 결과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차는 약 300만 년에 1초. 기존의 상용 원자시계보다 10배 이상 뛰어난 정확한 값이었다. KRISS는 이 시계에 ‘KRISS-1’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였다. KRISS-1은 국제원자시(Temps Atomique International, TAI) 생성에 기여하는 세계 7번째 1차 주파수표준기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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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더 나아가, 이제 세슘원자분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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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SS-1이 탄생한 지 7년 뒤인 2014년, 연구원들은 KRISS-1의 오차를 17분의 1로 줄인 세슘원자분수시계 개발에 성공한다. 극저온으로 냉각된 세슘이 위로 솟았다가 떨어지는 동안의 진동수를 레이저로 측정해 시간을 생성하는 원리라서 ‘분수(噴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시계는 오차가 5,000만 년에 1초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정확하다.


시계의 탄생에는 씁쓸한 배경이 숨어 있다. 90년대 후반 세슘원자시계 개발이 한창 가속도를 내고 있을 때 갑자기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연구비’였다. 당시만 해도 3년 혹은 5년의 연구가 끝나면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경영진은 10년이 넘도록 별 성과를 내놓지 않는 원자시계 개발과제에 더 이상의 예산지원을 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시간실은 고육지책으로 연구의 양을 두 배로 늘리기로 한다. ‘세슘원자분수시계 개발’이라는 새로운 국가지정연구실(NRL) 과제를 따낸 다음, 이 예산으로 원자시계와 분수시계를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었다.


박사급 연구원 4명과 연구생 3명이 두 개의 거대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당시 이호성은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다, 급히 실험실에 가서 실험하고, 다시 사무실에 가면서 ‘내가 여기서 뭘 하던 중이었지?’라고 자주 생각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분수시계는 원자시계보다 기술적으로 열 배 이상 난이도가 높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분수시계는 정상작동이 잘되지 않았다. 박상언은 다른 나라에서는 시도된 적이 없는 매우 혁신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거기다 미국 펜실베이니아공대에서 제안한 마이크로파 공진기 기술을 도입하면서 분수시계 개발은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한다.


드디어 2015년 KRISS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10-16 수준의 정확도를 갖는 세슘원자분수시계 개발에 성공한다. 이때까지 미국과 유럽은 기초과학 토대가 약한 아시아 국가들이 확보할 수 있는 원자시계 정확도의 한계가 10-15 수준일 것이라고 여겨 왔었다. 그런데 그것을 열배나 끌어올리고 미국·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자, 전 세계 시간표준 학자들은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00KRISS_3.jpg » 표준연 시간센터의 유대혁 센터장이 광격자시계 장치에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출처/ 표준연


시간표준의 새로운 미래 여는 광격자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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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KRISS는 세슘원자시계를 대체할 제3세대 원자시계 후보 중 하나인 ‘이터븀 광격자시계’ 개발에도 성공한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의 성공이었다. KRISS가 선택한 것은 레이저 냉각기술을 이용해 이터븀 원자를 광격자 구조로 포획한 후 진동수를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기체상태로 떠다니는 세슘원자의 진동수를 재는 기존 방식보다 훨씬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이 광격자시계의 오차는 1억 년에 0.91초로 측정됐다.


2003년 일본 동경대학교의 히데토시 카토리 교수가 발표한 ‘광격자시계’의 개념은 원자시계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KRISS 역시 광격자시계를 차세대 시간표준 연구의 타깃으로 삼았다. 특히 KRISS는 기존에 많이 하던 스트론튬 대신 새롭게 급부상하던 이터븀 원자를 이용한 광격자시계 연구를 시작했다.


구 과정 중에도 어려움은 많았다. 이터븀을 격자상태로 안정적으로 가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예민한 작업이다. 거기다 전혀 다른 파장의 5가지 레이저를 정확히 제어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연구를 위해서는 실험실을 지하 요새처럼 진동이나 전자파 등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해야 하지만, 연구 초기에는 실험실이 2층에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옆 연구실에서 펌프라도 동작시키면 수백 Hz 이상 주파수가 흔들렸다. 결국 레이저를 1층으로 이전하느라 수개월을 소요해야만 했다.


시간실은 머지 않은 미래에 세슘원자시계의 세슘을 더 정확한 다른 원자가 대체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터븀 광격자시계를 표준원기로 한 새로운 초의 정의가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선진국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하던 한국이 시간의 기준을 정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시계 개발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시간실은 끈기와 집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제 시간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글쓴이/ 표준과학연구원 시간센터

(원문 출처/ <KRISS> 2015년 5·6월호, 38-41쪽)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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