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언 -운명과 증명 ①

제4화. 운명과 증명
①
“모든 과학은 필히 진정으로 예언적이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 예언력이야말로 시험대이자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이를 통해 과학처럼 여겨지는 것이 실제의 확실한 과학으로서 인증되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월식을 예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과학과 예언은 케플러와 뉴턴과 함께 당도하였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영국의 시인, 비평가)
“한 번 들어가 본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혜 언니는 영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뭐, 평소라고 내 룸메이트가 잘 웃는다는 건 아니다. 표정이 풍부한 것하고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예를 들자면, 종강도 했고 주말이기도 하니 오늘은 간만에 같이 시내에 나와서 잔뜩 놀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언니는 시종일관 어디 학회에라도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던 코스 그대로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니는 동안 언니는 터무니없는 내용의 영화도 집중해서 봤고, 밥도 맛있게-라기보다는 열심히-먹었으니까. 그러니까 단지 내 룸메이트의 감정 표현이 유난히 무뚝뚝할 뿐인 것이다. 하루 종일 놀면서도 계속 그런 상태라면 조금 자극해보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고, 그래서 내 고등학교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카페에 일부러 데려왔을 뿐. 여기라면 분명히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꼭 점집에서 커피를 마실 필요는 없잖아.”
“점집이 아니라 타로카페라니까요. 간판에도 쓰여 있잖아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예상 그대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언니는 중얼거리게 내버려 두고, 나는 힘차게 상가 건물 1층의 새파란 문을 몸으로 밀어 열었다.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우리의 입장을 알렸다. 익숙한 차 향기가 훅 풍겨왔다. 은은한 조명, 불규칙하게 놓인 테이블과 소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 자리의 절반 이상을 채운 가지각색의 사람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했던 고등학교와 재수생 시절을 달래 주었던 작은 카페는 그 당시보다도 훨씬 인기리에 영업 중이었고, 나는 언니를 질질 끌고서 구석의 가장 편안한 소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드 따위가 의미 있는 데이터를 내놓는다니 너무 편리한 사고방식” 따위의 불평불만은 그러는 중에도 계속되다가 메뉴판을 보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
“메뉴 이름이 왜 이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라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타로카페라는 콘셉트에 맞춰서 메뉴에 상당히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달아놓은 게 이 가게의 세일즈 포인트였지만, 아무래도 처음 온 사람은 주문하기 부끄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니까. 아마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룸메이트에게는 더욱 당황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 한두 번 와본 게 아니니만큼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운명이 바뀌는 라즈베리 치즈케이크 하나하고요, 타로 점 두 명 볼게요. 그러면 음료 둘 공짜죠? 저는 영혼을 비추는 민트차로 하고, 언니는요?”
“그냥, 그, 아메리카노.”
“사랑이 이뤄지는 아메리카노도 하나 주세요!”
내가 주문하는 걸 듣던 언니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앓는 소리를 했다.
“도대체 왜 여기 온 거야? 이런 거 믿는 줄은 몰랐는데.”
“여기 치즈케이크가 진짜 맛있거든요. 설마 점 보러 왔을까! 고등학교 때야 신경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타로 점 본다면서.”
“그거야 뭐, 재밌을 거 같아서?”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사실 이게 정답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던 학생 때라면 모를까, 다시 과학을 사랑하게 된 지금 타로카드를 진지하게 믿을 생각은 없다. 다만 최근 일련의 사건으로 불이 붙어버린 호기심이 이번에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을 튀겼을 뿐. 과연 과학자는 이런 자리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무뚝뚝한 언니도 타로카페 같은 공간에서라면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래, 이건 일종의 실험이다. 같은 방에서 살고, 함께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해결하고, 오늘은 손잡고 놀러 다니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속을 알기가 힘든 과학자 룸메이트를 더욱 잘 알아가기 위한 실험.
실험이 시작되자마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이 즉각 발견되었다. 나혜 언니가 ‘운명이 바뀌는 라즈베리 치즈케이크’를 내 생각보다 굉장히,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 아까 식사할 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언니는 케이크에 몰두했고 나는 하나 더 주문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차가 너무 좋기도 하고-그렇게 생각할 즈음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집시 복장을 한 여자가 다가왔다. 나지막한, 익숙한 울림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걸면서.
“어머, 어머, 오랜만이네요. 즐거워 보여서 기뻐요.”
나혜 언니는 대놓고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자연스레 미소로 응답했다. 여러 번 봐서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타로카페의 점장이자 마스코트이자 스타, ‘예언자 미 선생님’은 몽롱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더는 당신을 붙잡고 있지 않네요.”
“덕분에요. 직접 점 봐 주시게요?”
“단골손님이 다시 찾아왔는데 이런 인연을 놓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맞은편에 앉는 미 선생님을 언니는 계속해서 노려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침묵이 내리고,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본격적인 실험의 시작을 알리면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미 선생님이었다.
“여울이네 학교 선배……, 아니면 룸메이트시죠?”
그리고 나혜 언니의 반격은 놀랍도록 빨랐다.
“손잡고 같이 들어왔으니까 친한 사이일 텐데, 여울이가 여기 단골이었다면 가족 얘기도 했을 거고, 언니나 친한 사촌언니가 있었다면 얘기를 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았겠죠. 웃으면서 들어온 걸 보니 대학에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그렇다면 친해진 대학 선배거나 자취방 룸메이트일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시겠죠. 어차피 사람은 맞은 것만 기억하고 그렇지 못한 건 잊으니까 안전하게 두 가능성 모두를 불렀고요. 콜드 리딩, 상대가 말하는 것 이상의 정보를 얻어내는 기술. 어떤 방법인지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다시 침묵. 심장소리만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이 불꽃 튀는 공방을 한 차례 주고받은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미 선생님한테 ‘적당히 이해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정도. 사실 과학자를 이런 가게에 데려오는 건 조금 민폐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니의 방금 전 반박이 너무 멋져서 더 보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었고, 그래서 나는 조용히 ‘영혼이 맑아지는 민트차’를 홀짝이면서 다음 공방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믿지 않으시는 분들도 종종 방문하신답니다. 익숙한 일이지요.”
“증명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믿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초자연적인 통찰력이 존재한다는 제대로 된 증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글쎄요, 증거는 몰라도 조언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답니다. 과거의 연애가 지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 말이죠.”
이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언급! 긴장 속에서 언니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역시나 지극히 과학자다웠다. 정확히는 조금 신경이 거슬린 과학자.
“나이를 고려하면 일생에 한 번 정도는 연애사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연애란 어떤 방식으로든 갈등을 낳게 마련이죠. 증명 과정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점수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빈정거리는 대답에도 미 선생님은 동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초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제쳐두고라도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니만큼 여유로움은 한 수 위인 걸까? 받아치는 목소리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그래서 연애사가 한 번도 없었다는 건가요?”
“찍어 맞힌 건 인정 안 합니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침묵. 공방이 다시 이어지나 싶었지만 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고, 택배기사가 상자 여럿을 들고 들어오자 예언자이기 이전에 점장인 미 선생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죄송해요. 식재료 주문한 게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나보네요……. 그거 주방에 좀 놔 주세요!”
그러는 틈을 타 나혜 언니는 시선을 돌려서 나를 째려보았다. 여전히 이 공간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덕분에 이 언니가 더 맘에 들게 되었고, 그래서 멋졌다고 몇 마디 해 줬더니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저 표정에서 뭘 읽어내기는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케이크는 확실히 맛있잖아요. 분위기도 재밌고.”
“독특하긴 하네. 처음 와 봐.”
독특한 것은 인테리어나 점장뿐이 아니다. 색색의 수정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뭔가 고민하는 사람, 종업원의 예언을 들으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그 사이에서는 잠깐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시는 택배기사조차도 이 분위기에 녹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늦지 않도록 꺼내놓았을 자그마한 모래시계마저 어쩐지 마술 도구처럼 보이고. 카드나 수정구슬 따위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나 터무니없는 일에 왜 이렇게 다들 몰두하는 것일까. 소파에 반쯤 파묻혀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엔 심령술에 빠진 과학자도 많았다고 들었어요.”
“과학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과정이니까, 그것보다 쉬운 길이 있다면 끌릴 수밖에 없지. 그게 꼭 잘못됐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방금 전에는 되게 매섭게 말하셨으면서.”
“마음이 끌리더라도 머릿속에선 계속 의심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배웠고,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이야기를 더 진행하고 싶었지만 미 선생님의 눈빛이 다시 언니를 향했다. 점장에서 예언자로 돌아온 눈동자 앞에서 2라운드가 막 시작되었다. 집중해야지, 집중. 다음에 또 오자고 하면 절대 반대할 것 같으니까.
“과거나 현재의 일은 단서를 모아서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미래, 그것도 제가 예상하지 못하는 미래를 알아맞히시면 됩니다.”
이번엔 언니의 선제공격이었다. 아무니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초자연적인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증명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생각은 있다는 과학자의 마음가짐. 하지만 그 증명을 통과하지 못해서 무수히 많은 가설들이 나가떨어져 왔다. 미 선생님은 그 앞에서도 너무나 태연하게,
“그럼 본격적으로 카드에게 물어보지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섞어 펼치고, 몇 번을 봤지만 아직도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는 방법으로 이리저리 바꾸거나 뒤집거나 한 뒤, 과거나 현재 따위를 상징한다는 카드를 열고, 그러는 동안 나혜 언니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이 실험에서 중요한 건 미래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결과니까.
“먼저 과거, 옛날의 나쁜 일이 다시 덮쳐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죠.”
예언은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불길한 시작을 끊었지만 언니는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의수를 빙빙 흔들면서 가볍게 빈정거렸다.
“답안지를 보고 풀다시피 하시네요. 네, 무슨 사고가 있었지만, 그래서요?”
“하지만 현재, 조심하기보다는 뛰어드는 성격, 참지 못하고 맞서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미래……, 당신은 어찌되든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죠, 가까운 사람까지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답니다. 그러길 원하진 않죠?”
미 선생님이 이렇게 날카로운 말을 하는 건 처음 봤지만 여전히 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언이 얼마나 소름끼치든 간에 그저 이렇게 대답할 뿐.
“그렇게 애매한 예언이라면 누구한테나 들어맞겠죠. 아깝지만 믿어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 그래도 케이크는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언니의 살벌한 타로 점 체험은 끝났고, 두 사람 몫을 주문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였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미 선생님은 바로 점을 쳐 주는 대신에 잠시 자리를 떴다. 택배기사가 점성술에 흥미를 보이자 잠깐 그 테이블에 들렀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네요”라는 대답에 아쉬워하면서도 배웅한 다음, 식재료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향하고. 이게 기다리는 동안 차를 한 잔 더 마시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것을 나는 단골이 된 지 1년만에야 겨우 깨달았지만, 언니는 그걸 바로 알아챘는지 또 뭐라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언니의 반응을 웃어넘기면서도 한편으론 방금 전 싸움의 여파가 내 타로 점에까지 미치지는 않을지, 기분이 상한 미 선생님이 나한테까지 날카로운 소리를 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나를 갑자기 와락 껴안았다. 찻잔이 손에서 떨어져 쨍그랑 깨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볼 틈은 없었다. 주방 쪽에서 밀려나온 충격파와 열기가 온 가게 안을 덮쳤다. 택배기사가 두고 간 모래시계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내 발치까지 굴러왔다.
폭발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언니에게 꼭 안겨서 울먹이고 있었다. 상처는 없었고, 여파가 여기에까지 미치진 못했는지 언니도 멀쩡한 기색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나는 내 룸메이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번엔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언니의 모습은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갈고리 모양 의수를 심하게 떨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함께 출구 쪽으로 발을 옮기면서도, 언니가 하는 말은 오로지 괜찮다는 중얼거림뿐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대피해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언니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근처 상가의 계단에 주저앉았고, 나는 걱정스레 그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다행히도 소방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소방관 한 명이 다급하게 다가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내가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설명하려던 순간, 갑작스레 끼어드는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폭탄이, 터졌습니다.”
언니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폭탄? 처음 들은 생각은 언니가 뭔가 말실수를 했거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거라는 추측이었다. 하지만-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나혜 언니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온 몸을 떨면서도 반드시 뭔가 말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눈에서 느껴졌다.
“그래도 언니, 도대체 왜 폭탄이라는 거예요?”
소방관의 놀란 눈빛 앞에서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언니는 지금 제대로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야 나도 눈앞에서 주방이 터졌으니, 그것도 단골 가게고, 오래도록 알던 점장님도 주방에 있었고, 그래서 엄청나게 떨리고 진정이 안 되지만……, 나혜 언니의 지금 상태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뭔가 트라우마를 자극받은 것 같은 모습.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말해야 할 것이 있어서 입을 열었고-룸메이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든 이 충격 받은 과학자의 가설을 증명해야 했다.
“폭탄을 설치하는 걸 봤어요?”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폭탄을 직접 본 게 아니라면, 주방에서 일어난 폭발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폭탄에 의한 거라고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
“수상한 물건이라도 있었어요?”
이번에는 고개 끄덕. 수상한 물건이라 하면 이 카페에는 너무나도 많았지만, 수정 조각이나 점성술 도표가 폭탄일 리는 없으니까 배제하고 생각해야 했다. 주방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 누군가가 주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들어간 사람은, 으, 미 선생님은 아마 살아남지 못했겠지. 그 분이 범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왜 들어가셨던 거지? 분명히 식재료가 온 걸 확인하러……,
“아! 택배 상자!”
나와 같이 앉아 있는 동안 주방 안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꿰뚫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니는 과학자였긴 해도 초능력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가 카페에 있는 동안 주방으로 들어간 물건이 딱 하나가 있었다. 택배기사가 가져온 식재료 상자. 그 안에 폭탄이 장치되어 있다가 미 선생님이 확인차 상자를 여는 동안 폭발했다는 것이 아마도 나혜 언니의 가설인 것 같았다. 소방관이 급히 무전을 보내고, 경찰을 부르고, 그러는 동안 언니는 조금 진정되었는지 숨을 작게 쉬면서 내게 고맙다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이 완벽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의문은 아직 남아 있었고, 경찰이 도착하자 나는 다시금 그 의문에 직면해야 했다.
“폭탄이 있었다는 걸 알아채셨다고요.”
경찰의 질문에 언니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떻게 아셨죠? 뭔가 더 아시는 게 있나요? 여기에는 명확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나도 그저 언니의 눈치만을 살필 뿐. 그런 와중에 언니가 반응을 보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기사가 범인이에요.”
“네?”
“택배기사로 위장해서, 고의로, 들고 온 겁니다.”
그리고 가설을 증명하는 것은 이번에도 내 몫. 생각해내야 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언니는 택배기사가 범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거지? 단지 우편물에 정교한 폭탄이 실려 있었고, 기사는 그걸 배달했을 뿐일지도 모르는데?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택배기사의 행적을 하나하나 기억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여유가 조금 있는지 차를 한 잔 주문하고, 모래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점성술에도 관심을 가지다가 이내 일어나서 나가고-
“네, 택배기사가 뭔가 수상했어요.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았거든요. 모래시계도 그래요. 정확히 시간을 맞춰야 한다면 그냥 시계를 보지, 모래시계를 들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었다. 기사가 했던 한 마디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니까. 일어나서 자리를 뜰 때, 그는 시간이 없어서 점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네요”라고.
“이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있어요. 단순히 택배를 전해주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아요.”
이번에는 경찰이 무전을 넣고, 곧 연기가 피어오르는 카페에서 소방관 한 명이 나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 손에는 자그마한 모래시계가 들려 있었다.
“이 시계가 맞습니까?”
“네, 그거였어요. 그 택배기사가 두고 갔네요.”
“그럼 이 그림이 뭔지도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림? 이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경찰관이 장갑 낀 손으로 들어 보이는 모래시계에는 칼 모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유성 펜으로 그린 단순한 모양, 하지만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표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나도 언니도 대답할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카페에서 대피해 모인 사람들 중에는 각종 상징과 표식의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모래시계와 칼은 네메시스의 상징이에요. 복수의 여신, 마땅한 운명을 분배하는 자.”
이 말이 파르르 떨고 있던 언니의 몸을 진정시켰다. 동시에 그 얼굴에서는 충격의 여파가 가시고, 대신 작게 찌푸려진 궁금증이 둥지를 틀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 룸메이트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으니까. 경찰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혜 언니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아니, 회복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억누를 길 없는 궁금증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 너무 계획적이잖아.”
길고 혼란스러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달라붙으면서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넘치는 궁금증은 말의 형태로 다 흘러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네메시스의 상징을 남겼으니까,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던 거야. 복수일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고-하지만 너무 침착했어. 그 택배기사, 전혀 떨지도 않았잖아. 이 메시지를 전하려던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물론 이 시점에서는 단순한 추측일 뿐이었다. 납득하려면 납득해줄 수도 있지만,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도 있는 그런 정도의 추측. 하지만 이것이 설득력 있는 가설로 변모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지 몇 번의 검색과 불길한 상상력만이 필요했을 뿐.
“이것 좀 봐, 여울아.”
언니가 보여준 검색 결과들은 지난 몇 달간 일어난 사건/사고 기록이었다. 화재 한 건, 실종 두 건. 피해자는 각각 유명 역술인, 사주 노점, 예언을 쏟아내던 작은 교회 목사. 사건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언과 점에 관련된 사람들이 최근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희생되었다는 건-
“-어쩌면 이건 연쇄살인일지도 몰라.”◑
<제4화 ②에서 계속>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