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한국 우주발사체의 길과 러시아

 
이 글은 지난해 나로호 발사를 앞두고 저의 블로그에 취재메모 형식으로 올린 글입니다(2009. 8. 17. 작성).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별로 바뀌지 않았고, 또한 최근에 한국-러시아 합작의 나로호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다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아, 당시에 썼던 글을 이곳으로 옮겨 싣습니다. 글의 주된 내용은 한국 우주발사체 개발사를 되돌아보면서 러시아가 차지한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고, 러시아가 단 한번의 우주개발 파트너가 아니라 앞으로도 오랜 기술협력의 파트너가 될 공산이 크다는 전망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초고를 작성하고, 현직 교수인 우주개발 분야 전문가가 부분적으로 첨삭해 작성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우주개발사를 아는 다른 분께 글을 보여드렸더니, 그 분은 "한국과 러시아의 기술협력 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관계를 너무 낙관적으로 봐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한국 우주발사체의 길과 러시아

     

과학기술은 이미 정해진 하나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과학기술들이 정치나 경제뿐 아니라 한 사회의 전통이나 관행,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우연한 발전의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독특한 궤적을 그리기도 한다. 역사상 수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아니 모든 과학기술이 하늘에서 순결한 형태로 뚝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과학기술의 발전과정에는 인간사회의 요소들이 뭍어나는 게 당연하다. 물론 진화론이 시사하듯이 그런 우연들에서도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겠지만, 우연과 필연의 조합은 과학기술이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주고, 그것이 축적이 되어 독특한 나름의 전통과 역사가 된다. 한국 우주 발사체 사업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보자. 이 글은 한국 우주발사체 사업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길을 내다보며 한국-러시아의 기술협력 관계를 전망하면서 정리해본 것이다.

 

 

2002~2004: 자력개발론 vs. 기술습득론

 

나로호.jpg나로호의 개발 뒷얘기들을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들어보면, 나로호 개발의 길도 다른 과학기술이 그러하듯이 지금의 길처럼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2년 우리나라의 첫 액체연료 로켓 KSR-3의 개발이 마무리될 즈음에, 우주발사체 개발의 로드맵을 짜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기술검토 작업이 이뤄졌고 여러 논의들이 오갔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논의에는 두 가지 축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가압식' 엔진의 로켓이기는 하지만 항우연이 개발해온 KSR-III 로켓을 기본으로 삼아 그 여러개를 다발로 묶어 추진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한국형 우주발사체를 자력으로 만들자는 ‘자력개발론'(내가 붙인 이름일 뿐이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압식이 100kg 이하의 소형위성을 발사하는 데엔 쓸모 있겠지만 1.5톤급의 중형위성을 쏘아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처음부터 우주발사 기술의 선발국들과 협력해 ‘터보펌프 방식'의 엔진 기술을 습득하자는 기술습득론이었다고 요약된다. [*참조* 가압식 - 고압 헬륨 등을 이용해 산화제와 연료를 탱크에서 연소실로 밀어내어 주입하는 방식. * 터보펌프 방식 - 추진제의 일부를 연소시켜 만든 가스로 터빈을 돌리고, 그 터빈 축에 연결된 펌프로 산화제와 연료를 연소실로 분사해 주입하는 방식]

 

아마도 초기에는 2005년 자력발사 목표 달성이 가능한 자력개발론이 상당히 설득력을 얻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국내외 자료들을 검색해보면, 초기의 KSLV-Ⅰ은 자력개발론이 주장했듯이 KSR-III 로켓을 여러대 묶어 하나의 발사체를 완성하는 클러스터링(clustering)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우주개발사의 우연한 전환점, 러시아

 

하지만 우리나라가 2001년 미사일기술통제체계(MTCR)에 가입하면서 우주발사체 기술 도입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고,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은 기술습득론 쪽으로 수렴되어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한테 우주발사 기술을 제공할 협력국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있었으며, 여러 나라의 우주발사기술 담당기관들과 접촉이 이뤄졌을 것이다. 결국에 결정된 곳은 러시아 흐루니체프였다고 한다. 어느 나라는 우주발사체 기술협력을 꺼려했고 어느 나라는 너무나 높은 기술협력 비용을 요구했다고 한다. 옛 소련 해체로 경제난을 겪던 러시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 가격에서 기술협력에 호의를 보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러시아와 한국의 우주발사기술 협력의 마당이 처음 마련됐다. 우연한 전환점이었다.

 

KSLV-Ⅰ의 추진과정에서 한러 우주기술 협력에 대해 미국의 견제가 있었다는 의혹도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선 미국의 안보전문 사이트에 게재된 글을 번역해 이 블로그에 올린 글인 “한-러 우주발사체 사업”을 참조). 그러니까 한-러 기술협력은 단지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국들이 개입된 여러 국제정세에 의해 움직여왔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남북한의 우주발사체 개발 역사"도 그 배경의 하나로서 참조해야 한다.)

 

아무튼, 한러 우주기술협력은 한국 우주개발역사에서 우연하게 출현했지만 역사의 여러 갈래 길을 선택하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가 첫 기술협력 파트너가 됨에 따라, 한국에서 습득되는 많은 우주기술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길'을 밟게 됐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우주공학 전문가들이 늘어났으며, 러시아의 연구전통에 더욱 더 친숙해졌다. 정치적으로 더욱 더 긴밀한 우방국인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한때 적성국가였던 러시아가 국가 안보기술로도 꼽히는 우주발사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파트너가 됐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그만큼 한국 우주개발사에서 전개되는 요인들은 단순한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국제 정치경제에 얽히게 됐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본다.

 

 

KSLV-Ⅱ는 한국 주도, 러사이 협력 방식?

 

한국 우주발사체 개발 역사를 바라볼 때 떠오르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얘기는 현재 수준에서 할 수는 있지만 예견이자 추정일 뿐이다.

 

항우연은 2018년 개발 완료와 발사를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형 우주발사체인 KSLV-Ⅱ의 모델 중에서 클러스터링 방식을 가장 유력한 모델로 채택하고 있다. 다음 기사를 참조.

 
"한국 첫 우주발사체(KSLV-Ⅰ)가 될 ‘나로‘의 다음달 말 발사를 앞두고, 나로의 뒤를 이을 후속 발사체의 개발 계획이 윤곽을 드러냈다. ‘한국형 발사체’(KSLV-Ⅱ)로 불리는 후속 모델은 2018년까지 국내 자력으로 개발돼 발사될 예정이다.    박정주 한국항공연구원(항우연) 발사체계사업단장은 지난달(6월) 28일 대전 항우연에서 열린 ‘한국형 발사체 개발전략과 산업체 협력 방안‘ 심포지엄에서 “7월30일 발사될 발사체는 ‘한국 최초 발사체’이지만 우리가 자력으로 개발할 후속 발사체는 ‘한국형 발사체‘로 불릴 것”이라며 2018년 발사를 목표로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 지금은 2018년 목표가 2010년으로 늦춰진 상태다)   한국형 발사체는 길이 50m, 중량 200t급이며, 나로보다 추력을 2배가량 높인 ‘3단형 로켓’ 방식이다. 75t 추력의 액체연료 로켓 4개를 이어붙여 제1단 로켓을 구성하는 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항우연은 이미 30t 추력의 액체연료 로켓을 개발한 바 있다. 예산은 나로 개발 때보다 3배가량 많은 1조5천억원 규모가 될 것으로 추산됐다.    심포지엄에선 한국형 발사체의 자력 개발 앞에 놓인 어려움들이 논의됐다. 연구인력 부족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2018년까지 1천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현재 국내 전문 인력은 400명에 못 미쳐 앞으로 항우연과 대학·산업체의 협력과 정부의 적극 지원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참석자들은 “러시아·중국·일본·북한은 발사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만 그렇지 못하고 있다”며 “위성 자력 발사와 발사체 상용화를 위해서도 발사체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전/오철우 기자"(<한겨레> 2009년 6월2일치 과학면)

비교.jpg

 
 

 한국이 엔진 연소시험에서 성공을 거둔 액체연료 엔진의 추진력이 30톤급에 불과하므로(러시아 RD-191이 196톤급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아직 추력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력으로 개발한 이 엔진의 성능을 더욱 개선해 75톤급까지 올린 뒤에 이 엔진 4개를 묶어 1단 로켓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절묘한 전략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는 클러스터링 방식이라는 게 처음 해보는 기술 분야라는 것이다. 발사체 엔진과 시스템 개발도 쉽잖은데 클러스터링은 또다른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클러스터링 방식은 기본로켓모듈(URM)을 만들어 이를 1개, 3개, 5개로 붙여(클러스터링) 발사체의 추진력을 확장해 저궤도, 정지궤도 등 여러 급의 위성 발사에 쓰려고 하는 러시아의 안가라 발사체 구상과도 상당한 닮은꼴을 이루고 있다. 클러스터링 분야에서 갖가지 노하우를 갖추고 있을 러시아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다면 수많은 난관이 예상디는 KSLV-Ⅱ 사업에는 청신호가 켜질 것이다.

 

정부와 항우연은 일단 KSLV-Ⅱ를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다. 하지만 항우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주도권을 한국이 쥐고 사업을 이끌 수만 있다면 핵심이 아닌 기술 부분에서는 외국과 기술협력을 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기술에서 국제협력의 시대이니까, “순수 국산 기술과 순수 국산 부품”이라는 순결주의가 아니라면 이런 기술협력은 가능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부품과 모든 기술을 한 나라에서 자급자족하는 기술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한국이 개발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한국과 러시아가 KSLV-Ⅱ 사업에서 다시 한번 더 기술협력의 파트너로 만날 가능성도 꽤나 높다고 보여진다.

 

 

자력개발론과 기술협력론의 조화?

 

최근 나로호의 핵심인 1단 로켓이 러시아에서 설계, 제작해 사실상 기술이전 없이 1단 로켓을 납품받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와 항우연이 '나로호의 기술 국적'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는 1단 로켓을 수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동안 정부와 항우연이 마치 나로호 사업이 한국 주도로 이뤄졌다는 듯이 과장 홍보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장 홍보로 우리 우주기술에 대해 착각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1단 로켓의 기술이전 없는 수입' 사실을 알게 돼 더욱 더 큰 실망을 했던 것 같다.

 

이런 와중에 한 전문가는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가 그대로 드러난 게 오히려 우리나라 우주개발 역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뼈 있는 말을 했다. 우리 기술의 현주소를 뼈져리게 알아야 한다는 얘기고, 외국 기술 수입에 의존하는 현재 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겼던 것 같다. 또한 자력개발론의 목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볼 때에, 다음 세대의 한국형 우주발사체의 개발은 자력개발론과 기술습득론이 어느 정도 절충된 형태도 진행되지 않을까 예견해본다. 앞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는 그 과정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일 이런 발전의 경로를 예견해본다면(미국 등 주변국의 견제를 비롯해 여러 변수들이 있고 그래서 쉽게 예견할 수 없는 이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한국이 일부러 이런 발전의 경로를 설계하지는 않았겠지만  러시아는 한국 우주기술 개발의 역사에서 주요한 파트너로 계속 우리 곁에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는 세계 수준의 우주기술 보유국이고 한국은 적은 인력으로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이를 배우려 하는 두 나라의 관계는 장기적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우주발사체 기술의 역사는 ‘러시안 트랙' 쪽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도 있겠다. 긴 안목으로 한국과 러시아가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관계도 생각할 일이다. 러시아를 ‘오만한 우주기술 보유국'으로 바라보아 즉흥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민족적 반감을 품는 일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러시아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KSLV-Ⅰ 사업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KSLV-II 사업 전략이 무엇이건 간에 기술 습득이 여의치 않을 경우, 즉시 독자개발로 전환한다는 대안을 항상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은 해외로부터의 기술 습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동일 기술에 대한 Shadow Program을 통해 국내의 독자적인 연구개발을 병행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 이 글의 초고는 제가 작성했으나, 이후에 항공우주 전문가가 일독한 뒤에 몇 군데에서 코멘트와 첨삭을 해주었습니다. 초고 이후에 글을 다듬으며 수정하고 확장한 부분도 있습니다. [] 모양의 꺽쇠괄호 부분은 전문가 코멘트 부분인데, 그러므로 이 글은 상호동의 전제 없이 2명이 쓴 공동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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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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