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논문은 세계 최초여야 한다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s2e07_2.jpg » 제작 / 김창대, 그림재료/ openclipart.org, unsplash.com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결국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날, 교수님께서 정원과 길영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김정원은 전보영과, 전길영은 강준상과 각기 팀을 이뤄 논문을 쓰기로 한다. 데드라인 일주일 전, 교수님은 정원에게 논문을 하나 보내준다. 차이점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7.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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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들은 인터넷을 만들었다. 모든 지식을 선으로 연결했다. 더 빠르게 지식에 접근했고, 더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연구자들을 옥죈다.


논문은 세계 최초여야 한다. 최초가 아닌 논문은 애초에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심사에서 탈락해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게 뭐 쉬운가. 기똥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들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라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기 일쑤다. 더 놀라운 건 매해 수많은 논문들이 그 거미줄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미줄을 더 촘촘하게 한다.



D-7


정원은 교수님이 보내주신 논문을 뽑았다. 실험이 제때 끝나려면 실험 스크립트[1]를 다듬고 재빨리 실험을 돌려야 한다. 보영이가 코드 리뷰[2]까지 해줬지만, 보나마나 버그[3]가 잔뜩 숨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논문이 정원이 쓰려던 것과 똑같은 거라면 말이다.


정원은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잔뜩 긴장하며 논문을 읽어내려 갔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아이디어가 논문에서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분명 비슷한 내용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수님이 보내주셨겠지. 하지만 얼마나 똑같을까? 당장이라도 연구를 그만 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이번 제출은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비슷한 것이 나와 버렸으니, 논문이 학회에 붙으려면 내용을 더 붙여야 할 테니까.


내심 포기해버릴 만큼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2주간 애 키운다는 심정으로 밤잠 설쳐가며 매달리긴 했지만, 애초에 너무도 희미한 희망이었으니까. 어쩐지 구현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더라니. 운이 좋다 싶더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하긴, 3년간 놀아제껴 놓고 3주 열심히 해서 박사를 거머쥐는 것도 순리는 아니지 싶었다. 논문 제출을 포기하게 되면, 이걸 핑계삼아 술이라도 퍼 마셔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늘어지게 잠이나 퍼 자야겠다. 우울함은 속쓰림으로 달래고, 속쓰림은 순대국밥으로 달래야지. 논문 제출을 포기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 늘 그래왔잖아? 이게 박사우울증이란 건가?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어 한다니.


정원은 일단 논문을 계속 읽었다. 교수님께 답장은 보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단 달랐다. 꽤 비슷하긴 하지만, 이란성 쌍둥이 정도의 차이점은 보였다. 신선하진 못해도 비린내를 잘 잡아내면 요리가 될 순 있을 것 같다. 괜히 심하게 쫀 것 같다.


정원은 뒤를 돌아 보영을 불렀다.

김정원(박4): 보영아, 너 교수님 메일 봤지?

전보영(석2): 논문 보내주신 거요?

김정원(박4): 어.

전보영(석2): 지금 그 논문 보고 있는데요, 되게 비슷해 보이는데...

김정원(박4): 지금 어디 보는데? (보영이가 들고 있는 논문을 본다.) 3장 보는 거야?

전보영(석2): 꼼꼼하게 읽진 않았는데요, 2장까진 거의 같고, 3장도 크게 다르지 않던데...

김정원(박4): 풀고자 하는 문제가 같으니까 2장까진 거의 같을 수밖에 없어. 꽤 비슷하긴 한데, 내 생각엔 차이점을 찾으라면 찾을 순 있을 것 같아.

정원은 자신이 얼마나 절망했었는지는 숨겼다. 부끄러우니까.

전보영(석2): 차이점이 뭔데요?

김정원(박4): 일단 이 논문은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넣었잖아. 그런데 우리 것은 이미 나와 있는 하드웨어를 약간만 개선시켜서 사용했잖아. 또, 뭐더라…. 잠깐, 이러지 말고 좀 정리를 해보자.

정원은 노트를 가져와서 보영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차이점을 적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설명하다가 정원이 침이 허공으로 튀었다. 보영은 이 오빠가 열심히도 설명하는 구나, 하면서 못 본 척했다. 보영은 질문을 했다.

전보영(석2): 그런데 classification을 쓴 건 똑같은 거 아니에요?

김정원(박4): 아니지, 여기를 보면 이건 classification을 썼다기 보다는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전보영(석2): 그러니까 하드웨어로 classification을 한 거잖아요.

김정원(박4): 어라? 그러네?

정원은 보영의 말에 무턱대로 “아니지”로 대답하기 시작한 걸 후회했다. 엄마가 여자 말 잘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전보영(석2): 오히려 우리 것이 classification을 사용한 게 아니라 프로그램의 특성을 직접 파악해서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counter를 써서 그 값을 사용하잖아요.

보영이 말이 맞았다. 역시 여자 말은 잘 들어야 한다.

김정원(박4): 오, 좋은데. 고마워. 그럼 교수님께 말씀드리러 가자. 어차피 교수님이 똑같다고 하면 접어야 하니까.

정원과 보영은 교수님 방으로 갔다.

권대성(교수): 메일 보낸 거 봤어?

김정원(박4): 네, 그거 읽어봤는데요,

정원은 보영이와 논의한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두뇌가 빛의 속도로 돌아가버렸음이 느껴졌다.

권대성(교수): 음, 알았어. 그럼 이거 구현할 수 있겠어? 이거랑 비교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김정원(박4): 네?

권대성(교수): 시간이 없나? 그렇다고 비교군에서 빼버리면, 왜 비교 안 했냐고 리뷰어[4]들이 뭐라고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바르다 권선생[5]이다. 논문은 세계 최초임을 입증하는 동시에 세계 최선임을 입증해야 하는 거니까. 비슷한 아이디어라면 더더욱 정량적 비교를 해봐야 한다.


정원은 암담했다. 여자친구 부모님 만났는데 나한테 돈봉투를 쥐어주시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이제 일주일 남았단 말이다. 일단 계산을 해보았다. 실험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것이다. 물론 아주 아주 운이 좋을 때의 얘기다. 적어도 사흘은 잡아두어야 한다. 실험 결과 가지고 그래프 그리고 글 쓰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면 구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사흘. 게다가 오늘은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가니까….

권대성(교수): 안 될 것 같아?

김정원(박4): 하는 데까진 해봐야죠.

정원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6]

권대성(교수): 그래, 그럼 가 봐.

정원과 보영은 교수님 방을 나왔다.

전보영(석2): 오빠,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정원(박4): 그렇다고 교수님께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전보영(석2): 아…. 그러네요. 어쨌든 그럼 다른 일은 최대한 저에게 넘기세요. 관련 연구 정리하는 거라도 좀 해두고 있을까요?

김정원(박4): 음, 아니, 그건 시간 남으면 하고, 일단 실험 스크립트[1] 짜는 걸 좀 해주라.

전보영(석2): 그럼 무슨 실험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김정원(박4): 응, 바로 보내줄게.

정원은 자리로 돌아와 보영에게 메일을 하나 썼다. 그리고 논문을 다시 쳐다봤다. 답답하다. 믹스커피를 하나 탔다. 어차피 밤을 새야할 운명 같으니. 논문과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언제 또 이런 논문이 나왔단 말인가? 몇 달만 늦게 나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럼 아직 희망을 품고 있을 텐데. 아니다. 내가 논문을 조금만 열심히 찾아봤으면, 평소에 논문 읽는 습관만 있었어도 진작 발견했을 논문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다른 비교군 대신 이걸 구현했겠지. 그러면 지금쯤 희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비교군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지금 발견한 게 최상의 경우일 수도 있다. 듀의 법칙[7]에 따르면 갈수록 능률이 올라갈 테니까. 나는 이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풍부한 비교군을 가진 논문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수…있을까?…’


정원은 보영을 떠올렸다. 교수님을 떠올렸다. 물러설 데가 없었다. 논문을 더 자세히 읽었다. 자기가 구현하던 시뮬레이터(simulator)의 구조를 떠올렸다. 어떻게 구현할지 구상했다. 몰입했다.



D-6


정원이 완성과 싸운다면, 길영은 완벽과 싸우고 있었다. 길영은 D-14에 모든 실험 데이터를 다 뽑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2주 정도는 글을 쓰는 데 집중하려고 했다. 아무리 실험 데이터가 중요하대도 논문은 일단 ‘글’이니까. 길영은 2주가 남기 전에도 짬짬이 초안을 작성했다.[8] 그는 계획적인데다 성실하니까.


하지만 일주일도 안 남은 지금, 길영은 여전히 구현과 실험 중이다. 교수님 덕분이다. 길영은 D-14에 교수님께 실험 데이터를 보여드렸었다. 잠시 고민하던 교수님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그 질문에 해석까지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1. threshold를 이 값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 ⇒ 대충 정한 값이지? threshold를 다양하게 해서 실험해봐라.

2. 여기서 다른 논문에 나온 B를 하지 않고 A를 새로 만든 이유가 있나? ⇒ B도 구현하고 실험해서 둘을 비교해봐라.

3. 이 부분에서 C랑 D를 순차적으로 하는 이유가 있나? ⇒ C와 D를 병렬로 처리하게끔 구현해라. 그러자면 당연히 문제가 많이 생기겠지만 알아서 해결해라. 그리고 실험 결과를 뽑아라.

교수님은 데카르트라도 빙의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세 치 혀로 천냥 빚도 갚는댔나? 세 치 혀로 천 일짜리 야근이라도 만들어 줄 기세였다.


하지만 길영은 일주일만에 해냈다. 그리고 준상과 함께 교수님을 찾아갔다. 드디어 논문 작업을 하게 되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교수님은 다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러니까, 다시 몇 가지 일을 시키셨다. 학생이 무슨 빠삐코도 아니고, 끝까지 쭉쭉 빨아먹을 기세였다. 길영은 조금 불안해졌다.

전길영(석2): 형, 이래가지고 논문 낼 수 있을까요? 이미 논문에 넣을 내용은 충분하지 않아요?

강준상(박4): 교수님이 보기엔 안 충분한가 보지.

전길영(석2): 다른 논문 보면 이거 보다 덜 하고도 논문 잘만 붙던데.

강준상(박4): 그럼 니가 교수해라~ 논문 마음대로 내게~

전길영(석2): 그게 아니라요, 이러다 못 내면 어떡해요?

강준상(박4): 내가 봤을 땐, 니가 너무 잘해서 그래.

전길영(석2): 네?

강준상(박4): 니가 전에 시키셨던 걸 다 못 했으면 더 이상 안 시켰을 거야. 있는 것만 가지고도 그럴듯하게 논문을 만들어내셨겠지. 근데 그걸 다 해냈잖아. 아직 6일이나 남았고. 그러니까 더 시키는 거야.

전길영(석2): 아니 그럼 쓰는 건 언제 쓰구요.

강준상(박4): 알아서 하시겠지. 내용이 이쯤 완성됐으니, 어떻게든 내긴 내실 거야.

전길영(석2): 계속 네댓 시간 밖에 못 자서 진짜 피곤한데.

강준상(박4): 그럼 오늘이라도 푹 자고 와. 내가 봤을 땐, 데드라인까지 충분히 잘 기회가 없을 거야.

전길영(석2): 오늘 시키신 게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강준상(박4): 그래, 그게 니 병이야. 근데 그러다 진짜 병 걸린다. 조심해라.

본인도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준상은 충고를 했다. 길영은 충고를 듣지 않았다.



D-5


정원의 구현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실험을 간단하게 해서 테스트해 봤더니 결과도 잘 나온다. 이제 전체 실험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면 안 될 텐데. 실험에 걸리는 시간을 예측해보았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3일이면 충분하다. 아, 됐다. 드디어 되는 건가. 보영이가 만들어둔 스크립트를 약간 고쳐서 마지막 실험에 대한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김정원(박4): 보영아! 드디어, 요 엔터만 누르면 마지막 실험 시작이다!

전보영(석2): 와, 진짜요?

김정원(박4): 요거 엔터 눌러놓고, 음료수 하나 마시고 오자. 왜냐면, 어차피 한 번은 죽을 거거든. 안 그럴 수가 없어.

전보영(석2): 그럼 테스트를 좀 해보고 돌리는 게 낫지 않아요? 시간이 조금만 남으니까...

김정원(박4): 당연히 해봤지. 짧은 실험은 잘 끝나. 근데 전체 실험을 한 번에 넣으면 또 모르는 거잖아. 일단 음료수가 마시고 오자. 잘 돌고 있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고치면 되고 뭐.

전보영(석2): 그래요!

정원은 힘차게 엔터를 눌렀다. 그리고 보영과 음료수를 마시고 왔다. 10분쯤 걸렸나? 그런데 실험은 아직 죽지 않고 잘 돌고 있었다. 별 일이네, 싶었다. 보영이가 코드 리뷰를 훌륭하게 해준 덕이라고 추켜세웠다. 정원은 논문 얼개를 구상했다. 아직 실험은 안 끝났지만, 아이디어 설명은 써둘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득 불안했다. 이번 논문에 유독 운이 잘 따라주는 게. 유독 버그도 별로 없는 게. 큰 수의 법칙[9]에 따르면 행운이 많이 따라줄 수록 그 다음에 불행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니까.



D-3


길영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매점에 다녀왔다. 컵라면과 즉석밥을 몇 개 사왔다. 시리얼과 우유도 사왔다. 남은 3일간은 연구실에서 끼니를 때우려고 한다. 기숙사는 찜질방처럼 쓸 계획이다. 씻고 잠시 자고 나오는.


길영의 눈 밑은 부어 있다. 속도 약간 안 좋았다. 대뇌피질[10]과 두개골 사이에 온천수라도 들어찬 듯하다. 뜨듯한 게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3시간 간격으로 기면증[11]이 온다. 15분이라도 눈을 감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하지만 3일만 버티면 된다. 3일만 버티면 쉴 수 있다.


길영은 이제 논문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남은 실험이야 준상이 해줄 것이고, 관련 연구 정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글을 쓰는 건 교수님께로 넘어갔다. 교수님이 퇴고를 부탁하기 전까진 손 대선 안 된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그림은 글보다 중요하다. 연구자들이 논문을 볼 때 대개 각 장의 소제목과 그림 중심으로 훑어보기 때문이다.[12] 이 과정을 통해 논문의 대강을 파악한다. 그리고 자세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논문만을 자세히 읽는다. 그러니 그림은 논문의 첫인상이다. 논문 전체를 통틀어 초록(abstract) 바로 다음으로 많이 보여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흑백 그림으로 논문의 핵심을 담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길영이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야지. 이렇게 그리다 지우고, 저렇게 그리다 지우고, 를 반복했다.


다시 극심한 졸음이 온다. 어느덧 꾸벅, 하고 졸았다. 마우스가 화면 끝으로 가 있다. 화면엔 원치 않는 선 하나가 그려져 있다. 졸음을 깨울 기운조차 부족하다. 눈에만 힘을 줘서 떠 보았다. 시계를 봤다. 저녁 10시다.

‘아, 찜질방 계획이고 뭐고, 첫 번째 그림만 마치면, 오늘은 잠 좀 충분히 자야겠다. 어차피 마지막 이틀은 밤을 새다시피 할 테니까.’

어차피 낼 힘은 없으니 가만히 앉아 마우스 클릭을 계속했다. 거진 다 그렸다고 생각할 찰나, 교수님께 메일이 왔다.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우리가 제시하는 기법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성능 향상을 이루는지, 그에 대한 수학적 분석이 있었으면 좋겠어. 3장 각 절 앞부분에 잠깐씩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

방에 가서 담요라도 하나 가져오는 게 취침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학생휴게실에 소파가 있다고 했었나?


논문은 세계 최초여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도 그래야 한다. 알겠다. 어떻게든 해보겠다. 그런데, 그럴 거면, 쓰는 거나 좀 쉬우면 안 되나? 뭐가 이리 힘드냐….



D-2


이제 정원도 관련 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본문은 대충 들어갈 내용만 정리해서 교수님께 넘겼다. 보영은 그래프를 만들고 있었다. 실험이 끝나는 대로 숫자만 적어 넣으면 완성되게끔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보영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실험이 안 끝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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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크립트(Script): 일반적으로 다른 프로그램을 조종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지칭한다.

[2] 코드 리뷰(Code Review):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실수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프로그램은 컴퓨터가 읽는 것이므로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작성한 프로그램을 눈으로 읽으며 작성자의 의도대로 구현되어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이를 코드 리뷰라고 한다.

[3] 버그(bug): 직역하면 ‘벌레’. 프로그램에 개발자가 의도치 않은 오류가 있을 때 이 오류를 ‘버그’라고 한다. 컴퓨터 초창기에, 컴퓨터에 실제로 벌레가 들어가 오작동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4] 리뷰어: 논문을 심사하는 사람을 리뷰어라고 한다. 본 소설은 의도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한글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왜래어 수준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는 데다, 소설에서 대화문 안에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에 영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5] 바르다 권선생: 최근 뜨고 있는 김밥 전문 음식점인 ‘바르다 김선생’의 패러디. 광고료나 협찬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에서 전보영이 김정원에게 했던 말이다.

[7] 듀의 법칙(Due’s Law): 마감 기한(due date)이 가까이 올수록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는 법칙. 자세한 설명은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를 참고하라.

[8]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 - http://scienceon.hani.co.kr/274724

[9] 큰 수의 법칙: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은 이론상 1/2이다. 그런데 동전을 4번 던졌을 때 앞면만 4번 나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하지만 동전을 10,000번쯤 던지면 앞면이 나오는 횟수는 5,000번에 근접하며, 더 큰 숫자만큼 던져볼수록 앞면이 나오는 횟수는 전체의 1/2에 가까운 숫자가 된다. 이를 ‘큰 수의 법칙’이라 한다. 다르게 말하면, 큰 수로 갈수록 실험상 결과 값이 이론적 확률과 비슷해진다는 법칙이다.

[10] 대뇌피질: 대뇌 표면에 위치하는 신경 세포들의 집합. 즉, 대뇌의 껍질이라고 보면 된다.

[11] 기면증: 일상생활 중 발작적으로 졸음에 빠져드는 신경계 질환이자 수면장애. - http://ko.wikipedia.org/wiki/%EA%B8%B0%EB%A9%B4%EC%A6%9D

[12] 다음 논문에서 권유하고 있다. S. Keshav. How to read a paper. SIGCOMM Comput. Commun. Rev. 37, 3 (July 2007), 83-84.


   작가의 말

 논문은 그 내용이 세계 최초여야 합니다. 논문은 철저히 사실(실험 결과)에 기반해야 합니다. 논문은 대충 훑어봐도 대강을 알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소설은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표현이나 서술 방식만 다르면 인정을 해줍니다. 소설은 거짓말이 잔뜩 있어도 됩니다. 소설은 앞에서 뒤로 읽었을 때 이해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논문은 못 써도 소설은 쓰고 있는 이유죠.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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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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