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무익한 수고와 싸움’ -설계 ①


00evolution_pixabay2.jpg » 출처 / pixabay.com


제3화. 설계



“하등한 선조들의 흔적을 몸에 깊이 새긴 채 선사시대의 어둠에서 인간은 걸어 나왔다. 그는 짐승, 다른 짐승들보다 약간 지능이 높을 뿐인 짐승이자 자신을 종종 파멸로 몰고 가는 본능을 지닌 속절없는 사냥감이다. 정신을 공포와 피로로 바꾸는 끝없는 환영에 사로잡힌 자이며, 자기 육신의 삶을 무익한 수고와 싸움으로 채운다.”

-토머스 헉슬리(영국의 생물학자)




학 소강당은 후끈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찜질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니 땀이 증발해 구름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지 염려가 될 정도였다. 거액을 기부한 모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건물이 설계 단계부터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서 냉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대학에 대한 정보에 굶주렸던 재수학원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그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지금의 이 열기는 단순히 바깥의 더운 날씨와 엉망진창으로 지어진 건물의 합작품만은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강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거미줄처럼 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거미줄이 뻗어 나온 근원은 강당 전면의 플래카드. 앞으로 10분 후면 시작될 토론회를 알리는 플래카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큼지막한 파란색 글씨로 적혀 있었다.


“진짜로 이 두 사람이 맞붙을 줄이야.”


옆자리의 나혜 언니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한참 과학과 인연을 끊었던 나조차도 오늘 토론회에서 맞붙을 두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니까.


00evolution_onezoomorg2.jpg 미션스쿨이며 교회에 강연을 다니며 지적설계론- 그러니까 초월적인 지적 존재가 우주와 지구와 특히 모든 생명체를 설계했다는 이론을 설파하던 정경엽 박사의 도발이 이 토론회의 시작이었다. 다윈의 말대로 생명체가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진화해 나왔을 리가 없다면서, 정 박사는 여러 권의 책을 써서 대중에게도 유명해진 진화생물학자이자 무신론자 교수 한 명을 콕 찍어서 몇 번이고 공격했던 것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진화생물학자 나영비 교수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면서 몇 년 동안 묵묵부답이었지만, 아무래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상대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이렇게 강당까지 빌려서 손수 토론회를 주최한 것을 보면.


“확실히 이슈는 이슈네요. 학교에 외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온 건 처음 봐요.”


“그야 나 교수는 꽤 유명하니까. 기자도 많이 왔고, 다른 데서도……,”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강의실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열두어 명의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젊은 남자부터 아줌마까지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딱 봐도 이 학교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 중 하나는 진화론과 동성애와 불벼락에 대한 이상한 피켓까지 들고 있었으니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딱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룹의 리더처럼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 한마디 했다.


“자, 다 같이 찬송 부르시겠습니다.”


근처 대형교회에서 몰려왔을 십자군의 경쾌한 노랫소리가 강당을 윙윙 울렸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서 교회를 다녔던 내게는 아주 익숙한 찬송이었지만 언니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끝나지 않을 듯 울려 퍼지던 찬송이 마침내 멈춘 것은 사회자가 나와 곧 토론이 시작되니 정숙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한 뒤였다.


“오, 선수 입장한다! 잘 부탁해요, 과학자 언니.”


혹시라도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해설을 부탁하기 위해 데려온 룸메이트는 다소 꺼림칙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무튼 거절하지는 않았다. 자기 전공도 아닌 분야에서 해설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면서 몇 번이고 사양한 언니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배가 나온 정 박사가 트레이드 마크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강단으로 올라왔고, 마른 몸에 안경을 쓰고 머리는 짧게 깎은 나 교수가 다소 쭈뼛거리며 뒤를 이었다.


“한국판 윌버포스 대 헉슬리 대결이네. 성공회 목사였던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와 대결을 펼쳤죠. 1860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요. 이 정도는 아니깐 설명 안 해 주셔도 되는데.”


내 말에 언니는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도 어젯밤에 뉴스 기사에 언급된 것을 보고 자세히 검색해봤을 뿐이었지만.


“그거 아세요? 사실 윌버포스 주교는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곽 막힌 사람은 아니었대요. 당시에는 다른 생물학자 중에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았고, 주교 본인도 나름대로 과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토론에 임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원숭이가 당신의 할머니 쪽입니까, 아니면 할아버지 쪽입니까’라고 말한 게 치명적인 실수였지만.”


“글쎄, 당시 주교였으면 연설에 익숙한 최고의 달변가였을 거야. 정 박사는 과연 어떨지 봐야겠네.”


어떻게 토론을 하든지 사실이 아닌 게 사실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이지, 하고 언니는 한 마디 던지면서도 강단 앞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 사람당 15분씩 자신의 주장을 소개할 시간이 주어졌고, 먼저 앞으로 나선 사람은 창조론자 정경엽 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러분, 폭탄먼지벌레를 아십니까?”


“알아. 낡은 주장이야.”


00evolution_wikicommons.jpg 정 박사가 입을 열자마자 나혜 언니가 너무나도 퉁명스럽게 소곤거리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창조론자들이 앵무새처럼 말하고 또 말하는 지긋지긋한 주장이라면서 언니는 그 뒤로도 박사가 말을 할 때마다 거의 동시에 태클을 걸어댔다. 이를테면 정경엽 박사가 이런 말을 하면,

 “폭탄먼지벌레는 위협을 받으면 몸속에서 하이드로퀴논과 과산화수소라는 물질 둘을 섞어서 뿜어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두 물질 다 대단히 불안정하며 자칫 잘못해서 몸속에서 섞였다가는 벌레 자신이 폭발하고 말겠지요. 과연 이런 복잡한 시스템을 진화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즉시 이렇게 반박하는 식이었다.

 “퀴논은 다른 딱정벌레들이 껍질을 강화시키고 쓴맛을 내려고 흔히 생산하는 물질이야. 과산화수소는 흔한 생체 부산물이고. 반응은 폭발적이지만 효소가 필요하지. 폭발까지 가지 않고 거품만 만들어내는 딱정벌레도 있어. 전부 점진적인 진화로 설명할 수 있어.”


“역시 언니 데려오길 잘 했네요.”


그렇게 말했더니 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반박이고, 아마 나 교수도 조금 있으면 똑같은 말을 전공지식을 살려서 훨씬 자세하게 할 거라는 것이다. 애초에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면서 언니는 한심하다는 듯 강단을 쳐다보았지만, 장 박사의 말이 끝나자 그 시선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한 교회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저 사람들은 만족한 모양이네요. 있죠, 그렇게나 잘 알려진 비판이면 저 사람들은 왜 계속 그걸 믿고 있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종교는 둘째치고라도 일단 장 박사도 박사니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물론 저 박사는 진화생물학이 아니라 기계공학 박사지. 자기 전공 밖의 내용은 잘 모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과학자라면 과학 전반에 대해 다 알 거라고 생각을 하잖아.”


자신도 집에 가면 고장 난 컴퓨터나 새로 산 화장품의 성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서 언니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단지 과학자라는 이유만으로 나혜 언니를 끌고 온 나 역시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아무튼 지금부터는 전공자의 말을 경청할 생각이니까-이젠 나영비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차례였다. 긴장으로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장 박사가 말하는 내내 병에 담긴 주스를 들이키던 그는 강단으로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피곤과 초조의 기색이 짙었고 손도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전공자라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떨리나보네요.”


“이런 토론이 익숙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토론 전공이 아니잖아.”


그렇다 하더라도 나 교수는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비틀거리다시피 하며 걸어와, 불안하게 사방을 쳐다보면서도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은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가도 주스로 입술만 축일 뿐 도무지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사회자의 무언의 재촉 아래서도 머뭇거리길 그렇게 2분 정도, 조용한 웅성거림 속에서 나영비 교수는 마침내 결심한 듯 숨을 들이쉬고,


“여러분, 그, 제가 이 자리에서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제가, 제가 하려는 말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해졌다. 힘이 없는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목소리 역시 그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리는 목소리로 나 교수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한 마디를 뱉었다.


“제가, 졌습니다.”


경악이 긴장의 거미줄을 모조리 끊어내며 소강당 전체에 내렸다. 단지 교수의 충격적인 선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언과 동시에 교수의 다리가 풀리면서 몸 전체가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나 교수의 마른 몸이 힘없이 강단 위에 쓰러지자 침묵은 이윽고 혼란으로 바뀌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교수님!”을 외치며 뛰어 올라갔다. 교회에서 온 사람들조차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누군가가 짧게 “아멘!” 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문가 한 사람이 패배선언을 했다고 진화론이 무너지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혜 언니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보니 인터넷 뉴스는 온통 이 사건 얘기로 가득했고, 그 중에는 ‘진화론의 패배’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단 것도 잔뜩 있었던 것이다.


“과학이란 건 전문가 한 사람의 말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니까. 그게 과학의 포인트야.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한 사람이 뒤집기에는 너무나도 많고, 고작 말 한마디가 흠집을 낼 수는 없어.”


언니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정론이 으레 그렇듯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물론 무수히 많은 진화생물학자 중 한 사람에 불과한 나영비 교수가 창조론자에게 패배했다고 해서 진화론이 일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나 교수는 도대체 왜 패배를 선언한 것일까? 그 분야의 전문가가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단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을 뿐. 인터넷 뉴스들은 단지 교수가 쓰러진 지 얼마 안 돼서 깨어났으며, 넘어질 때 가볍게 다친 상처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지만 기자들의 인터뷰는 거절하고 있다는 단편적인 정황만을 알려줄 뿐이었다. 물론 그것조차 알려주지 않는 기사도 있었다. 악명 높은 보수 기독교계 신문은 기다렸다는 듯 대형교회 목사이자 창조과학 연구회장이라는 사람의 칼럼을 실었다. 문제의 칼럼은 첫마디부터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00evolution_pixabay3.jpg ‘다윈이 죽기 전 진화론을 부정했듯이’….


“‘다윈이 죽기 전 진화론을 부정했듯이’라고? 이건 유명한 거짓말이잖아요!”


“엘리자베스 코튼이라는 사람이 지어난 얘기라는 게 정설이나 다름없지. 어차피 그 십자군들도 이 사람 교회에서 온 거고, 읽을 가치도 없어.”


나 교수의 패배선언에 대해 ‘모세의 형 아론이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자, 파라오의 신관들도 똑같은 기적을 선보였지만 아론의 뱀이 신관들의 뱀을 전부 잡아먹었다’는 구절을 들먹이면서 ‘한낱 인간의 알량한 오만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소리 높여 외치는 대목을 읽은 뒤 나 역시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화론에 설령 흠집이 난다 한들 자동적으로 창조론이 승리하는 건 아니니까. 문제가 있다면, 이 목사의 글이 터무니없다고 해서 패배 선언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역시 궁금하죠, 언니?”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잔뜩 찌푸려진 룸메이트의 표정과 까딱이는 의수만으로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껏 진화생물학을 대중에게 알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창조론자에게 무릎을 꿇고서 쓰러진 것이 천벌이나 저주일 리는 없었다. 우주의 탄생이나 인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이 존재해야만 했다.


“가설을 세워 볼까요. 제가 먼저 할게요. 누군가가 협박한 게 아닐까요?”


“토론에서 고의로 패배하도록 말이지.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모든 학문적 성취가 흔들릴 테니까 기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몰라. 다른 가능성으로, 계속 주스를 마시고 있었으니 누가 주스에 약을 탄 게 아닐까?”


“정신이 혼미해져서 헛소리를 하라고 말이죠? 그러려고 했는데 약을 너무 많이 써서 정신을 잃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짓까지 할 정도로 나 교수님의 패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이 누굴까요?”


역시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 나 교수의 패배를 누구보다 원했을 사람이라면 당연히 토론 상대방인 정경엽 박사일 테니까.


“내가 정 박사를 만나러 가 볼게. 너는 혹시 토론 전에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지 않았는지, 수상한 정황이 없었는지 알아봐 줘.”


“시시티비(CCTV) 같은 걸 살펴봐야 하나요? 그건 좀 무리 같은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아마 나 교수 연구실의 대학원생일 거야. 토론 전에도 교수랑 같이 있었을 테고 평소에도 자주 만났을 테니까,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해서 가설은 세워졌고, 어디서 어떤 데이터를 얻어야 할지도 정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실제 현상을 관측하는 것. 가설에 들어맞는 데이터만 손에 들어온다면 사건의 진상 역시 명확하게 밝혀질 터였다.



음날 점심시간. 나 교수의 연구실을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언니의 추측대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대학원생은 눈 밑에 기미가 잔뜩 끼고 피곤에 찌들 대로 찌든 표정으로, 내가 가져온 캔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달리 할 일도 없는데 뭐. 교수님이 못 오시니까 실험실이 다 마비됐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뛰어나갈 때 이미 이렇게 될 건 예상했지만, 그래도 막상 일이 닥치고 나니까 우울해 죽겠다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질문을 할 틈조차 없이 인생에 대한 무겁기 짝이 없는 불평이 이어졌다. 토론 전에 뭔가 수상한 일은 없었는지 묻는 내 질문은 그 한숨 가득한 사고의 흐름 속에 파묻혀 그대로 흘러가버릴 뿐이었다.


“교수님은 나랑 계속 같이 계셨고 이상한 사람은 못 만났어. 그렇게 오래 얼굴 보고 있었던 것도 오랜만인 게, 요사이엔 딸 때문에 실험실에 얼굴도 잘 안 비치셨으니까. 딸이 열 살인가 먹었는데, 돌봐줘야 된다고 매일 어디로 왔다갔다만 하시고 그런다고. 나 슬슬 논문도 쓰고 졸업 준비도 해야 되는데 봐주시질 않으니까 매번 지지부진해지고, 이래선 언제 졸업할까 몰라. 아무리 딸이 중요해도 그렇지 교수면 학문에도 신경을 쓰는 척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교수님이 스트레스로 쓰러지신 걸 보면 협박 같은 걸 당하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혹시 최근에 그런 정황이라도 없었나요?”


“교수님만 피곤했을 거 같냐? 나도 피곤해. 딱 피곤한 거 안 보여? 실험실엔 돈도 없어서 장비도 못 사고, 교수님하곤 얘기가 안 되니까 스트레스는 나 혼자 받을 대로 받고, 요즘은 그냥은 아예 잠을 못 든다니까? 아무튼 논문은 안 나오는데 이젠 창조론자한테 지기까지 하고, 모르겠다. 실험실 잘못 골라서 인생 망했다…….”


자칫하면 나도 이 우울함의 물결에 휩쓸려버릴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혜 언니의 전화가 나를 구해주었다. 후다닥 자리를 피해서 전화를 받아보니 언니의 담담한, 한숨과 절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욱 반가웠던 것은 그 목소리가 전하는 내용이었다.


“창조과학연구소 사무실로 오래. 무작정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정 박사라는 사람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 주더라고.”


“그럼 지금부터 용의자를 만나러 가는 거네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도 있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이 뒤에 딱히 수업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빨라졌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창조과학연구소 사무실은 버스로 몇 정거장 가면 있는 빌딩숲 한복판의 건물 3층이었다.


정경엽 박사는 참으로 한결같은 미소로 나와 언니를 맞이했으며, 주스도 두 잔 갖다 주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종이컵에 입조차 대지 않았다. 대놓고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정 박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방금 전까지 기자들이 들렀다 갔지만 지금은 좀 여유가 생겼다면서 그는 ‘젊은 과학도’들의 방문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거기에다 대고 나혜 언니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나 교수님이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짚이는 점이 있으신가요?”


“어이쿠, 글쎄요. 연구소장 목사님은 신나셔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막 그러셨는데, 사실 저는 이런 걸 기도한 게 아니랍니다.”


“정말로요?”


의심 가득한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갔지만 정 박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토론이 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창조과학 강의를 하고는 있어도, 아시다시피 생물학 전문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전문가한테 제 말이 어떻게 비칠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공부도 많이 했어요. 이렇게 끝나다니 솔직하게 말해서 안타깝습니다.”


이 태연한 말은……, 전혀 거짓말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릴 적 교회에서 자주 만났던 독실한 신앙인 특유의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라서 부담스러운 태도만이 느껴질 뿐. 나혜 언니도 그런 걸 느끼는지 얼굴을 찡그렸고, 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말이었다.


“이해합니다. 제가 토론에서 이길 리가 없다고 생각하셨을 테니, 제가 뭔가 수를 쓴 게 아닐까 의심이 드시겠죠. 주스는 나 교수님 쪽에서 준비하신 거고 교회 사람들은 계속 강당에만 있었습니다-이렇게 다 말씀을 드려도 계속 의심을 하실 거고요.”


“그야 그 교수님이 진심으로 박사님의 논리에 승복하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진화생물학 전문가시고, 진화론은 한 순간에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게 다져진 기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도 기계공학 박사로서 이렇게 답을 드려야겠네요. 주님께서 지으신 생명들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근사합니다. 사람은 잘만 하면 100살까지 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간의 기술이 총동원된 스마트폰 그런 건 몇 년도 못 가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게 기계든, 토론이든, 진화론이든 다 불완전해요.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는 달라서 실수를 하고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혜 언니는 뭐라고 반박을 하려 했지만, 나는 그 반박을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관측은 실패였다. 수상한 점은 없었고 정 박사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인간이 세우는 가설, 인간이 수행하는 관측이 한계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탁 막힌 기분이었다.



기분 그대로 돌아와서 인터넷 뉴스를 다시 보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험이었다. 창조과학연구소 회장인 목사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모니터에 떠 있었다. 나 교수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다녀왔는데 재도전을 요청했다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듯했다. “자기가 졌다고 남자답게 승복할 줄도 모르는 사람의 재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고, 무엇보다 어이가 없었다.


“패배선언을 한 사람이 왜 재도전을 신청해요? 이 목사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00evolution_maze_openclipar.jpg 그렇게 소리쳤지만 나혜 언니는 말이 없었다. 정 박사를 만나고 돌아온 이래로 계속 그 상태였다. 어깨를 툭툭 쳐 보았더니 반응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기대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과학과 합리의 목소리를 내는 대신에 반쯤 몽롱하게 이런 말을 했으니까.


“아닐지도 몰라.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실수하고 죄를 짓는 존재니까.”


“뭐라고요? 언니도 패배선언이에요?”


그렇게 따지듯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고, 휴우, 아무래도 최악의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단지 머릿속의 복잡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중인 것 같았다. 설마 과학자 룸메이트가 창조론자의 설교조차 퍼즐조각으로 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정 박사가 죄를 지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창조론자고, 틀린 주장을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잘못된 이론을 지지한다고 해서 나쁜 짓까지 하라는 법은 없는 거야. 누군가 협박했거나 약을 탔을 거라는, 그럴 정도로 교수님이 패배하기를 원했다는 가정에 오류가 있었을지도 몰라.”


-달리 생각해 보면 과학자는 언제든 가설을 수정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진화생물학자 한 사람의 선언으로 진화론이 전부 무너지는 것이 아니듯, 창조론자가 말한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나혜 언니는 기존의 가설을 부수고,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로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이렇게 가정해 보자. 나 교수님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고, 죄를 짓는 존재라고.”

<제3화 ②에서 계속>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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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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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편 '미래 ①'에서 이어집니다. 제7화. 미래②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너무나 빨리 찾아오니까.” -앨버트 아인슈타인(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언니는 충격 때문에 눈치를 채...

  • 무너져야만 한다면 -제7화①무너져야만 한다면 -제7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10. 23

    제7화. 미래①“허나 체제가 더욱 크게 성장할수록 그 파국의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기에, 무너져야만 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무너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미국의 수학자, 테러리스트)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나혜 언니...

  • 알아야만 한다  -제6화 ②알아야만 한다 -제6화 ②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10. 09

    ◐ 전편 '상자 속 입자 ①'에서 이어집니다. 제6화. 상자 속 입자②“어리석은 ‘우리는 알지 못하리’ 정신에 대항하는 우리의 슬로건은 이러하리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다비드 힐베르트(독일의 수학자)“확실한 게...

  • 이해하지 못한다  -제6화①이해하지 못한다 -제6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09. 25

    제6화. 상자 속 입자①“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파인만(미국의 물리학자) “자, 그럼 뜯어보자.”왼손으로는 드라이버를 꼭 쥔 채, 과학자 룸메이트의 눈은 호기심이 상당부분 섞인 기묘한 빛...

  • 독성을 없애는 것  -제5화②독성을 없애는 것 -제5화②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08. 28

    ◐ 전편 '만물은 독이니 ①'에서 이어집니다. 제5화. 만물은 독이니② “만물은 독이니 독 없는 것 없도다. 독성을 없애는 것은 오직 그 용량뿐이라” 파라셀수스(스위스의 연금술사, 본초학자) 진실을 알고 싶다면 서둘러야 했다. 만일 나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