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 한국인 제약전문가들 지적
» 출처: Wikimedia Commons 우리나라 생명공학과 제약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초연구와 기업 신약개발의 중간단계인 선도물질 연구에 집중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다. 충북대 등이 23일 대전 스파피아호텔에서 연 ‘글로벌 신약개발 전략 심포지엄’에 참가한 재외 한국인 제약전문가들은 세계 굴지의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신약개발 부진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한국,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바이오 인프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나, 국내 연구개발 체계는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보스턴 노바티스신약연구소의 윤태영 책임연구원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생물의약 분야의 기념비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생산성은 경고 수준까지 떨어지고 있다”며 “특허기간이 만료되는 이른바 ‘특허 절벽’에 직면해 세계 제약산업은 커다란 조직적, 전략적 격동을 겪고 있다”로 말했다. 파이자나 노바티스 등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그동안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저분자 약품들을 개발해 수익을 올려왔지만, 그동안 개발해온 신약들의 특허 만료가 끝나가는데 새로운 바이오의약품은 개발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9년 스웨덴의 아스트라와 영국의 제네카가 통합한 아스트라제네카는 연수익의 38%에 해당하는 신약의 특허가 3년 이내에 만료돼 저가 복제약과의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머크사 등 대부분의 제약사들도 똑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도전에 맞서 다국적 제약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선도물질'(lead)부터 '신약후보물질'(candidate)에서 신약에 이르는 신약개발 전 과정을 수행하던 전략을 바꿔, 위험부담이 큰 선도물질 개발 단계는 과거에 비해 생명공학 연구 인프라가 크게 향상된 아시아권 국가들에 용역을 주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노바티스의 경우 올해부터 연 200억달러의 자금을 한국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곽영신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의약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런 전략의 선회는 제약업계가 10년 전 게놈프로젝트가 성공했을 때 바이오의약품에 대한 기대가 컸음에도 이 분야에서 신약이 개발되기에는 축적된 지식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약회사들의 전략 선회는 대규모 인력 감축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올해 5만5천명의 직원 가운데 8천명을 해고한다고 발표했고, 머크사는 지난해 1만6천명을 해고한 데 이어 올해도 15%의 인력 감축을 선언한 상태다.

윤 책임연구원은 “제약회사들이 위기 극복을 위해 투자 위험 부담이 큰 선도물질 연구를 외부 용역으로 돌리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도 대학 중심의 기초연구와 제약회사들의 신약개발 연구를 연계해주는 선도물질 연구분야에 투자와 인력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들이 최근 5년 동안 선도물질 관련 연구소를 유행처럼 잇따라 세우고, 제약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에서도 최근 제약회사 릴리의 전 임원을 신약연구의 총 책임자로 영입했다. 곽 책임연구원도 “의약 관련 생명공학 기초분야에서 우리나라 연구진의 성과가 잇따르고 있지만 이것을 활용하는 후속 연구체계에 대한 지원이나 정책적 고려가 부족하다”며 “골리앗 제약업계의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첨단의료복합단지 등도 신약개발의 중간단계 연구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추진되는 첨단의료복합단지는 오히려 제약회사들이 담당하는 신약후보물질 쪽에 너무 치중돼 있다는 것이다. 정밀검색 기술의 발달로 초저분자를 활용한 ‘맞춤형 대량검색시스템’ 등이 가능해져 적은 투자로도 효과적인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도 신약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도입을 가능하게 하는 점이라고 곽 책임연구원은 덧붙였다. 현재는 기초연구 단계에서 새로운 타겟이 발견되면 ‘대량검색시스템’(HTS)을 가동해 분자은행에서 적합한 물질을 찾아내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현재 노바티스의 경우 100만개의 화합물을, 파이자의 경우 300만개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를 한번 가동할 때마다 100만달러~300만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 우리는 엘지화학이 2만5천개, 한국화학연구원이 수천개의 분자은행을 운용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태도 변화도 신약개발 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을 고려하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두 전문가는 말했다. 에프디에이가 특정 질병군에서 효과가 검증된 신약의 범용화 검증 시스템을 간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곽 책임연구원은 노바티스의 예를 들었다. 노바티스는 IL1베타를 항체로 사용한 관절염치료제를 개발했지만 에프디에이의 안전성 기준을 못 맞췄다. 그러나 이 약은 희귀병인 머클웰신드롬에도 효과가 있었다. 에프디에이는 이 약에 대해 허가를 내줬다. 이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 500여명에 불과하다. 임상시험을 하고 나면 약을 사 줄 사람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노바티스가 ‘머클웰’이라 이름지은 이 약의 허가를 신청한 것은, 에프디에이가 하나의 질병에서 검증된 신약을 다른 질병에 적용하려 할 때 검증 시스템을 간소화하려는 정책 변화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오벤처투자회사인 옥스포드 바이오사이언스 파트너스의 김병수 박사는 “미국이나 유럽조차도 신약을 찾아내고 개발해 시장을 형성해내는 데 필요한 능력을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회사는 몇 안된다”며 “초기단계인 한국의 생명공학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연구자들이 세계 생명공학 전문가들과 전문성을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