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여학생은 있는데, 남학생은 없어요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s2e04_2.jpg » 제작 / 김창대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되고 학생들은 멘탈파쇄가 일어난다. 교수회의 결과, 석사 1년차 학생들은 모두가 기피하는 연구실 중에서만 연구실 재배정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됐고, 주성(박1)은 다른 연구실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길영(석2)이 다른 연구실로 가더라도 박사과정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가운데, 가타부타 말이 없던 보영(석2)을, 정원(박4)이 퇴근길에 마주치게 된다. 정원은 보영에게 술 한 잔 하러가자고 말한다.




#4.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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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잠깐의 침묵이 무거운 것은. 정원은 그저 보영을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자기라고 뾰족한 수는 없지만,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카페를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커피 마셨다고 잠 못 자면 어쩌려고. 그래서 술 마시러 가자고 한 것이다. 아차, 싶어 재빠르게 “싫음 말고”라 덧붙였다. 그래도 긴장됐다. 늦은 밤 여성에게 술 마시자고 하는 건, 마녀사냥[1]에 사연 보내면 그린라이트[2] 판정될 일이니까. 정원의 마음은 순수했지만.

전보영(석2): 그럴까요?

다행이었다. 정원은 순간 이것이 그린라이트가 아닐까도 싶었다.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김정원(박4): 어디로 갈래?

전보영(석2): 전 아무데나 괜찮아요.

김정원(박4): 나도 다 괜찮아. 네가 원하는 데로 가자.

정원은 보영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보영은 정말 아무데나 괜찮았다.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자란 족속과 함께 살아가려면.

전보영(석2): 그럼, 그 오빠가 좋아하시는 ‘둘리야 학교가자’[3]도 괜찮고, ‘요세미티’도 괜찮고, 음, 아, ‘세다리’도 괜찮고요.

김정원(박4): 옛날에 개그콘서트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원하는 걸 두 번째로 말한다며? 그럼 ‘요세미티’ 가면 되는 거지?

전보영(석2): (웃음) 그런 게 언제 나왔어요? 누가 그렇대요?

김정원(박4): 아니야? 웃기려고 한 말인가…. 어쨌든 그냥 요세미티 가자. 뭐.

보영은 어쨌거나 웃었다. 남자들이란,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배운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애초에 자기가 아무데나 정해서 가자고 했으면 중간은 갈 텐데. 하긴, 그런 센스가 있었다면 이 오빠가 솔로가 아니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세미티’만 병맥주를 파는 집이긴 하다. 나머지는 소주, 맥주에 안주를 거하게 파는 집들이다. 보영은 개그콘서트에 나왔다는 그 말이 진짠가도 싶었다.



하로 내려갔다. 아저씨가 “두 분이세요?” 묻는다. 정원이 “네”라고 대답한다. 구석 자리로 안내하더니 초를 켜준다. 어둑한 조명 속에 초만 밝다.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목소리[4]가 팝음악에 얹혀 나온다. 두 사람은 자리에 가방만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병맥주들이 가득 진열된 냉장고로 향했다.

김정원(박4): 오늘은 오빠가 살 테니까, 비싼 거 마셔.

전보영(석2): 안 사주셔도 돼요.

김정원(박4): 에이, 내가 너보다 월급 더 많이 받잖아. 우리 서로 월급 뻔히 아는 처지에 이러지 말자.

정원은 솔선수범해서 4,900원짜리 독일산 맥주를 잡는다. 보영도 머뭇거리다 4,900원짜리 맥주를 잡는다. 둘은 초를 밝혀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앉자마자 보영이 병따개로 맥주를 딴다. 대신 따주려던 정원이 머쓱해진다. 하지만 안 그러려고 했던 척, 자신의 병을 딴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년 반. 우연히 학생식당에서 만나 둘이 밥 먹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만난 것은 처음, 술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어색하자면 한없이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술이란 무엇인가. 체면이란 장막을 걷어내고 부끄러움이란 문을 열어젖혀 상대방을 초대하는 도구가 아니던가. 물론 어느 정도 취한 다음의 이야기다. 정원은 병을 들어 내밀었다. 보영이 병을 맞춘다. 새끼손가락끼리, 병의 밑동끼리 닿는다. 짱, 유리가 운다.

김정원(박4): 박사 어쩔 거냐?

병을 내려놓자마자 본론부터 들어간다. 딱히 꺼낼 곁다리 이야기도 마땅치 않으니까. 보영도 이미 예상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지만.

전보영(석2): 모르겠어요.

김정원(박4): 뭐가 고민이야? 연구가 좀 아닌 거 같아?

전보영(석2): 연구가 할 땐 재밌긴 한데, 딱히 결과가 잘 나오는 게 아니니까….

김정원(박4): 그건 왠지 나 때문 같다. 미안해.

석사 신입생들이 연구가 뭔지 알 리가 없다. 그래서 보통 박사과정 선배가 한 명 붙어서 자신이 진행 중인 연구를 돕게 한다. 연구가 뭔지 보고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 때 박사과정 선배를 사수, 석사과정 후배를 부사수라고 한다.[5]


작년엔 보영이 석사 신입생이었고, 정원이 보영의 사수였다. 당시 정원이 진행하던 연구 주제로 7개월쯤 함께 실험도 하고 토의도 했다. 학회에 논문도 제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출 일주일 전,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주제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볼 여지도 없었다. 결국 접었다. 보영은 어물쩍 석사 2년차가 되었다. 혼자만의 연구 주제를 잡아야할 때였다. 그 후로는 각자 연구를 하게 됐다.


정원은 그 일이 늘 미안했다. 연구도 첫 경험이 중요하다. 조금이나마 성취를 맛보는 게 중요하다. 그걸 자신이 망친 것 같았다. 그 후로 보영의 연구는 답보 상태였다. 정원은 그게 자기 책임인 것만 같았다.

전보영(석2): 오빠가 왜 미안해요. 그래도 그 때 나랑 연구하겠다고 한 건 오빠밖에 없었잖아요.

김정원(박4): 알고 있었어?

전보영(석2): 그 때 다른 사람들이 다 날 어려워했잖아요. 오빠가 정말 고마웠어요.

김정원(박4): 네가 첫 여학생이라 좀 그런 게 있긴 했지. 다들 여자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하는 거 같았어.

전보영(석2): 여자라고 다를 것도 없는데.

보영인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대생들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공대 여자 아니면 공대 아름이[6]. 공대 여자는 남자로 대한다. 목욕탕 같이 가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공대 아름이는 공주로 대한다. 당연한 듯 흑기사가 돼준다. 술자리에서든, 숙제를 할 때든. 미모에 따라 어느 편인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다. 여기는 공대. 세 명이 미스코리아에 나간다면 꼴찌도 ‘미’를 받는다. 약간의 애교만 섞으면 단번에 ‘진’이다. 그렇다면 상을 받지 않는 방법은? 출전을 안 하면 된다. 예쁜 얼굴을 가졌어도 화장과 치마를 포기하고 함께 밤을 새는 사람에게는 공주 대접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대생은 대학원에 와서야 ‘여자’를 처음 접한다. 나이 먹고 만나서 남자 대우를 할 수도, 직장동료로 만났는데 공주 대접을 할 수도 없다. 남자들끼리야 같이 밤새 가면서 일하자면 하는 건데, 여자에겐 그러자고 하기가 좀 그렇다. 각자 몫은 해줘야 하는데 일을 시키지 않기도 좀 그렇다. 결국 여자는 같이 있고 싶지만, 함께 하기 꺼려지는 존재가 된다.


보영은 대학교 4년 동안 공대 여자를 선택했다. 흑기사에 기대 학위만 받아가려는 여자애들이 꼴 보기 싫었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밥 한 번 같이 먹은 걸로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는 남자들도 짜증났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 졸업사진 찍는 날을 제외하고는 치마도 입지 않았다. 오빠들과는 거침없이 지냈다. 과한 농담을 웃어넘겼다.


대학원에 오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실 생긴 지 6년 만에 첫 여학생이다. 모두가 자기를 조심스레 대했다. 첫 몇 주간은 화장을 했었는데, 다시 지워보았다. 좀 더 편하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기인 길영에겐 일찌감치 생긴 사수가, 자신에겐 생기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나서야 정원이 다가왔다.


배려는 바라지도 않았다. 밥 먹는 속도도 맞췄다. 게임 이야기, 군대 이야기도 경청했다. 하지만 여자란 이유만으로 어려워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달리 대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똑같이 대해줘도 알아서 감수하고 맞춰줄 건데.


보영은 울컥하는 대신 맥주를 벌컥했다. 정원도 따라 마신다. 그래도 정원 오빠는 동료로 대우해줬으니까,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보영은 생각했다.

김정원(박4): 그래도 험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잖아? 안 그래? 여자 대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거지, 나쁜 사람은 없잖아.

보영은 작년에 졸업한 선배가 생각났다. 그 선배는 그렇게도 자기 가슴을 힐끗거렸다. 정말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건가? 눈빛이 짜증났지만 참았다. 안 그랬다고 하면 그만인데다, 눈길 가는 데 좀 보면 안 되냐고 하면 곤란하니까.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술만 마시면 어깨동무도 하고 허리도 감싸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 당황해서 말을 못했더니 그 뒤론 당연하다는 듯 계속 한다고 했다. 신고하기엔 약했다. 이제와 싫다고 하는 것도 분위기만 망칠 것 같다. 오늘 따라 예민하다면서 눙쳐질 것만 같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 눈빛만 기분 나쁜 선배도 졸업하고 없는 지금은 참 좋은 거다.

전보영(석2): 그건, 그렇죠.


자리의 또 다른 장점은 정적을 목 넘김 소리로 메울 수 있다는 거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둘은 다시 술을 마셨다.

김정원(박4): 박사 가는 건, 여자라서 꺼려지는 거야? 아이 낳고 그러는 거 때문에?

정원은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쩌지 못 하겠지만, 들어주고라도 싶으니까.

전보영(석2): 과장도 안 섞어서, 박사냐 결혼이냐, 양자택일 문제에요.

김정원(박4): 그 정도야?

전보영(석2): 그렇죠. 결혼까지 해서 애를 안 낳을 수도 없잖아요.

김정원(박4): 그래도 국가연구소 같은 데 가면 출산휴가 같은 것도 잘 갈 수 있는 거 아냐?

전보영(석2): 제아무리 여성부가 있고 각종 법이 있다한들, 눈치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니, 아무 눈치 없다고 해도, 일단 몇 달 동안 일을 못 하는 거잖아요. 우리 분야에서 몇 달이면, 나오는 논문이 몇 편인데.

김정원(박4): 음,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렇다. 차라리 군대는 어렸을 때 가잖아. 아무 능력도 없고 경력도 없을 때. 근데 애 낳는 건 대부분 직장 잡고 나서 하게 되잖아.

전보영(석2): 직장 잡기 전에 애를 낳으면, 아예 직장 잡기가 힘들겠죠.

김정원(박4): 그러네, 정말.

전보영(석2): 그리고 군대는 2년도 안 되잖아요. 출산은 한 번 하면 평생이에요.

김정원(박4): 그래,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요즘 남자들은 많이 도와주잖아.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설거지 자주 도와주고 하시는데.

보영은 잠시 망설였다. 맥주부터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보영(석2): 도와준다는 생각부터가 문제죠. 모든 게 여자 일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잖아요. 설거지만 해도 그래요. 밥은 같이 먹는데 왜 설거지가 여자 몫이에요? 이미 요리도 여자가 했을 텐데. (멈칫) 아니, 그렇다고 오빠 아버지께서 잘못하셨다는 건 아니고요…, 그분들 세대는 다 그랬으니까….

보영이 급히 꼬리를 내렸지만, 정원은 되려 그 꼬리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김정원(박4): 아냐, 맞는 말이야. 이제 맞벌이 시대니까, 집안일을 몽땅 내 일로 생각해야겠다.

보영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맥주를 마셨다. 정원도 따라 마셨다.

김정원(박4): 근데, 설거지를 내가 하기로 하면, 요리는 여자한테 다 맡겨도 괜찮은 거지? 요리는 당최 자신이 없어서….

전보영(석2): 직장 다니는 아내에게 구첩반상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요.

김정원(박4): 에이, 난 김치찌개 하나가 일주일 동안 나와도 맛있게 먹을 거야!

전보영(석2): 그건, 오빠가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잖아요.

김정원(박4): 아, 걸렸네.


기운에 웃음이 더 크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맛집 이야기, 대학 시절 추억들, 학과에서 누구랑 누구랑 썸타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 등등. 정원은 보영의 말투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밤과 함께 술도 깊어갔다.


어느덧 세 병째였다. 보영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촛불이 붉어진 볼을 밝혔다. 잠시 말을 멈췄던 보영이 흐트러진 발음으로 말했다.

전보영(석2): 근데, 말예요, 오빠들은 왜 내 외모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김정원(박4): 응?

전보영(석2): 아니, 이게 그렇잖아. 대충하고 다니면 좀 예쁘게 좀 다니라고 하고, 또 꾸미고 가면 어디 소개팅이라도 가냐고 놀리고. 진짜 짜증나. 꾸미든 말든 그건 내 맘이지 안 그래요? 자기들 보라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정원은 좀 놀랐다. 가끔 있던 일이고, 말하는 사람도, 듣는 보영이도 농담으로 여겼다고 생각했는데.

전보영(석2): 근데 오빤 예쁘게 했을 때만 칭찬해줘서 좋아요.

정원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김정원(박4): 그래? 그럼 난 괜찮은 거야?

전보영(석2): 음, 좋아, 합격!

정원은 술이 세다. 맥주로는 쉬이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취한 듯 했다.

전보영(석2): 오빠,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김정원(박4): 응?

전보영(석2): 아, 나 화장실 가야겠다.

보영이 탁자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약간 비틀거리는 듯 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정원은 도와줄까 하다가 말았다. 같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전보영(석2): 오빠, 나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 거죠?

김정원(박4): 당연하지, 이 늦은 밤에 어떻게 여자를 혼자 보내.

전보영(석2): 좋아. 그럼 한 병만 더 먹고 가자.

김정원(박4): 말만 해, 내가 갖다 줄게.

전보영(석2): 아냐, 내가 갖고 올래.

보영은 그새 반말이 늘었다.



병을 마저 비우고야 둘은 ‘요세미티’를 나섰다. 돌아가는 길 보영은 정원의 옷자락을 잡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정원은 그럴 거면 팔짱을 껴도 된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보영을 데려다 주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왜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니는 게 위험할까? 남자는 잘도 다니는데 말이다. 통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 여자가 성범죄를 당할 확률은 낮지만, 성범죄가 일어날 경우 여자가 당했을 확률은 절대적으로 높으니까. 생물학적 이유도 찾을 수 있다. 성범죄가 일어날 경우, 여자가 성병에 걸려 있지 않은 이상, 모든 피해는 여자만 감당하게 되니까. 하지만 우리가 차를 탈 때마다 교통사고를 두려워하진 않는다.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마초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팜므파탈에겐 검지손가락을 내미는 그 어떤 세계관이라든가….


정원은 어쨌거나 뿌듯했다. 옷자락이나마 내어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전보영(석2): 오빠,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김정원(박4): 뭔데?

전보영(석2): 여학생은 있는데, 남학생은 없어요.

김정원(박4): 응?

전보영(석2): 신입생 올 때도 말예요, 여학생 몇 명이냐 그러고, 학생 몇 명이냐 그러지, 남학생 몇 명이냐곤 안 그러잖아요. 아까 오빠 얘기할 때도 그래요. 어느 어느 연구실 여학생이라곤 말하는데 어느 어느 연구실 남학생이라곤 안 말 하잖아요.

김정원(박4): 아, 그러네.

보영의 말에 토를 달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공대에는 여자가 소수다. 그러니 여학생의 숫자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어느 어느 연구실 여학생이라고 하면 단 한 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 어느 연구실 남학생이라고 하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편의를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까 ‘공대 남자’라고 써야 적확한 곳에서도 ‘공대생’이라고 썼던 것에는 위화감을 느꼈어야 한다. 공대 여자와 공대 아름이를 말한 부분에서, 두 번이나 그렇게 적었다.

전보영(석2): 여잔, 다, 여자에요. 남잔, 다, 각자인데.

여교수는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남자 교수(‘남교수’는 아래아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빨간 줄이 그어지는 단어니까)들은 능력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는다. 여학생은 여자 취급을 받고, 남학생들은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는다. 이 바닥엔 여자가 적어서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자가 왜 적은가? 남자가 여자보다 수학에 더 능통하다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실은 차이가 없다고 한다.[7] 그런데 한국 수능에선 여전히 남학생의 수학 성적이 여학생보다 높다.[8]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대에 여자가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분명 여자는 절반에 가까운데 말이다.



보영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정원은 보영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참 힘들게 살고 있구나 싶었다. 여자란 짐이 참 무거워 보였다.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자기가 노력하면 한 여자쯤은 그 무게를 가볍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쉬이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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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녀사냥: 종합편성채널 jT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주로 연애, 특히 성과 관련된 시청자들의 사연을 다룬다.

[2] 그린라이트: <마녀사냥>에는 “그린라이트를 켜줘”라는 코너가 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정말 호감이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다루는 코너다. 사연을 듣고 사회자들이 호감이 있다고 판단하면 자신들 앞에 놓인 초록색 불을 켠다. 이 불을 “그린라이트”라고 한다. ‘사랑의 직진 신호’라는 의미다. 용례로, “그린라이트다.”는 “상대방도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대쉬해도 된다.”는 의미다.

[3] 둘리야 학교가자: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화에서 원식과 정원이 소주를 마시며 짜파게티를 먹던 그 술집. http://scienceon.hani.co.kr/158831

[4]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목소리: 박진영에 따르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이상적인 비율은 “공기 반 소리 반”이다. 여기서 공기 함량이 높아질수록 좀 더 끈적하고 야한 느낌이 나게 된다. (공기 100%는 거친 숨소리라는 걸 생각해보자.) 공기 함량 60% 정도의 여자 목소리는 온가족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섹시한 목소리다.

[5] 사수. 부사수: 군대용어다. 본래 총, 포, 혹은 어떤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수, 사수를 도와 같은 일을 하다가 유고시에 사수를 대리하는 사람이 부사수다. 한국 사회 뿌리 깊숙이 스며든 군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6] 공대 아름이: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 공대 여학생을 일컫는 말.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나오면서 널리 쓰이게 된 단어다. http://www.youtube.com/watch?v=wnPNsoWMukQ

[7] 이희정 기자, “[JBC 리포트] 남녀간, 수학적 능력 차이 없다“, 미주 중앙일보, http://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59507 이 기사는 다음 논문 내용에 대한 것이다. Hyde, Janet S., et al. "Gender similarities characterize math performance." Science 321.5888 (2008): 494-495.

[8]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 “2015 수능 수학, 난이도에 상관없이 남녀 성적 차이 크게 나타나”.

http://info.jinhak.com/HOTIpsiInfo/IpsiInfoDetail.aspx?CategoryCode=04&ContentID=814821



   작가의 말

1. 이번 화를 준비하면서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저, 교양인 출판)이란 책을 읽었어요. 성차별이 말이나 행동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인식세계 그 자체부터 문제였어요. 제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 여성이 절반이나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2. 제가 제 20회 카이스트 문학상에서 당선을 했습니다. 사실 작품이 공개된 지도 한참이나 지났지만 여기선 말씀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 <2G>라는 작품입니다. 통신사 마지막 2G 가입자와 인턴 사원 사이의 이야기예요. 테크놀로지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http://times.kaist.ac.kr/news/articleView.html?idxno=3031 여기로 가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3. 사이언스온에 새 소설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상민님의 “해석기관”입니다. 읽어보니 재밌더라고요. 시즌1의 9화 삽화에서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는 최고의 소설이다. 사이언스온 내에서”라고 농담한 적이 있는데, 이젠 조심해야겠군요. 희귀성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서로 자극 받으면서 좋은 작품 썼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해석기관> 첫 이야기는 http://scienceon.hani.co.kr/252362 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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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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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4. 15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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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18

    김창대의 단편소설알파고 쇼크 또는 열풍이 한국사회에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니 여전히 많은 담론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사이언스온의 연재소설 작가이자 카이스트 전산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김창대 님이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의 연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