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우리의 욕망은 창조된다


00phd21_pic.jpg » 연간 기온 변화와 사람들의 ‘희망온도’. 흔히 겨울철 희망온도가 여름철 희망온도보다 높다. 희망온도를 뺀 나머지 데이터는 기상청 자료에서 가져왔다(http://www.kma.go.kr). 삽화제작/ 김창대




#21. 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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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은 뜨거워도 마음만은 상쾌한 여름 아침이다.[1] 땀방울이 피부세포 틈새를 비집고 나온다. 하지만 아직 사선으로 비추고 있는 태양 탓에 양이 많지는 않다. 속옷 선에서 처리됐다.


하지만 연구실 문을 여니 다른 세상이다. 화생방 훈련이라도 하듯 숨이 막힌다. 창문이 닫혀 있다. 10년 전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온실효과가 피부로 느껴진다. 이른 새벽부터 티끌만 한 햇볕이라도 모두 그러모아 둔 것 같다. 게다가 겨울철 난방기 역할을 톡톡히 하는 컴퓨터들이 여름에도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사람에 평균 3대쯤 놓여 있는 컴퓨터, 1분 1초라도 더 연구하려면 죄다 켜놓고 가야 한다. 아침에 와서 바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하니까. 또, 원격으로 접속해서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으니까. 자주 하진 않지만.


연구실에는 에어컨도 있고 선풍기도 있고 따로 중앙냉방도 나온다. 에어컨과 선풍기는 죄다 꺼져 있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이 꺼놓기로 했다. 에너지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그 대신 창문을 꼭 열어두자고 했는데 안 한 것이다. 중앙냉방이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한여름의 햇볕과 15대의 컴퓨터를 이겨 내기엔 역부족이다. 중앙정부 정책이 있으니 중앙냉방을 그리 세게 틀지도 못할 터다.


마지막으로 나간 사람이 실수로 에어컨을 안 껐어도 곱게 눈감아주고 고마워 할 판이다. 그런데 에어컨만 끄고 창문은 닫아놓고 가다니. 대체 누구야. 정말 오랜만에 일찍 나온 건데. 하.



열기를 식히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내가 비록 컴퓨터 과학자이긴 하지만, 학부 1학년 때는 대학물리도 배우지 않았는가. 사실 기억은 안 나지만, 느낌은 아니까.


일단 이 뜨거운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열기를 그대로 식히자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에어컨을 터보 모드로 켜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풍기도 창문 쪽으로 틀어놓았다. 에너지 낭비는 심하겠지만 참기엔 너무 뜨겁다. 사실 열을 발생시키는 컴퓨터를 끄는 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것을 끌 수는 없고, 내 것은 이제 써야 하니까.


일단 복도로 피신했다. 더 있다간 ‘더위가스’에 중독되어 쓰러질 것 같아서. 컴퓨터가 없는 복도는 중앙냉방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온도가 유지되고 있다. 복도를 살랑살랑 거닐며 페이스북이나 보다가 화장실도 다녀왔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다시 한 번 연구실로 진입을 시도한다. 킁킁, 가장 독한 ‘더위가스’는 빠진 것 같다. 이제 2차 진압작전을 펼 때다. 창문을 굳게 닫는다. 에어컨은 여전히 터보 모드다. 이번엔 선풍기가 방 전체를 휘감도록 회전시킨다. 무거운 찬 공기를 최대한 퍼뜨려 방 전체가 식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차, 에어컨 희망온도도 18도로 낮추었다. 터보 모드가 끝난 후에도 계속 강하게 돌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연구실에서 탈출했다. 이번엔 논문을 두 개 들었다. 배도 고프니 뭘 좀 먹으면서 논문이나 봐야겠다. 어딜 가든 에어컨은 빵빵하게 틀어져 있을 테니.



리 학과 건물과 가장 가까운 빵집으로 들어갔다.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 바람이 수직 하강해서 내 열기를 씻어준다. 관자놀이까지 젖어들어 간 머리카락이 수분을 뺏기며 몸을 떤다. 액체가 증발하면 주변의 온도가 낮아진다 했던가.


빵집 알바의 출근길은 어땠을까? 나처럼 피신할 곳도 없었을 텐데. 요즘 시대에 알바의 근무 환경을 위해 미리 에어컨을 켜주는 사장은 없을 테니까. 먼저 출근해서 에어컨을 켜놓으라고 하면 모를까. 아마 그 김에 청소까지 해놓으라고 일러뒀겠지. 그의 아침은 바디로션 없이도 촉촉했으리라.


샌드위치 하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페이스북을 켜보았지만 몇 분 전에 확인한 터라 새로 올라와 있는 건 별로 없다. 게임을 할까도 싶었다. 그러다 오늘부터 연구를 열심히 해보기로 한 게 생각났다. 그래서 일찍 나온 거니까, 논문부터 봐야겠다.


두 개의 논문을 가져왔다. 첫 번째 논문은 특정 서비스를 하는 컴퓨터들을 대상으로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전력 효율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컴퓨터들이 꼭 필요한 만큼의 성능만을 내도록 설정하는 방법을 제안했다.[2] 두 번째 논문은 스마트폰의 어느 부분이 전력을 더 많이 소비하는가를 밝혀냈다. 그리고 사용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전력 사용을 줄이는 기법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배터리 지속 시간을 늘렸다.[3] 사성기업과 하고 있는 과제와 연관된 논문들이다. 두 번째 논문과 비슷한 일을, 더 잘 해내야 하는 것이 이번 과제다.


생각해보니 웃겼다. 내가 전력 효율을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게. 연구실에 에어컨을 가장 세게 틀어놓은 채로, 선풍기도 가득 틀어놓은 채로, 있는 컴퓨터는 죄다 켜놓은 채로, 그러고도 이미 에어컨이 켜져 있는 빵집으로 피신해놓고는, 지금 무슨 연구를 한다고?


과제를 하면서, 정말 전력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내 모습을 돌이켜 보니 더 이상 그런 말은 못하겠다. 그냥 돈을 벌고 업적을 쌓으려는 것뿐이다. 하긴, 정확히 얘기하자면 전력 효율을 높이는 게 아니라 배터리가 오래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더 얇고 더 가벼운 스마트폰을 더 오래 사용하려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이쯤 되면 언행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관성은 있는 것 같다. 뭐, 괜찮네.



구실로 돌아왔다. 보영이가 이미 와 있다. 카디건을 입고 있다. 터보 모드에다 18도로 맞춰둔 덕분인지 어느덧 약간 쌀쌀해졌다.

김정원(박4): 하이.

전보영(석2): 오빠, 에어컨 틀어놓은 게 오빠였어요? 국현 오빤 줄 알았는데. 엄청 일찍 오셨네요.

김정원(박4): 이제 연구 좀 열심히 해볼라고. 근데 추우면 에어컨 온도 좀 올려놓지 그랬어.

전보영(석2): 아, 제 자리가 에어컨 옆이라 그래요. 국현 오빠는 자주 더워하는 거 같던데요.

김정원(박4): 국현인 아직 오지도 않았잖아. 이따 낮춰도 되는데.

전보영(석2): 전 괜찮아요. 카디건 입으면 돼요.

김정원(박4): 그래도 조금만 올릴게. 아까 최저온도로 해놨거든.

에어컨 희망온도를 20도로 올렸다. 너무 올리면 좀 더워질 수도 있으니까. 막 출근하는 애들은 땀도 좀 식혀야 하고.


이상하다. 겨울철엔 이보다 높은 온도로 난방을 했던 것 같다. 약간 덥다 싶을 만큼이 될 때까지 난방을 했던 것 같다. 잔뜩 입고 온 옷들은 굳이 모두 벗어두고서 말이다. 그런데 여름엔 카디건을 입어야 할 정도로 냉방을 한다. 약간 쌀쌀하다 싶을 만큼이 되어야 만족을 한다. 하늘이 내려주는 따뜻함을 기꺼이 거부한다. 여름에 좀 따뜻하게, 겨울에 좀 춥게 살면 안 되는 걸까?


냉방, 난방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것 같지 않다. 업무 효율을 위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자연을 거스르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 같다.



심시간 즈음 되니 다들 왔다.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들 점심시간이 시작하자마자 밥을 먹으러 와서 그런지 줄이 길었다. 문득 국현이의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김정원(박4): 야, 그거 스마트워치냐? 산다더니 진짜 샀네?[4]

김국현(박3): 결심한 건 사고 봐야죠. 어제 배송 왔어요.

전보영(석2): 그래서 오늘 늦게 오신 거군요?

김정원(박4): 아, 너 원래 일찍 와?

김국현(박3): 원래 10시쯤이면 오는데, 어제 이거 갖고 놀다가 늦게 자 가지구요.

맨날 늦게 오니 누가 언제 오는지 알 턱이 있나. 앞으로도 일찍 좀 와야겠다.

김정원(박4): 근데 그거 가지고 뭐하는데?

김국현(박3): 음, 시계 보죠.

김정원(박4): 오, 완전 스마트폰인데! 어차피 스마트폰도 100만 원짜리 시계잖아.

김국현(박3): 푸하하, 그러네요.

김정원(박4): 아니 근데 진짜 진지하게, 어따 쓰냐.

김국현(박3): 뭐, 길 안내 기능이 된다는데, 그건 아직 한국에서는 서비스가 잘 안 되고요, 음성명령 내리고 하면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건 많다는데, 솔직히 화면이 너무 작아요.

김정원(박4): 그럼 정말 시계인 거야?

김국현(박3): 아, 그건 있어요. 전화 오면 누구한테 왔는지 여기서도 뜨거든요. 그래서 광고전화를 다 걸러낼 수 있어요. 문자도 내용이 뜨고, 메일도 제목 정도는 쉽게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은근 괜찮은 것 같아요. 당장 답할 내용인지 나중에 봐도 되는 건지 그런 건 바로 판단할 수 있거든요. 스팸메일이면 여기서 바로 지워버릴 수도 있고요.

김정원(박4): 뭐, 그럼 나쁘진 않겠네. 배터리는 얼마나 가?

김국현(박3): 어제 밤에 와서 잘은 모르겠는데요, 밤에 잘 때 한 번씩 충전하면 충분하대요. 하루 종일은 너끈하나 봐요.

 

도 스마트워치를 갖고 싶었다. 싼 건 20여 만 원에서 비싸봐야 40만 원이니 무리하면 못 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걸렸던 게, 사서 어따 쓰나, 였다. 국현이는 그냥 갖고 싶으니까 사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난 양심상 그러지 못했다.


요약하면, 시계 기능과 전화, 문자, 메일에 대한 미리보기 기능 정도가 유용한 것 같다. 대충 짐작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횟수를 40 퍼센트쯤 줄여줄 것 같다. 이게 30만 원의 가치를 할까? 거기에 매일 밤 충전기에 꼽아야 하는 수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기숙사에 멀티탭을 하나쯤 늘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냥 갖고 싶다. 시계 기능밖에 없다고 해도 그냥 갖고 싶다. 액정화면이 달려 있고 연산기능이 있는 기기에 대한 공대생들의 일반적인 욕망이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있어도 추가로 태블릿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해낸 것이 우리 공대생들 아니던가. 국현이가 말했듯이[4] 사놓고 쓰다 보면 뭔가 유용한 걸 발견해 낼 것이다. 정말 살까…?


쉬이 결정은 못하겠다. 이게 정말 욕망 때문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지, 이 욕망을 충족시켜서 얻는 행복이 30만 원 값어치는 하지 않을까? 한 번 사두면 주욱 쓸 거 아냐. 어차피 이 작은 화면에서 뭔가 대단한 걸 할 수 있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러면 굳이 최신 기기로 바꾸지 않아도 한동안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폼 좀 나잖아. 더 있다가 사면 폼이 덜 날 것 같은데… 남들 없을 때 사야 폼이 나지. 30만 원, 질러버려?


아, 두근거린다. 그런데 용기는 안 난다. 곱게 밥이나 먹었다.


밥을 먹고는 다 같이 카페에 들렀다. 몇 년 새 댓 개는 생긴 것 같은 학교 내 카페 중 하나다. 얼음이 든 카페모카 한 잔을 손에 들고 연구실로 갔다. 한 모금 빨아보았다. 달달함이 혀를 찌르고 카페인이 뇌를 찌른다. 빨간 국을 먹어 매큼해진 혓바닥과 배불리 먹어 나른해진 뇌를 동시에 치유한다. 캬, 이거다.



후 두 시, 교수님과 미팅하기로 한 시간이다. 국현이, 길영이와 함께 교수님 방으로 갔다.

권대성(교수): 중간보고서가 일주일쯤 남았나?

김정원(박4): 다음 주 월요일까지니까, 6일 남았습니다.

권대성(교수): 주말도 있으니까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오늘, 내일, 모레 해서 끝내자고. 알았지?

김정원(박4):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좀 어렵지 않을까요?

권대성(교수): 이런 거에 너무 힘 쏟으면 안 돼. 연구를 우선시 해야지. 어쨌든 내일 밤까지 초안 작성해서 나한테 보내. 그럼 내가 금요일에 좀 보고, 월요일에 자잘한 거 채워 넣고, 그러고 끝내자구.

일을 늘 급박하게 처리하는 교수님과 벌써 6년째 일하지만, 늘 당황스럽다. 아직 ‘중간보고서-초안.hwp’도 안 만들었는데 내일까지라니. 그렇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는가. 미리 대비해서 준비하지 못한 게 잘못이지.

전길영(석2): 그럼 분량은 얼마나 하면 될까요?

권대성(교수): 그래도 분량은 좀 채워줘야 돼. 25페이지? 30페이지? 뭐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평소 교수님의 언행을 미루어보아, 이건 이틀 만에 30페이지를 뽑아내란 말이다.

권대성(교수): 그, 사성기업에서 받아온 핸드폰 상태는 어때?

김정원(박4): 그게, 열심히 해서 구동은 되는 상태인데, 아직 실험까지는 못 해봤습니다.

“열심히 해서”에 힘을 주었다. 구동시키는 데만도 엄청 힘들었단 말이다. 교수님도 옛날엔 구현하고 실험하는 것 깨나 해보셨을 테니 이해해주시겠지?

권대성(교수): 그래? 그건 원래 기업 쪽에서 좀 해줘야 되는 건데 기술유출 문제 때문에 못 해준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그건 그 상태대로 쓰면 되고, 일단 첫 부분엔 정원이 니가 연구 동기랑 그런 거 채워 넣어. 제안서 니가 썼으니까 그거 참고해서 분량 좀 채워 봐. 그 다음엔 길영이가 학회 논문 냈던 거 있지? 그 내용으로 채워. 그 다음엔 국현이가 다른 스마트폰에서 실험했던 거 있잖아, 그걸 넣자. 다 넣진 말고 지난 번에 논문 내려다 못 냈을 때 있지? 그 결과까지만 넣어. 나머지는 결과보고서에서 써먹어야 하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정원이 니가 그 받아 온 장비에서 했던 거 간략하게 써넣고. 그럼 뭐, 30쪽은 금방이겠네.

역시, 25쪽은 립서비스였고 30쪽을 원하신 것이다.

김국현(박3): 이거 원래 사성기업 핸드폰 기반으로 해야 하는 프로젝트 아닌가요?

권대성(교수): 자기네들이 해줘야 할 걸 못 해줘서 그런 건데 어떡해. 그리고 프로젝트가 기존의 스마트폰 앱들 분석하는 것이 절반이니까, 전반기에는 기존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이런저런 분석을 했다고 하면 돼.

참 대단하다. 솔직히 그동안 별로 한 일이 없어 걱정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미 대비책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도 꽤 그럴 듯하게.

권대성(교수): 아, 그리고 정원이는, 앞부분 쓸 때 사용자 니즈(needs), 뭐 그런 단어 좀 넣어줘. 그래야 회사에서 좋아해.

김정원(박4): 네.

권대성(교수): 그럼 내일 밤까지, 정원이가 취합해서 나한테 보내. 할 수 있지?

김정원(박4): 해보겠습니다.

권대성(교수): 오늘, 내일 빠싹 해서 끝내버리라고, 너무 힘 쏟지 마.

이틀 만에 끝내라면서 힘을 쏟지 말라니. 지쳐 나가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어쨌든 교수님 방을 나왔다.

전길영(석2): 형한테는 언제까지 드리면 돼요?

김정원(박4): 내일 저녁까지만 주면 될 거 같아. 가능해?

전길영(석2): 저야 써둔 논문 가지고 말만 늘리면 되잖아요.

김정원(박4): 국현이 너도 괜찮지?

김국현(박3): 네, 최대한 빨리 해서 드릴게요.

사실,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냐. 교수님이 하라시는데.



른 사람들이 이미 있는 자료를 정리하면 되는 것인 반면, 내가 써야 할 부분은 창작을 해야 한다. 제안서에 써둔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때 목표와는 약간 다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좀 고쳐야 할 것 같다.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나….[5] 사실 보고서란 게 문장의 유려함보다는 두께가 더 중요하긴 하지만.

“스마트폰의 활용도가 다양해지면서 긴 배터리 지속 시간에 대한 사용자 니즈가 급격히 커지고 있다.”

대충 이 정도면 괜찮은 문장 아닐까? 연구 동기의 핵심은 잘 담아낸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까?


그러다 문득, 니즈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영어로는 ‘needs’, 직역하면 ‘필요’라는 뜻이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 않다. 한국어로 직역할 쉬운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영어 단어로 표기하는 것부터가 의뭉스럽다. ‘욕망’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우리는 정말 긴 배터리 지속 시간이 필요한가? 그냥 스마트폰을 덜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필요한가? 우리는 연구실에 앉자마자 메일을 확인하는 대신 출근길 버스에서 메일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가? 장문의 문자를 보내는 대신 다른 메신저를 써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제길,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다.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누가 내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방금 나온 최신 노래를 들을 필요도 있다. 화장실에 앉아 3분간 즐길 게임마저 필요하다.


분명히 만들어진 필요다. 몇 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 없이 잘 살았는데, 지금은 못 살겠으니까. 스티브 잡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일까?[6] 아니면 그들이 우리가 모르고 살던 욕망까지 밝혀내어 자신들의 지갑을 채우는 것일까?


아까 마셨던 카페모카도 생각났다. 언제부턴가 밥을 먹고 나면 꼭 커피 컵 하나를 손에 들려야만 할 것 같다. 매큼하면 물 마시면 되고, 졸리면 잠깐 자면 해결될 것 같은. 국현이의 스마트워치도 생각났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몇 초를 줄이는 데나 유용한, 그 몇 초 절약해서 웃긴 동영상이나 하나 더 볼 것 같은. 아침에 틀었던 에어컨 터보 모드도 떠올랐다. 컴퓨터만 끄고 다녔으면 필요하지 않았을 것 같은.


우리의 욕망은 창조된다. 그리고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의 돈만 소멸할 뿐이다.


‘중간보고서-초안.hwp’을 만들었다. 첫 문장을 적었다.

“스마트폰의 활용도가 다양해지면서 긴 배터리 지속 시간에 대한 사용자 니즈가 급격히 커지고 있다.”

왜냐면 나도 돈을 벌어야 하거든. 나도 먹고 살아야 하거든. 내 돈도 소멸하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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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화의 시간적 배경은 7월입니다.

[2] David Lo, Liqun Cheng, Rama Govindaraju, Luiz André Barroso, and Christos Kozyrakis. 2014. Towards energy proportionality for large-scale latency-critical workloads. In Proceeding of the 41st annual international symposium on Computer architecuture (ISCA '14).

[3] Alex Shye, Benjamin Scholbrock, and Gokhan Memik. 2009. Into the wild: studying real user activity patterns to guide power optimizations for mobile architectures. In Proceedings of the 42nd Annual IEEE/ACM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 (MICRO 42).

[4]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9. 비트. http://scienceon.hani.co.kr/221586

[5] 강원국은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 출판)에서 “말과 글의 성패는 첫마디, 첫 문장에서 판가름 난다”라고 단언했다. 참고로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의 첫 문장은 “자퇴원을 다운로드 받았다”이다.

[6] 스티브 잡스가 1998년 비즈니스위크와 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A lot of times, people don't know what they want until you show it to them.”라고 말했다. http://www.businessweek.com/1998/21/b3579165.htm



  ■ 작가의 말

아, 쓰다 보니 카페모카 마시고 싶고 스마트워치 너무 갖고 싶어요. 엉엉. 자판기 커피 뽑아 마시면서 스마트워치 사용 후기라도 읽을래요. 엉엉.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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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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