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연구소의 연구 전통과 문화에서 얻은 배움
김연주의 “일본에서 배우는, 과학자로 살기”
[3] 2년 간의 일본 포닥 생활을 마치며
» 가장 최근에 있었던 연구자 와타나베의 송별회 자리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매번 새로운 사람이 오거나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함께 모여 식사합니다. 특히 이동이 많은 3-4월, 7-8월은 환영회와 송별회가 한달에 한번쯤 있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여름, 저의 첫 번째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 생활이 일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수많은 환영회와 송별회를 경험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송별회의 주인공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일이 막상 제게 닥치니 얼떨떨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말 그대로 ‘시원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일하는 일본 오사카대학교는 올해부터 외국인 연구자, 특히 여성 연구원의 비율을 좀 더 늘리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는데요, 외국인을 대학 연구실에 많이 받아들여서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영어로 의사소통할 기회를 더 많이 주고, 그럼으로써 세계화를 꾀하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경우에는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요, (개인적인 경우일 수도 있지만) 일본 학생들의 소극적인 대화 태도와 대부분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며 사회 활동 시간은 적어지고 이로 인해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연구실에 외국인이 많은 경우를 제외하고), 영어보다는 일본어에 매달리는 경우도 늘어납니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점점 커지는 게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만일 일본에서 일자리를 잡고 생활할 계획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일본어보다 영어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 얼마 전에 알고 지내던 태국에서 온 연구원이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해서 모처럼 모여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대학에서 제공하는 일본어 수업 시간에 만난 사람들인데요, 오사카대학교에서는 외국인의 비율을 늘리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2년 간의 포닥 생활…‘유기적인 연구조직’
2년 전, 박사과정을 마치자마자 시작된 일본 생활은, 미처 학생티를 벗지 못한 미숙함과 초반에 일본 연구자들과 비교되면서 생긴 자신감 상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난 뒤의 정체 모를 무력감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수많은 실수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사고방식 차이 때문에 의견충돌을 겪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하니 모두 제 인생에 소중한 경험이었고 앞으로 연구하며 사는 데 여러모로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일본의 실험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 다른 연구소에 있을 때엔, 혼자서 자기 실험을 하기에 바빠 다른 사람의 일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다른 연구주제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다달이 또는 분기마다 열리는 ‘연구 보고’ 자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연구실은 다른 사람이 무슨 유전자에 대해 공부하고 있고 어떤 표현형에 주로 관심이 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매우 규칙적으로 그리고 강도 높게 진행되는 세미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저도 한동안은, 아니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 사항을 보고해야 하는 세미나 자리는 부담스럽니다. 일주일을 꼬박 연구실에 시간을 할애해도 매번 새로운 결과를 발표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매번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었고, 너무 잘 진행되는 다른 학생들의 실험 결과를 보면서 은근한 압박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시간을 통해서 진행 중인 실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사람의 시행착오와 실험방법, 결과 등을 보면서 자칫하면 느슨해 질 수도 있었던 나의 시간에 자극제가 되었으며, 또한 논문 소개 등을 통해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지난번에 연구소에서 열렸던 컨퍼런스 자리입니다. 실험실 내의 세미나 외에도 연구소 전체 단위로도 실험 결과를 발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를 자주 함께 가집니다. 물론 대부분이 일본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외국인이 따라가기엔 어려운 점도 좀 있습니다.
분야별 전문가 체계의 장단점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실험실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체 구성인원의 분포에 있습니다. 제가 현재 있는 연구실에는 교수님을 제외하고 다섯 명의 연구교수(한국에선 ‘조교수’)가 계십니다. 물론 그들의 고용조건은 동일하진 않은데요, 그들 중에서는 영년직 테뉴어(tenure)를 지닌 사람, 완전한 테뉴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약직도 아닌 사람, 그리고 10년 계약, 5년 계약 등 이렇게 다양한 조건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약직이라 해도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약연장이 어렵지는 않아 매우 안정적인 자리라고 여겨집니다.
그 다섯 명 연구교수들의 관심 분야와 전문 분야는 조금씩 다 다른데요, 예를 들면 한 분은 단백질 등 분자생물학적 지식과 실험 경험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고, 다른 분은 다양한 전자현미경의 이용 경험이 풍부합니다. 또 다른 분은 유전자 변형 마우스 제작만 수십 년 해왔고, 다른 분은 마우스 아닌 다른 동물을 이용한 실험을 담당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자 탁월한 분야를 갖추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에 해당하는 연구교수를 ‘사수’로 삼아 실험을 배우고 함께 논문 연구작업을 진행합니다. 또한 과학저널에 투고할 논문 원고를 준비할 때에 각자 뛰어난 부분의 실험을 진행해서 함께 투고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런 사전지식이 없이 이곳에 들어온 저는…, 한동안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질문해서 원하는 답을 얻지도 못하고, 바로 가면 될 길을 돌고 돌아서 헤맨 경우도 좀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마치 일본인의 텃새로 느껴져서 마음 고생도 좀 했습니다. 물론 의사소통에 문제도 있었겠지만요.
물론 이러한 조직 운영이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실험을 진행하면서 당장 필요한 결과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시도를 해볼라 치면 이미 그 실험에 능통한 사람이 있는데 왜 물어서 해결하지 않고, 그런 시도를 통해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식의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학생이 교과서에 있을 법한 실험을 낑낑거리며 진행해 얻은 결과의 발표 내용을 보고, 연구를 취미로 하느냐며 나무라는 연구교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이고 빠르게 결과를 얻길 원하는 교수님들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어느 정도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지도를 받던 학생과 지도하던 연구교수의 관계가 틀어져 더 이상의 깊은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논문을 마무리하게 된 학생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상하관계가 뚜렷하다 보니 생기는 일들이지만 결코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일본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어떤 교수님께서 ‘일본은 기본적으로 창의력은 뛰어나지만(아이디어는 많으나) 해결 능력이 없는 전문가를 양성하기보다는 조직 안에서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잠시나마 제가 겪고 느낀 일본의 실험실의 모습은 그때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의사소통 어려움, 안정적 연구환경 부러움
일본에서 연구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꼽으라면, 뭐니뭐니해도 의사소통의 문제입니다. 생활하면서 필요한 대화들은 차츰차츰 알아간다고 해도 실험을 진행하며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충분한 대화가 필요한데 영어를 전혀 구사할 수 없는 연구원과 함께 일해야 할 경우도 생기다 보니 별거 아닌 일로도 불만이 쌓이고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오사카대학의 전체 연구시설을 보면 외국인이 교수로 실험실을 운영하는 경우도 여럿 있습니다. 이런 실험실의 경우를 들어보니 일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박사후 연수과정이라는 모호한 포지션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연구소에 와서 일하는 경우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도 있지만 제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약기간을 제대로 마칠 수 있었던 건, 기본적으로 열심히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여러 일본인이 있었고, 무엇보다 실험 기술의 측면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다양한 실험 테크닉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시설과 과학·기술 연구자한테 비교적 안정적이고 후한 대우를 해주는 일본의 환경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일본 연구실에 완전히 적응해 그 계급구조 안으로 흡수되지는 못했지만, 실험 기술 면이나 조직 생활 면에서 다음 걸음을 내디딜 만큼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음달 영국의 새로운 실험실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도 없고, 2년이나 일본의 전문 연구시설에서 실험 경력을 쌓았으니 더 이상 어수룩하게 굴 수도 없어 사뭇 긴장되는데요, 새로운 환경에서 또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것을 느껴 다음 연재 글에 담게 될지 기대됩니다. 독자 님들도 기대해주세요.◑
김연주 일본 오사카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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