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인간, 경쟁과 공존의 경계에서 만나다
인간유전체 속에 숨어 있는 바이러스의 비밀
생명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인간은 바이러스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공격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단순한 질병학을 넘어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경쟁’에 대해 풀어볼까 합니다.
[박테리아 감염 과정에 나타나는 바이러스의 자세 또는 구조 변화를 보여주는 동영상]
관련 기사: ‘바이러스의 세포 감염 공격’ 포착 영상화 ]
이번 글의 주제 논문
Felix MA, Ashe A, Piffaretti J, Wu G, Nuez I, B?licard T, Jiang Y, Zhao G, Franz CJ, Goldstein LD, Sanroman M, Miska EA, Wang D. Natural and experimental infection of Caenorhabditis nematodes by novel viruses related to nodaviruses. PLoS Biol. 2011 Jan 25;9(1):e1000586. doi: 10.1371/journal.pbio.1000586.
바야흐로 바이러스가 지구촌 뉴스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에볼라 출혈열' 때문입니다. 8월2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에볼라 바이러스 진원지를 격리 구역으로 설정하고 전염병 확산에 힘을 모아 대처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닙니다. 20세기에 보고된 것만도 몇 번의 ‘돌발적인 대발생’(outbreak)이 있었는데, 에볼라 바이러스의 경우에는 높은 치사율 때문에 풍토병 수준에 머물렀던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긴 잠복기와 강한 전염성이 동반된다면, 지구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재앙의 출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2003년에 퍼졌던 사스-코로나 바이러스 등의 경우를 생각하면 인간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 체계는 미진한 부분이 상당합니다.
바이러스의 뿌리를 찾아서
바이러스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단순한 정의를 내리자면, 다른 개체의 세포 안에서만 복제 가능한 작은 감염성의 물질입니다. 자신만의 유전 물질을 가지고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를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체의 중요한 특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대사 체계가 없어서 숙주의 단백질을 도용하여 필요한 부품을 생산해야 합니다. 생명의 기본 단위라고 받아들여지는 ‘세포’와 같은 구조가 아니고, 숙주 밖에서는 생명 활동이 없는 그저 핵산과 단백질 덩어리로 보이기 때문에, 흔히 ‘생명계의 맨 가장자리에 있는 개체’로 불리기도 합니다. 진핵생물, 원핵생물, 고세균을 아우르는 모든 생명체가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림1.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의 구조 : 인간에게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구조입니다. 알엔에이로 된 유전물질이 중심에 있고 단백질 껍데기인 캡시드(capsid)와 지질 막(lipid membrane)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구조는 워낙 다양해서 공통된 특징을 꼽기가 힘듭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 그림2. C형 간염 바이러스(Hepatitis C Virus, HCV)의 복제 주기 :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내로 들어가 자신의 유전체와 단백질 껍데기의 복사본을 만드는데 주력합니다. 각 부속품을 조립하여 바이러스 복사본이 많이 생산되면 숙주 세포를 떠납니다. 이 때 숙주 세포가 손상된다면 질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생명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인간은 바이러스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공격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단순한 질병학을 넘어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에 벌어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경쟁’에 대해 풀어볼까 합니다.
바이러스는 여전히 물음표를 많이 지닌 존재인데, 무엇보다 큰 물음은 ‘바이러스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증거의 부족으로 바이러스 기원에 대한 지식은 거의 추측과 짐작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는 여태까지 한 번도 화석의 형태로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화석화한 생물과 공존하는 바이러스 핵산조차도 발견된 적 없습니다. 아마도 바이러스의 크기가 너무 작고 화석이 되기에는 약한 탓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부족한 증거에도 굴복하지 않고, 최대한 그럴듯한 설득력을 갖춘 이론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가설은 ‘퇴행 진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바이러스는 자유롭게 살던, 다소 복잡한 기생 생물에서 기원했습니다. 고대의 바이러스는 숙주세포 내의 복제 기구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고, 미토콘드리아처럼 자신만의 유전물질을 가지면서 세포 내에서 자가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숙주세포 내에서만 복제할 수 있게 퇴행한 것입니다.
두 번째 가설은 ‘세포 탈출’ 이론입니다. 즉 바이러스는 처음부터 독립된 생물이 아니었고, 세포에서 떨어져 나온 부산물이라는 주장입니다. 세포의 디엔에이 또는 RNA가 자가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바이러스의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비리온(virion)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를 ‘탈출’한 것입니다.
마지막 가설은 ‘독립적 또는 평행적 진화’ 이론인데, 위의 두 가설과는 반대로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와는 별개로 바이러스가 생겨났다는 이론들의 통칭입니다. 각 가설의 장단점을 자세히 논하진 않겠지만, 한 가지 사실만 주지하면 바이러스의 놀라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은 대부분의 세포가 바이러스를 세포 바깥으로 방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세포가 손상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어쨌거나 세포 생명체 사이에 진화적으로 널리 보존된 현상임은 자명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포가 바이러스를 방출하는 능력(또는 바이러스가 세포 밖으로 탈출하는 능력)이 자연선택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해 살아남은 현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바이러스의 증폭과 확산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세포가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그런 세포들로 구성된 생명체도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숙주 역할은 세포라면 공유하고 있는 당연한 특성 같아 보입니다.
유구한 역사 속의 진화 동반자
세포-바이러스 연합이 지닌 ‘이점’이란 무엇일까요? 또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이리도 널리 퍼졌을까요?
첫 번째 이점은 수평적 또는 수직적으로 유전자 일부를 널리 퍼뜨리고, 새로운 숙주의 유전체 내부로 침투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즉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자뿐 아니라 숙주의 유전자도 함께 퍼뜨리면서 충실한 ‘심복’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숙주 입장에서는 적당한 복제공장만 잠시 빌려주면, 일부나마 자신의 유전자를 다른 세포에 퍼뜨릴 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두 번째로 고려할 것은 바이러스가 진화 과정의 ‘촉진자’로서 활약할 가능성입니다. 기본적인 진화의 흐름은 유전적 변이가 생기고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발생함에 따라 진행된다는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진화 이론에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하는 의견 중 핵심은, 유전적 변이를 만들어내는 돌연변이라는 현상 자체가 매우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 모델만 따르자면 진화가 너무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빠르고 큰 진화적 도약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바이러스 유전자가 숙주 유전체 내에서 이동하는 도중에 숙주 유전자에 큰 변화(유전자 결손, 역위, 재조합 등)를 만들어 ‘유전체 불안정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개체 하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유전적 불안정성은 ‘재앙’이 될 공산이 큽니다. 그러나 진화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전적 변이 또는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이러스의 힘은 진화를 채찍질하는 무법자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세 번째 이점은 자연적인 생물학 무기 기능입니다. 즉 포식자나 경쟁하는 종에 대한 공격 병기로써 바이러스가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바이러스가 침투 가능한 종의 경계를 손쉽게 허문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곤충이나 거미 같은 절지동물이 포유류를 감염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의 근원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인류에게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대부분도 동물성 감염으로 종간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잘 알려진 에볼라, 말버그, 사스-코로나, HIV 등도 모두 동물에서 전달된 바이러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바이러스를 지녔던 최초의 근원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세포가 바이러스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바이러스 무기를 휘둘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바이러스의 파괴력이 특정 종간의 경쟁 관계를 휘저어 버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자연 속에서 돌아다니며 진화에 끼쳤을 큰 영향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바이러스를 질병을 일으키는 무언가로 보는 관점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낡은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포가 바이러스를 방출하는 능력이 있고, 이 능력이 진화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바이러스가 생명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소개한 바이러스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이론들은 여전히 ‘가설’에 불과합니다. 바이러스의 중요성과 비교하면 바이러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양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여러 가지 변명이 가능하겠으나, 바이러스가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숙주 내에서 복제하는 전략, 유전체의 복잡도, 생태 내에서 숙주와의 관계, 유전자의 순환 방식 등이 바이러스마다 너무나 다릅니다. 아직 바이러스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기원했는지 아니면 여러 개의 혈통을 가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RNA 간섭’의 재발견: 광범위한 RNA 조절 능력
바이러스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대규모 비교 유전체학이 힘을 내 준다면 앞으로 조금씩 바이러스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릴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생명의 신비 이전에 현생 인류가 바이러스의 공격에 쓰러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학자들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쁜꼬마선충이 던져준 '방어법에 대한 힌트'를 소개하겠습니다. 답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수차례 소개되었던 ‘아르엔에이 간섭(RNA interference)’입니다.
» 그림 3. RNA 간섭(RNA interference, RNAi)의 원리 : 이중가닥 RNS(dsRNA)가 세포 내에 존재하면 다이서(Dicer)가 짧은 꼬마 RNA로 자릅니다. 꼬마 RNA는 승무원 단백질을 포함하는 복합체에 실려 자신의 서열과 상보적인 목표 RNA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목표 RNA를 분해 또는 억제하여 발현을 방해하고, 추가적인 꼬마 RNA 생산을 촉진합니다. 출처/ Andre Fire Nobel Lecture, “Gene Silencing by Double Stranded RNA”, 2007RNA는 DNA와 원자 하나 차이가 나는, 아주 유사한 분자입니다. RNA는 DNA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유전 정보가 단백질로 변환되는 과정을 매개합니다(유전 정보의 전달 순서: DNA ⇒ RNA ⇒ 단백질). 즉, 유전 정보가 암호에 머물러있지 않고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려면 반드시 RNA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RNA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면 유전자를 억제할 수 있게 됩니다. RNA를 억제하여 유전자를 억제하는 효과를 얻는 과정을 "RNA 간섭"이라고 합니다. RNA 간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꼬마 RNA는 어떤 RNA를 목표로 하여 억제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RNA 간섭 연구로 2006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앤드류 파이어(Andrew Fire)와 크레이그 멜로(Craig Mello)는 이 연구를 처음 발표했을 때만 해도 바이러스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식물에서도 유사한 RNA 간섭 현상이 존재하고 바이러스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외부 유전자가 주입되었을 때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방어 기능에도 주목하게 됩니다. 다만 처음 발견 당시에는 RNA 간섭이라는 현상의 작동 방식에 큰 관심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간섭에 중요한 역할자들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지속적인 연구로 예쁜꼬마선충의 RNA 간섭 과정에 필요한 기구들은 잘 알려졌습니다. 그중에는 큰 RNA를 작게 자르는 '가위 효소'인 다이서(Dicer)와 아주 작은 조각이면서도 확실한 기능을 하는 ‘꼬마 RNA’(small RNA), 꼬마 RNA의 복사본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RNA 합성효소(RNA-dependent RNA polymerase, RdRP), 꼬마 RNA를 지정된 목표 대상으로 데려가 분해하는 데 기여하는 '승무원 단백질'인 알고너트(Argonaute)들이 포함됩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예쁜꼬마선충이 비교적 작고 단순한 생명체인데도 RNA 간섭에 관여하는 기구들이 상당히 발달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포유류보다 꼬마 RNA의 증폭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승무원 단백질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추측건대 다양하고 중요한 생리학적 활동에 RNA 간섭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 유전체에서 마음대로 날뛰는 ‘뛰는 유전자’를 억제하는 기능(참조 : 이전 글 “‘뛰는 유전자’ 쫓는 꼬마RNA”)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
RNA 간섭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체계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서야 확립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쁜꼬마선충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자연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이러스를 막아낼 것 같은 무기는 가지고 있는데 정작 쳐들어오는 바이러스가 없으니 이게 정말 무기가 맞는지 연구자들도 갑갑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궁하니 통하였는지 억지로(!) 길을 만들어 낸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딩(Shou-wei Ding) 그룹과 아칸소 대학의 마차카(Khaled Machaca) 그룹은 급기야 널리 연구되고 있던 포유류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예쁜꼬마선충에 감염시키기에 이릅니다.
딩 그룹에서는 '집떼 바이러스(Flock House Virus, FHV)'의 유전자를 미세주입법(microinjection)을 이용해 예쁜꼬마선충의 생식선에 주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세포 내에 가지고 있는 개체들을 골라내어 연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세포 내로 직접 바이러스 유전자를 이식해준 것입니다. 바이러스 입자 자체가 온전한 형태로 세포에 침입한 것이 아니므로 ‘감염’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진은 예쁜꼬마선충의 세포 내에서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RNA로 잘 전사되며 복제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바이러스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예쁜꼬마선충으로부터 추출한 RNA가 초파리 세포를 감염시키고 내부에서 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추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코 온전한 형태의 바이러스가 옮겨간 것이 아니니 바이러스의 감염 상황을 정확히 재현한다고 보기에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마차카 그룹에서는 조금 더 그럴듯한 방법을 사용하여 수포성 구내염 바이러스(Vesicular Stomatitis Virus, VSV)를 예쁜꼬마선충에 감염시킵니다. 우선 초기 단계의 예쁜꼬마선충 알을 꺼내어 알껍데기을 살짝 분해할 수 있는 효소들로 처리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개별적인 세포의 형태로 배양 가능한 1차 세포(primary cell)를 만듭니다. 여기에 직접 배양한 바이러스를 정제하여 뿌려주고 실제 감염이 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다행히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가 얻어져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예쁜꼬마선충 개체에 수포성 구내염 바이러스를 뿌려주어 봤자 감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자연스러운 실험 방법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세포 내에서 바이러스의 활동을 연구할 수는 있었지만, 세포 간 바이러스의 수평적 이동은 관찰할 수 없고 바이러스 복제 주기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므로 한계가 분명한 실험 모델입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성취도 상당한 것이어서 두 그룹이 연구한 RNA 간섭을 이용한 면역에 관한 내용은 2005년 <네이처>에 백투백으로 실렸습니다. RNA 간섭 기구들에 대한 지식은 이미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기구들 중 어느 부분이 바이러스 면역에 관여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비교적 순탄한 작업이었겠지만, 예쁜꼬마선충의 유전학적 강력함을 바이러스 연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연구자가 열광했습니다.
유전학과 바이러스의 만남
그러던 중 진실로 예쁜꼬마선충을 감염시키는 자연적인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으니 학계에 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글의 주제 논문의 주인공인 프랑스 마리-앤 펠릭스(Marie-Anne Felix) 연구팀이 이런 발견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예쁜꼬마선충의 생태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여성 연구자인 그는 프랑스 각지에서 가져온 썩은 과일들에서 야생의 선충을 찾고 관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세포가 비정상적인 형태 이상을 보이는 일군의 예쁜꼬마선충을 찾아냈고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별다른 감염원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개체들에서는 장세포 내 에너지원을 저장하는 작은 입자 모양의 소기관인 ‘저장과립’(storage granule)이 사라져 있었으며 세포질이 점성을 잃고 액체처럼 흐물거리는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또 세포핵이 길어지거나 퇴화해있기도 하고 세포끼리 융합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그림 4. 오르세 바이러스에 감염된 예쁜꼬마선충의 장세포 : 그림 상단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비정상적인 형태를 보이는 장세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림 하단에는 전자 현미경으로 장세포 단면을 관찰할 때 보이는 미세한 바이러스 입자가 있습니다. 출처/: Felix M-A et al., 2011
눈에 띄게 이상한 표현형이 보인다고 해서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앤 펠릭스는 바이러스가 장세포 이상을 유발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검증 실험에 돌입합니다.
우선 성체 안에서 알만을 깨끗하게 걸러내어 부화시키면 장세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개체들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장세포 이상 표현형이 세대를 거쳐 수직으로 전달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즉, 유전자에 생긴 돌연변이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음 실험에서는, 장세포 이상을 보이며 죽은 개체를 건강한 개체의 곁에 두었더니, 대략 1주일 뒤부터 건강한 개체도 비슷한 이상 증상의 표현형을 보인 것으로 관찰됐습니다. 또는 감염된 개체를 많이 모아서 곱게 간 뒤에 미세한 필터로 거른 추출물을 건강한 개체에 뿌려주어도 1주일 뒤에 이상 징후를 보였습니다. 무언가 감염성 물질이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최종으로, 전자현미경 사진을 통해 지름이 20나노미터 정도 되는 바이러스 같은 입자를 마침내 확인했습니다! 마리-앤 펠릭스는 이 바이러스에 처음 발견된 곳의 지명을 따서 ‘오르세 바이러스(Orsay Virus)’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오르세 바이러스는 장세포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것에 비해 수명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낳을 수 있는 자손의 수도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자손을 만들어 내는 속도가 상당히 줄어든 것이 눈에 띄는 점이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자손에게 수직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바이러스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체에 끼어들어 있지는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오르세 바이러스의 확산에는 수평적 이동이 중요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수평적 이동으로만 실험실에서 50세대 이상 바이러스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전파능력이 꽤 좋은 편이며, 감염된 개체의 배설물을 다른 개체가 섭취함으로써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펠릭스가 가장 하고 싶었던 실험은 실제로 RNA 간섭이 바이러스 방어에 관여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두 실험이 바이러스 감염 상황을 인공으로 재현한 것과는 달리, 오르세 바이러스는 스스로 충분히 예쁜꼬마선충을 감염시킵니다. 펠릭스의 새로운 연구에서는 예상과 일치하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조건에서 RNA 간섭이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바이러스’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RNA 간섭이 망가진 예쁜꼬마선충 돌연변이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예쁜꼬마선충 내에 훨씬 많은 바이러스 RNA가 축적되고, 예쁜꼬마선충은 더 심각한 이상 징후를 보였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예쁜꼬마선충 간에는 RNA 간섭 능력 차이가 존재하고, 이 차이가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 능력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개체마다 바이러스에 대한 ‘민감성’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이러스 대처 반응을 조절하는 유전자에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민감성의 차이를 결정하는 유전자 영역을 규명할 수 있다면 선천적으로 내재된 항-바이러스 기작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나간다면 꼬마 RNA로 인한 RNA 간섭 현상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 그리고 숙주와 바이러스의 공진화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르세 바이러스가 처음 발표된 것이 2011년이니, 지금쯤 어떤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더 쌓였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바이러스가 알려준 바이러스 대처법
처음으로 돌아가 에볼라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보면, 예쁜꼬마선충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찾은 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냐는 핀잔을 들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사명입니다. 위험한 바이러스를 연구할 수 있는 전문 시설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독촉만으로 치료제를 생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또 지금 전염되고 있는 바이러스에 완벽히 대처하는 약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언제 다른 조합의 유전자를 갖추고 방어선을 허물 수 있는 바이러스가 등장할지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진도는 느릴지라도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한 가지 희망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오르세 바이러스의 발견이 그리 사소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RNA 간섭이 희망이 되어 줄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미 우리의 세포가 RNA 간섭을 이용해 유전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분자 면역’ 체계는 내재적인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세포 내, 외부에서 유래하는 불길한 유전 물질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불길하다고 판단하는 유전 물질은 유전체 내에서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뛰는 유전자’(transposon), 뛰는 유전자와 비슷하지만 RNA 중간체를 사용하는 ‘거꾸로뛰는유전자’(retrotransposon) 등 기생 유전자들입니다. 유전체 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무법자가 활개를 칠 경우, 유전자가 망가져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 바이러스는 자신의 증식과 전파를 위해 숙주 세포를 파괴할 수도 있으므로 피해가 더욱 직접적이고 단시간에 촉발됩니다.
그렇다면 외부의 바이러스를 상대하기 위한 꼬마 RNA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온 바이러스 유전자를 주형으로 사용하여 꼬마 RNA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유전체에 포함된 정보들로 꼬마 RNA를 직접 생산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방법의 장점은 외부 유전 물질이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특정한 조건(이중 가닥 RNA 구조를 가질 것)을 만족하기만 하면, 꼬마 RNA를 만들고 RNA 간섭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점은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유전 물질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바이러스에서 숙주의 RNA 간섭 체계를 억제할 수 있는 단백질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집떼 바이러스도 B2 단백질로 불리는 RNA 간섭 억제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 무기(바이러스)-방어 무기(RNA 간섭)-방어 억제 무기(B2 단백질)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두 번째 방법으로 우리의 유전체에서 직접 꼬마 RNA를 생산하게 되면 방어 억제 무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B2 단백질은 바이러스 유전자를 인지하는 단계를 억제하기 때문에 인지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꼬마 RNA를 생산할 경우에는 무력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점은 꼬마 RNA를 생산할 설계도가 이미 유전체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유전체가 생산할 수 있는 꼬마 RNA의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으며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적과의 동침? 경쟁과 공존의 미묘한 경계에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꼬마 RNA의 설계도는 언제부터 또는 어떻게 지니게 되었을까요? 진화의 신비라고 해야 할지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그 설계도는 대부분 바이러스 그 자체입니다! 인간 유전체 서열 분석이 끝났을 때 드러난 특징 중 하나는 45%의 서열이 ‘뛰는 유전자’와 유사한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8% 정도는 감염성 레트로바이러스와 유사한 서열이었습니다.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뛰는 유전자의 기원이 바이러스이거나 뛰는 유전자와 바이러스의 조상이 같다는 것이 주류 가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유전자의 절반 정도가 바이러스와 유사한 것입니다. 예쁜꼬마선충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 현상이 발견됩니다.
어떤 경로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단정하긴 어렵지만, 바이러스는 우리 유전체 속에서 편안하게 공존하며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이 이상한 동거 또는 공생이 가능하려면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익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로 바이러스가 제공한 자신의 설계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동족의 설계도를 인간에게 판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설계도에 따라 세포가 꼬마 RNA를 만들게 되면 유사한 유전 정보를 가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 무기가 됩니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다른 바이러스가 쳐들어와서 지속적으로 경쟁하는 것보다는 기밀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편안히 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 그림 5. 인간 유전체 정보 : 인간 유전체 중 45% 정도가 이동할 수 있는 전이인자(transpos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이 알엔에이 형태의 중간물을 거치는 알엔에이유래전이인자(retrotransposon)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출처/ http://www.microbiologybytes.com/virology/Retroviruses.html
그렇다면 세포와 바이러스 간의 연합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를 물리칠 비법을 알 수 있을까요? 시도해볼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에볼라 RNA를 억제할 수 있는 꼬마 RNA를 인공으로 합성하여 세포 내로 전달하는 전략과 에볼라의 설계도를 인간 유전체에 직접 삽입하는 전략입니다. 누가 봐도 더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은 앞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에볼라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설치류나 유인원 실험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걱정거리가 더 많습니다. 모델 동물에서 일정한 효과를 보인 것과 인간에서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습니다. 꼬마 RNA를 세포 내로 전달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 됩니다. 세포 내로 들어간 꼬마 RNA가 RNA 간섭을 동원하여 정확한 목표를 공격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근본 문제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유전적 변이를 일으켜 재창궐할 경우 새로운 꼬마 RNA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그림을 본다면, 생명의 역사에서 바이러스와 세포 생명체가 경쟁과 공생을 통해 진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바이러스성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것과 더불어 바이러스의 기원과 진화를 탐구하려는 연구가 병행되어야만 바이러스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 유전체가 이미 바이러스를 포함하고 있고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적과 친구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지만 어찌 되었건 바이러스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미묘하고도 상당하다는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요.◑
참조한 논문
· Bagasra O, Prilliman KR, RNA interference: the molecular immune system. J Mol Histol. 2004 Aug;35(6):545-53.
· Fire A, Xu S, Montgomery MK, Kostas SA, Driver SE, Mello CC. Potent and specific genetic interference by double-stranded RNA in Caenorhabditis elegans. Nature. 1998 Feb 19;391(6669):806-11.
· Wilkins C, Dishongh R, Moore SC, Whitt MA, Chow M, Machaca K. RNA interference is an antiviral defence mechanism in Caenorhabditis elegans. Nature. 2005 Aug 18;436(7053):1044-7.
· Lu R, Maduro M, Li F, Li HW, Broitman-Maduro G, Li WX, Ding SW. Animal virus replication and RNAi-mediated antiviral silencing in Caenorhabditis elegans. Nature. 2005 Aug 18;436(7053):1040-3.
· Diogo J, Bratanich A. The nematode Caenorhabditis elegans as a model to study viruses. Arch Virol. 2014 Jul 8.
성상현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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