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첫 회

아래에 "작가의 말: 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00phD4.jpg » 제작 / 김창대, 그림재료/ openclipart.org




#1. 새벽 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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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원을 다운로드 받았다. “자퇴원 (1).hwp”로 저장된다. 아, 전에 받아둔 걸 지우지 않았구나. ‘무한도전’들과 ‘진짜사나이’들 사이에 자퇴원이 끼어 있었다. 파일을 바라만 보다가, 다시 보고 있던 ‘마녀사냥’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출연자들이 히히덕거린다. 웃기네, 생각하지만 얼굴 근육은 움직이지 않는다.


새벽 세 시다. 다들 퇴근했다. 조금 전까지 한 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자정을 넘기고 나면 늘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한동안 보지 않고 있던 ‘마녀사냥’을 다시 틀었던 게 실수였을까. 벌써 세 편째네. 이것만 보면 가장 최근 것까지 다 보는 것이다. 예능을 좀 줄이려고 ‘마녀사냥’부터 끊었는데, 포기해야 하나.


차라리 아까 술을 마시러 갈 걸 그랬다. 주성이가 가자고 했는데. 이제 막 박사과정을 시작한 주성이, 하여간 그 놈은 어지간히 논다. 오늘은 자기 동기 몇 명끼리 술을 마시러 간다면서 나를 불렀다.


“에이, 형 없이 무슨 재미로 술 마셔요? 오셔서 형 그 술력 한 번 보여주세요. 글라스에 쏘주를 똭! 그냥,”

“야, 내가 꽃박사들 모이는 곳에 왜 가냐. 내 나이가 몇 인지 알아? 이제 만으로도 서른이야.”

“형, 회사에서 일하다 오신 그 형도 와요. 나이가 무슨 대수라고.”

“야, 대학원에 오면, 나이순대로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연차순대로 먹는 거야. 내가 그 분보다 신체 나이고 정신 나이고 훨씬 늙었을 걸.”

“아, 형, 어차피 연구도 안 할 거면서 왜 그래요.”

“야, 여기 푸티[1] 켜놓은 거 안 보이냐? 오늘은 연구할 거야.”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마셔요.”


내심은 누구 새로운 사람을 만날까 싶어 두려운 것이었다. 막상 앞에서는 온갖 농담을 범벅이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오겠지만, 내일이면 뻘쭘하게 인사하는 그런 인간관계를 하나 더 만드는 게 싫어서. 이 좁디좁은 사회에서 굳이 한 사람 더 친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도 싶다. 그저 연구만 성공하면 되는 곳인데.


하지만 막상 주성이가 나가자 마음이 허해졌다. 그리고 뭐 한 편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건 다 봤고, 새로운 걸 시작하기엔 후환이 두려워서 결국 끊었던 ‘마녀사냥’을 다시 틀었다. 여전히 푸티도 켜 둔 채로. 하지만 손은 키보드에서 턱으로 옮겨갔다.

다시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새벽 세 시에,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이란 곳에서, 나는 연애와 섹스에 대한 농담들에서 웃음을 찾고 있다.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의미 없이 밤을 보내버렸다. 일 분 일 초라도 더 공부해야 하는데, 그래야 제때 졸업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뻐근한 것도 없는데 기지개를 폈다. 우연히 돌아간 눈에 원식이 형 자리가 보인다. 박사만 7년째 하고 있는 원식이 형, 석사까지 포함하면 9년째 이곳에 머물러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 원식이 형이 답답했다. 저 정도 연차면 좀 더 열심히 해야 맞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나를 바라본다. 나라고 뭐가 그리 다른가 싶다. 오히려 존경스럽다.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내친김에 반대편도 보았다. 박사 3년차 국현이 자리. 늘 전문연구요원 복무기간만 끝나면 이 짓거리 때려 칠거라고 말하는 아이다. 회식 때 교수님 앞인데도 술김에 이 말을 내뱉어서 모두가 식겁했던 적도 있다. 내가 재빨리 “국현이가 출석부에 사인하는 걸 되게 귀찮아하거든요.”라고 수습했지만, 수습이 됐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현이는 늘 뭔가 연구하고 있다. SCI급[2]은 아니지만 저널에 논문도 냈다. 국현이가 바라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뒤쪽에 앉은 석사 2년차 보영이. 내가 연구를 도와주고 있는, 불쌍한 아이다. 옆방에 있는 동기인 길영이는 그래도 국내 학회 논문이나마 하나 냈는데, 보영이는 아무 결과도 없다. 석사 1년차 땐 내가 아이디어 냈던 연구를 하다가 시간만 날렸다. 애초에 될 만한 아이디어인지부터 점검했어야 했는데, 구현해보려다 고생만 했다. 책상에 분홍색 머리끈 하나가 놓여 있다. 내일 오면 저걸로 머리를 묵겠지.


에이씨. 잠이나 잘까. 어차피 연구도 안 하는데. 하지만 마녀사냥이 15분 남았다. 15분? 그래, 깔끔하게 다 보고 내일부터 새출발 하자. 내일 출근해서 15분 동안 시간 버리느니 깔끔하게 오늘을 날려버리자. 이게 며칠 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멍하니 타임머신을 탄다. 더 비어간다. 머리도, 가슴도, 웃음도, 감각도. 에라이. 곰플레이어를 꺼버리고 열어놓은 탐색기들도 닫아버렸다. 가방을 둘러맸다. 며칠 전에 넣어놓고 한 번도 안 꺼낸 논문들이 날 비웃는다. 내일 하자, 내일. 연구실을 나왔다.


눈길은 자동으로 교수님 방으로 향한다. 당연하지만 불이 꺼져 있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쯤 퇴근하는 우리 교수님.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떻게 저 나이까지 저러고 살지? 테뉴어 심사가 언제라더라, 테뉴어를 받으면 좀 제때 퇴근하면서 사실까? 난 졸업만 해도 다시는 야근하기 싫은데. 하긴, 내가 갈 수 있는 직장 중에 야근 안 하는 직장이...


옆방의 불이 켜져 있다. 보나마나 정길이 형이겠지. 저 형은 언제 자는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일찍 나온다는데. 저 형, 참 열심히 하는데. 이제 결과 좀 나와 줘야 할 텐데. 안타깝다. 그렇다고 나도 박사 4년차라 도와주기도 좀 그렇고. 도와줘봤자 도움이나 될까도 싶다. 저 형은 이 바닥에 들어온 걸 후회하진 않을까. 회사에선 돈 잘 벌었다던데. 대체 왜 학문의 길로 들어선 걸까. 이런 줄 몰랐을까. 아니면 콩깍지가 씌었던 걸까.


준상이와 길영이는 아마도 들어갔을 것이다. 매일 밤 10시쯤이면 퇴근해서 운동을 한다니까. 대단한 애들이다. 연구도 잘 해내는데, 운동도 하고, 참 뭐든 잘 챙긴다. 내 동기인 준상이는 벌써 논문이 4개다. 제길. 난 뭐했지. 석사 2년차인 길영이도 벌써 국내 학회에 논문을 하나 냈다. 제길. 난 뭐했지. 보영이는...


문을 열어 정길이 형한테 인사나 하고 갈까 하다가 말았다. 괜히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사실 그보다는, 누군가에게 미소지을 기분이 아니다.


밤공기가 무겁다. 별빛이 나를 쏜다. 찬바람에 눈이 따갑다. 눈물이 배긴다. 실눈을 겨우 떠가며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안구건조증인가. 대학원에 와서 생긴 몸의 변화 중 하나다. 컴퓨터를 너무 많이 쳐다보면 안구건조증이 생긴다던데, 그렇다고 컴퓨터 사용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눈 사이로 몇몇 건물들이 보인다. 불, 참, 많이 켜져 있다. 새벽 세 시가 넘었는데. 저들은 무얼 하며 이 밤을 보내고 있을까. 내가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예능이나 보며 허전함을 달래고 있는 중일까, 내일 아침 랩미팅을 준비하는 중일까, 제안서나 보고서를 쓰고 있을까, 아니면,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학문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중일까?


내게도 꿈이 있었다. 인텔 연구원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중앙처리장치(CPU)를 설계하고도 싶었다. 여느 대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길러내고도 싶었다. 그러다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을 포기하던 무렵부터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이라도 잔뜩 벌고 싶었다. 아니, 정부출연연구소에 가서 몇 십 년 일하다가 연금 받는 삶도 좋겠다 싶었다. 전공은 좀 달라도 근무환경이 그렇게도 좋다는 어느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점점, 세계 일류건 이류건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박사, 그 두 글자만으로도 너무 무겁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내가, 박사를 꿈꿔도 되는 걸까?



* * *

[1] 푸티(PuTTY): 해커들이 나오는 영화에 등장하는 까만 바탕에 회색 글씨가 흘러 다니는 그런 프로그램. 원격 데스크톱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그래픽 없이 글자만 나온다. 주로, 윈도우즈로 구동 중인 컴퓨터에서 리눅스로 구동 중인 컴퓨터를 원격조종하기 위해 사용한다.

[2] SCI급: SCI(Science Citation Index)는 직역하면 “과학논문인용색인”이란 의미로, 소위 ‘급’이 되는 논문들을 모아놓은 목록이다. (http://ip-science.thomsonreuters.com/mjl/ 에서 확인 가능) ‘SCI급 논문’이란 이 목록에 속한 저널에 실린 논문이라는 의미이다. ‘SCI급 논문’ 개수는 연구 실적의 중요한 기준이 되며, 학교에 따라서는 자신이 제1저자인 ‘SCI급 논문’이 있어야만 박사학위를 주기도 한다.


* * *



    작가의 말: 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박사과정 중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우울한 증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다고 하는데 안 나오는 연구 결과, 사실은 그다지 열심히 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은 데서 오는 자괴감, 학문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학생인지 직원인지 모를 애매한 자아정체감, 비교의식 등등 우울한 원인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하지요.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저 또한 박사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제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대학원생으로서의 삶의 의미, 박사과정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대학원생의 일상을 곱씹어보면서 의미를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함께 묻고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저 혼자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편리하게, 가끔은 짜증내면서 사용하시는 그 기술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로부터 나온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계들도 사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을 좀더 따뜻하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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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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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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