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삶, 열정과 밥벌이 사이에서

사진·동영상으로 보는 연구생활


글 전치형 카이스트 교수 | 사진·동영상 '과학 하는 삶' 공모전

※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000.jpg » 일상의 반복 속에서 꿋꿋하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연구현장에는 열정이 있다. 사진1 사진 부문 대상작 ‘과학에 대한 열정 1040℃’(김종선·김선준 카이스트).


“꿈의 소재인 그래핀 제작을 위해 한밤중에도 환한 불을 밝히고 있는 반응기의 온도는 섭씨 1040도. 지금 당신의 삶 속 과학에 대한 열정은 몇 도입니까?” 어두운 실험실에서 마스크와 보안경을 착용하고 포즈를 취한 카이스트 대학원생이 물었다(사진1). “제가 생각하는 과학은 어 … 제 밥벌이고요.” 카이스트 동측식당 앞을 지나가던 다른 대학원생이 말했다. 열정과 밥벌이, 과학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001.jpg » 사진2. '진짜 추운 겨울'(최선정, 영남대학교)002_1.jpg » 사진3 ‘지금은 논문 쓰는 중?’(허승진, 카이스트)002_2.jpg » 사진4 '연구실 밤샘용 간이 스피커'(김태현, 카이스트)

우리는 과학자들을 초청하여 문화방송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 녹화장 같은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구구절절한 실험실 생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당신에게 과학이란?”하며 ‘공식질문’을 던지고 마지막엔 ‘속풀이 송’을 부르면서 못다한 얘기를 털어놓는 그런 자리.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우리 연구팀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말부터 연구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과학하는 삶’을 보여달라는 사진·동영상 공모전을 열었다. 학교와 연구소와 회사에서 일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과학하는 사람’의 희열과 좌절과 고민을 전해주었다. 신문·방송의 과학 뉴스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그들의 또렷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과학자가 말하는 과학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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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연구자들이 보여준 과학연구 현장은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고 멋있게 보이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 측정기기를 펼쳐 놓을 공간이 부족했는지, 영남대의 한 여학생은 실험실 바닥 한켠에 분홍색 삼선슬리퍼를 벗어 놓고 은색 돗자리 위에 앉아 황테이프를 잔뜩 두른 실험장치를 만지고 있었다. 테이블 밑에는 개인용 전열기의 열선이 절반만 켜져 있었다(사진2).


‘논문 쓰는 중’이라는 카이스트 학생은 공대생답게 멀티태스킹에 능했다. 왼쪽 모니터는 구글 검색 창 하나와 붉은 글씨로 수정된 원고 창 하나를, 물리화학 교과서 위에 올려진 오른쪽 모니터는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모니터 한쪽 귀퉁이에는 성서의 고린토전서 6장 19절을 영어로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사진3). 밤을 새는 동안 음악이 필요한 학생들은 이어폰 주위에 에이4 종이를 고깔 모양으로 감아 간이 스피커를 만들어 썼다(사진4).

  

003.jpg » 사진5 ‘가내수공업’(백시은, 건국대)004_1.jpg » 사진6 'Cut it.'(김영수, 조영범, 세광고등학교)004_2.jpg » 사진7 '걱정마! 아빠가 다 고쳐줄게!'(이영희, 카이스트)004_3.jpg » 사진8 '날 따라 해봐요.'(김범기, 카이스트) 004_4.jpg » 사진9 '에필로그'(이민규, 위성훈, 전성수, 아주대학교) 005.jpg » 사진10 '기쁘다 시약님 오셨네'(윤수진, 건국대학교) 00anaysis.jpg » 사진11 '널 분석하고야 말겠어'(안호재, 인천과학고등학교) 00robot.jpg » 사진12 '로봇 이즈 마이 라이프'(류길재, 전남대학교) 응모 작품들에서 우리가 본 과학자는 어느 학생이 말했듯이 “성실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부경대 지구환경과학과에서 만든 동영상 속에서 박편작업 1만회 경력의 서른살 지질학자는 거친 무채색 돌멩이가 0.03 밀리미터짜리 박편이 되어 노랑, 주황, 분홍의 광채를 낼 때까지 자르고, 붙이고, 갈고, 닦았다(아래 동영상2).


‘가내수공업’이라는 제목의 사진에서 건국대 연구원은 탁자 위에 여러 색깔 통을 수십 개 쌓아 놓고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통 안의 구멍에 실험용 ‘팁’을 하나하나 꽂았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왔을까?”라고 자신에게 묻기도 한다. 크기별로 가지런히 나눠 담은 팁들은 다음 주면 모두 사라지고 또 누군가 그렇게 앉아 하염없이 팁을 꽂아 실험을 준비해야만 할 터이다(사진5).

 

많은 이들에게 연구는 고결한 정신활동만이 아니라 고단한 몸놀림이기도 하다. 사진 속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트레이닝복에 목장갑을 끼고서 불꽃을 튀기며 재료를 자르고(사진6), 황량한 공터의 벤치에 걸터 앉아 소형비행기를 뜯어 고치고(사진7), 검정색 쫄쫄이 옷을 입은 채 온몸에 센서를 붙이고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었다(사진8). ‘에필로그’라는 제목의 사진은 실험실 싱크대에서 비커 안을 기다란 솔로 씻어내는 장면을 흑백으로 담았다. 고무장갑을 낀 손이 수많은 실험의 끝은 논문이 아니라 설거지라고 말하고 있었다(사진9).


적정기술을 연구하고 싶다는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박사과정 학생은 동영상에서 전자렌지로 조리한 햇반을 뜯어 밥덩이를 몇십 번이고 꾹꾹 짓이겼다. 과학자 친구의 톡톡 튀는 일상을 담아 보려고 카메라를 잡은 건축 전공 학생은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밥을 빻고 있는 친구에게서 ‘과학하는 삶’의 지리하지만 진지한 일면을 발견했다. 과학자 친구는 “돈을 벌 수 있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연구를 해서 “인생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 기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는다(아래 동영상1)0.jpg



과학자의 ‘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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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영상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던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생각을 제대로 듣기 위해, 우리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초겨울날 분주한 캠퍼스 길목에 마이크를 세워 두고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과학(공학)과 과학자(공학자)란 무엇인가?”('과학 하는 사람: 카이스트 오픈마이크', 아래 동영상3)


구질구질한 연구의 일상을 얘기할 때와 달리 그들은 고상하고 진지한 언어를 사용했다. 물리학과 박사과정 학생은 “과학은 이성적으로 사고해서 세계를 밝혀내는 것, 세계에 근접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공학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대학원생도 있었다. 어느 수학과 학생은 "수학은 예술"이고 "수학자는 예술가"라고 선언했다. 또 다른 학생은 “과학자는 성직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예술가이고 성직자라면, 그 예술과 종교는 현실의 비루함과 무관한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거기에 발을 담근 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는 박물관에 특별전시된 <몽유도원도> 진품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며 줄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과학자의 ‘몽유도원도’는 절로 존재하는 꿈 같은 세계가 아니라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며 데이터를 쌓아가는 끈기의 결과이다. 과학자는 지겹게 반복되는 연구의 일상을 통과하여 그 너머의 어떤 차원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또한 지루하게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세계의 한 진실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많은 생활인들이 품는 희망이기도 하다.0.jpg

 


과학자가 과학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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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동료 과학자, 공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기말보고서에서, 심지어는 술자리에서도 쉽게 듣지 못했던 얘기를 해주었다. 젊은 과학자들의 말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이었고 그래서 낯설었지만 울림이 있었다.


“우리 영혼 없는 공부는 하지 맙시다.”

“생명을 위협하는 짓은 좀 하지 맙시다.”

“우리 개인의 욕심을 위한 연구는 하지 맙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자 여러분 우리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만난 과학자들 모두가 노벨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한 여학생이 “저는 프라이드가 있거든요, 우리는 과학하는 사람이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것으로 충분하겠다 싶기도 했다. “공학자는 지금 현 시대에서는 노예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사회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누구나 그렇듯이 과학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과 처지를 말하고 싶어하고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는 과학지식의 심오함을 칭송하거나 경제효과를 독촉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학자의 삶에 무관심할 수 없다.


“과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뻔한 말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왜 과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간결해서 아름다웠다. “저는 거기서 자유를 발견했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두서없이 길어서 찡했다. “딱히 정해진 게 없고 진짜 제가 하고 싶어서, 그냥 이유가 없고 그냥 진짜 뭐 왜 하는지라고 이유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네 그냥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고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에게 까닭 없는 기쁨을 주는 과학,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학, 그런 오래된 과학을 하려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00JCH.jpg   글쓴이/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 더 많은 사진과 동영상이 '과학문화실험실 대전’ 페이스북에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scienceculturedj


  동영상1


  동영상2


  동영상3


 

    잠깐 인터뷰   동영상 대상 수상자

“연구실의 소소한 일상 모여 큰 발견 이뤄지죠”



00JYinterview.jpg “과학 하는 삶이라는 것도 일상의 반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엄청난 발견을 이룬다고 해서 날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구나, 작은 일상이 모여야 큰 발견으로 이어지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윤홍식(27·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박사과정·사진 오른쪽)씨와 함께 6분짜리 동영상을 만들어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주최의 ‘과학 하는 삶’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장원석(27·홍익대 건축학과)씨는 이렇게 말하며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내일을 향한 기술’이란 제목이 붙은 동영상은 윤씨의 실험실 생활을 담았다.


동영상은 별 계획 없이 만들어졌다. 오랜 친구 사이인 둘은 1월1일 구체적인 촬영 계획도 없이 만나 잠깐 얘기를 나누고선 해질녘까지 서너 시간 동안 해수담수화와 적정기술을 연구하는 윤씨의 연구 일상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늦은 밤에야 ‘퇴근’하고 연구실에서 밤샘도 하는 모습은 담지 못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과 이야기는 오히려 잔잔한 울림을 준다.


윤씨가 밥을 정성껏 으깨며 실험을 준비하는 장면은 이색적이다. 제3세계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만한 적정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마실물을 구하기 힘든 곳에서 물 속의 오염물을 제거하는 데 녹말과 효소를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적정기술은 내가 하는 일에 가치와 보람을 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해준다”고 말했다.


그에겐 거창한 꿈이 없다고 한다. “흔히 연구라 하면 멋있고 진전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내게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동료들과 해결책을 나누며 실패를 줄여가는 과정”이었다는 윤씨는 “꿈이 있다면 날마다 닥치는 선택의 순간에 좀 더 옳은 선택을 하며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다.


촬영·편집을 맡은 친구 장씨는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한나절 보고 듣다보니, 나중엔 연구자의 소소한 일상에 담긴 어떤 메시지를 찾아 꼭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이 글과 사진을 간추린 원고가 26일치 <한겨레>의 사이언스온 테마지면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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