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첫 강의, 가르치며 얻는 새로운 깨달음

신동화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이탈리아”


[7] 프로그래밍 수업을 맡다

00torino01.jpg » 수업을 듣는 학생들. 앞 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역시 수업 참여도도 높고 진도도 빠르게 따라옵니다. 그리고 맨 앞줄 학생들은 왠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한 프로그래밍 할 것만 같습니다.^^ 사진/신동화  


녕하세요? 토리노에 있는 신동화 입니다.

이번 글은 개인 사정으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올려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다리셨을(^^;)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9월 말 아내가 토리노에 왔습니다. 약 3주 동안 함께 지내며 다른 도시를 여행하고 토리노에서도 함께 지내다가 돌아갔는데,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더니 아내와 함께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다른 일이 밀린 통에 10월 중순부터 많이 바빴습니다.


아내는 한국에 계시는 어머님께 맡기고 온 아기가 신경 쓰이면서도 정말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가 무척이나 즐거운 듯했습니다. 먹어보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제가 일정을 알차게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피렌체, 로마, 밀라노 등을 다녀왔는데, 아내는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여행지에서는 자신의 신용카드가 있는데도 제게 자잘한 현금을 받아 쓰는 재미가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2유로 3유로씩 받아서 젤라토(아이스크림)를 하루에 두세번씩 사먹곤 했습니다. 여느 부부 같으면 당연했을 일들을 재미있어 하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아내는 성당에 갈 적마다 편찮으신 장인어른을 위해 기도하며 초를 피웠는데 그럴 때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제 처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사실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처지에서 가족이나 친구가 방문해서 지내다 돌아가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 경험상 며칠 동안 붕 뜬 기분으로 지내게 되는데, 미국에서 지낼 때에는 어머니가 오셨다가 귀국하신 날 운전면허 주행시험을 봤다가 말도 안 되는 신호 위반으로 떨어졌던 적도 있습니다. 아내가 돌아가고 난 뒤, 버스 타고 한 시간쯤 가면 서울 아현동에 도착할 것만 같은 기분이 더했습니다. 이유식을 시작한 뒤로 옹알이도 부쩍 늘고 뒤집기도 잘 하게 되었다는 딸아이가 보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요. 



뜻하지 않게 맡게 된 프로그래밍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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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도 10월에 시작한 이번 학기에 저의 호스트 교수 수업 일부를 맡게 되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실습을 겸하는 수업이라, 교안을 짜고, 자료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제법 들었습니다. 제가 맡은 수업은 내장형 시스템의 전력소비 최적화에 관한 석사 수업인데 영어로 수업을 진행합니다. 수업에 계속 나오는 학생은 열서너 명 정도로, 에티오피아 학생이 세 명, 중국인·베트남 사람이 한 사람씩이고 나머지는 이탈리아 사람들입니다. 수업은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인데 출석을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수업 중에 드나드는 것도 매우 자유롭습니다. 옆 강의실 다른 수업을 봤더니 나가서 담배를 피고 다시 들어오는 학생도 있더군요.


래도 수업 태도는 아주 좋습니다. 국내에 있을 때 수업조교를 맡아 수업에 들어가서 보던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학생들간 의사소통도 활발합니다. 제가 과문한 탓에 실수를 하기도 했는데, 별 생각없이 우리 수업에 에티오피아 학생이 유달리 많은 이유가 무언지 물었다가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농담조로 에티오피아 학생들이 특별히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았는데, 알고 보니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점령헀던 역사가 있더군요. 무솔리니 시절의 일인데, 여기에서는 파시즘이나 무솔리니에 관해서는 입에 담지 않는 일종의 금기가 알게 모르게 있어서,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다들 조용히 있었던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왔다는 웨이는 수업을 마친 뒤 제게 와서 우리나라 대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언뜻 아시아 사람이 수업을 하는 것에 재미있어 하는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00torino02.jpg » 수업을 마친 뒤 찍은 사진입니다. 이렇게 보니 배도 더 많이 나온 것 같고, 저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기분은 학부 시절 수업 듣던 때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수업의 앞쪽 20분 정도는 내용 설명을 하고, 실습 목표를 알려준 다음에 실제 실습에 들어가면 질문이 나오는 대로 제가 학생이 막힌 부분을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하는데,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외국어로 기술적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녹음도 하는데 정말 진땀이 나더군요. 사실 저도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여기 학생들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경우는 인도 학생이 아니면 거의 없으니, 서로 영어로 수업 내용을 말하고 듣는 것이 결코 효율적인 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연구자들과 논문을 읽고 쓰면서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영어로 된 내용을 알아야 하므로 전체적으로 보아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학위를 받은 뒤에도 ‘박사’란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고, 더우기 이탈리아 사람들이 동양인의 나이를 외모로 가늠하지 못하는 까닭에 학생이냐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가 ‘프로페서’ 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어색하던지요. 하지만 학생들이 제가 수업 자료를 마련하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훌륭하게 구현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물론 모든 학생이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것을 다 해내는 것은 아니라, 저는 주로 조금씩 뒤쳐지는 학생들을 돕는 데 대부분 시간을 씁니다. 출석도 부르지 않고 실습 평가도 매우 관대하지만 학생들의 수준이 높은 것인지 이해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이 수업 중 받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도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해 덜한 것 같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수업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혹은 평가 방식 등 제도 때문인지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전체적인 수업 분위기 자체가 경쟁적이지 않다고 할까요? 이탈리아 학생들은 수업 중에 이해되지 않는 것을 옆자리 친구에게 묻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입니다 (이 부분이 인상적인데, 수업 중에 손을 들어 의사표시를 한 뒤 학생들끼리 대화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다가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이야기해줍니다). 또 영어가 서투른 경우에는 옆자리 사람이 나서서 통역해주기도 합니다. 수십 명씩 듣는 큰 수업을 이렇게 진행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소규모로 듣는 석사과정 수업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각자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시아계 학생들의 태도는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슷한데, 약간 끼리끼리 앉고 수업중에 질문이 많지 않습니다. 아프리카계 학생들은 그 중간 정도입니다.



멀리 돌아 익숙한 곳에 다시 온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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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이탈리아에 와서 내장형 시스템의 전력 최적화를 에티오피아, 베트남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학생들에게 수업 중 실습 과제를 시킨 뒤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익숙한 듯 낯선 기분이 듭니다. 역시 강의실은 연구실보다 밝고 활기찹니다. 몰라도 흉이 되지 않고, 배울 것이 많아 즐거워 보이는 학생들이 약간 부러운 기분이랄까요. 몇 년을 돌고 돌아서 다시 익숙한 곳, 그리운 곳에 온 기분이기도 합니다.


략 1년 전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찾을 때만 해도 이탈리아에 온다는 것은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대학원에 오고 학위를 한다는 것도 학부 시절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군요. <사이언스온>에 글을 쓰면서도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저는 제 미래를 그렇게 치밀하게 설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뭐든 닥친 일을 한참 하다보면 슬금슬금 재미도 있어졌고, 또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 다른 역할로 있게 된 기분이 묘했습니다. 낯선 듯 익숙한 이 느낌이 수년 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00torino.jpg » 토리노공대 앞에서. 사진/ 신동화 딸아이가 태어난 뒤 제가 바라는 삶의 모습도 정말 크게 변했습니다. 막연히 공학자를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저는 늘 커다란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를테면 로켓이라던지 슈퍼컴퓨터 같은 것들입니다. 아이비엠(IBM) 같은 회사에 가서 블루진 같은 수퍼 컴퓨터를 만들어 체스 챔피언을 이긴다거나 미국항공우주국(NASA)이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같은 곳에서 로켓 쏘는 데 들어가는 시스템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이런 꿈이 물론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고, 제가 만든 게 달이나 화성 같은 곳에서 돌아다닐 수 있다면 사실 밥만 먹여주고 일을 시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 딸과 떨어져 지내보니 일단 아이와 계속 떨어져 지내야 하는 조건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겠다는 걸 인정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 딸아이와 떨어져 산다는 것이 힘든 건 둘째치고 그렇게 지내기가 싫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저 수업 내용이 재미있고 뭘 만드는 게 좋았던 학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박사과정 지도교수님께서 맡아 하셨던 내장형 시스템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실험 수업 중에 ‘지금은 이 거 만드는 거 재밌어서 집에 안 들어가고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는 때가 없다. 지금이 공부하기 좋은 때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며칠씩 밤새워 가며 손바닥 만한 보드 한 장을 손으로 만들던 중이라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말씀 말고 학점을 잘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 수업을 듣고 막연히 수업이 재미있었던 기억에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고 연구실에 들어갔던 그때의 저는 어찌보면 참 순수했습니다.


일단 취업이 목표가 된 뒤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업적을 만들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연구 자체의 완결성이나 제 자신의 만족보다는 리뷰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먼저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수업을 하는 동안 제가 했던 연구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면서, 좀 더 열심히, 좀 더 완성도 있게 연구를 마무리짓지 않는다면, 단지 제가 강단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 말을 듣고 믿어주는 학생들에게 떳떳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주제가 아직 누굴 가르칠 주제는 못 되지만, 학생들 앞에 서 보는 것이 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참말로 큰 경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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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화 이탈리아 토리노공대 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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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화 이탈리아 토리노공대 박사후연구원, 컴퓨터공학
이탈리아 토리노공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다. 공인된 분류를 따르자면 설계자동화 분야를 연구하고 있고, 구체적인 전공은 내장형 컴퓨팅 시스템의 저전력 설계 기법인데 사실은 납땜부터 코딩까지 가리지 않고 다했다. 취미랑 전공이 비슷해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메일 : donghwa.shin@polito.it      
블로그 : http://mimosa.snu.ac.kr/~zir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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