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삽과 호미로 시작하는 사막 식물 연구

김상규의 ‘사막 위의 식물학자’
[3] 어떤 주제로 연구해야 할까?

0desertplant1.jpg » 들판의 야외시험장에서는 호미와 삽을 잡고 일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도구는 물을 공급하는 관입니다. 사진/김상규


일에 가서 연구하게 되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냐’였습니다. 그때 당시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평생 연구할 수 있는 주제를 찾으면 돌아갈 준비를 하지 않을까요’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 참 순진했고 무식했던 대답이었습니다. 박사과정까지 마치고서 평생 연구하겠다는 사람이 연구주제를 찾으러 나간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궁금함이 이끄는 데로 나아가며 연구하고 싶다는 이상적인 답변이 떠오르고, 아울러 어떤 연구를 해야 식물을 먹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좀 더 이로울까 혹은 무엇을 연구해야 좋은 논문도 내고 안정적인 자리를 빨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계획까지 떠오르며,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한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나의 궁금함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날리게 된 박사과정 학생을 보면서 장기적인 연구에서 단기적인 연구주제를 찾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최근 우리 연구실에 지원한 박사과정 지원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지원자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식물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하겠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두루뭉실한 관심과 열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서 하고 있는 이런저런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앞으로 이런저런 접근 방법으로 연구하고 싶다’라고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이 뽑힐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연구를 전자의 사람보다 더 잘 하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궁금한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잘 하는 경우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이라는 학문, 우리 참고문헌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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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 연구소에 왔을 때 오랫동안 이 연구소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있었던 분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곤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제 책상 위에는 곤충에 대한 책이 더 많이 놓여 있습니다). 함께 시내 거리를 걷는 날에는 연구소가 있는 예나(Jena)라는 작은 도시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민달팽이를 연구하면서 화학생태학이라는 학문을 시작한 1세기 전 곤충학자이자 예나대학 교수(에른스트슈탈, Ernst Stahl, 1848-1919)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생태학(ecology)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도 예나대학 교수였던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이니, 이 동네에 생태학연구소를 세우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뛰어난 감각도(우연이었을 수도 있지만) 칭찬했습니다.


한 번은 강가를 함께 산책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특히 생명과학 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이란 것이 있을까. 불과 몇십 년 전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술과 장비를 가지고 실험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참고해야 하는 책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대화의 끝에 나온 이야기는 자연이 우리의 고전이자 참고해야 하는 문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어중간한 결론이었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이해되지만 그것이 실제 연구의 주제를 찾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약간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사과정 동안에 애기장대라는 모델식물을 실험실 안에서 연구하면서 이 식물이 현대 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가장 많이 연구되는 식물이고 제가 이곳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식물이지만, 그동안 나는 얼마나 눈에 보이는 다른 많은 식물을 무시(?)하면서 혹은 ‘애기장대가 이러니 다른 식물도 이럴 것이다’ 하는 식의 성급한 일반화를 하면서 지냈는지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00desertplant2.jpg » 미국 사막의 야외시험장에 머무는 동안에 한 번 정도는 꼭 이렇게 근처로 하이킹을 갑니다.



사막에서 생각하는 연구주제, 기초연구, 응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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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하는 야생담배 연구는 호미와 삽을 가지고 땅을 일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수도를 연결하고 물길을 내고 물이 마른 땅 위로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잘 조절해줍니다. 식물을 옮긴 이후에 잘 자라고 있는지 정성스럽게 돌아봅니다.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는 일입니다.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흙을 만지는 것이 좋고 그 위에 풀썩 앉아있는 것이 좋습니다.


00desertplant3.jpg » 이렇게 사막에서 불이 나서 나무가 타게 되면 그 아래에서 유독 야생담배가 많이 발아해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인디언들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야생담배 씨앗을 잎과 같이 피우다가 남은 부분을 그곳에 버려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습니다. 지도교수와 함께 가끔 사막에서 하이킹을 나가면, 지도교수는 중간중간에 만나게 되는 식물 친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아 줍니다. 그리고 실제 그 이야기 속에서 연구할 주제를 찾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런 게 궁금하지 않니’라고 많은 질문들을 들려줍니다. 물론 확신하건대 누군가도 그런 질문으로 연구를 했거나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물을 현대적인 도구를 통해서 보게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연이 우리의 고전이 되어야 하고 참고문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조금씩 이해됩니다.


야외시험장 근처에서 자라는 잡초 중 하나가 먹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보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내던 베트남 학생이 있었습니다. 푹 데친 뒤에 양념과 버무려서 먹어도 맛있고 우려낸 국물에 계란말이를 곁들여 먹어도 맛있는 식물이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한국 분은 매운 고추를 먹으면서도 잘 살아가는 한국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곤충의 해독 작용이 궁금해 고추와 곤충을 들고 이곳에 와서 연구했습니다. 비행기로 이 곤충을 실어날랐던 무용담(?)은 들을 때마다 재미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연구주제가 얼마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기초연구에 응용의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고 그것이 결국 어디서 나오게 될지 모르는 기초연구의 응용 가능성을 막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세금으로 연구하고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연구가 그들에게 결국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에 도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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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desertplant6.jpg » 야생담배의 꿀을 훔치러 온 카펜터벌(Carpenter bee)입니다. 수정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꿀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서 꿀만 쏙 빼가는 도둑벌입니다. 너무 이상적이지만 지금 제가 연구하는 야생담배의 꽃이 언제, 어떻게 향기를 내고 열리고 닫히는지 연구하는 것이 화훼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24시간 주기를 가지고 수직상하로 움직이는 이 식물의 특이한 조직을 연구하는 것이 적어도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여주는 데 쓰이면 좋겠고, 꽃이 어떻게 꿀을 만들고 꽃 안에 저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타가수정을 위해서 곤충을 유혹하는 식물의 전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다양한 형태의 초식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식물의 방어기작에 대한 연구가 좋은 작물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독일에서 미국 사막에서 살아가는 식물을 연구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식물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자연이 들려주는 수많은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무엇을 연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 혼자 즐거운 연구가 아니라 적어도 제 주변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연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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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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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프로젝트그룹 리더, 식물분자생태학
하얀 실험복보다 밀집모자가 더 편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언젠가는 농사 짓는 분들한테서 그들의 식물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과 함께 연구하고 싶다.
이메일 : skim@ice.mpg.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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