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처우: 우리 안의 문제, 우리 밖의 문제

브릭-사이언스온 공동기획 설문조사 결과와 보도를 보고

 - 공학계열 박사과정생의 글


00lab2.jpg » 대학 실험실. (* 이 사진은 대학 연구현장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사진으로 이 글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한겨레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은 공동기획으로 ‘국내 생물학 분야 연구개발직 종사자와 대학원생들의 연구환경 및 처우 실태’ 설문조사를 벌였으며, 그 결과를 보도했습니다(설문 결과 | 관련 보도). 이 가운데 대학원생의 처우에 관한 설문조사의 결과와 관련 보도를 본 공학계열 박사과정 대학원생 한 분이 긴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대학원생 처우의 문제가 매우 구조적이며 고질적인 문제이며 또한 우리 사회 전반과 연관된 사회적인 문제라고 지적하며, 단지 학생이자 노동자라는 막연한 이중 정체성 의식으로는 현재 문제를 다 볼 수도, 풀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인 고민, 좀 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거기에서 해법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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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 사이언스온과 브릭(BRIC)이 진행한 공동기획 설문조사 결과관련 보도를 접하고 근 10년에 걸쳐 펼쳐진 대학원 생활과 갖가지 상념에 몸서리가 나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음을 고백합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세월 동안 상황은 악화하고 이에 대응하는 대안은 십 년 전이나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이 지지부진하네요.


근 십 년의 대학원 생활을 거치며, 저 자신도 설문조사가 보여주는 우리 대학원 생활에 치여 살았으며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숙명인 양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막바지에 이르러 도달한 결론은 매우 참담한 진실이었습니다. 설문조사와 이후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공개되는 ‘이중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이를 야기하는 비합리적인 연구실 환경은 결국 학생이 스스로 이에 동조하거나 방조하는 조력자이기에 벌어질 수 있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중적 정체성, 이중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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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정체성의 고민은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비롯합니다.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정작 ‘학생’과 ‘노동자’라는 이중 정체성에 시달리면서도 ‘학생’과 ‘노동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서 사실 정량적 평가 결과는 제가 몇 가지 루트로 이미 접해온 대학원생 실태 조사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성 평가에 더 관심을 두고서 읽다가 이런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줄 때는 ‘학생’이라는 논리를 펴다가 일을 시킬 때는 ‘노동자’라는 논리를 펴는 일부 교수 집단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점철된 설문조사의 ‘기타 응답 및 주관식 결과’에서 묘하게도 동일하게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는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학생’과 ‘노동자’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용어들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장학금’이란 용어는 31차례, ‘학생’이란 용어가 71회 언급되는 반면에 ‘인건비’ 혹은 ‘급여’라는 용어는 241회, ‘노동자’ 혹은 ‘근로자’라는 용어는 단 3회 언급됩니다. 즉 대학원생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를 학생답게 대우해 달라’ 또는 ‘우리를 노동자답게 대우해 달라’가 아니라 일 시킬 때는 ‘학생’으로 돈을 줄 때는 ‘노동자’ 수준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중적인 논리에 대학원생들이 휘둘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그 이중적인 구조에 유화적인 자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중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이중적인 논리로 대응하다 보니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조를 양산해 어떤 합의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차라리 ‘학생’과 ‘노동자’라는 선택안 중에서 한 가지 정체성에 집중하고 이에 기반한 논리 전개가 상대방을 설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선택마저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대학원생들이 ‘학생’임을 인정받고 싶다면 수혜적인 ‘장학금’의 크기가 아니라 교육 차원에서 학생이 감당해야 할 적정 과제 수에 대한 이의를 제기해야 옳은 수순입니다. 그런데 설문조사의 ‘기타 응답 및 주관식 결과’에서는 이에 대한 고민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파악한 기존 설문조사 결과는 카이스트(KAIST) 대학원생 총학생회에서 실시한 ‘2012 카이스트 연구환경 실태조사(770명)’와  2012년 옛 교육과학기술부의 대학원생 인건비 개선안을 통해 공개된 ‘이공계 대학원생에 대한 인건비와 연구장학금 지급 현황’(국내 6개 대학 15690명, 이하 ‘교과부 조사’)입니다. 교과부 조사에서 나타나는 대학원생 1인당 수행 평균 과제 수는 석사과정이 평균 2.7개, 박사과정이 평균 3.1개인 반면에 이번 조사에서는 석사과정이 1.8개, 박사과정이 2.1개입니다. 원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인지는 더 따져보아야 하겠으나 조사대상자 규모에서 교과부 조사가 압도적으로 크기에, 적어도 생명과학 분야 대학원생이 더 적은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생물 분야 대학원생의 73%가 자신이 진행하는 과제가 졸업 주제와 관련성이 있다고 응답하여 정량적 평가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연구환경에 놓여 있다고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물론 생명과학 분야 대학원생에게 약 2개의 과제는 교육 차원에서 적절한 수준인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이겠지요).


반면에 우리 대학원생이 ‘노동자’임을 인정받고 싶다면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근로계약 사항과 이의 준수 여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로 받는 ‘임금’에 대해서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을 받기 위한 노동력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도 필요합니다.


박사과정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독일의 경우는 훌륭한 학생 처우로 유명하지만 연구 결과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하기로는 더 유명합니다. 합격(pass) 또는 불합격(fail)으로 구분되는 냉혹한 평가를 통해 살아남은 사람만이 학위를 취득하지요. 학위 취득 실패자가 우리 국내보다 외국에서 빈번한 이유입니다. 이렇듯이 자신이 제공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함께 그렇지 못한 경우에 자신이 입을 불이익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학생과 노동자, 분리된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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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노동자’라는 이중 지위는 도리어 위험해 보입니다.

어떤 협상에 임할 때 상대방을 설복하기 위한 주효한 방법 중 하나는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대학원생들이 상대하는 분들은 대학원생들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이를 현명하게 이용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대학원생들은 그저 감정의 발산에 급급합니다. 거기다 고민의 원천이 되는 이중적 지위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까지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해답이 ‘학생노동자’라는 새로운 특수 형태의 계층으로 보입니다. ‘학생 노동자’라는 해법은 현재 대학원생들의 열악한 연구환경을 해결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학생노동자’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보여주듯이 모호한 이중 정체성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학생’이며 동시에 ‘노동자’라는 지위는 ‘학생’과 ‘노동자’의 교집합으로 나타나는 특수한 경우로 인식되길 희망하겠으나 역으로 ‘학생’과 ‘노동자’의 합집합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우로 늘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둘째, ‘학생노동자’라는 지위는 이공계 대학원생을 우리 사회에서 더욱 격리시킵니다. 지금까지 대학원생의 열악한 연구환경을 보도하는 숱한 언론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약자의 위치에 놓인 대학원생을 지지해줄 사회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찍부터 과학기술계가 누려왔던 특별한 지위에 대한 반감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갈수록 다원화하는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이를 용인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세째, 그래서 더욱이 정부의 시혜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정부 주도 하에 기형적으로 길러져 관계유착이 고질적인 병폐가 된 과학기술계를 더 병들게 할 뿐입니다. 우리 과학기술계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의 근원을 찾다 보면 정부의 과보호 밑에서 진행되어온 ‘외형만의 성장’이라는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한 특혜를 입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이공계 특목고와 이공계 특수목적 대학, 병역특례, 거기에 이미 과학기술계에 쏟아붓는 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2위에 이르는 수준입니다. 이러한 묻지마 투자의 결과가 오늘날의 기형적인 구조입니다. 여기서 어떤 추가적인 특혜가 비뚤어진 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비슷한 문제를 이미 선진국에선 몇 가지 형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석사과정은 ‘학생’으로, 박사과정은 ‘노동자’로 대우합니다. 미국의 경우 대학원생은 ‘학생’이나 수업조교와 연구조교에 한해 ‘노동자’로 대우합니다. 일본은 대학원생을 철저히 ‘학생’으로 대우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미국의 경우를 도입했으나 내용상으로 일본의 경우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두 시스템의 단점만을 융합해놓은 형태지요.


이런 상황에서 ‘학생노동자’라는 지위는 현 상황을 고착화할 뿐입니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유럽식 시스템이건, 수업조교와 연구조교 만이라도 ‘노동자’로 인정하는 미국식 시스템이건, 심지어는 대학원생을 원천적으로 학생으로 대우하는 일본식 시스템이건, 어떤 선택에도 대학원 교육철학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과학기술계만 청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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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겪는 고통은 이공계 대학원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며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노동력의 착취는 절대 이공계 대학원생들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도제식 교육을 표방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더 확장하면 ‘약탈적 리더십’과 ‘갑을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을의 지위를 갖는 대한민국 모든 약자가 겪는 불행입니다.


유교적 봉건적인 위계질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온정주의, 지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비합리주의, 절차보다 결과로 평가되는 성과 지상주의, 강자에겐 비굴하고 약자에겐 군림하는 비겁함, 남이야 죽던말던 나와는 관련 없다는 이기주의, 편법·탈법·불법에 조롱당하는 원칙, 돈이면 뭐든 오케이 하는 황금만능주의, 능력보다는 처세를 높이 사는 기회주의, 거기다 근 10년 동안 진행되어온 민주주의 후퇴에서 볼 수 있듯이 후진적인 시민의식에 걸맞잖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가라는 옷을 걸친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는 일반적인 현상인데도 우리는 이를 이공계 대학원만의 문제로 인지하며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특수해를 꾸준히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온 대한민국이 썩어가는데 우리 사는 동네는 청정구역으로 만들어야 하니 끊임없이 투자를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술 더 떠 실험실 통장의 일괄 관리 실태를 현실 관행이니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쥐가 고양이를 생각해주는 부적절한 동업자 의식마저 보여 솔직히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전혀 동료로 생각지 않는데 쥐는 애써 고양이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모습은 왜 대학원생 인건비 문제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가 비난하는 인건비 상황을 주도하는 분들도 우리 같은 대학원 생활을 거쳤고 우리도 언제고 그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우리는 지금 우리 윗세대가 그러하듯이 대학원생의 처지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느라 바쁠 테지요. 그래서 이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대학원생 인건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폐쇄적이며 부적절한 동업자 의식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이 시대의 약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입니다. 똑같이 족쇄 차는 처지에 나는 황금 족쇄를 찼으니 철 족쇄를 찬 부류와는 다르게 취급받아야 한다는 특권의식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안 부조리의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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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와 교감하는 연구자를 길러내지 못한 과학기술계가 대학원 인건비 실태의 원인입니다.

돈 줄 때는 ‘학생’, 일 시킬 때는 ‘노동자’의 이중 논리를 스스럼없이 구사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이 분들에게 대학원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인간 지성의 발현으로 볼 수 없으며 그저 동물적인 자기 보호 본능일 뿐입니다.


철학이 부재한 연구자를 끊임없이 길러내고 그렇게 길러진 연구자들이 다시 후배 연구자들에게 과거의 악행을 대물림하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다시 정부의 힘을 빌리자는 주장은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특수해는 특수조건 하에서만 성립될 뿐, 그 조건이 사라지면 무용지물입니다. 이제는 특수해를 일반해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눈앞의 문제 해결만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앞과 함께 옆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우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구요? 이번 설문조사에서 대학원생 갈등 해소 담당 부서를 운영하자는 데 99%가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자’는 결정했는데 ‘방울’은 이제 누가 다시렵니까? 대학원생 갈등 해소 담당 부서의 책임자나 직원을 학교에서 임명할 경우 이 조직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에 결국 대학원생이 주체가 되어 이 조직을 운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하시렵니까? 외국의 경우 이런 조직을 학생 선거로 선출한 학생회장과 학생회비로 월급을 주는 상근 직원으로 운영하는데 이로 인해 인상되는 학생회비에 대해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이 부분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분들은 동물적 본능만을 그저 발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이런 상황입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약자가 약자의 편에 서서 함께 지지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우리에 대한 지지를 얻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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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되는 부조리의 원인이 우리 자신에 있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아직도 떠나지 못한 저희 연구실에서도 숱하게 접하는 면면입니다. 눈앞의 인건비 문제에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불이익에 대해 목에 힘을 세우지만 주변의 동료,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고민을 꺼내들면 반사적으로 내미는 카드가 있습니다. 연구말고는 관심없다 카드!  대학원 총학생회마저 해마다 출마자를 찾느라 몸살을 앓고 심지어는 투표 참여자마저 갈수록 줄어 대표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는 상황. 자신에게 직접적 이해관계가 아니면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모습들.


우리 스스로 ‘나는 이공계 연구자니까 내 연구만 잘하면 된다’는 벽을 이중 삼중으로 우리 사회에 대해 세워왔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목소리가 우리가 세워둔 벽에 갇혔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들.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못된 시어머니 난다고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 결국 자신 같은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 직장 상사가 되어 자신보다 약한 자의 아픔을 헤아릴 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임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제가 내린 결론은 단순 명료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다들 알아서 건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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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학계열 박사과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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