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연구소 생활의 감초, 깨알 같은 축하와 기념 모임들

정민기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프랑스"


[2] 함께 축하하며, 함께 기념하며

 00paris3.jpg » 퇴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장난감 물총을 선물받는 연구소의 전문 기술자, 테크니션. 사진/알린쉬웁


근 해서 받은편지함을 열어보니 연구원 한 분이 메일을 돌리셨다. 오후 4시에 프로젝트 수주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다들 참석해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늘 그렇듯이 와인과 치즈와 소세지가 준비되었단다. 아침부터 이런 메일을 받으면 참 반갑다. 외국 땅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다 그런 것인지 맛있는 ‘공짜’ 먹거리 이야기만 들으면 귀가 쫑긋 선다. 오늘은 또 어떤 와인과 치즈를 맛볼 수 있을지, 들뜬 기분에 연신 시계를 훔쳐보며 오후 4시가 되길 기다린다.


00paris1.jpg » 자신의 프로젝트 수주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직접 훈제 돼지 넓적다리를 썰어 대접하려고 칼을 들고 몸을 푸는 연구원. 사진/정민기 이곳 그르노블 연구소에선 함께 축하하거나 기념할 일들이 많았다. 하긴 오르세 연구소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프랑스 연구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1년만 돌아보더라도 누군가 박사학위 심사를 통과하거나, 정규직이 되거나, 상을 받거나,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은퇴하거나 할 때마다 빠짐없이 다과를 겸한 축하 모임이 연구소 한켠에서 벌어졌다. 퇴직하는 경우에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자리를 마련해주지만, 다른 경우에는 보통 축하받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음식거리를 준비해온다.

학위 심사 통과를 축하하는 자리를 위한 음식에는 특히 정성이 담기는 듯하다. 이탈리아처럼 가까운 나라에서 온 학생이 졸업할 때는 가족들이 총출동해서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한국처럼 먼 나라에서 온 학생의 경우에는 친구들이 발벗고 나서서 음식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을 넘어서 이런 자리가 특히 마음에 드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이다. 연구실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아니라 연구소 전체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학생, 교수, 연구원, 행정원, 테크니션 등 모두 함께. 그래서 그동안 지나치면서 눈인사만 나누던 사람들과 와인 한 잔의 힘을 빌려 말을 트는 사교의 장이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학생의 축하 자리에도 부담없이 참석한다. 한국에서 학위 심사를 마치고 심사위원 교수님들과 식사를 하거나 연구실 동료들 하고 회식 자리를 갖는 것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자 전통이다.


축하받는 학위논문에 오롯이 깃든 학생, 교수의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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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 심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지켜본 소감을 잠깐 이야기해보겠다.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학위를 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통상 3년에서 3년 6개월정도 되니, 미국이나 한국에 비하면 짧은 편이다. 더군다나 석사과정에서 경험하는 연구기간도 짧다. 한국에서는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바로 연구실 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프랑스에서는 대학 생활의 연장처럼 내내 수업만 듣다가 마지막 한 학기 정도 연구실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실험을 하고 보고서를 쓰는것으로 석사학위 과정을 마무리한다. 그러니 처음 연구를 접하고 박사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미국이나 한국에 비하면 월등히 짧다.

00paris5.jpg » 액체질소를 사용해 맥주를 시원하게 만드는 모습. 사진/알린쉬웁 이렇게 짧은 시간에 소정의 연구결과를 얻으려면, 그만큼 잘 짜인 계획에 따라 연구를 진행해야 하고 지도교수 역시 세심한 지도를 해주어야 한다. 실제로 박사과정 학생을 모집하는 연구실별 공고에는 구체적인 주제와 잘 정립된 방법론이 함께 제시되곤 한다. 많은 한국 대학원생들이 박사과정에 들어서서 주제 선정을 위해 고심하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사실 양측에 일장일단이 있다. 주제와 방법론까지 일찌감치 정해져 있으면 학생이 신속하게 연구를 끌어나가면서 차곡차곡 연구결과를 쌓아 나갈 수 있고, 이는 새롭게 학생에게 동기 부여가 되면서 연구를 가속할 수 있다. 반면에 좋은 주제를 찾기 위해 헤매는 과정도 역시 연구자가 늘 마주하는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경험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프랑스에서는 이 얼마 안 되는 박사과정 기간의 상당부분을 다시 학위논문 작성에 할애한다. 학위논문이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에 비해 프랑스에서 학위논문을 쓰는 데 쏟는 시간과 노력이 월등히 크다. 한국에서는 학위논문을 쓰더라도 연구실에 출근해서 한두 달 정도 쓰는 게 보통인 듯하다. 밖에서 보기엔 꽤 짧은 시간으로 비치겠지만, 이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서 하나로 엮는 과정이기 때문에 생각 만큼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르세 연구소에서 일할 때 옆에서 지켜본 같은 연구실 학생 하나는 근 반 년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 논문만 썼다. 그 친구는 연구실로 따로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일 주일에 한 번씩 나타나서 논문 진행 상황을 두고 교수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런 모습이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 생활을 해본 이에겐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테다. 일단 이렇게 오랜 기간 연구실을 비운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고, 지도교수가 학위논문 작성에 하나하나 간여한다는 것도 꽤 낯설다.

00paris2.jpg » 연구소에서 열린 어느 축하 모임에서, 능숙한 솜씨로 고기에 겨자를 발라 구워내는 엔지니어. 사진/정민기 이런 다른 모습은 현실 상황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게 크다. 한국에서는 교수 한 사람이 많게는 십수 명의 대학원생 연구를 책임져야 하므로, 학생 하나의 학위논문을 반년 동안 매주 따로 시간을 내어가며 지도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듯하다. 반면에 앞서 말한 프랑스 학생의 지도교수는 단 두 명의 학생만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 하나에 쏟는 정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 학위과정이 짧아서 이런 집중적인 지도가 필요할 수도 있다.

반 년이란 시간을 투자하기에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프랑스에서는 학위논문이 오롯이 새로 쓴 책 한 권이란 점도 놀랍다.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이미 학술지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순서대로 잘 정리한다기보다는, 새롭게 하나의 책을 쓰면서 필요한 부분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끌어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학위과정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학위논문 심사에 참여한 심사위원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학위논문을 꼼꼼하게 읽어온 상태였다. 실은 심사 이전에 이미 몇 차례 학생과 만남이나 서신 교환을 통해 논문에서 고치거나 보충할 점 등을 이야기해둔다고 한다. 이게 가능한 건 심사위원들이 학생이 발표하는 내용을 단기간에 충분히 이해하고 논박할 수 있는 해당 분야 전문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기초과학 저변이 우리보다 넓어서 자국 내에서 전문가를 모시기도 우리보다 용이하지만, 영국이나 독일처럼 주변에 과학 선진국들이 많아서 특정 분야 전문가를 찾아 심사위원으로 모시는 게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는 교수 한 사람이 참석해야 하는 학위심사가 너무 많다. 저변이 넓지 않다 보니 내용을 깊숙하게 따라가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심사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바다 건너 유럽이나 미국에서 전문가를 모셔오기도 만만치 않을 테다. 그많은 학생들의 100여 쪽은 족히 넘을 학위논문들을 미리 읽어둔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지나친 기대일 수밖에 없다. 뾰족한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는데, 프랑스처럼 대학에 정식 연구원 자리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연구논문 뒤편의 '묵묵한 지킴이' 테크니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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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단한 과정을 거쳐 출판된 학위논문에 빠지지 않는 건 감사의 글이다. 기본적인 내용이야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지도해준 교수에 대한 감사와 도움을 준 동료 연구자들, 믿고 성원해준 친구와 가족들에 대한 감사 등이 주를 이룬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 학위논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문구는 기술자(technician; 테크니션)에 대한 감사다.

기술자는 보통 연구에 필요한 실험장비들을 만들고 개선하거나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유지, 보수하는 역할 등을 맡는다. 대학원생들이 실험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일종의 연구지원 기술팀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유수의 대학들에서 학과 단위로, 또는 연구실 단위로 기술자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이들 개개인의 숙련도와 완성도는 연구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기술자 수를 줄이고 외부업체에 용역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데,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00paris4.jpg » 고자기장 자석을 점검하는 기술자 모습. 사진출처/ 프랑스국립고자기장연구소 얼마 전 연구소에서 바베큐 파티가 있었는데, 이날은 마침 기술자 한 분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연구소에서 장난감 물총을 선물로 주던데,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연구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챙기는 분위기라 좋았다. 학생, 교수, 연구원, 동료기술자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더라.

사실 수준 높은 이공계 연구를 위해선 능력 있는 기술자들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과학 선진국들에선 학과 단위로 기계가공실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연구실 단위로 장비운용 전문기술자를 운용하는 경우도 많다. 실험과학에서 기술자는, 막연한 연구자의 구상을 현실화하고, 한발 앞선 실험장치를 만들고, 최선의 결과를 얻는 데 빠짐없는 기여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연구자들 스스로 기술자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존중한다는 점인 듯하다.

나도 연구소에서 기술자들과 종종 대화를 나누는데, 가끔은 내가 뭘 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알기도 한다.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내 연구 선배들의 일을 담당해왔기 때문일 테다. 특히 눈앞에서 내게 필요한 장치들을 쓱쓱 만들어내거나 고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생겨난다. 어린 대학원생들이 아버지뻘 되는 기술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 역시 교육적 효과가 크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학위논문을 마무리하고 나면 나의 연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학위논문에 기술자에 대한 감사 문구가 늘어날수록 우리나라 과학 수준도 높아지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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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 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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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양자자성연구실(LQM) 펠로연구원
낮은 차원 세상에서 불확정성 원리가 물질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일상과 동떨어진 내 연구가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다. 전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 연구원 [2014년 이전 글들은 필자가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에서 일할 때 쓴 글입니다]
이메일 : we.all.stardu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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